GIS를 이용한 江都의 성곽 체계와 궁궐의 위치 재고 강동석(국립문화재연구소) Ⅰ. 머리말 Ⅱ. 강도 성곽 체제의 재구성 Ⅲ. 강도 궁궐의 위치와 입지 Ⅳ. 맺음말 Ⅰ. 머리말 江都는 39년 간 고려의 수도였고, 皇都였다. 비록 전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건설된 수 도였지만, 강도는 고려를 상징하는 수도로서 개경의 도성 체제와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지 금까지 강도의 성곽체계를 복원하거나 궁궐과 관부의 위치를 비정하였던 대부분의 연구는 이와 같은 ‘개경을 재현한 강도’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그 전모를 밝히고자 하였다(김창현 2004, 2005; 윤용혁 2005, 2010; 신안식 2010; 이상준 2014; 이희인 2012, 2015, 2018, 2019). 그 결과, 강도의 도성 체제를 대표하는 外城, 中城, 內城은 개경의 羅城, 皇城, 宮城 과 대비되는 것으로 상정되었으며, 도성 내의 궁궐, 관청, 사찰 등의 공간 구조도 개경의 그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되었다. 이처럼 강도 건설과 운영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개경의 모방이라는 일치된 접근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에 따라 강도를 구성하는 각 성곽의 위치와 규모, 성곽 자체의 존부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위치, 도성을 구성하는 기능 공 간들의 배치에 대해서도 견해를 달리한다. 이와 관련한 논쟁은 그동안 주로 문헌 사료에 기 초하여 전개되었으나, 최근 강화읍을 중심으로 강도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고고학적 조 사 성과가 축적되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려사』, 『신증동국여 지승람』를 비롯하여 읍지, 문집 등의 기록과 고고유적을 근거로 강도를 재구성한 많은 도 면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료의 부족과 해석의 한계, 각종 도면의 시각화 등 의 문제로 인해 강도의 성곽 체제와 궁궐의 위치, 입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 GIS의 시각화 기범과 공간 분석을 통해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강도의 성곽 체제를 다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강도와 개경의 궁궐을 비교·분석하여 앞서 제시된 논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해 보고 자 한다.
Ⅱ. 강도 성곽 체제의 재구성 1. 연구사 검토 1232년(고종 19)에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가 옮겨진 이후, 개경은 더 이상 수도가 아닌 舊都 또는 舊京이 되었으며, 강화는 고려를 상징하는 江都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강도는 궁 궐을 중심으로 성곽을 축조하며 수도로서의 위상과 대외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도성으로서 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고려의 도성 방어 체제는 개경을 비롯한 서경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궁성-황성-나성 으로 둘러싸인 중층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도성은 국가의 중심으로서 궁궐뿐만 아니라, 관부, 사찰 등 국가 운영을 위한 중요 시설들이 성곽 체제 내에서 기능 공간을 구성하여 고 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개경을 모방하여 건설된 강도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중층의 도성 체제를 이루었다고 판단되며, 이것은 『고려사』를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읍지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표 1). 표 1. 강도 성곽 관련 기록(이희인 2012) 문헌 내용 1233년 강화外城을 쌓았다. 1235년 주군의 일품군을 징발하여 강화 연강제안(沿江堤岸)을 가축(加築)했다. 1237년 이 해에 강화외성을 쌓았다. 『高麗史』 1250년 비로소 강도中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960여 칸이고, 대․소문이 모두 (1451) 17개였다. 1259년 처음 강도내성을 파괴하니 객사가 심하게 독촉하였다. 1259년 客使가 외성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외성이 존재하니 어찌 가히 성심으로 복종한다고 하겠는가? 도방으로하여금 외성을 파괴하니... 『崔沆墓誌銘』 중성으로 皇都를 둘러 쌓았다. (1257) 『新增東國輿地勝覽』 내·외성은 모두 토축으로 외성은 주위가 37,076척이고 내성은 주위가 3,874척이다. (1530) 『休翁集』 「海東樂府」 처음 강도외성을 설치했는데 연강환축(沿江還築)하였다. (17세기 초) 내성 : 주위가 3,874척이며 고종19년 흙으로 쌓았는데 지금은 기지가 없다. 『江都志』 중성 : 고려 고종 을사년에 흙으로 쌓았다. 故基가 지금 대문현 및 장령에 있다. (1696) 외성 : 이는 浦邊長提로 속칭 만리장성인데 주위가 3만 7076척이다. 흙으로 쌓았으며 1237년에 또 쌓았다. 이상 세 성은 1259년 훼석되었다. 『餘地圖書』 위치 : 송악 동쪽에 있다. 내성과 외성 모두 흙으로 쌓았다. 「江都府志」 규모 : 외성이 3만 7천 76척, 내성이 3천 8백 74척이다. (1759) 특징 : 성문유지가 남아 있다(성문현, 대문현, 서문동 등 지명이 남아 있다).. 『江華府志』 “옛날 전기에 이르기를 고종이 천도할 때 내외성을 모두 흙으로 쌓았는데, 외성은 (1783) 주위가 16만 6,066척이라 하였다. 舊址는 장령의 성문현, 선원의 대문현으로… . 내성은 주위가3,877척 이라 했는데… ” 『大東地志』 “1233년(고종 20)에 내성을 쌓았으며, 지금 기지는 미상이다.” (1864) “1237년(고종 24) 흙으로 외성을 쌓았으며, 지금 부 남쪽에 故址가 있다. “1250년(고종 37) 비로소 중성을 쌓았는데, 문이 모두 17개다.” 외성 : “沿海環築이러라(今其遺址或存或沒). 海東樂府 撤城註에 이르기를 연강 『續修增補江都誌』 환축하되...둘레는 수백리(지금은 수십리)라 하니...” (1932) “...(조선)외성은...이는 본시 고려의 구성으로 이조 광해군 10년에 무찰사 沈 惇이 토축으로 고치니...” 중성 : “토성으로 처음 옥림리 성문현으로부터...대문현을 거쳐...창성에 이른다”
이상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강도를 구성하였던 성곽으로 외성, 중성, 내성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강도를 구성하고 있던 성곽의 규 모와 위치, 축조 방식, 그리고 도성 체제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 고 있다. 이밖에 지리지와 읍지에서도 성곽 체제와 실제 성곽이 남아 있는 遺址에 대한 정 보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사료는 대부분 단편적인 내용만을 수록하고 있어 문헌 자료만으로는 강도의 도성 체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행히도 고고학적 지표조사와 발굴조 사를 통해 성곽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지만, 이것이 어떠한 성곽의 일부인 지에 대해서도 논 란의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은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의 부족으로 인해, 연구자마다 강 도의 성곽 체제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표 2). 표 2. 강도 도성 체제에 대한 제견해 이병도(1947) 김상기(1948) 김창현(2003·2004) 윤용혁(2005) 신안식(2010) 이희인(2012) 궁성 궁성 궁성 (宮墻) 궁성 (궁성) (내성) (내성) 내성 내성 내성 중성 중성 중성* 중성* (내성) 중성* 외성** 외성** 외성 외성 중성* 외성 외성 * 현재 중성으로 명명된 성곽 ** 현재 중성으로 명명된 성곽을 외성의 재명명 지금까지 이병도와 김상기를 제외하면, 모든 연구자가 강도의 성곽을 3重城 체제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처음으로 강도의 도성 체제를 재구성한 이병도(1947)는 궁성이 별도로 존 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현재 강화산성을 내성으로 파악하였다. 중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 로 당시 선원면과 부내면 일대의 지명을 언급하며 내성을 둘러싼 토성이라고 하였다. 외성 은 불은면 삼성리, 서문동, 덕성리 등으로 가로질러 강화 東岸을 따라 이어지는 토루, 즉 강 도의 동안에서는 중성과 접하며, 남쪽에서는 중성의 외곽에 위치하는 圍繞의 형태가 된다고 하였다. 한편 김상기(1948)는 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된 4重城으로 강도의 성곽 구조를 설명하였다. 그는 직접적으로 궁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宮墻을 방위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궁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김창현 2004: 155). 내성은 이 병도와 달리, 조선 강화부성이 개축되기 이전의 성곽과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중성은 확장 이후의 강화부성, 외성은 현재 중성으로 명명된 성곽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 강도의 성곽 구성는 1940년대에 제기된 4중성이 아닌 3중성 체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김창현(2004)은 『고려사』의 기록에 주목하여 강도의 성곽을 재구 성하였다. 『고려사』에 외성과 중성의 축성, 그리고 외성과 내성의 파괴 기록이 있다는 점 에서 내성과 중성은 같은 성곽으로 보았으며, 沿江提岸의 표현을 감안하여 강화 동안의 성 을 외성으로 파악하였다. 윤용혁(2005)은 조선시대 강화부성 개축 이전의 舊城을 내성으로 보았으며, 이는 궁성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중성은 현재 중성으로 명명되고 있는 강화산성 외곽의 토축성 으로 보고, 외성은 월곶리에서 동안을 따라 이어지다가 화도돈대 부근에서 서쪽으로 꺾여 혈구진성까지 연결되는 성곽이라고 인식하였다.
2010년대에는 궁성, (내성)중성, 외성으로 구성된 성곽 체제에 의해 강도의 도성 구조 가 논의되었다. 신안식(2010)은 내성이 파괴 된 이후에도 등장하는 궁궐의 문에 주목하여 궁성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하며 궁성의 존재 를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내성은 궁성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없고, 고종 38년 (1250)에 축조된 중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내성과 중성이 동일하다고 판단하였다. 외성은 강도를 환축한 성곽으로, 강도 동안 의 해안 제방과 구별되는 것으로 보았다(그 림 2의 좌). 마지막으로, 이희인(2012)은 신안식과 마 찬가지로, 궁성, (내성)중성, 외성의 3중성 체제로 강도의 성곽 체제를 파악하고 있다. 그림 1. 윤용혁의 성곽 체제안(이희인 2012) 궁성은 축성 기록이 없지만, 강도에도 개경 과 같은 궁성 문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궁궐을 둘러싼 성곽이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내성에 대해서는 신안식의 견해에 따라, 실체가 있는 성곽이 아니라, 궁성 또는 중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외성은 현재 중성 으로 명명된 토축성의 축조 수준, 견고성, 규모을 감안할 때, 이를 외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고 하였다. 해안 제방에 대해서는 외성과 연계된 성곽이 아닌 방어선을 구축한 것으로 판단하였다(그림 2의 우). 그림 2. 신안식(2010(좌)과 이희인(2012(우)의 성곽 체제안 이상과 같이, 강도의 성곽 체제는 초기에 4중성으로 이해되었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강도가 개경의 재현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3중성에 기초하여 성곽 체제를 재구성하려는 시 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최근에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내성을 중성과 같은 것 으로 보고, 궁성-(내성)중성-외성의 구조에 의거 강도의 도성 구조를 설명한 신안식과 이
희인의 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이희인의 안은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검토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강도는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마련된 수도였고, 시급히 수도를 방비할 수 있는 관방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는 점, 지형적 여건이 개경과 달랐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개경의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강도의 성곽 체제를 이해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 인식 하에, 앞서 살펴 본 기존 연구자의 견해를 참고하여 강도를 구성하고 있던 성곽 체제를 다시 구성해 보고자 한다. 2. 강도의 성곽 체제 재구성 1) 외성 강도 시기 성곽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은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외성, 중성, 내성과 관련한 기록이다. <표 1>에서 보았듯이, 17세기 이후의 기사는 대부분 이 문헌 기록에 기초하여 遺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 지승람』의 기사를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외성과 중성의 축성 사실, 내성의 실체, 그리고 각 성곽의 규모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먼저 『고려사』의 성곽의 축성 과정을 살펴 보면, 가장 먼저 축조된 것은 외성이었다. 외성의 축성은 『고려사』志에는 1233년(고종20)으로 기록되어 있고, 世家에는 1237년(고 종 24)으로 전하고 있다. 이처럼 축성 연대가 다른 이유에 대해 축조 시작과 증축, 또는 시 작과 완성 시점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으나(김상기 1948, 김창현 2004), 『고려사』에서 시기를 표시하는 방식을 고려하면(신안식 2009), 후자의 주장이 타당해 보인다. 즉, 외성은 강도 천도 직후에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1232년부 터 1234년까지 강도에 궁궐을 짓고 있던 시기와 겹치며, 결과적으로는 궁궐이 완성되기 이 전에 외성이 먼저 축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국왕의 안위를 도모하고, 국가의 최고 권 력을 상징하는 궁궐이 완성되기 이전에 외성을 서둘러 축성하였던 이유는 몽골의 침입을 방 비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외성의 위치와 규모는 어떠했을까? 이와 관련한 기록은 『고려사』에 남아 있 지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토축으로 쌓았으며, 둘레 37,076척이라고 전한다. 이 때문에 <표 3>에서 보는 것과 같이, 연구자마다 외성의 위치에 대해 각기 비정하고 있 다. 본고에서는 외성 축성 당시의 정황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조선 후기 강화외 성의 축성 기록을 참고하여 외성의 위치와 규모를 추정해 보기로 하겠다. 표 3. 강도의 성곽 위치와 규모(이희인 2017 수정) *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구분 궁성 내성 중성 외성 이병도 해안외성 김상기 조선행궁지 강화부성(확장후) 강화부성 외곽 토축성 강화부성 외곽 토축성 김창현 해안외성 윤용혁 조선행궁지 강화부성(확장전) 강화부성(확장후) 해안외성 신안식 강화부성 외곽 토축성 이희인 궁골, 관청리 일대 강화부성 외곽 토축성 강화부성 외곽 토축성 규모1) 약 11,864m (37,076尺)* 강화부성(확장전) 강화부성 외곽 토축성 강화부성(확장전) 강화부성(확장후) 궁골일대 관청리 일원 약 1,240m(3,874尺)* 약 12,314m(2,960間)**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외성은 천도 직후에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단기간에 축성된 성곽이었다. 이와 같은 축성 배경을 염두해 둔다면, 외성은 몽골군의 강화도 진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일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 축조되었을 것이다. 필자 는 이곳이 강화 東岸이었다고 본다. 이희인(2012)은 조수간만의 차와 갯펄이 강화로의 접 근을 막는 천혜의 방어선이 되므로 해안 방어선의 구축이 시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2017)의 동락천 일대 해안선 추정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강도시기에 갯펄이 강화읍 부근까지 형성되어 있었고, 간조 시에도 해안으로 이어진 갯골을 따라 강도의 중심지로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개경을 연결하는 주요 포구인 승 천포가 위치한 송해면 일대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따라서 당시 무인정권은 해안 방비를 위한 시설을 최우선으로 갖추지 않으면 수도를 방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여 해안에 축 성을 단행하였을 것이며,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외성이었을 것이다. 그림 3. 강도 시기 고지형과 해안선 복원도(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17년 재구성) 『고려사』에서 외성을 축성하였다고 기록한 고종 24년(1237)의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지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후집 권2에는 평장사 이인식이 이규보에게 해변의 新城이 장관이니 놀러 가자고 했다고 전한다. 1233년 외성 축성 기사를 제외하면 『동국이상국 집』이 편찬 이전에 강화도에 성곽을 쌓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볼 때, 이인식이 언급한 新城은 강화 東岸에 새롭게 쌓은 외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235년에 沿江提岸을 加築한 것은 외성을 보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보한집』중 1) 김창현(2004)이 조선 전기의 영조척을 기준으로 환산한 길이이다.
권에서 최우가 新都에 沿江環堞하였다는 기사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숙종 17년(1691)에 강화외성의 축조 방식을 논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 외성이 토성이 었으므로 토축성으로 건축하기로 결정한 점과 돈대 축성 계획을 기록한 『江都設墩處所別 單』에서 돈대 축조에 소요되는 物役을 아끼고 工期를 단축하기 위해 고려시대 城堡의 기초 위에 축조하도록 한 점을 보더라도, 강도의 외성은 조선시대의 외성이 축성된 東岸에 위치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려사』에서 말한 ‘외성’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강도 東岸에 최우선으로 쌓은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성에 대해 신안식(2010)과 이희인(2012)은 강도의 방어를 위해 쌓은 해안 제 방으로 보았다. 강도 도성의 동쪽 해안 구간에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을 경우, 도성은 성곽으로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방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즉, 강도 동안의 토루는 방어 성격의 제방이 되는 것인데, 이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곽으로 이해하 여도 좋을 것이며, 『고려사』, 『보한집』,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기록한 외성을 가리 키는 것이다. 이러한 소위 ‘江都 東岸 外城論’은 이미 이병도, 김상기, 김창현, 윤용혁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그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존재한다. 이병도와 윤용혁은 강화도 동북쪽의 월곶으로부터 강화 동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불은면 고릉리, 즉 화도돈대 근방에서 서쪽으로 꺾여 삼동암리의 穴口 鎭城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반면, 김창현은 북쪽의 승천포 부근에 서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초 지까지 이어지는 조선시대의 외 성과 거의 같은 구간으로 인식하 였다. 김상기는 현재 중성이 끝 나는 옥림리와 신정리를 잇는 것 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강도 시기의 외성은 기본적으로 조선 숙종 대에 축성한 강화 외성과 상당 부분 겹칠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하면서도 구간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 은 김창현을 제외한 모든 연구자 들이 외성의 최북단을 휴암돈이 위치한 지점으로 상정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이는 『강화전도』 (1684년)와 『비변사등록』숙종 17년(1691)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외성의 초축이 휴암돈 대~초지돈대 구간에서 이루어졌 고, 고려 외성을 기반으로 축조 그림 4. 강도 외성의 위치와 구간(필자안)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
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고려 외성은 염하를 따라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전략적 요 충지인 갑곶 일대를 주요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초지진까지 이어지는 대규 모 축성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이희인 2012: 129-130)2). 이와 같은 추론을 전제로 하여 강도의 외성을 상정해 보면, 휴암돈을 최북단으로 하여 갑 곶을 거쳐 남단의 특정 지점에 이르는 구간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남단은 화도돈이 위치한 지점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외성의 둘레가 37,076 척이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환산한 기존 연구를 따르면(김창현 2004; 이희인 2012), 약 11,300m~11,800m 에 해당한다. 그런데 휴암돈~화도돈까지 연결된 조선시대 외성의 구간 도 약 11,800m 로3),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화도돈은 이병도 (1948)과 윤용혁(2005)이 강도 시기 외성을 상정하는 과정에서 해안 성곽이 혈구진성과 연결되는 분기점으로 상정한 곳이기도 하다. 즉, 해안 외성의 남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한 외성은 실제 강도의 東岸에 축성한 외성을 가리키 는 것이며, 그 구간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휴암돈~화도돈 사이의 외성과 일치할 가능성이 크다(그림 4). 2) 중성 『고려사』에서 외성 축성 기록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중성과 관련한 기사이다. 1237년 을 외성이 완성된 시점으로 보면, 그 해로부터 13년이 지난 1250년에 ‘비로소 강도 중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960여 칸이고, 대․소문이 모두 17개였다’. 이 중성에 대해 선원면 대문 현과 북쪽 옥림리 일대에 위치한 강화읍 외곽의 토성(이병도 1948; 김창현 2004; 윤용혁 2005)(그림 1 참조)또는 지금의 강화산성으로 보는 견해(김상기 1848)가 있다. 이밖에 『고려사』의 내성이 곧 중성이며, 강화산성의 안팎(신안식 2010) 또는 강화산성 내의 일 부 지역을 중성으로 보는 등(이희인 2012)(그림 2 참조), 다양한 주장이 공존한다. 본고에서는 상기한 『고려사』의 축성 기록에서 성곽의 규모와 관련한 논쟁을 중심으로, 중성의 위치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먼저 김창현(2004)은 『고려사』에서 외성과 중성의 건축이 보이고, 외성과 내성의 파괴가 보이는 점에 주목하여 중성과 내성을 같은 것으로 보 았다. 그리고 최항이 중성을 쌓아 皇都를 병풍처럼 둘러쌌다는 기록에 의거, 중성은 황도 강도의 도성으로 인식하였다. 한편 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외성 37,076척을 『고려사』의 중성 2,960칸과 동일시하고, 이형상 『강도지』에서 중성으로 본 대문현과 장령의 토성이 그 遺址라고 하였다. 두 문헌에 나타난 중성의 규모를 비교한 내용 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외성 37,076척은 조선전기의 영조척이 대략 32㎝이므로, 약 11,864m로 환산하였다. 한편 『고려사』의 중성 2,960칸에 대해서는 1칸을 10척으로 할 경우 9,472m, 13척으로 볼 경우 12,314m라고 하여 여지승람의 외성과 비슷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두 문헌의 중성과 외성의 규모가 같기 때문에 『신증동국 여지승람』의 외성은 『고려사』의 중성에 대한 기록자의 착각 혹은 오기로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이희인(2012: 137-138)은 『고려사』가 편찬된 시점인 조선 세종 때에는 거 2) 이희인은 본문에서 ‘해안 제방’이라고 하였지만, 필자를 이를 ‘강도 외성’으로 상정하였기 때문에 외성 이라고 언급하였다. 3) GIS의 Geometry calculate 기능을 이용하여 외성 구간에 대한 길이를 측정한 값이다.
리 측정 등에 주척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1間=10尺은 약 20.6m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기준으로 중성 2,960칸을 환산해 보면 약 6,000m로, 현재 중성으로 명명된 성곽의 둘레 약 11,390m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척을 사용하여 계산한 개경 황성 2,600間의 둘레 약 5.3km가 실측치 4.7km와 거의 부합하므로, 영조척을 이용한 김창현의 안은 타당하 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한 외성의 길이 37,076척, 약 11,800m가 현재의 중성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것이 실제 강도의 외성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희인의 안에 대해 김창현(2017)은 반박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선 間과 尺 의 기준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그 기준을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 다는 점을 전제하였다. 이와 더불어, 개경 황성은 발어참성 하단부에 형성되었는데, 『고려 사』왕경개성부편 세주는 개경 황성을 발어참성과 혼동 내지 동일시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황성 2,600間이 발어참성의 규모를 가리키는 것이며, 1間을 10尺으로 잡고 영조 척(32cm)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8.3km로, 발어참성 실측치 8.2km와 부합한다고 보았다. 즉, 그가 산정한 영조척의 사용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도 중성 2,960間은 1間 을 영조척으로 계산하면, 11,366m로 현재 중성으로 상정하고 있는 토축성의 실측치 11,390m와 부합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영조척을 적용 한 김창현의 주장은 타당하 다고 본다. 최근 강화 관청리 657번지 유적에서는 대규모 회랑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지 정면의 주칸 거리가 3.3~3.5m이었다. 1間을 10 尺으로 본다면, 강도 시기 당 시의 건축물은 영조척을 사 용하였다는 것이 된다. 이것 은 김창현이 제시한 영조척 기준의 환산 방식이 적절하 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를 다시 한번 입증하기 위해 원 주율과 GIS의 버퍼분석을 이 용하여 중성을 가시화해 보 도록 하겠다. 즉, 중성 둘레 는 11,366m이므로, 성곽의 반경은 1,810m가 된다. 이것 을 도면으로 나타내면, <그 림 5>와 같다. 그림에서 버 퍼의 크기는 현재 중성의 규 모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록을 근거로 중성을 규모를 추정 그림 5. 강도 외성과 중성(필자안) 해 보았을 때, 현재 중성에
근접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려사』에서 언급한 중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최항의 묘지명에 ‘中城을 쌓아 屛皇都하였다’라는 표현은 강도를 완전히 둘러싼 것 이 아니라 병풍처럼 감싸 안은 형태로 볼 수 있으며(김창현 2004: 153), 이는 중성과 접한 해안의 외성을 제외한 형상과 유사한 것으로, 지금의 중성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이밖에 『고려사』의 외성 축성 기록에서 ‘비로소 강도 중성을 쌓았다’라는 표현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외성 축성 이후 13년 만에 중성을 완성한 것이다. 이미 이희인(2012: 96) 이 말한 것과 같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중성의 토축은 그 축조 수법의 정교함과 견고성, 규모를 감안할 때, 강도의 도성으로 볼 수 있다. 성벽의 둘레가 약 11km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을 고도의 축조 수법을 이용하여 축성한다는 것은 많은 공력이 투입되는 대형 토목사업 으로, 최소 수 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성의 축성은 장기간의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고려를 상징하는 도성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중성은 몽골군이 침입할 수도 있는 급박한 정세 속에서 최우선으로 효과적인 방어망을 구축할 수 있는 외성을 먼저 축조한 이후, 오랜 기간 의 축성 과정을 거쳐 ‘비로소’ 중성 축조를 완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3) 내성 『고려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내성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종 46년(1259) 6월 몽고 사신의 지휘 하에 강도의 내성을 파 괴하였다는 사실만이 언급되어 있다. 이 내성에 대해 그 실체를 인정하면서 강화부성 확장 이후의 성곽, 즉 현 강화산성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48)와 궁성적 성격을 강조하며 강화 부성 확장 이전의 舊城으로 상정한 견해(김상기 1948; 윤용혁 2005)가 있다. 반면에 내성 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지금의 중성이 곧 내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창현 2004; 신안식 2010; 이희인 2012). 이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강도가 개경의 성곽 체제를 답습하여 3중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전자의 경우는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라 내성-중성-외성으로 상정한 반면, 후자는 내성을 별 도의 성곽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성-중성(내성)-외성 체제로 인식한 것이다. 필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한 외성, 중성에 대한 기록이 신뢰할만하고, 지금의 그것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내성의 기록도 신뢰할 수 있다고 본다. 고려시대의 궁성을 내성이라고 한 사례 가 없다고 하지만(신안식 2010: 39), 내성이 궁성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면 별도의 궁성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등장하는 강도의 내성은 궁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중성은 주거 공간을 포함하는 도성, 그리고 외성은 방어성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윤용혁 2002). 이 경우, 내성은 김노진의 『강화부지』에서 말한 ‘舊城’으로 추정된다. 김창현(2004)은 이 성에 대해 황성 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지만, 윤용혁(2005)은 강도 시기의 잔적이며 강도의 ‘내성’으로 간 주하였다. ‘舊城’은 조선 숙종대에 강화부성을 확장하기 이전의 성곽에 해당한다. 조선 초기 강화부 성의 축조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확장 논의를 통해 볼 때, 견자산과 남산이 포함되지 않는 범위로 보인다. 숙종실록에 의하면4), 당시의 강화부성은 강화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남산이 부성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방어상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확장의 필요 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확장 이전의 강화부성의 실체는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확인한 바와 같이, 17세기말, 18세기초에 작성된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 6). 그림에서 보 면, 강화부성은 현재 북산으로 명명하고 있는 송학산과 동락천 사이에 축조된 성곽으로, 동 편으로는 견자산, 서편으로는 현 강화산성의 서성벽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지도 가 운데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고려대박물관 소장 강화지도이다(그림 7). 이 지도는 18세 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숙종 이후에 확장된 강화부성과 함께, 부성 안에 별 도의 작은 성곽을 그려 넣었다. 아마도 이 성이 고려시기에 축성된 이른바 ‘내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한 ‘옛 궁성’의 ‘내성’임이 거의 틀림없다(윤용 혁 2005: 9). 그림 6. ① 강화전도(1684, 영남대박물관), ② 강화지도(1696, 이형상 강도지), ③ 강화지도(18세기 초, 국사편찬위원회), ④ 동여비고(18세기초, 양산 대성암) 4) 『숙종실록』 권22 숙종 16년 5월 계묘, 권46 숙종34년 12월 을사
『강화부지』에서는 이 舊 城의 둘레가 1,658보라고 기 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윤 용혁(2005)은 360보를 1리 로 환산할 경우, 2.4㎞에 해 당한다고 보았으며, 『신증동 국여지승람』의 내성 규모 3,874척을 감안하여 최소 1.2㎞~최대 2.4㎞, 대략 2㎞ 안팎으로 상정하였다. 김창현 (2003)은 1보는 6척이므로, 부성은 9,948척이 되며, 주척 (20.8㎝)을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2.08㎞이 된다고 하였 다. 한편 이희인(2012)은 영 조척(30.8㎝)을 적용하여 약 3,060m로 계산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강도시기 ‘내성’ 으로 상정되는 舊城의 규모는 2~3㎞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연구자마다 규모 추정에 있어 그림 7. 강화지도(18세기초, 고려대박물관 소장) 서 차이가 나는 것은 각기 적 용한 기준 척도가 다르기 때 문이며, 이를 감안하여 내성의 규모를 산정해 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이 고지도에 표현된 강화부성과 주변 지형과의 공간적 맥락, 연구자 들이 환산한 부성의 규모 등을 참고하여 강도 내성의 범위와 규모를 추정해 보았다. <그림 6>에서 볼 수 있듯이, 확장 이전의 부성 북쪽편은 송악산을 따라 성벽이 둘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연장되는 동성벽은 <그림 7>과 같이 증축된 강화부성의 안쪽을 따라 이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8-①>에 표시한 바와 같이 남문, 동문을 따라 축 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고려대박물관 소장 강화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舊城의 성벽 구간을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측량한 지도와 비교해 보면(그림 8-②), 현 강 화초등학교 동편의 구릉 정상부를 따라 강화 성공회성당으로 성벽이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 된다. 이 구간은 1866년 측량도 상에 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을 다시 <그림 8-③>의 1911년 지적원도 도로망을 통해 추정해 보면, 김창현(2004)이 말한 것과 같이, 구성의 남 문으로 있었다고 전하는 김상용 순절비각을 지나 강화성광교회가 위치한 구릉으로 이어졌다 고 본다. 한편 舊城의 서성벽 구간은 참고가 될 수 있는 고려대박물관 소장 강화지도에 그 흔적이 지워져 있어 명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그림 8>의 도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동 성벽과 마찬가지로 구릉 정상부를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고 생각된다. 1911년에 측량한 지적원도를 보면(그림 9의 위), 성광교회 북쪽으로 지적 경계선이 있는데, 이 선을 따라 성 벽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954년 촬영 항공사진(그림 9의 아래)에서도 구릉 정상
동문 동문 ① ② 동문 ③ 그림 8. 강화부 舊城 남동 성벽 추정(① 강화지도(고려대박물관), ② 1866년 측량도, ③ 지적원도) 부에 소로가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궁지’ 북편의 북산(송악산)에는 현재 강화산성의 북장대를 기점으로 좌우 사면을 따라 능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지형적인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이 능선 상에 성벽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림 10>는 이상의 강화부 舊城에 대한 추정 과정을 거쳐 작성한 도면이다. 송악산의 정상부 능선과 남쪽 산사면을 따라 형성된 낮은 구릉의 정상부에 성벽이 축조되었으며, 남 문은 김상용 순절비각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상정된다. 앞서 보았듯이, 강화부의 舊城이 고 려시대의 내성을 기반으로 축조되었다고 전제한다면, 이것이 곧 강도의 내성이라고 할 수
그림 9. 강화부 舊城의 위치와 범위 추정도
그림 10. 강도 내성 추정도
있다. 내성의 추정 둘레는 2.2㎞이다. 이는 기존 연구자들이 『강화부지』성곽조에서 언급 한 ‘舊城’의 규모와도 부합되며, 개경의 궁성과 유사한 규모를 지닌다. 앞서 이희인은 옛 부 성의 둘레가 3㎞ 내외로 개경의 궁성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궁성이 될 수 없다고 하였지 만, 실제 추정한 부성의 규모로 볼 때, 개경의 궁성 정도의 크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하면, 강화부의 옛 부성이 강도의 내성이고, 개경의 궁성과 같은 규모이며, 궁궐을 방어하는 궁성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윤용혁(2005: 6)은 이 에 주목하여 강도 내성이 ‘궁성’의 성격이었다고 하였고, 이는 단지 왕궁만의 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왕궁 구역을 중심으로 주변 에 주요 관서와 시설이 위치한 중 심 구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즉, 강도의 내성은 개경의 궁성과 황성의 통합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복합적인 기능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 강도 궁성에 대한 축조 기록이 없는 것 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결국, 강도의 성곽 체제 는 개경의 궁성-황성-나성과 같 은 3중성의 체제가 아니었지만, <그림 11>과 같이, 몽골군의 침 입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비 를 위해 해안 외성-중성-내성의 그림 11. 강도의 성곽체제안 3중성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 이다. Ⅲ. 강도 궁궐의 위치와 입지 1. 궁궐의 위치 강도의 궁궐은 고종 19년(1232) 6월 강화 천도가 결정된 이후 조영되기 시작하여 약 2 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고종 21년(1234) 2월에 완성되었다. 이 궁궐에 대한 기사는 『고려 사』,『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강화부의 동쪽 10리 지점의 ‘송악리’라 고 기록되었을 뿐,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 동안 강도 궁궐의 위치는 조선시대 행궁
과 유수부 동헌이 있는 지금의 ‘고려궁지’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궁궐의 중심구역을 ‘궁골’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고려궁지 또는 관청리 일대도 포함될 가능성 이 제기되고 있다(김창현 2005; 이희인 2012; 이상준 2014). 이병도(1948)와 김상기(1961)는 강화 송악산의 局勢가 개경의 송악산과 유사하고, 江岸 으로부터의 防敵을 고려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강도의 성곽 체제 등을 고려하여 조선시대 행궁과 유수부 동헌이 있었던 현재의 ‘고려궁지’를 궁궐로 비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궁궐지로 유력하였던 ‘고려궁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한림대박물관 2003, 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11), 궁궐과 관련한 건물지들이 확인되지 않으면서 재고되기 시작하였다. 김창현(2005)은 비록 궁궐 건물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강도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된 점을 들어 차후 본궐 건물지들이 확인될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아울러, 본궐은 ‘고려궁지’ 정도의 소규모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므로, 관청리, 궁골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윤용혁(2010)도 강화의 조선시대 궁전과 관아지가 고려 강도의 궁궐지와 일정한 상관이 있다고 보았지만, ‘고려궁지’가 강도 궁궐의 중심구역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 다. 그리고 중심구역은 개경의 만월대를 염두해 둔다면, 지금의 ‘궁골’이 궁궐터일 가능성이 있으며, ‘고려궁지’의 좌우측 사면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강도 궁궐의 이른바 ‘고려궁지론’은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에 의해 부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궁지’는 궁궐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한편, 이곳과 인접한 ‘궁골’이 새 롭게 유력한 중심구역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실제 ‘궁골’에 해당하는 관청리 657번지, 687-1번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대규모 회랑건물지와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타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종합 정리한 이희인(2012; 2015; 2018; 2019)은 관청리 유적에서 확인된 회랑의 규모가 최상위 위계에 건축물에서 사용되는 건축 형태라는 점에 주목하여 궁 궐을 포함해 관청이나 사원 등의 주요 건축물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고 유적의 위 계와 분포 양상, 그리고 지형 조건 등을 고려할 때, 강도 본궐은 ‘고려궁지’ 서남쪽, 궁골 일 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관청리 657번지, 687-1번지 유적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은 고려시대 매병, 마상배, 향완 등 양질의 청자가 출토된 관청 리 405번지 유적, 서쪽은 강화향교로 진입하는 도로를 잇는 범위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으로 추정하였다. 이상준(2014)도 강도 궁궐이 개경의 그것을 모방하였다고 보고, 개경 궁성의 입지와 도 로, 연못 등의 공간 구성과의 비교를 통해 관청리 ‘궁골’ 일대에 강도 궁궐이 위치할 가능성 을 제기하였다. 그는 관청리 ‘궁골’ 일대가 개경의 궁성과 같이, 중앙부는 탁월한 고도의 구 릉이 남아 있고, 남쪽으로 하천이 흐르는 지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인접한 관청리 405 번지 유적은 개경의 ‘東池’와 같은 성격의 유적으로 판단된다고 보았다. 또한, 지적원도를 보면, ‘궁골’ 일대에 호상(弧狀)의 도로에 의해 구획된 복주머니 형태의 평면이 확인되는데, 이는 개경의 궁성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청리 657번지는 궁궐 전각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강도 궁궐은 ‘궁골’ 일대에 위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최근에는 발굴조사 성과와 입지, 지적원도 등에 대한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관청리의 ‘궁골’ 일원에 본궐이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경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검토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본고에서도 앞서 본 내성의 궁성적 성격을 고려하여, 강도 내성과 개경 궁성과의 비교를 근거로 궁궐의
위치를 추정해 보기로 하겠다. 이를 위해 우선 GIS의 지리보정 기능을 이용하여 <그림 10>의 강도 내성과 개경의 궁 성을 중첩해 보았다(그림 12).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두 성곽은 비슷한 규모를 지니고 있 고, 비록 지형은 다르지만 유사한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중첩 도면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 도면은 강화부 舊城의 남문과 개경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을 지리보정을 위한 기점으로 설정하고, 두 성곽의 형태를 감안하여 중첩한 것이다. 그 결과, 북성벽을 제외한 전구간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창현(2005)이 말한 것과 같이, ‘고려 궁지’가 개경 궁궐의 정전에 해당하는 선경전(회경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 한 성벽 구간의 정합성과 건축물 위치의 유사성을 볼 때, 강도 내성은 개경의 궁성을 염두 해 두고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657번지유적 그림 12. 강도 내성과 개경 궁성의 중첩도 <그림 12>의 도면을 보면, ‘고려궁지’는 강도 궁궐의 중심구역으로 상정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전의 일부로 추정되는 관청리 657번지의 대규모 회랑건물지가 ‘고려궁지’와 직선 거리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개경의 궁궐과 동일하게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 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강도와 개경의 궁성지는 지형 입지적인 측면에서 각기 다른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고, 이를 고려한 궁궐 건축물의 공간적인 배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현 재로서는 이러한 궁궐 건축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양상을 가시화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관청리 ‘궁골’ 일대에 정전을 비롯하 여 궁궐의 중심구역이 위치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하겠다.
2. 강도와 개경 궁궐의 입지 비교 관청리 궁골 일원 대규모 회랑건물지의 확인으로 궁궐이 위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이곳에 궁궐이 입지하고 있었다면, 이상준(2014)이 언급한 바와 같이, 강도와 개경의 궁궐 은 유사한 지형적 조건 하에 건축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천의 분포, 경사도와 지형 단면, 가시권 분석 등을 통해 두 궁궐 입지의 유사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하천을 살펴 보면(그림 13), 개경 궁궐의 경우, 송악산에 흘러 내리는 광명천과 정 전의 동쪽편에 형성되어 있는 소하천 사이에 입지하고 있다. 정전을 비롯하여 주요 궁궐 건 축물들은 이 하천들 사이에 조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강화 관청리 궁골 일대도 지금의 북산(송악산)에서 산사면을 따라 작은 하천들이 있고, 관청리 657번지 유적의 회랑건물지가 하천 사이의 비교적 넓은 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이처럼 개경과 강도 의 궁궐은 송악산이라는 산지를 배경으로 조영되었기 때문에 건축 입지 선택 시 곡간지를 따라 흘러 내리는 하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주요 건물지들은 이 하천을 피하여 건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경사도 비교·분석 결과를 살펴 보자. 개경 궁성의 경우(그림 14의 위), 경사도 는 전체적으로 0°~18°구간에 속하며, 평균 경사도는 4°, 중간값은 3°이다. 경사 4° 이하는 지형 상 평지 또는 완경사지로 분류되는데, 궁성 내부 경사면의 50%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는 것은 궁궐지가 건축물의 입지에 적합한 곳임을 보여 준다. 실제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정전을 비롯하여 주요 시설물이 대부분 경사도 5° 구간에 분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개경 궁성은 조영 과정에서의 현상 변경으로 인해 평탄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것도 있 겠지만, 지형 자체가 완사면을 이루고 있어 궁궐 조영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 다. 한편 강도 내성의 경우(그림 14의 아래), 경사 0°~39°까지 확인되며, 평균 경사 11.5°, 중간값은 11°이다. 일반적으로 경사 10° 이상의 계단식의 지형 변경이 어려운 준완경사지에 해당하며, 15° 이상부터는 급경사지로 분류된다. 이처럼 강도 내성의 경사도가 전체적으로 급하게 나타난 것은 이 지역이 북산(송악산)의 사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궁 지’ 주변과 그 남사면은 대체로 경사 10° 미만의 완경사지에 해당하고, 5° 이하의 평지도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관청리 657번지 유적도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유적 주변은 건축물 입지에 적합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궁궐의 입지적 적합성은 지형 단면에 대한 분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5>는 개경 궁성의 횡단면을 살펴본 것이다. 횡단면은 궁성의 좌우측에 흐르고 있는 하천 으로 인해 곡간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 궁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점은 약 200m에 이르 는 너른 대지가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종단면의 경우에도 궁궐의 북사면은 완 만한 경사면을 이루지만, 중심구역은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개경 궁성은 현재도 계단식의 건물지가 남아 있어 이러한 궁궐 건축물의 대지 조성면을 살펴볼 수 있다. 강도의 궁궐도 산사면부에 해당하는 만큼 이와 같은 완경사면을 따라 대지를 조성 하고 건축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16>은 이러한 강도 궁궐의 건축 대지면을 예상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준다. 이것은 수치표고모델(DEM)을 별도로 제작하고, 그 위에 1954년 항공사진을 중첩하여 지형 단면을 분석한 도면이다. 관청리 657번지 유적을 횡단하는 단면 분석 결과를 보면, 내성의 동서벽이 지나는 구간은 구릉 정상부에 해당하여 상대적으로 표고도 높고, 경사도 비교적
657번지유적 그림 13. 개경 궁성과 강도 내성의 하천 분포
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궁골’ 일대의 약 300m 구간은 너른 대지를 이루고 있어 건축물 조영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종단면의 경우, 산사면을 따라 급경사지를 이루 는 구간도 있지만, 대체로 완경사지를 이루고 있어 개경의 궁궐과 같이 계단식의 대지를 마 련하고 건축물이 조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대지 조성은 관청리 657번지 유적에 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확인된 회랑건물지는 남북 약 60m의 규모인데,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해당하는 남쪽 기단은 북쪽에 비해 높게 축조하였으며, 초석의 높이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높아져 최대 약 2m 정도의 단차를 보인다. 즉, 이 회랑 건물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단층을 이루며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한성문화재연구원 2017). 그림 14. 개경 궁성과 강도 내성의 경사도 비교
그림 15. 개경 궁성 지형의 횡종단면 분석 결과
그림 16. 강도 내성 지형의 횡종단면 분석 결과
그림 17. 개경 궁성(위)과 강도 내성(아래)의 가시권 분석 결과
마지막으로, 궁궐의 가시권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가시권은 ArcGIS Pro에서 제공하는 Exploratory 3D Analysis의 Viewshed를 이용하여 궁궐 중심구역으로부터 전방 1㎞ 이내의 가시권에 대해 분석해 보았다. 개경 궁궐의 회경전 부근을 관찰 지점으로 설정하여 분석한 결과(그림 17의 위), 궁성 내부의 전역을 조망할 수 있었다. 또한, 황성 내부도 일부 지점 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성곽 내부를 가시할 수 있는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 다. 이를 통해 볼 때, 궁궐의 입지 선정시 가시성을 고려하고, 개방감을 확보할 수 궁궐지 선택을 위한 차별적 의사결정 과정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림 17>의 아래 도면은 강도 궁궐의 중심구역으로 상정되는 ‘궁골’의 특정 지점에서 바라본 가시권을 분석한 결과이다. 강도의 경우에도 개경과 마찬가지로 내성 내부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가시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내성의 동서 측면은 구릉으로 인해 조망할 수 없지만, 남산이 위치한 전면은 가시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할 수 있다. 이상 강도과 개경 궁궐의 입지적 특징을 비교·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두 수도의 궁궐은 경사도, 지형, 가시권 등 입지적인 측면에서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강도 궁궐의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개경의 궁궐을 의식한 모방 또는 답습이 작용하였다는 것 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Ⅵ. 맺음말 강도는 39년이라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려의 수도였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사료에서 당시 강도는 개경의 재현을 구상하며 수도로서의 위상을 갖추어 나갔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급박한 정세와 강화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인해 개경과는 다소 다른 성곽 체계를 이루고 있었고, 궁궐의 공간 구성과 배치, 규모 등도 개경 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았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식 하에 기존 연구자들이 주장하였던 강도 성곽의 3중성 또는 4중 성 체제에 대한 논의를 재검토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단편적이지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료라는 것을 전제하였 다. 즉, 여기에서 언급된 외성, 중성, 내성은 실제 존재하였던 성곽이었으며, 그 규모에 대한 기록도 믿을만 하다는 것이었다. 강도의 외성은 그동안 염하와 접한 東岸의 해안 성곽으로 이해하거나 지금의 중성을 가리 킨다고 하였다. 외성은 강도 천도 직후부터 축성되기 시작하여 가장 먼저 완성된 성곽이었 다는 점을 볼 때, 몽골군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최우선으로 방비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생 각된다. 따라서 외성은 몽골군의 渡江을 막을 수 있는 東岸안에 시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구간은 고려시대 외성을 이용한 조선시대 외성과 돈대의 축성 논의에서 드러난 것과 같 이, 숙종대 축조한 외성의 일부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외성 의 둘레 환산을 통해 지금의 휴암돈~화도돈 구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중성에 대한 검토에서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비로소 중성을 쌓았다는 기사와 그 규모 에 주목하였다. 우선 중성 둘레 2,960칸은 약 11㎞로 현재 중성으로 명명하고 있는 성곽과 부합한다. 그리고 중성은 최근 조사된 고고학적 성과에서 볼 수 있듯이, 축조 수법의 정교
함과 견고성을 갖추고 있어 고려를 상징하는 도성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치밀한 계획 하에 축성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중성은 강도의 도성으로서 국왕이 기거하고 있던 궁 궐과 관청, 사찰, 일반민들의 생활 공간을 보호하기 장기간의 축성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 성되었던 것이다. 내성의 경우, 최근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지금의 중성이 곧 내성이라는 주장도 있지 만, 내성의 궁성적 성격에 주목한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강도의 궁성 내지 내성 으로 추정하는 조선시대 강화부의 舊城을 복원한 결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 성의 둘레와 부합하며, 개경의 궁성과도 거의 일치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내성은 궁궐을 포함한 주요 관부와 부속 시설이 위치한 궁성과 황성의 통합, 즉 복합적 기능 공간을 이루 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강도의 성곽 체제는 개경의 궁성-황성-나성과 같은 3중성의 체제가 아니었지만, 전쟁 정국을 반영한 해안 외성-중성-내성의 3중성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한편, 궁궐의 위치는 최근 관청리 657번지 유적에서 정전의 일부로 추정되는 대규모 회 랑건물지가 발견되면서 ‘궁골’ 일대가 중심구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일대와 개경의 궁성 도를 중첩해 보면, ‘고려궁지’를 비롯한 ‘궁골’ 일원이 강도의 궁궐이 위치한 지점을 가능성 이 높다. 지형 입지적인 측면에서 하천의 분포와 경사도, 지형 단면, 가시권을 분석한 결과, 두 지점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즉, 강도가 개경의 궁궐과 동일한 건축물 배 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없지만, 궁궐터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개경의 그것을 염두 해 둔 입지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문헌 사료와 고고 조사 자료를 기초로, GIS의 시각화 기법과 공간 분석 방법을 이용 하여 강도의 성곽 체제와 궁궐의 위치, 입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강도의 실체를 밝히려는 시도는 문헌 사료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최근 주목할만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가 보고되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 앞으로 관련 유적에 대한 기획 학술발굴조사 등을 통 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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