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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장로교회_30년사_2부

Published by kpcnjc, 2020-08-13 14: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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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닮기 원하는 사합율 1980 년도 당시 김동철 목사 사택의 작은 방에서 6형제와 함께 지내면서 궁핍한 중에도 자신을 친 hψ민 아들처럼 돌봐준 안마리아 사모를 “잊을 수 없다 고 한 목사는 지금도 회고한다.9) 꾀 봐 당시 전기사정도 좋지 않아 김동철 목사는 호롱불을 켜고 가정예배를 이끌었다. 어려 딴 움은 가난뿐만 아니었다. 교회자리를 판 불구자집단과 곁방을 쓰는 대동청년단 등으로부 킹 터 갖은 핍박을 당한 것이다. 불구자들은 주일날 설교 중인 김 목사에게 욕절과 저주를 싸X 퍼붓고 교회당을 둘러싸고 창문을 두들기거나 돌팔매질을 해댔다. 그러나 김 목사는 담 대히 설교를 계속하며 교인들과 함께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대동청년단은 그들대로 예배시간 때 벽을 두들기며 교회당을 달라고 소란을 피우더 니, 하루는 도끼로 강대상을 찍어버렸다. 그래도 김 목사는 그들을 용서하면서, 화를 내 는 교회청년들을 되레 꾸짖었다. 바깥 무리들은 혼자 무릎꿇고 기도히는 김 목사를 끌어내어 욕설하고 뺨을 후려치기 도 했다. 시달리다 못한 교회 제직들이 교회당 이전을 여러 번 건의해 봐도 김 목사는 서소문 언덕바지가 순교의 터전임을 상기시키며 굽히지 않았다. 그런 의연한 모습은 수 년 후의 순교를 앞둔 훈련이었을지도 모른다. 순교샤 7』동*경 1950년 6월 25일 주일날은 북괴 인민군이 한반도를 심키려고 남침해온 날이었다. 가족들이 남으로 피난 가자고 설득했으나, 김동철 목사는 “만주 교회를 떠난 것도 가 슴 아픈데 교회와 남은 양떼를 두고 나만 살려고 어딜 가느냐”며 요지부동이었다. 실량 이 끝에 아버지와 둘째 아들 초랜만 남기고 피난길에 오른 가족은 폭파된 한강교 앞에 서 맏아들 창국만 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되돌아왔다. 그러던 8월 23 일 수요예배 때, 김 목사가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뱀처럼 지혜롭게’ 살 것을 교훈한 것이 그의 고별설교가 되고 랬다. 이튿날인 24일 아침, 김 목시는 새벽기 도를 이끈 뒤 이른 아침마다 장에 다녀오는 부인을 마중 나갔다가 돌아온 뒤 인민군 정 치보위부 요원 청년에게 끌려간 것이다. 당시 어린 소년이던 김창길 목사는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훗날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아침 아버님을 찾아온 청년은 서울지역에 있는 목회자들이 한 곳에 모여 -’ 9) 앞과 같은 책 235쪽 참조

사진 16 김동철 목사 순교기념비를 찾아간 김창길 구국기도회를 결성하려고 하니 지금 함께 가자고 하는 것 같 목사내외 았어요. 그러면서 유명한 목사 님들의 성함도 댔는데 아버님 Rev. Samuel Chang Ghil K.im and Mrs. Esther K.im, at their 은 효탬안 생각하시더니 그 청 visit to the monument to the m따tyrdom of the late Rev. 년을 따라 나섰어요. 그것이 마 Dongchul K.im. 지막 본 아버님의 모습이었습 니다. 여름옷을 입고 나가신 아 버님 생각에 어머니는 서울 인 근지역 감호소와 시체 보호실 등을 쉽 없이 초L아다녔습니다. 시ζ}이 한침- 흐른 후 4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큰 트럭에 실려가더라는 소문 을 접하게 된 것이 전부입니 다 김동철 목사의 아호가 ‘야성’ (野聲)이었다. 광야의 소리로서 올곧고 굽힘 없는 세례 요한처럼 민족 앞에 복음을 부르짖다가 갔다. 현재 서소문교회 입구와 경기도 용인군 양 지의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에 서있는 그의 순교기념비에는 다음 성구가 새겨져있 다.(사진 16)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끼계 2:10). 안마리아의 오빠이자 김장길의 외삼촌인 안길선 목사{1891~1950)도 한국교회사에 길이 벚나는순교자다. 초기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오랜 기간 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일제에 항거했고 북괴 앞에서도 믿음을 굽히지 않다가 순교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했던 그는 민족 교육과 복음화에 뜻을 두고 평양산학교를 다니다가 신사참배 거부로 퇴교 당했다. 다시 경성신학파현 서울신학대학교)에 편입해 학업을 마치고 안수받은 후 그는 계속 신사참배 거부로 여러 교회를 두루 ‘순회’ 하는 우여곡절 끝에 1942년 북간도 용정 동산 교회에 부임했다. 거기서도 참배거부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한 뒤 어려운 생활을 핍4

예수 닮기 원하는 사항뜰 1980 년도 하면서, 만주 각 교회를 누비며 신사참배 거부 집회를 이끌다 과로와 영양결핍 등으로 m 심한 관절염을 앓아 사와 모진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W있 회a 해방 후 월남한 안 목사는 각 교회 부흥성회를 이끌면서 은혜로운 설교자로 소문나 빠g킬μ 신당동중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열정적이고 은혜 넘친 설교는 특히 피난민들 X씨 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때 사권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워 자주 설교 청탁을 받곤 했다. 성경중심의 보수적 신앙을 견지한 그는 기독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한글교 육에 치중한 애국자인 데다 기도의 사람이기도 했다.6.25가 터지자 그 역시 매제인 김동철 목사처럼 주위의 피난 강청을 무릅쓰고 교회를 지키며 기도하다 꿋꿋이 순교의 길을갔다. 신당중앙교회에는 현재 안길선 기념도서관과 외아들 안철호 장로가 세운 안길선 기 념장학재단, 안길선 목사 순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이런 양가의 순교 정신이 김창길 목 사의 삶과 목회 배경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서증싼옥샤 김창길 목사의 삶과 목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또 한 사람이 앞서 언급한 서금찬 목 사다. 김 목사가 부임하던 해인 1980년 우리 교회 부흥회 강사로 모시려고 추진했던 분 이다. 서 목사 역시 만년을 캐나다 토론토에서 보냈기 때문에 더더구나 김 목사와의 친 분이끊이지 않았다. 「서소문교회 50년사」에는 “순교의 길을 가신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은 김창길은 서금찬 목사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아울러 그의 목회에 갚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귀 띔해준다. 김 목사 자신의 말을 인용해 본다. “병약자나 가난한 교우의 집을 심방하실 때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꺼내 나눔을 베풀곤 했던 서금찬 목사님은 늘 소탈하고 꾸밍이 없는 성격 에다 강단어나 목회 현장에서 일관된 삶을 시셨던 분이지요. 언젠가 제가 영락교 회 전임 부목사로 정빙을 받고 그 일을 의논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목 회하실 때도 더 큰 교회에서 청빙을 받으신 적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목사는 한 교회에서 오래도록 충성해야 하는 법이라며 유학 가 기 전까지 서소뭔11 있으라고 E에르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의 1이 같은 책 253-254쪽 참조 웹5

지했던 그분은 저를 무척 아껴 주셨습니다 \"10) 서금찬 목사도 북방 조선족 사역에 뜻을 둔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 용정으로 이주했 다가 기독교학교인 은진중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엽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는, 1936년 간도에서 목회했다.1940년에는 도쿄의 얼본신학교에서 유학을 하면서 만주에서 유학 온 한국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그는 후배지도에 있어 엄격하고 타협이 없으면서도 자상했고 뜨거운 조국애를 품은 목회자와 교육자로 유명했다. 해방 후 함흥에서 목회하 다가 한국전 당시 교우들을 모두 피난시킨 뒤 맨 나중에 가족과 함께 흥남 부두에서 미 군 수송선을 타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제주도에도 교회를 설립했고, 피난시절 서소문교회 성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 서 9' 28 서울수복 때부터 서소문교회를 시무하게 된다. 그는 흔자 지내는 외로운 노인들을 대접하기를 즐기는 등 고통받는 자들의 벗으로 살 아갔다. 연고자 없는 시신을 교회로 옮겨와 장례를 치라주기도 했고 딸의 약혼식 연회비 용을 돈 없는 상가(喪家)에 몽땅 주고 국수로 피로연을 때우기도 했다. 원로목사로 은퇴한 뒤로는 캐나다에서 지내면서 김창길 목사와 깊은 친분을 유지했 다.1978년 토론토에서 있은 김창길 목사의 수필집 ‘이민전화’ 의 출판기념회 때도 축도 를 했다.1981년 8윌 9 일 우리 교회 장립 9주년 기념예배 때도 ‘주님의 요구’(계 2:1-7) 라는 은혜로운 말씀을 전했다. 서 목사는 1994년 8월 21 일 9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갔다. 후손들은 현재 한국과 캐나다, 미국 등에서 활동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증벼웰 김창길 목사는 잠시 공백 중이던 본 교회를 목회체제로 변환시켜가며 처l 계와 조직력 을 갖추고 영적인 성장을 향해 힘찬 박차를 가했다. “준비된” 목회자였기에 교회가 이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다름 아닌 목회자 때문에 오래 상처받은 본 교회를 치유할 길을 기도로 모색했고 영적으로 터득해갔다. 특히 교우틀의 말씀 교육에 진력했다. 뉴저지 목회 초기였지만, 그는 이미 이민자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의 수상집 ‘이민 전화’ 는 교육목회를 하던 캐나다 시절 다년간 이민지들의 신앙 상담을 해주면서 그들의 11) ‘더 캐너더뉴스’ (한국일보 토론토지사). 1978 년 11 월 11 일, 25 일자 잠조, 126

믿음과 일상 생활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쓴 글들이다 11) 교회는 은혜 가운데 웅비(雄飛)에 앞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1980년도 교회요람 에 따르면, 그해 표어는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 주제성구는 사도행전 1장8절 말씀이었 다. 목표는 1 모여 말씀을 배우기 힘쓰자, 2. 가정 예배를 드리자., 3. 전가족 신앙화, 4. 직장에서 인정받는 선자상, 5. 이웃에게 화평을 심는 사람., 6.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 도등이었다. 매달의 설계’ 항에는 1윌이 기도의 달, 2월은 연구, 3윌 성짚 4월 소앞 5월 가정, 6 월 전도 7월 수양; 8월 애국, 9월 교육; 10윌 봉새 11윌 감λ}, 12월 반성의 달 등으로 계 획됐다 김 목사와그가정이 목회 초기 얼마나바쨌냐는 것을상상하기란쉽지가않다. 위기 에 처했던 교회를 살리려고 양떼들을 돌보랴, 집에서는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고 마구 매달리는 어린 두 아들 규호와 규창을 양육하랴, 캐나다에서 옮겨온 막대한 양의 책들이 며 숱한 이삿짐을 정리하랴, 전부터 해온 목회학 박사 과정을 끝내기 위해 연구하고 논 문준비를하랴'\" 그해 3월 한 주 주보를 보면, 김 목사는 월요얼부터 금요일까지 시카고에서 신학연구 차 떠나 금요일 저녁에 귀가할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여러 해를 그렇게 수시로 오가야 했다. 그뿐인가 부임하자마자 그는 교인가정 심방에 들어갔다. 섬방목회의 중요성을 잘 아는 터였다. 주보에다 “심방 및 기타 필요한 분은 서기부에서 준비한 용지에 써서 담 임목사에게 건네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면서 교인 돌보기에 힘을 썼다. 목회자 외에는-아니 김 목사 자신이 되어보지 않고서는←그 바쁘고 허겁지겁한 심 정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3동었 øj 훌; 맴 융~ -ì/ '\"'7 .u.. I!..- -~~ 교회는 자고로? 목표 내지 목적이 있어야 산다 목표나 꿈이 없는 교회는 좌표와 방향 이 없어 표류하는 배와 다를 바 없다 미국 최대급 교회의 하나인 새들백교회(Sadd!eback VaIley Community Church)의 력 워렌(Ilick Warren) 목사는 ‘목적중섬(purpose-driv삐’ 의 교회성장 및 리더십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새들백교회가 단기간에 대 성장한 비 결이 그것이다. 그의 목적중심론을 배워 실제로 적용해온 사람들이 수십 만 명 된다.12) 12) 새들백교회 웹사이트 참조 127

1960년대 초부터 7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군사독재를 한 고 박정희 대통령은 전통 적인 한국 농경사회를 수출 중심의 산업사회로 전환시킬 동안 농촌인구와 서민층을 희 생시켜가며, 삼성, 현대 등 기라성 같은 세계적 재벌들이 그의 그늘에서 컸다. 그는 한국 전쟁 이래 조국의 찌들 대로 찌든 가난의 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끝에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표면상 ‘조국근대화’ 의 기적을 낳았다. ‘계획’ 이라면, 과거 우리 교회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긴 있었다 3 대 담임 장승칠 목사 였다. 앞서 70년대 기록에 본대로 그는 오자마자 교회 발전을 위한 107~년 계획을 내비 쳤었다.딩) 무턱대고 적당히 부딪쳐보는 무계획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 은혜로 이 계획이 주효하려 했는지는 모르나, 부임 약 8 개월만에 교인수가 2배로 불어나는 배가현 상이 일어났였다. 그러나 장 목사는 성장의 기미를 간과했는지 성급히 사임하는 바람에 장기계획이 무산돼 버렸다. 교회의 목적은 장 · 단기 목회계획에도 나타나지만, 연도별, 월별 표어에도 나타난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이희철 목사 재임시인 1977년부터 구체적인 연도별 표어가 눈에 띈다. 그 전에도 표어가 있었을 볍한데 문서상으로는 획질치가 않다. 목회자들은 보통 새해를 앞두고 기도와 묵상 중에 표어를 정한다. 이희철 목사는 ‘전 도하는 해’ , ‘교육의 해’ , ‘기도하는 해’ 등으로 목표를 펼쳤다 80년대의 김창길 목사도 부임 첫 해를 ‘복음을 증거하는 해’ 로 잡은 뒤, ‘새로워지는 교회’ , ‘계속 성장하는 교회’ , ‘예수를 바라보재 ...등으로 연연히 80년대를 이어나갔다. 교회요람에는 매달 그 달의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웰 λ뼈썩 71 성경은 ‘모이기에 힘쓰라’고 교훈한다. 그런데 자체교회당을 갖지 못한 한인교회는 새벽기도나 삼일기도회, 금요기도회 등 주중집회를 갖기가 매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하다. 더욱이 바쁘기 이를 데 없는 미주 생활에서 그런 모임틀을 꼬박꼬박 지켜 참석한다는 것은 여간한 정성이 아니면 힘들다. 그래서 미국에서 오래 지나다보면, 새벽기도나 수요기도회, 금요기도 등의 말이 자칫 아득한 옛 추억처럼 귀에 생경(生뺏할 수도 있다 한인교회들이 자체건물을 희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마음껏 모일 수 있고 양껏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 70년대 부분 참조 128

X앵 김 목사가 부임하던 주일 주보에는 ‘새벽예배: 주일 오전 6시, 삼일예배: 화요일 오후 8시’ 로 명기돼 있었다. 당초 81년도 연초 정기 제직회에서 ‘1주일) 새벽집회에 모이는 교인수가 너무 적어 목사님 오설 때까지 당분간 중지하기로” 합의했었다. 김 목사의 부임 즉시 주일새벽모임이 재개되고 화요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초기 새벽 기도회 때 김 목사는 야고보서 강해설교를 시작했교 이어서 7월 중순부터는 디모데전서 를 가르쳤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한 권 씩 정하여, 강해를 계속해 나갔다. 1984년 11월부터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으나 불과 며칠 후 예 배장소를 펠리세이즈팍의 캘버리교회당으로 이전한 후 몇 달 동안은 조그만 사무실에 서 모였다. 미국인교회가 새벽기도 장소로 본당은 허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캘버 리교회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본 교회가 성장함을 발견하자, 그들 역시 새벽기도를 시작 하여 미국인들은 본당에서, 우리는 하층 친교실에서 교회당 구입 때까지 계속했다. 미국 인교회가 한인교회를 본받아 새벽기도를 한 예가 타처에도 있긴 있지만 매우 드물다. 1985년 2월 17일부터는 새벽기도를 위해 매일 오전 5시 40분부터 1시간 교회 문을 열어놓았고, 85년 12월부터는 한동안 새벽기도회를 6시에 모였었다. 새벽기도는 김 목 사가 교단 총회로 출타한 동안에도 매일 5시 30분에 계속됐고, 86년 8월 1일부터는 김 목사가 매일 6시 새벽기도회 때 설교를 시작했다. 얼마 후 주일예배 준비 관계로 주일새 벽 기도회는 중지됐고? 평일 날은 유지됐다. A쐐 얘앨톰 1980년의 새 일꾼들은 그해 3월말에 임명됐다. 따라서 그해 임기는 4월부터 12월까 지 8 개월간인 셈이다. 이유는 연말과 새해초 목회자가 공백이었던 시기였고, 새 담임목 사가 교회를 파악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1980년 3월 2 일 정기 제직회에서 서리집사를 3월말에 임명하되 , 4윌부터 12월까지를 임기로 하기로 했다. 각부 구성도 4월 첫 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한편 이 날 제직회 때 “각부 구성에 있어 본예배를 못 드리게 되는 직분자는 되도록 교대하여 예 배불참이 장기화되지 않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였다 예보된 대로, 3월 30 일 주보에는 새 일꾼들이 발표됐다. 새 목회자 부임 후 새롭게 편성된 80년도 서리 집사들과 각부 담당자였다. 이때 암으로의 교회건축을 위한 일꾼들 이 뽑혀 계속 이어져나갔다. 명예직분들도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들이다. 그해 6월 1 일 정기 제직회는 토론토에서 129

~ .. 르 %3νS써‘ 누주^-t \"l 0 --교호 130 녕^~ 온 김 목사의 모친 안마리아 권사를 명예권사로 추대했교 7월 27일 임시 제직회에서는 장기순 권시를 본 교회 명예권사로 추대했다. 과거 70년대에는 본 교회에 명예권사란 직분이 없었고 그럴만한 정서나 여유도 안 됐던 것 같다 그러나 이때부터 상당수의 교우들이 명예권사로 임명됐다 」표용#쓴 피표최 본 교회는 교육하는 교회다. 오늘날처럼 1천 명을 넘는 대형교회로 성장하게 된 경위가 교육목회로 쌓아올린 ‘탑j 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창길 목사 자신이 교육을 전공한 만치 교육목회를 평생과제로 삼았다. 연세대 연합 신학원에서도 기독교교육을 전공했고 젊은 시절 서소문교회에서도 중 · 고등부, 청년들 을 가르치며 유능한 교육자로 일했고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교육목사로 사역했다. 본 교회 목회로 분주한 와중에도 수시로 시차고 맥코믹 신학교를 오가며 연구한 노력 의 결정체인 박사학위 논문도 평신도 교육프로그램에 관한 연구 - 'Minisπy of Lay Lεadership Training through thε Korean Bible Institute in Korean-American Context’ 였다. 혼신을 다하고 땀을 쏟은 연구의 결과가 우리교회에 몽땅 부어진 셈이다. 김 목사 부부는 오자마자 기독교교육에 갚은 관심을 보여 교회학교 각 부서를 조직하 거나 어린이부와 중 · 고등부 수양회 때 직접 함께 다녀오곤 했다. 역대 주보철을 보면, 그런 교육목회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교육이라 해서 2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위한 전인적 성경교육으 로 모든 부서가 적극 교육대상으로 부각됐고 가능한 한 교육방법이 적용됐다. 본 교회 의 전교인 교육자화, 지도자화가 7뜸한 맥락이 그런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김에스더 사모는 특히 어머니성경반을 비롯한 성경반을 조직, 지난 20 여년간 지도함 으로써 교회성장의 근간이 되는 효과적인 평선도교육에 기여해왔다. 싼송해흩 바재야 1980년 2월 17일 임시 제직회는 갓 부임한 김창길 목사가 처음 진행한 제직회였다 김 목사를 포함한 10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 하나가 그 동안 사용해온 새찬송가를 ‘찬송개 (일명 개편찬송개로 빠F는 의안이었다. 성가대장 양호식 집λ까 130

1980 영:s.;. “음악적 견지에서 개편찬송가가 부르기가 쉽고 좋아 성가대는 이미 지휘자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 았으므로 차제에 바꾸는 것이 좋겠다 고 건의한 것이다. 김 목사는 이미 캐나 다에서부터 (개편)찬송가에 익숙해 있었다. 찬송가 전환 작엽은 본 교회 초창기인 1974년에도 있던 일이었다.녀) 초기 장영춘 목 사 때부터 사용했던 합동찬송가를 그의 이임(離任)과 함께 시대적 부응에 맞춰 개편찬송 가로 바꿨었다 그후 한동안 새찬송가로 대체됐다가 김 목사의 부임을 계기로 다시 개편 으로 통일하게 된 것이다. 1967년 발행된 (개편)찬송가는 장로교 통합측을 비롯해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 한성결교,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이 공동으로 음악과 가사, 교독문 등 을 위원들에게 위촉해 편찬했다. 반면 새찬송가는 합동 · 고신측 등 보수교단들이 1962 년에 만든 것이었다. 제직 가운데는 “이제 목사님이 갓 오시고 해야할 급선무가 많은데 갑자기 바꾸면 부작용이 있을 지 모르니 적당한 때를 기다리자’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오신 목사님이 개펀찬송가에 익숙하여 불편도 많을 테니 부흥을 위해 목 회자를 중심으로 마음을 합히는 견지에서 1:l]꾸자 고 합의, 주보에 광고하고 시행키로 했다. 그리하여 24일 ‘교회소식’ 에 찬송가 변경 예보가 났다. “지난 주 제직회에서는 그 통안 사용해 오던 새찬송가를 개편찬솜가로 t:I P규기 로 만장일치 가결하였습니다. 이유는 성가대에서 건의한 대로 음악과 가사가 조화 되어 부르기 쉽고, 또 우리교회가 속한 노회가 개편찬송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 습니다. 3월 첫 주부터 개편찬벙가를 사용하오니 부디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 다.’’ 이에 따라 3월 2 일부터 온 회중이 (개편)찬송가를 쓰기 시작했고 원하는 교인에게 권 당 5달러씩에 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볼과 수년 후 ‘(통일)찬송개가 한국에서 새로 발 행됐기에 또다시 바꿔야만 했다. 샤서tf 변화 새 담임목회자가 부임하자 교회는 안팎으로 분위기가 현저히 달라져갔다. 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창 위기 때는 수십 명 선에 머물어 ‘대롱대롱’ 하던 교인수 14) 70년대사참조 131

‘에 누주;세;, \"。\"‘;::::&::::ai: 고호 I ‘ 30 닝 At 가 이젠 매주 새 교인들이 들어오면서 날로 늘어가고 교회에 한결 생기가 돌았다 김창길 목사가 갓 부임한 후 “예배 찬송 부를 때는 마지막 절 부르기 전 간주를 듣고 부르기로 했다’는 새로운 뉴스가 주보에 실렸다. “간주할 동안 잔송가 7},사를 병상하도 록” 교인들에 대한 주문도 곁들였다. 대부분의 미국교회들이 하고 있는 방법이다.1983 년 새해부터는 다시 전처럼 바뀌어 간주 없이 부르기 시작했고 그후로는 의반0년이 지난 1991년 1월 13 일에야 재차 미국교회처럼 간주를 넣어서 부르게 된다. 1980년 4월 20 일부터는 주보 표지가 산뜻하게 바뀌었다 사진식자체로 ‘미주한인장 로회 뉴저지한인장로교회’ 와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USA' 란 영어 교단 명이 맨 꼭대기에 올려지고, 아래쪽에는 교회 영어이름과 함께 처음으로 새 담임목사의 이름과 성가 지휘재김병기 집λ9의 이름이 명시됐다 아울러 주보 표지 앞면은 고전적인 교회당의 펜화가 실려, 그해 말까지 본 교회 얼굴 노릇을 했다. 뒷면에는 주중의 모든 모임 안내와 기관안내, 1980년도 제직 명단 등이 실 렸다 무엿보다 중요한 것은 그해 5월 첫 주일(4 일)부터 예배 순서가 확 바뀌었다는 점이다. 김 목사의 목회적 배려와실천신학적 센스로 ‘깜짝’ 변모한결과였다; (표 18) 한마디로 참신한 내용이었다 흔히 이민교회는 본국교회에 비해 시대적으로 30~40년 뒤떨어졌다는 말들을 듣는 다. 그런 말이 무리도 아닌 것이, 케케묵고 고루한 전통과 고리짝 같은 요소들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안간힘들을 쓴다. 보수정통을 지켜나가는 방법의 일환언지는 모르나 어찌 보 면게으름같기도하다. 하지만 성경은 ‘새 노래로써 주를 찬양하라’, ‘내가 새 일을 행하노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었다 는 말씀에서 느끼듯,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한다. 그런 맥락 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뒤지는 교회는 아니었음을 주보가 증명해주고 있다 김창길 목사는 사실, 1960년대 서소문교회 사절부터 이런 예배 개혁 내지 예배정신 개혁을 구체적으로 추구해왔다. 옛주보순서와달라진특정을보면, ‘사회’나 ‘인도자’가 ‘집례자’로바뀌었고 ‘묵 E 대선 반주자의 입례송 주악이 강조되고1 기원 후 성가대의 송영이 삽입됐다 또 (대 표)기도 대신 목회기 57} 들어가고 평신도의 대표기도는 참회기도로 바뀌었다. 교독문은 ‘화답’ 이란 용어로 대체됐고 평신도대표가 봉독하는 ‘오늘의 양식’ 이 삽입 됐으며 성경봉독은 ‘복된 소식’ 으로 용어가 바뀌었다. 회중이 부르는 ‘헌금영개 가 명기 132

'11\\/ 씬 18 _~ 1980• ε 4 ,후 1 시:lO운 주영해>11 순서 \"':잉 ν{ i 성,\"1 싱 장길 용사 *잉 씨 종 ε 야 추 ~~ 에배 - 내 집온 인민이 지도하는 칩이니라 입 혀l 자 오직 너회는 주하나닝율 성킬찌니라 써I '1 송 α~ 성 γ} 에 *옥 þ} 가 옥시 :2j'님께서 여러분과 힘꺼l iíl 우 , 또한 목사닝에게오 함께 옥서 - 온 정성율 드혀 여1 배하자 iíl우 우리 는 쭈닝앞에 나가 여|배뜨리자 *션 *ßl t.;Jι1ιí.선 꺼 。 *찬 '11 욕왼소삭 c~ 감 석 성 약 싱 ,,1 아 í 'Ù 」익 사 현 *현양영 사 ,+ 강 야 *용 현 71 ::ι -- ‘ 겁 예자 성 셰샤 iι~ 소식 .... 나양이 본ii!..!E’‘*ι} *찬 송 .54'7 밴 주 '1 *축 요 ... , ι‘ - - - ‘ - 'f 주 · κ ‘ “‘ - ‘-<< ’ ‘ ••••• ‘ •• - ••• “ 성 x 의 .iit셰 풍안>4 인<~ (표 18) 새로 개정된 주보 되고 ‘소식과 환영’ 은 ‘교회소식’ 으로 대체됐다. 무슨 회의종료 신고와 같던 ‘폐회’ 란 말이 사라지고 ‘후주’ 가 들어갔다. 예배에서는 바른 용어법 (terminology) 이 중요하다. 당대의 타 교회 주보와 비교해 보면 알지만, ‘묵도’ , ‘폐회’ 따위의 용어가 80년대 초에 일찌감치 본 교회 주일예배순서에서 사라진 것은 보수성향이 농후한 당시 한인교 계로서는 혁선적이고 개학적인 일이었다 한편 목회기 57} 간략한 대화형태로 바뀐 것은 언뜻 카톨릭 미사순서를 연상시키지만, 이에 대한 김 목사의 변은 이렇다. “기독교 초기의식에서 찾이볼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 염3

,애↓농 ^~흔브 누주\"-1 \"1 。 도.iil.2. 1 30 닝 1\\. 에, 장로교는 물론 키톨릭과 성공회, 감리교 등 모든 교파들이 공히 쓸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종전의 성경봉독도 평신도대표가 읽는 ‘오늘의 양식’ 과 목회자가 설교 전에 낭독하는 ‘복된 소식’ 으로 구분했다 김 목사의 눈과 귀에 익은 캐나다장로교회의 전통 을 본받은 것이다. 사실, 설교 전에 잠시 인사드리다시피 성경을 짤막하게 읽고는 곧장 설교로 들어가 버리는 대다수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의 상투적인 기존 성경봉독 형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섬도 그렇고 여러 모로 너무 가볍게 보인다. 반면, 많은 전통적인 미국교회들이 주일예배 때 성경 일과낭송(I않son)을 통해 신 · 구 약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심을 표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 이런 새 로운 예배형식과 요소에 관해 김 목사는 “전통도 유지하고 복음적 패턴을 시도도 하는 방향으로 순서를 썼다”고 천명한다. 주보 안 오른 쪽 곁의 교회소식란 내용도 인상이 바뀌었다. 매달의 표제와 목표가 게 재되면서 그 달에 맞는 적절한 교훈이 꼭대기에 실리곤 했다. 그런 특색은 ~~년간 지속 되다가 소식 양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바뀌어갔다. 주보 뒷면도 바뀌었다. 전체를 주중의 모든 모임 시간과 장소 각 기관 모임에 대한 안내를배려한것이다. 주간집회 안내 대예배 주일 오후 1시 30분 본교회당 오후 8시 본교회당 화요기도회 화요일 새벽 6시 본교회당 새벽기도회 주일 기관안내 유치부 오후1시 30분 유치부실 어린이부 오후l시 3C 분 어린이부실 교회학교 매월 넷째 주일 예배후 매월 셋째주일 예배 후 어린이부 교실 청년부 매월 첫 주예배 후어린이부교실 여전도회 매주 1시부터 1 시 25분까지 제직회 또 예배 후 한시간 동안 어린이부실에서 성가대 김기태, 이성남 오요단,오순덕 안수집사 김어금, 김명순, 전인호, 이혜숙, 양호식, 이대영, 원윤팔, 권사 서태호, 서광진, 한원열, 김병기, 흥무승, 정주섭 집사 댐4

사진 17 밴 버스는 발이 되고 교우들의 있다 Church vans for church members. 교회 배응 우 oJ 콰I:~ 정말 반가운 소식은 이 해에 교회버스를 구입했다는 것이었다{사진 1끼. 960불의 버스 헌금으로 1천불 급 중고차를 산 것이었다. 부족액 40불과 유리창 등 수라는 양호식 집λ아 부담했다. 비록 중고차이긴 했지만 당분간 많은 교우들의 발 구실 을 톡톡히 해낼 것이었다.16 인승 밴으로1 교회 이름도 새긴다는 예보가 주보에 나간 뒤 김면오 선생이 교회 간판과 함께 밴에도 교회명을 새겨 넣었다. 밴-버스운영위원회가 구 성되고 설행됐다. 중고 밴은 야외예배가 있던 5윌 25 일 첫 선을 보이며 운행됐고, 8윌 첫 주일부터 친교부장 서태호 집사의 운전으로 밴 버;하 정식 운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6월 정기 제직회는 밴 버스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양호식, 서태호 두 집사를 위원으로 위촉했고? 운영위원회는 밴 운영 규정을 기안하여 차기 제직회 때 상정키로 했 다. 위원장으로는 양호식 집사가 선임됐다. 7월6 일 제직회는 밴 운영위원회의 안을 받아 그대로 채택했다. 대외채샤 1980년도에 있은 대외적인 행사를 살펴본다. 2월 24 일 주일에는 본 교회 집사 출신인 곽영철 전도사의 목사 안수식 및 새 교회 설립예배가있었다. 4월은 특히 대외적인 각종 행사로 무척 바쁜 달이었다. 그해 부활주일은 4월 6 일이었 다. 당일 새벽 5시 링컨 파크에서 뉴저지 부활절 새벽연합예배가 드려졌고, 본 교회 교 핑5

‘않f(, 듀;;;;>4 ;;;;1 장뚫교호펴 Q 앉^~ 인 다수가 참여했다.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주최로 지역별 연합예배의 일부로 개최 된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 갓 부임한 본 교회 김 목사가 성경봉독(요20:17-18)을 했고 설 교는 박재영 목사( ‘부활의 새 아침’ )가 했다. 또 조국의 안전과 번영, 동포교회의 부홍성 장, 교협 주최 할렐루야 80 대뉴욕전도대회를 위해 지역교회 목사들이 대표기도를 했고 감리교 김해종 목사의 축도로 마감했다. 한인교회협의회가 1975년에 일찌감치 생겨 이런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교역자협의회 등 교계 연합단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연합활동이 활발 치 못했었다. 초기에는 대개 한인 밀집 지역이던 권즈 등 뉴욕시 5개 보로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뉴저지 자체 교회연합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뉴욕교협은 7월1l ~13 일 권즈칼리지에서 개최되는 할렐루야 80 대뉴욕전도대회 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회 취지는 부활 후 숨을 내쉬며 너희가 가서 모든 사람에게 전 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아직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이었고 “이 기 회에 비신자들을 매 시간마다 참석하도록 적극 힘써 달라”는 광고도 있었다. 지금도 뉴욕교협이 매년 갖는 전통적 행사인 할렐루야 전도대회는 본시 뉴저지한인 제일교회 박재영 목λ까 창안하고 기획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박 목사는 뉴욕교협은 물 론 뉴저지교협 창설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1대 회장을 지냈다. 뉴저지교협이 독립한 뒤로는 호산나전도대회와 호산나청소년전도대회가 큰 연례행사로 발전했다. 4월 중에는 교단 대외행사도 있었다. 22~23 일 뉴욕한민교회에서 교단 미주동노회가 열렸다. 이 노회에서 본 교회 김창길 목사의 담임목사 청빙이 허락됐다. 이어서 23~27일에는 대뉴욕지구 장로교연합전도대 회가 미주동노회 뉴욕시찰회 주최로 뉴욕한성교회에서 개최됐다. 주제는 ‘그날이 오기 전에’ , 주제성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겨1122:20), 강사는 서울영락교회 박조준 목사였대박 목사는 훗날 영락교회를 떠나 갈보리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게 된대. 이 행사에는 뉴욕 9교회, 뉴저지 5교회 등 모두 14개 교회가 참가했다.폐 15) 참고로 당시 참가교회를 열거해 본다. 동부교회(박희소) 새소방교회(정도인) 새한교회(배성호) 엘름허 스트교회(이형기) 연합장로교회(지관순) 염광교회(이성의) 컨즈중앙교회(안창의) 한민교회(고용수) 한성 교회(김권석) 뉴져지장로교회(김창길) 뉴져지서부교회(김광웅) 뉴져지연합장로교회(길웅남) 라더포드장 로교회(김용주) 버겐장로교회(김기홍). 136

C엮수 양상 성례전(성례전 . sacraments)은 세례와 성만찬을 통틀어 하논 말로, 성경말씀과 함께 개혁교회의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다. 카톨릭에는중세 때부터 발전된 영세 · 견진 · 성체 · 고해 · 종부· 선품·혼배 등 7가 지 성례(성사)가 있으나, 개혁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오로지 서l 례와 성만찬 을 성례전으로 정립했다. 일반적으로 전통교회에서는 목회자 없이는 개 교회에서 성례전이 시행되지 못한다. 반드시 목회자가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집례하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는 안수 받지 못한 평신도 선교새 기능선교사 등이 현지인들을 위한 성례전을 갖기 위해 외부 목사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히는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교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전통교회 세례에는 아기세례, 학습 및 입교, 성인 세례등이 있다. 본 교회는, 일찍이 초창기인 1972년 성탄절에 장영춘 초대목사의 집례로 첫 성례식을 가진 바 있다. 그라나 목회자가 번갈아 바뀌던 과도기 시절, 성례식을 갖기란 쉽지도 흔 치도 않은 터였다. 반드시 목회자가 집례해야 하는 성찬식과 세례가 제대로 시행될 리 없 었다. 김창길 목사의 부임 후, 매해 시즌에 따라 성례식이 본격적으로 빠짐없이 시행되고 빈도가 잦아졌다 그도 그렬 것이 목회자 변동이 없어서, 꾸준히 지속됐기 때문。1 다. 그해 성금요일 기도회를 홍무승 집사 집에서 가진 뒤 4월 5 일에는 세례와 학습, 유아 세례 면접이 실시됐다. 김 목사가 부임한 이래 첫 학습 세례식과 성찬식은 4월 6 일 본 교회 부활절 예배 때 거행됐다. 1980년대의 첫 세례 · 학습자들언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사진 18) 학 습 : 한재덕 김규창 유아세례 : 김규호 김귀남 세 례 : 김은숙 예배 후 세례 및 학습자들의 기념 촬영도 있었다:6월 29 일에도 세례식과 함께 전입 교식(轉入敎式)이 거행한 데 이어 그 다음 주일인 7윌 6 일에 성례식을 가졌다. 전입교식도 80년대 중반 무렵까지 한동안 매년 계속된 전통으로, 타 교회에 다니던 교우가 본 교회에 교적을 갖기 원하는 서약식이었다, 전입교인은 이명증서를 첨부해야 했다. 전입교를 마친 세례교인은 본 교회 정 교인이 되었다. 유아세례와 학습, 세례, 전입 137

#주\"-I ^I 장중 i고호 130 닙 ^t 사진 18. 1980 년 4월 6일과 그해 6월 29 일 있은 아기세례 1 입교 1 학습, 세례장면 당시 에는 전입교식도 함께 거행 되었다 Infant baptisms,Entering-a-faith, Studying and the baptized on April6 and June 29, 1980. 교식 등은 81년부터 연간최소 2회 이상씩 실시됐다. 얘얘책 채용 채책 새 담임목회자의 부임 이후 교회가 활기를 띄어가면서 재정규모가 나째고 있었다 당초 3월16 일에는 80년도공동의회가 있었다 이날회의에서 80년도 예산을총 40,313.29 달러로결정했다 부활절로 인해 13 일에 열린 4월 정기 제직회가 첫 4분기 회계보고부터 받았는데 수 입부에다 그 이후 제직회에서 보고된 4윌 이후 분까지 나열하면 아래 도표와 같다. 모든 환경과 형편을 감안하고서라도 최소한 과거보다는 현저히 헌금수입이 늘었다. 1월 $1,480.50 2월 $1,775.40 3월 $2,637.40 4월 $2,923.75 138

5월 $1,897.85 6월 $3,641.80 7월 $2,549.10 8월 $3,924.16 10월 $2, 677.46(부흥회 $2,071.10) 9월 $낄799:25 11월 $2,523.68 10월 부흥회 회계 잔액때698.41)은 건축기금에 이관키로 했다. m애 한편 6월초 추경예산 초안 수립을 위한 5명 위원(양호식, 김기태, 서광진, 서태후 이 jbas 대영)이 선출됐다. 추경예산안은 7월 6 일 정기 제직회 때 보고됐는데, 해당연도 예산총 빠 킹 액 35,630 달러에 변동 없이 수정만 가했다. 수정내용은 교역자 사례비와 사택 보조비, 써 £ 교역자 심방 수당, 교역자 전화 사용료 등을 수십 달러씩 인상시킨 대신, 다른 지출을 같 은 금액만큼 줄인 것이었다. 교최용싹샤엑 변오 예배 음악은 그지없이 소중하다. 찬양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앞장에 기록된 대로, 설립되던 해인 1972년에 성가대가 이미 조직되어 그해 성탄절 이브에 ‘몇 명 안 되는’ 대원이지만 첫 선을 보인 이래, 꾸준히 맥을 이어 왔다. 초기사 기록에 70년대 말기까지 군데군데 성가대에 관한 언급이 계속되고 있다.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무보수로 일하면서 헌신적으로 일한 음악사역자도 있 었다.70년대의 한경희 교우 같은 이들이다. 이성남 집사나 김혜옥 씨도 70년대에 지휘 와 반주 사역을 한 이들이었다 이희철 목사 이임 후, 김창길 목사가 부임하기 직전언 공백기에도 성가대 관련 논의 가 있었다.1980년 1월 6 일 정기 제직회에서는 당시 성가대장 양호식 집사가 “현재 지 급되는 지휘자 사례비가 인근교회에 비해 너무 적다’며 ‘걱정한 선에서 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제직회는 예산 확정 때까지 잠정적으로 월 250달러씩 지급하기로 했다. 4월 13일 제직회는 당시 지휘자이던 성악가 김병기 집사와 반주자의 사례비를 그해 초로 소급하여 지급키로 했다. 새 예산안에서 각각 인상 조정된 것이다. 이와 함께 그 동 안 반주자로 봉사해오다 개인 형편상 사임하는 원혜숙 양에게 감사패를 증정키로 했다. 후임자로는 맨해튼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전은연 선생이 부임했다. 그러나 반주 자직은 여전히 불안정스러워 이내 다시 공석이 됐고 원혜숙 교우가 방학이 끝나는 9월 까지 계속 봉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6월초 주보에 났다. 하지만i 원 양 역시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게 돼, 8월 중 박병연 교우가 시작하게 됐고 )Ì;Ø!9

--- 행짧~ #루§예 ~1-C)= Zl .~J 30 앉\"'~ 원 양에게는 뒤늦게 11월 2 일에야 감사패가 증정됐다. 그후 1985년까지 박병연 집사는 계속 오르간 반주자로 봉사했다. 1984년 정초에는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뉴욕대 음대에서 수학 중이던 김형주 집사가 새로 지휘자로 부임했고 박 집사가 반주직을 사임함에 따라 이듬해 4월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최승혜 씨가 부임했다. 김형주 집사가 여름방학 중 일시 귀국으로 석 달 공석 일 때는 이춘성 교우가 대신 맡기도 했다. 오르간은 경 운 양이 맡 았다. 87년에는 줄리아드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당시 본 교회 기악 리더를 맡고 있던 최윤정 교우가 성가대를 맡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후 80년대 말 호산나 성가대와 알 렐루야 성가대로 분할되면서 지휘자로는 김홍일 집사와 김진양 전도λL 반주자로는 오르 간 유영은 집새 피아노 경 운, 김영숙 집사 등이 수고하게 된다. 김진양 유영은 부부는 일찍이 집사시절 80년대 전반기에 사업체를 운영했었다. ‘벤엘 기프트’ 가 그것이다- 90 년대 초에는 김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고 개척에 나서게 된다. 80년대 말에는 어린이성가대가 생기면서 선명회 노래지도자 출신인 박근연 선생이 지휘를맡아했다. 84년 12월 9 일에는 새 교회당으로 이전하면서 박정윤(이 태호)가정이 헌납한 ‘해먼드 820’ 오르간으로 찬송과 찬양을 반주하기 시작했다. 7썩씌 딴과 새 천통 80년대 초 김창길 목사가 부임한 뒤로 매달 변면히, 여러 가지 새롭고 중요한 전통이 속속생겨났다. 한가지 예를 들면, 김 목사가 부임한 지 한달 남짓하던 3월 2 일 삼일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예배 끝 찬송가 순서에 애국가를 부른 것이다. 그후 광복주일과 함께 매년 이 전통이 이어졌다. 또 매년 초 제직이 임명되면 신임 직분자를 위한 환영회가 열리곤 했다. 그해에는 5 월 2 일 금요일에는 양호식 집사 댁에서 신임제직 5명을 위한 환영회가 열려 새 일꾼들 을 격려하고 친교를 나눴다. 교육을 강조하다 보니, 가정의 달이 되자 자연스레 교회가 이전보다 어린이들을 더 사랑하게 됐다. 그해 5월 4 일 어린이주일에는 어린이들을 대예배 전반부에 참석하게 해 말씀 봉독, 기도, 성가대 찬엉까지 듣고는 협으로 내려갔다. 또 교회학교 어린이부에서 1聯

예수 닮기 원하는 사형뜰 1980 년도 어린이파티도열렸다. h 이어서 11일은 부모님 주일로 지키면서 청년부에서 만든 카네이션 꽃을 부모님들께 ψ mιbhg 달아드렸고 다과를 준비하여 어버이들의 은혜를 기렸다. 이 전통도 매년 이어져왔다. m야 또 당시 교회를 통해 각 가정의 교적부를 작성하고 있었다. 킹 캘 냐라 샤항 교화 샤란 김 목사 부임 첫 해 광복절이 낀 8월은 ‘애국의 달’ 로 지켰다. 8월 3 일자 주보 교회소식란 맨 위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8월은 애국의 달입니다. 우리에게는 세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태어나고 자라 난 조국 효R국과 지금 살고 있는 미국, 그리고 장차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가 야 할 천국입니다. 이 세 나라 모두 빠집없이 사랑합시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된 국민이고 교우입니다. 떠나온 조국이지만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이 감동적인 교훈은 8월 한 달 내내 5주에 걸쳐 주보 소식란에 계속 게재됐다\"017일 은 광복주일로 지켰다. 김목사는 ‘제2의 광복절’ (갈 5:니이란 주제로 율법으로부터 해방 되는 자유와 기쁨에 관하여 설교했다 앞서 3월 2 일에도 삼일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애국가를 제장했었다. 당시 김목사는 출애굽기 13:17-22에 기초하여 선민을 이끄시는 하나님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김 목λ까 순교자 가정출신이어서 조국을 위한 행사 때마다 특별한 감흥을 느낄 것임에 틀 림없었다 당일 애국가 제창도 있었다 8월 10 일은 특별히 본 교회가 뉴저지에 세워진 이래 8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로 드렸 다. 김 목사는 ‘교회를 위한 기도’ (에 1:15-23)란 주제로 설교를 했다. 당일 예배 후에는 청년회 주관으로 전 교우 기념촬영이 있었다. 물론 기념만찬도 곁들여졌다. 기념촬영은 창립 9주년을 맞던 1981년에도 그 이듬해도 연연히 이어져갔다. 우더위 공략 κÞl 한 여름철은 뭐니뭐니 해도 맹볕 무더위의 공습 아래 “가물가물” 해 가는 몸과 맘을 식히고 가다듬어야 할 때다080년대에는 공공장소와 가정의 센추럴 에어컨 시스템 마련

‘짧#、 납용내흩 l 잖}뚫쿄효 l띔g 않 ^t 도 그리 쉽지 않은 데다 미주 동북부의 여름 찜통더위는 겨울 추위만큼이나 만만치가 않다 그 해 7월과 8월 두 달은 에어컨이 구비된 교회 아래층에서 예배를 드렸다. 겨울과 봄철에 뜨뜻한 커피를 제공해온 친교다과회에서는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음료수 소비량이 많던 8월 중순에는 홍무승 집λ까 물 컵 한 빅난를 교회에 헌납하기도 했다.7월말에는 교육부{부장 김기태) 주최로?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25~27일 2박 3 일간 스토니포인트 미국장로교 수양관에서 시원하게, 여름성경학교 겸 캠핑을 가졌다. 회비는 1명당 20달러. 부족액은 주일학교 예산에서 충당됐다. 자격은 본 교회 교우들의 자녀로 한정됐고, 김 목사와 교샤 유치부와 유년부, 초등부 어린이들이 모두 참가했다. 여러 교우들이 물심양면으로 헌신했다. 행사 후에는 캠핑 사진이 교회 안에 전시되어 부모들이 관람하고 신청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됐다 뺑볕 더위가 시들어 가던 8월 30 일 ~9월 1일에는 교회학교 청년부가 워렌카운티의 워딩턴 주립산림지(Worthington State Forest)에서 제1차 수양회를 가졌다. 회비는 20달 러씩이었다. 청년13명과 김 목새 청년부장 등이 참가했다 첼힘랜} 교육환동 각급 학교가 개학하는 9월은 교육의 달로 지켰다:9월 7일 주보에는 이런 글이 나갔다. “9월은 교육의 달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중 많은 일들이 제자와 무리들에게 복 음을 가르치는 일로 시셨습니다. 좋은 교인은 좋은 신앙교육을 받은 데서 생겁니 다. 우리들의 이민 목적 중의 큰 하나가 자여들의 교육을 위해 왔습니다. 교육의 달을 맞아 새 학년 시작과 더붙어 우리들의 가정교육, 교회교육11 대한 반성과 개 선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김 목사는 부임 후 기도는 물론 성경공부에도 신경을 썼다. 부임 초기 새벽기도회 때 이끌어오던 야고보서 공부가 끝나 7월14일부터는 디모데전서를 시작했다:8월 중순에는 본 교회가 발행하는 교회회보 임마누엘 지 원고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본 교회 대내외 홍보는 물론 교우들의 문학정서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9월 제직회 때는 주한광 집사가 중 · 고등부 교사로 임명됐고, 10월에 중 · 고등부가 정기총회를 가졌다. 새 임원은 회장 한재덕, 서기 장경숙, 회계 정재봉, 부회장 서영호, 빼£

부서기 서재희, 부회계 정재호 등이었다. 같은 달에 어린이부는 교사 교체식을 가졌다. 최선혜, 김면옥 교사가 새로 부임했고 조용성, 김면오교λ까각각퇴임했다. 2.} 동채(動靜) 새 목사를 맞아 교회가 새 활기를 띠면서 교언 변동 사항도 늘어갔다. 주보에 의하면, 교우들은 마치 여태 새 담임목회자를 기다리며 묵혀두었던 일을 한꺼 번에 치르기라도 할 양 바쁘게들 움직였다. 물론 평소에도 늘 두루 다녔겠지만 80년대 주보에 유난히 표시가 났다. 삶 자체가 시공간의 제약 속에 희로애락이 그칠 수 없는 것 이지만, 교회도 그러하다 많은 이들이 이사를 가거나 이사를 왔다. 대내외 방문자와 새 교우들도 늘어갔다. 처음에는 새 목회자의 소문이 퍼져냐가더니 차차 좋은 교회의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사업차 또는 가족형편상 교우들의 한국 방문과 미국 방문, 타 지역에서의 뉴저지 방문도 잦았고 새 교우들도 줄을 이었다 80년 한 해는 특히 성가대에 경사가 잦았고 성가대원들의 결혼식도 다반사였다. 교 회학교 교사 김면오 군과 성가대원 겸 청년회 회계 권혜중 양, 성가대원 인경실, 김은숙 양등이그해결혼했다. 성가대원이면서 다년간 본 교회 주보표지 그림을 그린 이상뭔스쿨오브비주얼아트 · SVA 재학j군은 뉴저지포스터대회와 전 미국대회에서 각각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 죽희 집사의 장남인 그는 그후 본 교회 주보 표지 그림을 여러 해 그렸다. 성가대 지휘자 김병기 집사는 11월 7일 맨해튼 음대에서 발표회를 가진 데다 12월 8 일에는득남까지 했다. 물론 병으로 입원한 교우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새 목회자가 온 뒤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도 교인들의 마음속은 한결 안도감과 평안이 감돌았을 것 이란 점이다. 뭐니뭐니해도 교언은 역시 교회가 안정돼야 마음과 가정이 평안해지기 마 련이다. 우리 교회는 설립 이후 약 8년 만인 이제야 겨우 안정권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80 면대 그해 10월에는 김 목사 부임 이래, 또 80년대로서는 첫 부흥회가 열렸다. 씩3

일찍이 본 교회는 설립 다섯 돌을 맞던 1977년 3월에 사상 첫 부흥회로 5주년 기념 성회를 가졌었다. 강사는 이호문 목새인천숭의교회)였다. 교회자체 행사였다기보다 뉴 욕 · 뉴저지 지역행사였고 온 교회의 힘을 쏟아 붓다시피 한 대 행사였고 연인원 맴50。 병이 잠석했다. 타 교회 성가대까지도 동원됐었다.79년에도 같은 강시를 초청해 집회를 가졌다. 김장길 목사의 부임 후로는 명망 높은 ‘대 부흥새 보다 참신하고 목자다운 목자 강사를 모셔 내실을 기하게 됐다 당초 이 일을 위해 7월 임시 재직회로부터 위임을 받은 김 목사와 오안순 전도부장” 김기태 집사는 상호 합의에 따라 10윌 2~5 일 나흘간 서금찬 목사를 강사로 개최키로 했었다 서울 서소문교회를 다년간 시무하다가 은퇴한 뒤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고 었던 서 목사는 김 목λ까 오랫동안 아버지처럼 섬기던 선배 목회자였다 8월 3 일 정기 제직회 때는 전도부{부장 오안순)가 부흥회 준비를 위해 각 부서의 협 조를 요청하고 부흥집회 특별부서 조직내용을 보고하여 채택됐다. 특별부서는 예배, 안 내, 헌금, 홍봐 회계, 접대, 교통, 보육 등으로 거의 빈틈없이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9월 정기 제직회 때 강사 서금찬 목사 본인의 부득이 한 사정으로 못 온다는 보고에 따라 재차 김 목사와 오 권씨 김 집사 등 세 사람에게 강사 초빙과 부흥회 준비 결정 건을위임했다 그 결과 10월 3~5 일 사흘간 한국의 이영숙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 전도사는 사흘간 ‘성도의 예복’ (마 22:11-1여, ‘승리의 비결’ (고전 9:24-27) 등으로 말씀을 전했고 5 일 주일예배 때 ‘알자’ (호 6:1~3), 주일 저녁에 ‘더욱 힘쓰자 (고전 15:까11) 등의 제목으로 설교했다. 11 11윌 한 달간 주보 소식란 휩top)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지난 l년 동안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해결과 결정을 주 실 뿐만 아니라 위태한 것을 면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기쁜 생활을 합시다 감사주일인 16 일 어린이부와 중 · 고등부가 준비한 특송을 연주했다. 감시주일 헌금예 산액은 3천달러였다 찍4

장로교는 행정적으로 볼 때, 노회(presbytery)와 당회 중심의 민주주의 체제요 평선도 대표연 장로를 중시한다. 교단 이름에도 장로회란 명칭이 붙는다. 장로들은 교회의 ‘기 퉁 이다. 목사도 대표적인 장로직으로, 장로의 대표로서 당회장직을 수행한다. 장로교 장 로제의 장점이 많기 때문에 한국교회나 해외 한인교회에서 감리교나 침례교, 기타 교회 에서도 장로제를 도입하는 예를 흔히 본다. 소위 장로교회인 우리 교회에 설립 10년이 다 돼가도록 사무장로가 한 분도 없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70년대 과도기를 거칠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장로감을 다 놓치고 장로 한 분도 얻거나 남기지를 못했다. 따라서 대망의 80년대에 새 목회자를 모시면서 새 장로를 모시려는 열망으로 가득했 던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 문제후 그해 5월부터 온 교회가 합심기도에 들어갔다. 아울러 내친 김에 새로운 권사도 한 분 더 뽑기를 원했다. 그해 11윌 25-26 일 워싱턴 성 광교회에서 열린 미주한인장로회 동노회 저112회 정기노회에서 본 교회 장로 1 인 신청이 허락되어 12월 첫 주일인 7일에 장로 1 인과 권사 1인의 선임 투표를 했다. 12월 7일 주보에는 이렇게 기재됐다. “오늘 예배 후 공동의회에서 장로 l인 선택하는 일과 권사 1인 투표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6개월 동안 기도해 오신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가 뽑아내게 하 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투표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투표에 입하는 사람은 미주한연장로회의 교회법에 의히여 세례교인으로서 본 교회에 교 적을 가진 자로 합니다 오늘 투표는 두 번만 합니다 주보에는 아울러 헌법에 기재된 장로의 직무{헌법 제 34조), 자격 (35조), 선택 (40조), 임직 (41죄 등을 곁들여놓았다. 그렇게 해서 피택 장로로 뽑힌 사람이 김기태 집새 시무 권사 당선자는 오순덕 권사였다 감격에 겨운 일이었다. 김 피택 장로는 즉시 김 목사와 함께 준당회를 이루었다. 김기태 집사는 이듬해 4월 정기노회에서 장로고시에 합격했고 5월에 그의 장립식과 함께 오순덕 권사 취임식이 거행된다. 12윌 14 일 정기 제직회에서 준 당회에 최초로 위임된 건은 예 · 결산위원 선임 건과 펴5

꺼 > 찌? ^I- ë르 ‘、ι‘”“;‘ 、‘ #주^-f \"f 0 -'-쿄호 130 닝 ^t 교회당 이전의 건이었다. 교회이전은 이사장에게도 동시에 위임됐다. 그렇게 해서 뽑힌 감사위원과 예산위원은 다음과 같았다 감사위원: 한원일 집사, 정주섭 집사 예산위원 : 김기태 집사, 오안순 권사 양호식 집사 서광진 집사 이대영 집사 특히 12월 21 일부터는 헌금위원이 헌금계수를 마친 후 헌금 기록을 담임목사와 재정 부장과 회계에게 각 1 장씩 제출하게 했다 정확과 안전성을 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봉헌자들을 가도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1980년도 성탄축하예배는 12월 23 일 화요일에 드렸다. 김 목사가 집례한 이날 예배에서 그는 ‘아기예수를 찾은 세 박새 (마 27-12) 란 재목으로 설교를 했다.2부 순서 로는 교회학교 어린이부에서 캐럴합창을, 유정임 · 유정심 자매가 무용 ‘고요한 밤’ 을, 장경숙 양이 피아노 독주(모차르트 소나타 11번)를 각각 출연해 연주했고, 중 · 고등부 전원이 정성껏 준비해온 ‘뉘우친 도둑’ 이란 성극을 공연했다 ‘뉘우친 도둑’ 은 아마 우 라 교회 역사상최초의 연극이었을것이다 정&혼F 뽑핵채 김창길 목사는 바쁜 목회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글쓰기를 즐긴다 구약 시편의 시인들처럼 그의 삶 속에서 문학을 떼어놓을 수 없다. 이민목회의 삶 구 석구석에 시와 명상, 수생隨想)의 편린이 깔려있는 그의 글과 삶, 목회가 살과 피, 뼈처 럼 서로밀착되어 았다. 그는 문단에 정식 데뷔한 시인이다.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전, 토론토에서 교육자와 이민목회재 상담개 선학자로서 생활하던 톰틈이 문학활동을 한 면모를 현지 한인언론 에서 엿볼 수 있다.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Y문학클럽’ 등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첫 저서는 ‘성직자 였고 초기 시집으로는 ‘새울’ (공저)이 있다16) 시인으로서의 활약상을 단편적인 사례로 보면, 당시 캐나다 문인협회(회장 이석현)를 통해 1년간 한국일보 캐나다 주말판에 살리던 시작품 시리즈 ‘계절시첩’ 의 필진으로도 16) ‘더 캐너더뉴스’(한국일보토론토지새 1978년 11 월 11 일, 25 일자 146

예수 앓기 원하는 사람늘 1980 년도 이민교회 김창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시던 호령 동포끼리 터지는통시정 애m 가나안 복지로 이끄시는 지팡이 커피 잔이 비도록 ibhg 애굽 총리대신 집의 머슴살이 떠나지못하는발걸음 m 신앙의자유를무한한 * 수평선넘던청교도 모자이크에 살아있는 성새聖史) 찌gX 천주피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성결교? 어떠하다 떠나들왔습니다 침례교,구세군... 이뭔以뼈에서서울로 손을잡고참회하는기도 서울에서 제주도로 한상에나아와 다시 긴긴태평양을건너 먹과포도주를나누는 홀가분하게빈차림으로 2천년 다 밀려온 오이크메노스 탓하면서 한(빠을남기고 교회(交會)가 교회(敎創로 비뀌어지고 한숨을내쉬면서 신지{新者)가 신재信劃로 거듭나고 모여들왔습니다 로고스(Logo야가 아가페(Agape)로 진해 지는 언어가 행동으로 움직이는 아파트에서 쌓는 가정제단 이민자는 눈치보는셋방살이교회 또떠나가서 우리말로하는예배 빈손으로쌓는제단 표 19. 김창길 시집(떠나온 그리고 또 떠날 사람) <콤란출판사〉중에서 34-36쪽 여러 차례 직품을 게재한 적도 있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계간지 ‘신앙과 교회’ 등 언론에 틈틈이 신앙시를 싣기도 한 김 목사는 첫 시집 ‘떠나온 그리고 떠날 사람’ 을 펴내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 데 이어 1999년 8월 22 일 예닮원에서 시집출판 감사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두 번째 책을 출판했을 당시도 현지언론에 저작 배경을 곁들여 소개됐다.1978년에 펴낸 수필모음 ‘이민전화’ (서울 계문사)후 75년 11월부터 78년 4월까지 전화상담을 통 해 “이민자의 고민 해결과 길잡이로 활약한’ 인생, 종교, 민족, 이민 등 전반에 걸친 ‘1 분 설교’ 라 할 수 있는 212편의 ‘소품’ 을 담았다. 1예?

4써 κ ” ‘F 7\\.1- 2 # ; ; 4 ; l 。 …-.iil호 130 녕^. 김 목사의 글은 한마디로 쉽고 평범할 정도로 담백하며 꾸빔이 없다. 이민자에 의한, 이민자를 위한 글들이다. 이민자들과 어우라져 살다보니 그 삶 자체를 옮긴 글들이면서 이민 목회의 ‘우물’ 안 갚이에서 퍼내고 길어낸 고백이기에, 그의 글은 이 땅 한인들을 구슬리는 설득력이 있다. 웬만한 글쟁이들처럼 어정쩡하게 한국문학이나 영어 번역을 흉 내낸 글을 그에게선 찾을 수가 없다. 한 예로 비록 문학작품이 아닌 공적인 글이기는 하지만, 교단 총회장이던 1994년 연말, ‘교포신문’ 과 ‘장로교공보’ 에 실린 성탄메시지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 를 보면, 묻레 돌리듯 술술 풀어간 그의 독특하고 담담한 어조를 체감할 수 있다. “하냐님이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예수님은 가난하고 굶주린 대중을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시고, 권세가 높고 돈은 많으나 내면의 문제로 고민하는 삭개오를 찾아가서 구원해 주시교 살기 위해 몸을 피는 여인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어 바른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경제적 불황과 소수민족으로서 상처받는 우리 동포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그네 로 이 땅에 찾아오신 겸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삶의 둥우리에서 역사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표 19) 우리 교회는 섬방을 전담하는 여전도사를 두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특색이라기보다 담임목사의 방침이다. 평소 다른 교회를 보면 여전도사로 인하여 잡 다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려니와 인건비를 줄여 예산을 절감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김창길 목사는 여전도사의 업무를 사모가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도사를 채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 부임 초기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김 목사는 부임 초 예배 때마다 김에스더7)사모를 교회입구에 세워 교인들을 영접하게 했고 예배의 안내를 맡게 했다 가정 심방도 동행했어야 함은 물론이다. 교인들의 일이란 무슨 때를 정하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 않아도 김 목사는 때 없이 심방 다니는 목사후 ‘심방대장’ 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였다. 그는 실 로 ‘심방으로 목회에 성공한 목샤 였다. 17)본서에서 김 에스더, 정에스더, 정영선, 김영선은 동일 인물로 김장길 목사의 부인이다 148

예수 닮71 현하는 셔람들 1980 년오 어느 날. 교회에서 일을 마치고 김 목사 부부가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 늦은 시간에 젊 심방 가야할 일이 생겼다. 남쪽으로 하이웨이를 타고 가햄}는 좀 먼 곳이었다. 여느 때 칩 와 같이 사모는 성경 찬송을 들고 김 목사를 따라나섰다 김 목사 부부가 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밤 1시였다. 토끼 새끼 같은 어린것 옳iUS 들이 저녁밥을 먹지 못한 채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널브러져 있었다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그것들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 말라붙어 있었다. 사모의 눈에서 와락 눈물이 났다. 쓸어안으며 흔들어 깨워 보았다. 이제라도 뭔가 먹여서 재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울다 지쳤는지 눈을 뜨지 못했고, 고사리 손을 펴서 엄미를 끌어안 지도못했다 김에스더 사모는 그 어려운 목회 뒷바라지와 자녀교육에도 불구하고 훗날 80년대 말 기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90년대에는 예일 신학대학원을 나올 만큼 학구적이다 :149

1981 책홍순 흩輪 1981년 새해목표는 ‘새로워지는 교회’ 였고, 1월은 기도의 달이었다. 11 일 주보 꼭대기에는 “일년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권고가 씌어있었다. 새해 매 주일 예배 30분전인 1시부 터는 25분간 기도회가 열렸다. 1월 4 일 첫 주일에는 새해축하예배와 함께 성찬식 이 거행됐고, 1월중 새 일꾼들이 임명됐다. 제직들은 앞서 1월 3 일 김기태 집사 댁에서 강세대 목사를 강사 로 제직수련회를 가졌다. 둘째 주일은 예 · 결산 통과를 위한 공동의회로 모였다 공동의회 후 김기태 집사 집 에서 전 교우 초청 새해 만찬회와 친교파티가 열렸다. 푸짐한 상품도 준비되고 신나는 새해맞이 잔치 한마당 을 치른 것이대사진 19) 준 당회는 1월중 81년도 서리집사와 제직회 부서담 당재 성가대원, 교회학교 교λL 구역장 등을 임명했다 서리집사는 남집사 12명과 여집사 6명 등 18명이었고? 사진 19 전교우( 1981 년) Church members (1981)

i 영현장 사진 20.1981 년 11 월 11 일 이전한 제 5예 배처소 The 5th worship place (Novembεr 11th, 1981). 구역별 구역장이 5명이었다. 성가대원들은 모두 20명이었고, 교사는 어린이부가 4명, 고 월 등부 2명, 청년부 1명이었다.1981년도 신임 제직회의 재적은 당회장과 안수집λL 시무 권사와 명예권사까지 모두 24명이었다. 그해 첫 제직회 (1월 4일)는 재적 24명 중 20 명 씨싸 이 참석, 출석성적이 좋았다. 샤 1월 제직회는 또, 전년도보다 약 5천 달러 ($4,522)가 더 많은 총 40,152달러의 새해 예산안에 3천 달러의 부흥회 예산을 추개 사실상 1980년보다 약 8천 달러 더 많이 상 향조정됐다. 새해에 재정에 관한 믿음도 늘어난 셈이다 아울러, 전년도 회계 잔액 5,290 달러는 미지급금의 지급과 새해 예산에 신설된 목회적립금 900달러를 공제한 잔액을 건축기금으로 이관했다. 임대 교회를 매입할 계획도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사진 20) 새해 첫 달에 교우 한 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기순 권사였다. 기도의 여종인 장 권사는 전년도인 1980년 7월 27일 명예권사로 추대되어 5 개월 여 우리 교회에서 봉직 했다. 장 권사는 1월 13 일 화요일 아침 고혈압으로 메디컬센터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주말에 숨져 19 일 장례식이 거행됐다. 새해 초인지라 모든 활동상이 바빠지고 빨라졌다. 교회학교 부장회의, 구역장회의, 준 당회 등이 소집됐고, 특히 준당회는 55세 이상남녀들의 모임인 임마누엘회를조직하기 로 하고 김 목사를 고문으로 추대했다. 여전도회 고문은 김기태 집사였다. 한없이 분주하면서도 자칫 외로워지기 쉽고 소외되기 쉬운 이민자들의 삶 속에서 구 뀐1

‘- 、 누구처 \"1 ^Ié-'ë-프~ 쿄호 I 30 닌 At 역예배와 연례 교우가정 대 심방은 매우 중요하다. 1981년 새해부터는 교인 거주지를 5개 구역으로 나눠, 구역예배를 매달 1회씩 드리기 로 해, 그해 첫 주는 져지시티, 둘째 주 패터슨과 이슬린, 린허스트, 셋째 주 포트리, 넷 째 주 파라무스, 다섯째 주(또는 첫째 주) 뉴욕 구역 등으로 정해졌다.3월 15 일부터 구 역예배 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고 구역장회의도 자주 열렸다. 이때 성경말씀 지도는 김 목사가직접 이끌었다 구역편성 구도는 디음과 같았다. 구역담당자 1구역(져지시티 · 시코커스 · 유니온) 구역장 오요란, 권찰 윤 완 2구역(린허스트 · 패터슨) 구역장 양호식, 권찰 김면오 3구역(파라무스 · 포트리 · 이스트뉴욕) 구역장 이대영, 권찰 계정축 4구역(이슬린 · 팔린) 구역장 힌원열, 권찰 이애순 구역장 김병기, 권찰 최명숙 5구역(뉴욕) 이처럼, 80년대이래 본 교회가 본격 성장하면서 지역별 교인수가 증가함에 따라 구 역수도 늘고 다원화돼갔고, 구역장 · 권찰 등 구역일꾼도 덩달아 증가시킬 수밖에 없었 다.80년대 말에는 스티븐스 공대 등 주변 미국대학교의 한인 기숙사생과 유학생들을 위한 구역이 별도로 필요하여 유학생구역 도 구성됐고, 심지어 한국 거주자들을 위한 ‘서울구역’ 도 있었다. 서울구역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교우들과 지상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교우들이 본 교회를 그리며 모였던 모임으로, 1~2개월에 한번씩 모여 구역예배 를드렸다. 주윤서 교육션도샤 부 a』 1981년 3월 둘째 주에는 기도하고 기다리던 교육전도사로 주윤서 전도λH현, 본 교회 주인실 권사 3님j가 부임한 것이었다. 서라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 4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헌터칼리지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그는 1978년 본 교회에 부임했던 정용재 김종혁 전도사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80년대로서는 첫 번째의 전도사였다. 그해 5월은 예년처럼 ‘가정의 달’ 로 지켜졌고 5월 3 일 어린이주일에 본당에서 예배 를 드리면서 설교를 주전도사가 맡아했다. 그는 ‘결실할 때까지’ (마18:1-5) 란 제목으로 말씀을전했다. 그날 주보 꼭대기에는 가정의 달을 맞아 이런 교훈이 실렸다. 152

’x “주님이 묘단들어주신 가정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 집에 계시도 록 우리 가정은 신앙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어린이를 잘 돌보며 부모의 사람을 기억하며 수고를 피차 격려하십시다. ’ 주전도사는 부임 이듬해인 82년 7윌10 일 김창길 목사 주례로 피영미 양과 약혼식을 올렸고, 같은 해 9월 9 일 순복읍뉴욕교회에서 김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쉬운 것은 80년대 교육전도사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짧았다는 사실이다. 대개는 신 학교 학업관계 때문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젊은 사역자를 구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요 즘은 특히 이민교회를 위한 영어권 목회자 구하기가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하늘의 별 따기’ 가 되어가교 몇 년씩을 기다리는 교회들도 없지 않다. 한인 교인들이 자기 귀한 자녀들을 기꺼이 주의 종으로 바치고 많은 교회가 자체 사 역자들을 잘만 길랴냈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일꾼 품귀현상J 을 겪었을까. 용$ 성금요일(4월 17일)에는 제3구역 주관으로 김기태 집사 집에서 가상칠언(架上七言) 기도회를모였다. 그날 당일 주보에는 “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입니다. 이날을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을 하며 주님의 십자기를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공고되어 있었다. 또 4윌 끝 주일 주보에는 다음 글귀가 적혀 있어 인상적이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져야 하 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피하지 말고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죽음이 끝 이 아니라 죽음을 념어 부활이 있습니다 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주님이 십;z}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을 하나씩 찬송 · 찬양과 함께 묵상해나가는 가 상칠언 기도회는 시간이 가면서 각 교회는 물론 노회, 시찰회의 전통이 되다시피 했다. 1981년도의 가장 중요한 대내행사 한가지는 김창길 목사의 위임투표였다. 6윌 28 일의 임시공동의회에서 실시한 위임투표는 은혜롭게 진행됐다. 노회 위임국장 으로는 김권석 목사{뉴욕한성교회)가 맡아 ‘주가 쓰시겠다 하라’ (녹 9: 23-24)는 말씀을 전했다 힘3

쌍;‘ #주 ^i^1 ^。~트증 과:2 1 ι?30 념 김창길 목사의 위임식은 이듬해인 82년 9월 본 교회 10주년 행사 때 거행키로 했다. 그날 안수집사 2명을 선출하는 투표도 했는데, 서광진 집사 한 명이 34표로 당선됐다. 이보다 앞서 1981년 5월 10 일 오후에는 김기태 집사 장로 장립 및 오순덕 집사의 권 사취임 예배를 거행했다. 김기태 장로는 우리 교회사상 첫 시무장로인 동시 80년대에 장립한 첫 장로였다. 오순덕 권사는 70년대의 오안순 권사에 이어 두 번째 권사이면서 80년대에 취임한 첫 권사였다'.(표 20) 김기태 집사는 미주한인장로회 제 13차 정기노회가 열리던 4월14-15 일 필라델피아한 인장로교회(이병규 목새에서 장로고시를 치러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었다. 한편 6월 공동의회에서 안수집사로 피택된 서광진 집사는 당회로부터 20시간 교육을 받고 안수를 받았다. 그는 여러 달에 걸쳐 성경개론과 교회헌법 등 모든 해당교육을 계 속 받았는데 주보에는 교인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도하도록 수시로 촉구됐다. 이러한 피땀어린 훈련과 교육, 기도의 지원에도 불구하교 훗날 유감스럽게 김기태, 서광진 두 사람이 우리 교회를 떠나가게 된다. 어느 교회나 그럴 수 있겠지만 우리 교회 는 70년대에 이어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도 여전히 ‘장로 징크스’ 같은 것을 겪고 있 었던모양이었다. 표 20 임직예배 순서 장로 장립 및 권사취임 예배 순서 입례송 1 장 _._. 집례자: 김창길목사 다같이 예배의 부름 - - - 내 집은 만민이 기도 하는 집이니라 오직 너희는 주 하나님을 섬길지니라 기 원 _._.- • _----• 집래자 ._.. 송 영 ----_._.__. _-• - _.._-_._._- 성가대 목회 기도 •- →→ (219장) 집례자 찬송 다같이 화 답- (교독문 84번)--←→-←←→← 다같이 신앙 고백 (사도신경)←← 디같이 오늘의 양식 • •••••••••••••••••••••_ •••••••••••••••••••••••••••••••••• (마 9:37-38) 이성의 목사(뉴욕염광교회) 중보 기도 ........... _ - - - - - - - - - _ . _ - - 이성의 목사 송 영 - - - - - - - - - - - - - - - _ .__._-,-,- 성가대 복된 소식 (막 15:42-47) .. • • 집례자 찬양 성가대 :J54

설교 김권석 목사(뉴욕한성교회) 헌금과영가 봉현 기도 현금위원 서약 안수기도 집례자 당회장(장립받는 분/취임하는 분/교우들) 당회장, 목사: 지곤딴 · 손석구 · 안창의 · 정도인 장로:입민일·안흥원 악수 례 안수위원 공 포 당회장 축 가 축 사 유필봉선생 박희소 목사(장로에게) 정원식 목사(권사에게) 염석규 장로(교우들에게) 기념품증정 오순덕 권사(교회에게) 교회대표 및 각 기관(잠로 · 권사에게) 인사 말 김기태장로 찬 i二 (387장) 다같L이 =τ\"1 ζ그 김용주목사 도 한편, 새로 임직한 두 사람은 영문타자기를 교회에, 신약성서사전(11권 전질)을 담임 목사께 각각 증정했다. 교회는 모름지기 전도하여 일꾼을 키우논 곳이다. 더구나 새 목 회자가 오고 나서 그를 보필할 일꾼이 긴급히 필요했다. 그해 6월 마지막 주일은 안수집 사 2 인을 뽑기로 하고 5월 마지막 주일 주보에 안수집사 선정기준을 게재했다. 해마다 5월은 가정의 달로 지켜진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와 함께 가정을 지으셨다. 가정 없는 사회는 흑 있을지 몰라도, 가 정 없는 교회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가정의 달은 가족을 기본단위로 삼는 교회의 가족 적 분위기를 북돋우는 절호의 기회다. 1981년 어머니주일인 5월17일은 여전도회 헌신예배로 드렸다. 오안순 권사가 인도한 이날 예배에서 새로 권사로 취임한 오순덕 권사가 오늘의 양식(팀후1:5-7)과 참회기도를 맡아했다. 초청강사 백한)명희 목사는 ‘여자라는 이름’ (창2:21-25)으로 설교했다. 본 교 회 영어 목회자였던 한태헌(Danny H없1) 목사의 어머니인 박병희 목사는 당시 뉴욕에 몇 155

‘-,(쩌 누주 ^~;ζl X。t 동E5!쿄호 130 앉^~ 분 안 되는 여성목회자료 다년간 브롱스에서 목회했다. 예배 중 여전도회가 55세 이상인 교회 어르신들께 선물증정을 승}는 시간이 있었고 할머니들이 나와 특송을 했다. 이날 중 · 고등부 학생들이 꽃을 준비해 어머니들께 달아 드렸다.5월 24일 주일에는 에코레이크파크에서 야외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 신 자연을 맘껏 즐기고 형제우애를 나눴다. 가정의 달의 연장인지는 모르지만 6월 14일 예배 후에는 가족창 경연대회가 열렸고, 여기서 1등으로 당선된 가정은 우리교회 대표로 한국문화원이 주최하는 축제에 출연했다. 셔 7~!↓ 묵Ai 그해 7월은 ‘여가의 달’ 로 보냈다. 7월 첫 주일(5일) 주보 상단의 다음의 제언이 눈길을 끌었다. ‘'01 민생활이 바쁘고 쫓기는 생활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정신적인 여유를 찾아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 쉬신 것처 럼 우리도 세상일을 6일동안 하고, 하루는 하나님께 가서 쉬십시다. 하나님 요뻐1 만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없는 여가생활에서 여가를 묘뜯뜰} 삽시다. 성도의 휴가와 여 7}, 일시적인 은거생활은 곧 명상과 말씀묵상, 기도를 의미한다. 예 수님도 바쁜 사역일정 후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한적한 곳에서 쉬시거나 기도하며 묵상하 셨다. 그 달 3..5일에는 제2차 청년회 수양회개 10..12일에는 어린이캠프, 17..19 일에는 중 · 고등부 수양회가 각각 열렸다. 모두 17명이 참석한 청년회 수양회는 김기태 장로가 지도 를 맡았고 주윤서 전도새 주한광 집사 등이 협조했다. 김창길 담임목사도 8월 17일부터 9월 17일까지 휴가를 가졌다. 휴가 중 김 목사는 포 레스트기도원에서 2주 동안 기도와 연구생활을 했고 주일에는 뉴져지제일한인교회, 뉴 욕한성교회 등에서 설교를 맡아하기도 했다. 그가 휴가를 끝내고 난 9월 20 일 주보에는 이레적으로 다음주 설교의 본문과 설교제 목이 예보됐다. 이에 따라 27일 주일에 ‘성령의 큰 역새 (행 2:1..13) 란 제목으로 설교했 고1 특히 그날 예배 중에는 설교 후 온 교인이 함께 합심하여 통성기도를 했다. 그러나 이 휴가를 마친 이후후 김 목사는 지금까지 매년 정식 휴가를 갖지 않고 있다 그 달 구역예배 제목도 h냄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자 (행 1:1..26) 였고 10월 구역예 156

α@ 수 배도 같은 본문을 근거로 ‘합섬하여 기도하자 는 제목이었다. 기도와 성령의 은혜에 초 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개학철인 9월은 교육의 달이었다. 교회소식란은 다음과 같이 가정신앙교육을 강조하 고있었다. “개학과 함께 우리 교회 교육과 가정교육 그리고 학교교육의 상호관계성을 찾 아보P야겠습니다. 신앙교육도 가정에서부터 되어져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두 시간 밖에 안 되는 교회교육이 가정에서 부모님을 통해 보충되기 바랍니다 힘 ~*I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 교회는 특히 오래 전부터 성도들이 가진 바 귀 한 것들을 아낌없이 기꺼이 바치는 전통이 있어왔다.70년대 말에 성가대의 여름 가운 을 직접 만들면서 재능과 시간, 장소 등을 바친 것이 그 한 예다. 물론 때때로는, 자주 바뀌는 목회지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가 잦아들거나 삭아들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목회소신이 확고한 새 목회자가 부임하고 교회가 흔들림 없는 반석 위에 굳게 서기 시작한 80 년대부터, 성도들의 드렴과 바침 ‘현상’ 은 지속적,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1981년 8윌에는 오안순 권사가 담임목사의 자색과 녹색 스휠stole) 한 족 씩과 성가 대 지휘자 가운 한 벌을 헌납한 아름다운 일이 있었다. 이를 사발점으로 삼기라도 한 양, 성도들의 드림과 바침은 줄이어진다. 그 이후 주보에는 아무개 성도가 무엇 무엇을 헌납 했다는 광고가 잇따른다. 그런 현상은 교회가 이전하거나 자체건묻을 마련했을 때 더욱 확대되고 심화돼갔다. 자원하여 바치는 성도의 심령은 생명처럼 고귀하다. 때때로 그것 은 순교의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다윗은 전시(戰時)였던 어느 날, 광야에서 심한 갈증을 탄 적이 있다. 애지중지하던 그의 경호 팀 세 용사는 목숨걸고 적진을 뚫고 생수를 떠다 바쳤다. 다윗은 그 불을 마시기가 너무도 아까워 땅에 그냥 부으며 ‘생명’ 이라고 일컬었 다. 그 물줄기는 서l 용사의 목숨줄기였던 것이다. 출애굽시대 광야 성도들도 가진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기에 힘썼다. 엑소더스 당 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재불과 보화를 받아 갖고 나왔는데 그중 상당량을 자원하는 섬령으로 광야의 성믹t회막 . Tabemacle)을 짓는 데 바쳤다 그렇 게 바쳐진 예물이 너무 많아 “이제 그만 좀 가져오세요1\" 라고 모세가 사양할 정도였다. 157

;ιF그 & 누구처^ I o'=' ..ûl호 130 닝^~ 성도들은, 교회를 사람하는 마음과 열정이 자라가면서 교회 구석구석 손길과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투입했다. 교회학교 교사나 성가대, 엄마누엘 회원 등 각 부서에서 봉사하는 사역자들을 교우가정으로 초청하여 대접하는 전통은 80년대 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우리교회가 아직 대규모화되기 전인 80년대에는 특히 가족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다 온 교우들이 한 분 장로나 집사 가정에서 초대받아 식사를 하는 때 가 잦았다. 8윌부터 안내위원은 한달 간 매주 교인들이 간 뒤 마지막까지 남아 방마다 두루 살펴보고 휴지 등 쓰레기를 줍고 교회 물건을 정리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남이 알 이주든 않든 간에 꼭 해야 할 필수적인 작엽이었다. 1981년 10월은 말씀의 달이었다. 주제를 살려 그 달 마지막 주일에 전도부 주관으로 교회전체 성경암송대회 및 퀴즈대 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형편상 11월 추수감사절로 연기됐다. 이를 앞두고 9월부터 일찌 감치 성경암송대회를 위한 위원회 모임을 갖고 있었다. 위원은 김기태, 주윤서, 오안순, 한원열 등이었다. 오안순 권사는 10월 15 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메디컬센터에 입원했다 가 20 일에 퇴원했다. 온 교인들이 간절허 위하여 기도했다. 오 권사는 성경암송 및 퀴즈 대회를 주관할 전도부 부장이기도 했다 11월 15 일 추수감사절 예배와 만찬이 끝난 후 아래층에서 몇 달 간 준비하고 기다리던 성경암송 · 퀴즈대회가 열렸다. 어린이부는 마 태복음에서 몇 절을, 성인과 중 · 고등부는 마태복음 5-7장 또는 기타에서 한 장을 선택 하여 우리말이나 영어로 외웠다. 마태복음 전체를 출제범위로 한 성경퀴즈는 구역팀(팀당 4명) 대항으로 하되 중 · 고 등부와 청년부를 각 1팀으로 인정하여 출전했다. 각 구역장들은 퀴즈대회에 출전할 팀원 4명의 명단을 미리 담임목사께 제출했다. 이날 웃음과 손에 땀을 쥐게 하논 긴장으로 점 철된 열띤 대회 끝에 결과가 다음과 같았다. 성경퀴 Z l등 중 · 고등부(정재호 · 유정란 · 서영호 · 유정용) 4구역(서태호 · 계정숙 · 김어금 · 이혜숙) 성경암송 2등 2구역(양호식 · 이죽희 · 임 영 · 백남향) 3등 l구역(정주섭 · 유정순 · 정재봉) l등 김면옥(마 5장 · 영어) 2등 유정란(마 5장 · 한글) / 장경숙(마 7장 · 영어) 158

용앵쟁 t 현양L 3등 이혜숙(마 5장 · 한글/ 이죽희(마 5, 7장 · 한글) 그 즈음 당회는 연말을 앞두고 서리집사 선정 규정을 확정하여 11월 중에 발표했다. 당회는 서리집사 관련 규정을 정해 11월 1 일에 열린 정기 제직회에 통지했다. 서라집사 임명은 매년초로 한정하지 않고 자격 요건에 해당하는 사람을 언제라도 임명할 수 있도 록 하되 단 소정의 자격 기준에 합당해야 했다. (\",) 본 교회 교인으로 세례 받은 지 1 년 이상 되며 교회 출석과 봉사에 모범 이되는자. (L) 타 교회에서 수년간 집사로 봉직한 자로 본 교회에 전입하겨 교회출석과 봉사에 모범을보이는자 (τ) 본 교회의 교적을 가졌던 자가 재 입교하여 재직이 될 경우는 (L)항 에준한다. 교회는 또 11월22 일 준당회에서 82년도 예산섬의위원으로 김기태, 오순먹, 서광진, 양호식, 이대영, 정주섭, 서태호 씨 등으로 선임하여 29 일 발표했다. @ 1981년 11월 22 일 주일날은 본 교회역사상 펙 의미 깊은 날이었다. 엄마누엘회가 조직된 것이다.(사진 21) 55세 이상 남녀의 모임이었다. 원래는 그해 1 월에 준당회에서 항차 이 모임을 조직하기로 하괴 김 목사를 고문으로 추대했었으나 정 작 실제 구성은 연말에 이뤄졌다. 당시의 본 교회보(敎會혜 이름이기도 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God with us)는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한 명칭이기도 하다. 따라서 임마누엘 회 원들은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구약성도 에녹처럼 강건하게 살면서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희구하는 무리다. 초대 염원진으로는 회장 김숙자 권사,(사진 22) 부회장 오순덕 권λh 서기 오안순 권 새 회계 이봉금 집사 등이 선출됐다. 첫 임원진이 여성일색인 것을 보면, 당일 남자회원 들은 거의 참석치 않았거나 아니면 임원직을 전적으로 사양했거나 긴가민가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후 엄마누엘회는 가장 효율적인 부서의 하나로 급속 159

}료갚 얹 악 듀'\"에 \"'1 。 쿄호 130 념사 사진 21 임마누엘회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진 22 임마누엘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고 김숙자 권사는 2000. 11. 7 소 모형 지성소를 견학하고 있다. 천, 임마누엘 동산에 안장 되시다. Members of the Emmanuel Association of Seniors, at their visit to the model of the sanctuary in the The first president of the Emmanuel Association of P비ladelphia area. Senior Adu1ts, the late Kwansa Sookja Kim (2000.11.7), buried at the Emmanuel Hill church cemet앙y. 발전했고 특히 국내외 명승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거나 교회를 돕기도 하며 보람있 고 활기찬 여생을 보내는 모임의 하나였다. 임마누엘회의 가장 큰 엽적은 아마도 90년대 초 버겐경로학당의 설립일 것이다. 웃 어른들을 공경하는 경로사상 고취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전도 차원에서도 유익한 기구 였다. 임마누엘회는 그후 교회업무의 중요한 부분들을 맡게 되는 등 없어서는 안될 기 관으로 성숙하고 자리잡아가게 된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 등 세계적으로 고령인구가 급 증뺨H 띠라 노인목회가 중시되는 21세기에 그 무게가 더해 갈 것이다. 81 년의 대외챙샤 그해 첫 대외행사로는 3월 29 일, 우리 교회가 입주해있는 복음자유교회의 설립 90주 년 행째1 본 교회 성가대가 초대받。}가서 찬ÖJ한 기록이 있다. 또 7월 11-12 일 이틀간 권즈한인교회에서 대뉴욕지구 교역자회 주관으로 열린 이단 종파비판집회를 탁명환 교쉬국제종교문제연구소 대표 · 현대종교 발행인)가 ‘통일교 또 구원파는 과연 무엇인캐 란 주제로 이끌었다. 탁 교수는 ‘이단의 정체’ (요일 2:18-23/ 요 10:7-12), ‘악령의 정체’ (요일 4:1-6) 등의 제하에 열띤 강연을 펼쳤다. 목숨걸고 이단을 파고드는 연구비평가로 명성을 떨치던 탁 명환 교수는 그후 90년대 상반기 중 소위 ‘말씀의 아버지’ 라 불리던 서울 대성교회의 160

얘1 수 박윤식 목사와 대성교회를 조사한 일로 그 교회 교인에게 피살당했다. 그가 하던 일들을 현재는 아들 탁지원 전도λ까 필생의 과엽으로 잇고 있다. 이무튼 그때 전후나 지금이나 미주 한인사회에서의 이단종파와 이단교리의 준동은 여전하다. 10월 18 일 본 교회 주일예배는 미국인들이 교회당 전체를 사용하는 관계로 포레스트 수 양관에서 야외예배로 드렸다. 이 수양관은 김 목사가 그해 휴가철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5시에 저지시티감리교회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영화 감상회가 있었다. 이 행사에 대한 광고도 3주 째 계속 주보에 게재되어 그 중요성이 강조됐다. ‘한 사람도 빠점없이 참석하재 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은혜로운 영화였고 또 요즘처럼 비디오문화 가 발달한 때가 아니어서 그런 명작을 감상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11월 1 일 저녁에는 뉴욕한성교회에서 노회직영 신학교의 이병규 학장 취임식이 있었 다 1τ 18 일 이틀간은 미주한인장로회 제 14차 노회가 필라델피아 에덴교회에서 개최됐 고 본 교회 김 목사와 김기태 장로가 총대로 참석했다. 이 노회에서 김 목사의 위임 건 이 허락됐고 위임국장으로 한성교회 김권석 목사가 임명됐다. 또 김 장로는 선교부 서기 에 선임됐다 11윌 26 일에는 동노회 북부시찰 연합 추수감사예배가 뉴욕한성교회에서 드려졌다. 예배 후 ‘교회별 특기자랑’ 이 있어서 각 교회에서 2 명씩 선발된 사람들이 출 연했는데, 본 교회에서는 성가대지휘자 김병기 집사가 독장을 하고 백남향 교우가 성경 을 암송했다 기타 참석자들의 찬양순서도 있었다 이 해 성탄축하예배는 12월 20 일에 드렸다. 주보에는 이런 글귀가 실렸다. “에덴동쇼}어1 서 죄로 말미요l아 쫓겨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지금부 터 2천년 전에 하나님의 이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나라 베들레힘 말구유에 탄 생하셨습니다. 우리 다같에 동방박사처럼 경배하러 나갑시다.’ 성탄절 당일 밤에는 오후6시부터 예년처럼 교회학교 유치부, 어린이부, 중 · 고등부, 청년부의 특별순서가 있었다. ~I 해(휩강힘 우리 교회는 80년대 전반까지 임대해 머물던 교회당의 임대주인 복음자유교회 (Evan- 161

gelical Free Church)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특히 연말에는 서로 어울려 친교를 나누곤 했다. 1981년 11월 1 일의 정기 제직회는 남부지역으로 파견 이주케 된 미국인교회 목사를 위해 친교뷔부장 서광진 집써 주관으로 30달러 선에서 선물증정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 성탄절 선불과 겸하여 하기로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 일에는 밤 9시부터 미국인교회와 친교다과회를 가진 후 11시부터 송구영신예배로 드렸다 여전도회가 음식을 준비하고 성가대가 솔로를 준비하 기도 했다. 교인 중 다수는 한복을 입고 나왔다. 또 다음 해를 위한 기도제목을 각자 생 각해 와서 김 목사께 제출했다 김 목사는 그 제목을 놓고 1년간 기도했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1982년 9월쯤 교회당 교회계단 손잡이가 파손돼 본 교회가 미국교회에 100달러를 주기로 제직회에서 가결한 일이 있다. 또 84년 연초에는 본 교회 성가대 가운이 찢어진 일로 인해 미국교회가 반액 부담하겠다는 통보를 해왔으나, 2월 정기제직회에서 그냥 수선하여 쓰기로 한 적도 있다 162

/닝형월 양2 19용1 2 1982년의 동녘이 탔다. 주님의 거룩한 영광과 함께 새해의 밝은 빛이 온 누리와 우리 교회에 환히 비쳐왔 다. 이 해는특히 본교회 장립 열돌을맞는해후 ‘성 장하는 교회’ 란 표어를 내걸었다. 목표는 200명 교우배가운동, 자체성전 건축, 합심기 도의 역λh 성경 읽기와 모이기에 힘쓰기 등이었다. 매 달의 설계를 위한 표제는 1월은 계획, 2윌 기도, 3 윌 섬방, 4월 고난과 부활, 5윌 경로, 6월 말씀, 7윌 수양, 8월 전도, 9월 부흥, 10월 회개, 11월 은혜, 12월 결산 등이었다 1월 3 일에는 선년예배로 드렸고 예배 중 성찬식과 새해 집사 임명식이 거행되고 예배 후에는 공동의회가 열렸다. 공동의회에서 통과된 1982 년도 총예산은 60,660달러로 전년도보다 약 2만여 달러 늘어난 규모 였다. 공동의회 후 전 교우 친목회가 김기태 장로 집에 서 열렸다 새해 신임집사를 위한 환영회도 16 일 최고 참 집사인 정주섭 집사 자택에서 개최됐다 1월중 각 부서의 새 염원 선임에도 바쨌다. 토요일 인 1월 9 일에는 신년도 제직 수양회를 가졌교 둘째 주 일인 10 일에는 성가대원 및 교회학교 교사 임명식이 거행됐다. 성가대 임원들은 23 일 밤 이대영 성가대장 댁에 모여 성가대 연중계획과 10주년 기념음악예배에 관해 논의했다.24 일에는 청년회가 이성의 회장 집에 서 임원회를가졌다. 새해 초부터 김 목사는 화요기도회 때 신약 마태복 음을강의하기 시작했다 1월 당회는 4윌 30 일 주일에 3 명의 안수집사를 선 163

씨‘ #주 ^i\"l ^of-'ë르~ 쿄호 I “ 30 년 A. 출하기로 결정하여 주보에 발표하고 2윌 제직회에 통보했다. 한편 신년도부터 주정헌금 제도를 실시하여 헌금할 때 반드시 재정부가 제공o-}는 교회 지정 봉투에 넣어 하도록 조처했다. 또한 재직회에서는 모든 회계지출을 재정부장3 회계, 부회계의 사인을 받도록 했다 새해 첫 대외행사로는., 1월 10 일 미주한인장로회 동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가 뉴욕 한성교회에서 열려, 본 교회도 5명의 총대가 참석했는데, 오안순 권사가 부회장으로 선 출됐다. 또한 백형무 집사가 필라델피아의 필라장로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케 된 것도 새해 초 희소식이었다. 우리 교회는 그의 개척을 돕느라 지원헌금도 보냈다 그후 그는 목회 자로 자리를 굳혔고? 훗날 90년대에는 대 필라델피아지역 교회협의회 회장도 지낸다 본 교회 집사 출신 목사로는 그밖에도 70년대의 곽영철 목λh 80년대의 이명호 목λh 90년 대 초에 안수 받은 김진양 목사 등이 있다. 5:-빽 새 그해 ‘기도의 달’ 은 2월로 지정됐다. 새해 한 해를 기도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살기 위해 2월12 일부터 14 일까지 포레스트 수양관에서 전 교우 2빅t3일 금식기도회가 열렸다. 당회는 2월 정기 제직회 때 금삭기도 회에 모든 제직이 빠짐없이 참여해 줄 것을 요망했다. 2월 한달 간 주보 교회소식란에는 계속 다음과 같은 소중한 말씀과 교훈이 실렸다. “기도는 신앙의 호흡입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은 사료엔 것처럼 기도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모이면 함께 기도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표준인 주기도문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당회와 제직회, 성가대, 여전도회, 교회학교, 청년회, 임마누엘회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 니다 3월은 심방의 달이었다 10 일부터 춘기 대심방이 시작됐다 주보에는 이런 문구가 떠 올랐다. “주의 종들의 닿는 발걸음마다 그 가정에 은혜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월 13 일엔 구역장 및 권찰 수양회가 개최됐다. 강사는 고용수 목사 후임자로 새로 뉴욕한민교회에 부임한 김정국 목사였다 4월은 고난과 부활을 명상하는 달이었다. 종려주일인 4월 4 일 첫 주일 주보에는 “예 164

예수 닮기 원하는 사혐듭 198 2.년도 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씨w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삶이 있습니다 E 란 말씀이 적혔다. 당일 예배 중 성찬식이 거행됐다; 9 일에는 ‘7h1J언 기도회’ 를 제2구 냉b 역이 주최해 전 구역 연합으로 양호식 집사 댁에서 가졌다. 따 킹 한편 당회는 4월부터 화요기도회를 목요일 8시로 옮겼다. 그 즈음 기도회 때 김 목사 # 의 마태복음 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 8 2.년도 7낸의 딴 그해 5월은 예년과 같이 가정의 달로 지켜졌다. 주보에도 관련 메시지가 기재됐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정은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떠나지 않 습니다. 아무리 쫓기는 이민가정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미가 있으면 그 가정에 기쁨과 희망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5월 첫 주일인 2일은 어린이주일로 주윤서 전도사가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마 18:1- 5)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예배 후에는 어린이파티도 열렸다. 어머니날인 5월 7일에는 55세 이상 부모님들로 구성된 임마누엘회가 워싱턴 관광을 다녀왔다. 경로관광 차원에 서였다. 또 10 일에는 부모님주일로 지키면서 중 · 고등부가 꽃을, 여전도회가 50살 이상 되는 분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해 드렸다. 5월 30 일 주일은 ‘가정의 달’ 의 피크를 장식하는 즐거운 야외예배를 드렸다;11시부 터 예배와 점심, 게임과 레크리에이션 등으로 신나게 진행됐다. 이 야외예배를 위해 여 러분이 수고했고 홍무승 집사는 삼푸 두 박스를 선물로 헌납했다. 션켠퀴즈대최 · 싼송샤 대회 전년도(81년)10월에 있은 성경임송 · 퀴즈대회에서 온 교회가 큰 ‘재미’ 를 보았는지, 이 해도 일찌감치 봄철인 4월 18 일에 성경퀴즈대회를 가졌다. 범위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였고 지난 번 팀 대항전괴는 달리 개인전으로 진행됐다. 심사위원은 주윤서 전도 새 김기태 장료 오안순 권사였다;4월 25 일 예배 도혐1 거행된 시상식에서 %떨 받은 사람들은다음과같다. 1.65

듀 A -IA: I ;‘ i :~2쿄호 I 30 년\"'. 0 l등 백남향, 2등 유정심, 3등 유정란, 장려상 김지란 이성의. 6월 첫 주일인 6 일에는 ‘가정의 달’ 의 연장행사라 할 수 있는 제 2회 가족창대회가 청년회 주최로열렸다. 지정곡은 씩씩하고 힘찬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개편찬송가 438생, 또는 부드럽 고 정다운 ‘샤론의 꽃 예수’ (새찬송가 601쟁이었고, 지유곡도 한 곡씩 준비해야 했다 우리 교회는 찬송기를 여러 번 바꾸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있던 교우들은 대부분 개편 찬송가는 물론 합동찬송개 새찬송가를 소지하고 있었다. 1980년에 이미 개편찬송가로 통일했지만, ‘새찬송캐 에 았던 좋은 찬송가에 대한 미련은 아직 남아있었고 활용했다. 심사위원은 주윤서 전도새 김병기 집샤 박병연 선생이었고 시상종목은 사랑상 믿음 상 소망상, 희망상 등이었다. ‘소망’ 과 ‘희망’ 은 같은 뜻인데 두 가지가 다 들어가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참가팀 12가정 중에서 입상한 가정은 다음과 같았다. 사랑상 김성천 집사 가정 믿음상 서광진 집사 가정 소망상 양호석 집사 가정 ε뻐상 고수광 집사 가정 앓그X 쐐 1 IB -\"1 6월 20 일 주일 예배 때는 과거 한국에서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로 명성을 떨치던 곽 규석 장로가 초청되어 간증집회를 이끌었다. 당초 간증설교 제목은 ‘나는 왜 교회에 돌 아왔는개’ 로 예상되었는데 당일 실제 제목은 ‘감사승보 생활’ (살후 5: 16-18)이었다. 자신이 과거 생활을 청산하고 회개한 과정을 감동깊이 엮어간 그의 설교는 눈불과 함 께 틈날 때마다 깔깔 웃음을 선사능}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국 연예인교회의 창설 에도 갚이 관여 했었다. 그의 코미디 단짝 구봉서 장로도 연예인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봉 사했다. 곽 장로는 후라이보이답게 파란 잦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았고 음악에도 재간이 많아 LA에서 미국 교향악단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 그는 특히 80년대 초 뉴욕의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어려운 재정형편도 마다 않고 영성하고 비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직접 취재도 하고 녹화와 방영 까지 관여하면서 1 인 다역을 맡아 땀흘리고 애도 많이 태웠다. 초기의 그런 수고가 훗날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이 크게 자라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66

C쩌수 닮기 원하는 사창들 곽 장로는 훗날 신혁수업 후 목사가 되어 남침례교(SBC) 뉴욕지방회에 속한 한마음 침례교회를 세우고 원로목사가 되기까지 봉직했다. 후라이보이 명성 덕에 국내외를 누비 며 전세계 한인사회에 초청을 받아 다녔고 어디서든 환영을 받던 그는 90년대 말 작고 했다 o~ 릎과 수앤 교회학교 어린이부 수양회가 7월 23 일부터 25 일까지 포코노에서 개최됐다. 전통적으 얘m 로 금요일에 출발하여 주일날 저녁에 도착하면 부모님들이 픽업하여 데려가는 것이 상 꾀ι 례였다. 김 목사도 다녀왔고, 주 전도사와 교사 4명이 수고를 했고, 여러 교우들이 찬조금 웰 으로도왔다. 맨 킬 중 · 고등부도 같은 포코노에서 7월 30 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렸고 학생 14명, 교역자 때 2명이 참가했다. £ 청년부는 8월 19 일부터 22 일까지 롱아일랜드에서 가졌다. 청년부는 또 월 2회 성경 공부 모임을 갖기로 했다. 무더위 때문에 수양회 기간인 8월 셋째 주까지 아래층에서 예 배를 드렸다. 성경지도는 김에스더 사모가 맡았다. 그해 8월 14 일부터 15 일 이틀간은 본 교회 역사상 첫 번째로 전교인 하기수련회를 ‘주님 안에서’ 란 주제로 포코노수햄에서 가졌다. 준비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지도: 김창길 대회장: 김성천 준비위원장 : 흥무승 총무: 서광진 서기 : 이대영 회계 : 한원열 예배 : 양호식 김성천 안내: 서태호조영진 체육: 이태호 노래·율동: 주윤서 김지란 교육: 서태호주윤서 8월 14일 토요일 일정은 교회에 집합하여 현지로 출발, 도착한 뒤 개회예배-조장회의­ 점심식샤숙소배정 및 자유시 간저녁식샤가스펠송저녁집회-기도시간 등으로 진행됐다. 167

듀;;;:-1\", 1 장로교호 130 넘^~ 15 일은 새벽기도회-조깅과 명상-아침식사i조장회의-휴식-가스펠송-특강 등으로 보냈 다. 주일예배도 수련회장소에서 드렸고1 식사는 각 가정별로 준비했다. 점섬식사 후에는 자연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다가 건강관리 특강으로 최도현 집사 에게 단식법을 배운 후 저녁식사와 폐회 예배 후 귀가했다. 수련회 기간 중 즐겨 부른 노래 하나가 그 즈음 한국 교계에서 대유행하던 ‘사랑’ 이 었다. ‘사량은 언제나 오래 참고’ 로 시작된 정두영 작곡의 노래였다. 그 무렵, 매 주일 예배 30분전 성경공부와 함께 복음성가를 부르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82년 9월 5 일. 이날은 80년대 본 교회의 가장 뜻갚은 날의 하나인 창립 10주년 기념일로 지켰다. 온갖 풍상과 고초를 겪더니 결국 열 고개 넘어 프리틴(preteen)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 다 이 어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아니리요! 참으로 감격의 시간들이었다 10주년 기념행사 준비는 전년도(81년) 12월 정기 재직회 때부터 미리 시작됐다. 즉 담임목사 위임식을 비롯한 기념행사를 논의하고 10주년 행사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 한 것이었다 위원장 김기태, 위원 서광진, 이대영, 양호식, 오안순 등이었다. 8월에 들어서자 열 돌 준비로 한층 더 바쁘게 움직였다. 당초 준비위원장이던 김기태 장로 대신 8월 제직회에서 김성천 집사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위원장: 김성천, 안내위원 : 오순덕 오안순 원문팔 서태호 고수광 8월 29 일에는 준비위원으로 한원열, 홍무승 두 집사가 추가 임명됐고, 당일 주교실에 사진 23 전교우(창립 10 주년 기념) Church members (Celebration of the tenth anniversary of the chω:ch) 168

t 양쟁:경i 서 새 임직자들과 준비위원들의 연석회의가 있었다. 10주년 행사 신문광고가 복음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문 등에 게재됐고 기독 교텔레비전뉴스와 라디오방송뉴스에도 소식을 내 보냈다. 또 10주년 행사 초대장이 각 가정과 외부인사들에게 발송됐다. 그 주 구역예배는 10주년 행사 준비기도회와 겸하여 목요일 8λ130분에 본당에서 연합으로 드렸다.(사진 23) 기념행사는 기념예배와 김창길 목사 위임식, 네 집사의 안수식, 그리고 23 일부터 열 린 한진관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 등으로 이어졌다. 기념행사 당일 여러 행사 후 설립 당시부터 계속 충성해온 오안순 권λh 양호식 집사 가 10주년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창립 10주년 기념예배(주요순서) 집 례자 김칭길 목사 다 같이 입 례송 2 장(전능왕오셔서) 다 같이 200 죠J-(시온성과 같은 교회) 찬 λ」 이성의 목사 기 { 빌 쩌페 윤명호 목사 성켜 도C그 (성령의 공동체) 성가대 찬。 노정선목사 보독 안창의목사 。양 정주섭집사 설교 현금기도 교회연혁 낭독 위임국장 김권석 목사가 주례한 목사위임식은 이렇게 진행됐다. 찬 i 까‘ 387장(부름 받아 나선 이 붐) 다같이 ζ그 소개 위임국장 서약 [김권석 위임국장은 노회법에 따라 김창길 목사에 게, 그리고 교우훨1 게 각각 다음과 같은 서 ιt을 하게 했다. 대답은 ‘아멘’ 으로 했다.J 목사에게 • 그대가 뉴져지 한인장로교회의 목사로서 위입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 169

펀&장~ #주 Z에 \"'1 。 동.iil호 130 념 ^t 하여 헌신하그l자하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으로 확신하십니까? • 그대는 본교회를 담입하여 목사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서약하십니까? • 그대는 본 교회의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올바린l 교육하고 교회의 화 평을 도모하며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노력하기로 서약하십니까? 교우들에게 • 본 교회 교우 여러분은 김창길 목사를 위임목사로 받기로 서약합니까? • 교우 여러분은 목사의 교훈하는 진리를 받으며 치리에 복종하고 목사가 수고 할 때 위로하고 협력하기로 서약합니까? • 교우 여러분은 그가 본교회 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목회생활상 지징이 없도록 그 비용을 전답하기로 서약하십니까? 기도 위임국장 선포 [김 위임국장은 계속하여 다음 위임선포를 했다~] 나는 미주한인장로회 동부노회 권위로 김창길 목사를 뉴저지한인장로교회의 위입목사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아멘 권면 위임받은목사에게 김정국목사 지페자 교우들에게 박석린목사 닙깨 집사임직 당회장김창길목사 캐지 사 ‘-••• •••~ • • 당회장 깨「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우리는 지금 서광진 씨를 집사로, 정주섭 씨를 집사로, 이대영 씨를 집사로, 양호식 씨를 집사로 임직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는 영광어요 임직받을 분들에게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 합니다. 소 ••• 집례자 개 김병기집사 찬 양 [당회장 김창길 목사는 임직 받는 4명의 집사들에게 다음 서약을 시 서 약 켰다. 대답은 오른손을 들고 ‘아멘’ 으로 했다~] 170

집시에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택함을 입었으며 교우들의 신 임을 받아 안수집사로 세움을 받게 되는 이 시간 경건과 전실함으로 하나님과 교 회 앞에 서 QLf하기 바랍니다. •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 의 법칙으로 믿고 따르기로 서약합니까? • 본 장로회 신조와 요리문답과 교리는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기로 서익t합니까? •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알고 승락합니까? • 뉴저지 한인장로교회의 안수집사 직분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진 실한 마음으로 본직을 힘써 봉사하기로 서 ιr합니깨 • 본 교회의 화평과 연합과 성결호띨 위하여 충성하기로 서약합니까? 안수기도안수위원 당회장 악수례안수위원 임직자 선 포 [당회장김목사는이어서다음과같이선포했다.] 본 뉴저지 한인장로교회 당회 ε엔 나는 지금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직책과 권 위를 가지고 서광진, 정주섭, 이대영, 양호식 씨가 미주한인장로회 뉴저지한인장로 교회 안수집사 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아멘. 써권 면 집 게 임인환목사 박희소목사 교우들 뼈 서광진집사 교회가임직받는이에게 끓답 사 기념품 임직받는이가교회에게 임직받는이가목사에게 10주년 공로 표창 및 임직패 임직패 서광진 정주섭 이대영 양호식 10주년 공로패 오요란양호식 창립 10주년 축사 최이열목사 인사및광고 10주년 준비위원장 찬송 198장(내 주의 나라와) 도즈도 c: 김용주목사 • 김목사의 위임을 축하하기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이영숙 증경 171

;::.;aE르 듀처:0<., 。동교호 l 총무는 이런 축시를 보내왔다 (‘김 창길 목사 위임 축하’를 소재로 행시를 지은 것이다. 죄측에서부터 아래로 읽게 되어 있다.)(표 21) 金창길목사위임축하 9월 12 일 주보 위에는 이렇게 기재돼 있 보조진자랑임무복늘 었다 다주리장겸한에은에 “창립 10주년 기념예배 및 목사위임, 귀축생의손오충끊서 집사 안수식을 성대히 올리게 해 주신 주 한복명뒤인늘성임내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열심히 성가연습 사으이따내부하없리 을 한 성가대원들, 밤새워 강단 벽의 글씨 사로신라로터면이리 (표 21) 축시 를 쓰고 붙인 청년회원들, 밤잠을 주무시 지 못하고 음식을 장만한 여전도회원들, 이번 행사를 주관하고 이끌어 가신 10주년 준비위원들, 그밖에 수고하신 여러분 모두께 감사를드립니다 기념 행사의 성과로는, 하나님께 영광도 돌렸지만 대외적으로도 이런 열매가 있었다. “지난 주간 뉴욕과 뉴저지의 교회와 교인들에게서 계속 칭찬의 전화가 걸려왔 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저력을 발견하고 보여주게 되어 감사했습 니다” 과거 한때는 흠도 있었고 ‘목자를 마구 갈아치우는 교회’ 로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 열 살이 되면서 칭찬 받는 교회가 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남의 몸 된 교회 로성숙한것이다. 이는, 온교회가성령 안에서 한마음한뜻이 되어 정성껏 참여한결과였다. 교회안팎 으로 기쁨과 감λL 놀라움과 흥분이 넘쳐흘렀다. 하나님도 갓 열살 짜리를 내려다보시며 웃으시며 흐뭇해 하시고 대견해 하시는 듯 했다. 10 &행 챔쇄 9월 23 일부터 26 일까지 창립 10주년 기념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강사는 예정대로 권즈한인교회의 한진관 목사였다 집회기간 동안 한목사는 ‘하나님의 사랑’ (롬 5:5-13), ‘경건의 훈련’ (고전 9:23-27), ‘청지기의 사명’ 등으로 말씀을 전했다.26 일 새벽기도회에는 인수기도도 진행됐다.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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