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i 수 빼댄 서새@잭깊£ 이희철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시작된 것은 팍 고무적이라 할 수 있는 얼이다. 그것은 당시 많은 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다면 번졌다고 여길 수도 있을 베델 성서연구이다. 그림 이 포함된 별도 교재를 가지고 선구약으로 나뉘어 성경을 체계있게 배우는 시스템이다. 제직과 일반 교인은 물론 이웃들도 임의로 참여하도록 문을 열어 놓고 연구생을 모집 하였다. 그러나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냉핵회 냥서 종 1974년도에도 청년회의 발족을 위하여 위원을 선정하고 준비하였었다. 이것은 여전 도회와 동시 발단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전도회는 발기 총회가 당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임원도 선출하여 정식으로 7뿜되었다 그러나 청년회는 나이 구분에 펙 애로가 많 았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고 발족된 근거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기존했던 것은 사실로 알려지고있다. 결국 ‘청년회의 창립’ 이라는 용어를 써서 청년회도 현실화하기에 이른다. 나이 많은 이들은 빼기로 했다. ‘헤쳐 모여’ 식으로 일단 기존 청년회를 해체하고 재편성하되, 대상 지를 고등학교 졸업생 이상 25세 이하의 미혼 남녀로 범위를 좁혔다. 그렇게 해서 효과 의 극대화를 꾀했다.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이 모여(어느 잡기에 의하면 8명이 모였다고 되어 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신임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김면오 부회장 김혜옥 서기 조명순 회계 원혜숙 부회계 권희종 1976년 6월 27일부터 청년회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10 명이 출석하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마치고 나서 점섬 식사 후 헤어졌다. 71 쐐증 따.5....$ te C t:J! 이희철 목사 부임을 계기로, 교회 주보 제작부터 종전 방식에서 일신했다. 73
;ι 를 .l((c;. \\l:\" #주원 ;<;1 。 똥..i:il호 130 느\"^. 표지에 성화가 든 주보용지를 시중에서 구입해 본문을 타이핑하고 복사해서 만들었 다 따로 예산이 없었으나 예비비에서 서무비로 전용하여 쓰도록 허락됐다. 예배순서만 덜렁 들어가 있던 이전 주보보다 내용도 충실해졌다. 예배순서, 교회소식, 지난주 통계 등이 게재되어 제법 주보다운 변모를 갖추게 됐다. 예배시간도 재조정 됐다. 미국교회당을 빌려쓰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쓰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다0.7월 셋째주일부터 8월 말까지는 오전 10시 30분부터 예배를 드리는 등 수시로 형편에 맞추어야 했다. 그 즈음은 창립 네 돌을 앞둔 때였다. 그렇긴 해도 그다지 기쁜 마음들이 아니었다. 수난과 격동의 나날 속에 찢길 대로 찢긴 심령들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아 빽적지근 한잔칫.AJ을차렬손가 다음해 5주년 때는 그래도 보암직한 행사를 가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고 이 번만은 대내적으로 조출하게 지내기로 했다0.8월 29 일 주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온 교 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식사 경비는 제직들이 부담하였다 당시 한인교회들의 특정이라 할만한 것이 잦은 야외예배였다. 식구가 단출하기도 하 려니와, 한국에서 찌든 가난의 때를 여기서 벗겨본다든지 자연을 맘껏 만끽한다는, 보이 지 않는 자긍심과 우리만의 시간으로 가꿔보고 느껴보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도 작용했 을 것이다. 본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주 야외예배를 가졌다. 이웃 교회와의 유대 또한 굳어져 갔다. 몇 안 되는 한인교회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 며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그해 10월 17일에는 새로 부임한 이희철 목사의 집례로 성찬 · 성례식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집례를 도울 장로가 한 사람도 없어, 이웃 뉴저지 연합장로교회의 이현호 장로를 초빙하여 도움을 받았대이 일을 계기로 이 장로가 본 교회로 옮겨오기에 이른다). 또 이웃 제일교회의 성전 헌당식에 20달러 상당의 화환을 보내고, 많은 성도들이 헌 당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축하해줄 것을 광고하기도 했다. 이희철 목사가 목회자로 부임 하고 나서는 서서히 중홍{中興 · 쇠하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의 물결을 타는 것이 역력했다. 교회 재정에서 50불을 지원해 치러진 성가대 주최 교회 내 탁구대회는 성가대원들을 결속시킨 것은 물론 온 교우들의 화합의 장이 되고도 남았다. 청년회도 여러 행사를 통 해 활성화되어갔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제 위치를 지키고 교회에서 생활하며 교회를 지 74
C핵수 켜나간다는 것은 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효 iff 샌 추수감사절에는 감사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 학생들의 찬양순서 등 축하행사를 가졌 다. 그리고는 저녁식사를 전 교우들이 한 자리에서 니눈 뒤, 전례 없이 “성지순례” 슬라 이드를관람하였다. 연말에는 성가대를 위하여 200볼, 주일학교에 150불을 지급하여 자축하게 했다. 이 런 작은 일들이 촉매가 되어 교회 부서 부서마다 활기가 념쳐 보였다. 성탄축하 연합예배 입장 사회자,성가대 사회자 예배의부름 다같이 김용주목사 찬송 기뻐라 주오셨다 송기완집사 연합성가대 기도 누가복음 1 : 26-38 이희철목사 설교자 성경 봉독 ’ ‘ 마리아의 신앙 헌금 위원 찬 양 오경숙선생 오거룩한밤 곽영철집사 설교 임형재집사 천사찬송하기를 다같이 기도 박재영목사 연합성가대 헌금 헌그p 소ζ그 헌금 기도 광고 찬송 죽도 후주 성가대지휘: 심상선 집새단투: 이영주 선생 안내위원: 차종철, 윤석주 집사 헌금위원: 꽉영철, 조풍작, 송철호, 김정권, 김순혜 집사 표 9 성탄축하연합 예배 75
\" ..류처 ;ζl 。 독e프쿄호 l \"'. 그해 연말에는 이성희 집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예산위원회(위원. 회계2 인 · 서광진 · 김기태 · 곽영철 집λ니를 조직하여 차고 넙치는 예산을 짜도록 했고, 이듬해 3월에는 인 전 숭의 감리교회를 시무히는 이호문 목사를 초청하여 대 부흥회를 갖기로 구상해 놓았다. 성탄절에는 선불교환 등 축하행사 일체를 청년회에 일임했다. 왜 진작 그런 기회를 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것일까 의구심이 갈 정도로 그들은 은혜롭게 해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기로, 그해 겨울은 다른 해 겨울 보다 덜 추웠던 것 같았다. 특 히 더 훈훈하고 인상적인 모임으로 성탄축하 연합예배를 손꼽을 수 있다. 뉴저지 한인기 독교평신도연합회 주최로 12윌 25 일 7시 30분 뉴져지제일교회에서 드려졌다. 이 행사에 서 본 교회 담임 이희철 목사가 설교를 맡아 파리아의 신앙’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했다~(표 9) 76
체석웰션화 1977년도 첫 정기 제직회가 1월 9 일 본 교회당 회의 애 실에서 열렸다. 민 립 이희철 목사는 새해 목회방침 및 교회 운영에 대하 g“ 여 설명했다. 이어서, 종전에 제직회 임원을 제직회에 빠 서 선출했던 것과 달리 담임목사가 임명하였다. 킹 캘 <서리집시-> 남 : 원윤팔 서굉진 차종철 곽영철 이성희 김사현 김기태 이준무 강정구 양호식 이성남 공유성 조광기 홍무승 이정호 유병국(16명) 여 : 오안순 전인호 박경수 김어금 유민자 윤정자 김명순 (7명) 제직회장: 이희철목사 서 기: 김기태집사 회 계: 양호식집사 부회 계: 김정구집사 전도부장: 이준무집사 봉사부장: 김명순집사 동원부장: 조광기집사 친교부장: 박경수집사 재정부장: 원윤팔집사 * 차후 체육회장 이재실 씨를 임명하고 체육회를 담 임목사 직속으로 두었다. 〈구역편성과구역장〉 제 1구역장:이애순 제 2구역장:오안순 제 3구역장:김어금 제 4구역장:이혜숙 제 5구역장:유충자 이렇게 제직, 제직회 임원, 부서장; 구역장을 임명하
à I- E르 듀처 ^I o .o-a-쿄호 l 고 첫 달이 가기 전 1월 18 일(회-), 19 일(수) 양일간 저녁 8 시 30분에 모여 약 두 시간씩 제직수련회를 가졌다. 처음 있는 일이다. 강사는 이희철 목새 박재영 목새뉴져지저l 일한 인교회), 이현호 장뢰뉴져지연합장로교회)가 맡았다.(표 10) ’77년도 제 1회 제직수련회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표 10 표어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 : 10) 도-「EL-7:4「 교회 성 ε배 따른 직원의 기능화와 지질 향상 강사 박재영 목사 (제일교회 담입) 이현호 장로 (연합장로교회시무) 이희철 목사 (본 교회 담임) 일시 18 일 (화) 19일 (수) 8 : 30 개회기도회 개회기도회 사회 : 곽영철 오후 기도:이성남 사회 : 오요원 1 기도 : 김어금 진텅 : 550 효범 : 458 8 : 50 강의 : 박재영목사 강의 : 이현호장로 (교민 사회에서의 교회 사명) (미국 연합장로교의 헌법 해설) 9 : 30 -+9- λ-「1 유 λ-기1 9 : 40 금년 목회 계획 각부별 행사계획안작성 이희철목사 각부부장주관 10 : 20 폐회 평가회 이목사 사회 이희철 목사 기록 : 김기태 집사 펴1 회 : 이 목사 특히 ‘미국 연합 장로교회 헌법 해설’ 을 맡아 강의한 이현호 장로는 18쪽에 달하는 78
αf 수 교재를 준비하여 제직들에게 나눠주고 열강을 했다. 그 교재 내용 중 ‘교회’ 라는 부분을 여기에 싣는다. 교회 미국 연합장로교 헌법이나 우리 한국 교단의 헌법을 보면 원래 “교회”란 하나 님께서 만민 중에서 자기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한한 은혜와 지혜를 내 심을 알 수 있으며 이 “무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한다. 즉, 이 “무리”가 하나님 의 “교회”요,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로서 이를 가르켜 “거룩한 교회” 라고한다. 교회의종류 그러나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라 한다. “무형교 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요, “유형교회”는 전세계에 산재한 교회이다.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로서 “그리스도인(크리 스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세계의 많은 사료띨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교제하기 어려우므로 여러 곳에 “지 교회”를 설립하여 갈라디아서 l장 22절에 있는 말씁과 계시록 4장 2C 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 무리와 그 자녀들이 저희들의 바리는 대로 일정한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러며 성결하게 생활하며 그리스도 의 나라를 확장키 위하여 성경의 교훈과 교회 정치에 의하여 공동예배로 모이며 이것을 “지 교회”라고도 하고 ‘지 교회의 집회”라고 효따. 지 교회의 설립 이상과 같이 공동예배로 모이는 “기도소”에 입교인 15인 이 Sl이 있어 지교회를 설립코자 하면 그 지역의 “노회”에 청원하여 승인을 받아 설립을 한다. 그것을 ‘지 교회”라 하며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를 “미 조직 교회”라고 한다. (후략) @짜얘 선년을 맞이하여 여전도회도 새로운 각오로 새 일꾼을 고르고 이 중흥의 물결에 올랐다 79
회 장 오안순 부 회 장 김어금 서 기 이애순 회 계 김동희 봉사부장 OJ광자앙) 해 훨얻 채훔¢생핵! 난κ~ -tJ-캘책 쪽 4 당시에는 미 동부 쪽 한인교회들 전체가 영적으로 불붙는 양상을 보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 동부노회가 주최하고 뉴욕교협이 후원하는 대규모 전도대회 가 1977년 3월 4 일 ~6 일에 한경직 목시를 강사로 성대하게 열렸다. 장소는 플러싱에 있 는뉴욕연합장로교회였다. 표어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로내걸었다 미 동부지역 교회들이 총망라해 참석했다해도과언이 아니다 순서를맡아참여한지 교회만 봐도 집회규모와 출석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그 시절에는 어떤 교 회들이 있었으며 목회자들은 누구였는지 한번 되새겨 보는 의미에서 당시 순서를 맡은 교회(목회지}들을 열거해 본다. 3월 4일 (금) 저녁 7시 30분 장석진 목사 뉴저지 한인 성결교회 김규환 장로 라더포드 한인 장로교회 정달빈 목사 스탠튼 아일랜드 한인교회 홍대윤 장로 뉴욕 동부교회 선윤경 목사 대 뉴욕 한인 교역자회 회장 최원범 집사 전도대회 독창자 3월 5 일 (퇴 저녁 7시 30분 김용주 목사 라더포드 한인 장로교회 이은수 목사 부롱스 동산 교회 27) 양호식 집사(현재 장로)의 부인. 현 시무권사. 이하 ‘박광자’ 로 표기. 80
t 영 γ? 현 장영춘 목사 Queens 장로교회 박재영 목사 뉴저지 제일 한인 교회 유태영 목사 대 뉴욕 한인 교회 협의회장 3월 6일 (주일) 오후 3시 30분 검권석 목사 미주 동부 노회장 안장의 목사 Queens 중앙교회 정영규 목사 뉴욕 제일 장로교회 장승칠 목사 뉴욕 선교교회 염석규장로 한민교회 한진관 목사 Queens 한인교회 3월 6 일 (주일) 오후 8시 박희소 목사 뉴욕 동부교회 이희철 목사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김병서 목사 후라싱 한인 제일 교회 김해종 목사 뉴저지 연합교회 서상복 장로 Queens 한인교회 지관순 · 백예원 목사 뉴욕 연합 장로교회 얘 서I 댄뼈 1977년 1윌 18, 19 일 이틀간 본 교회에서 있은 제1회 제직수련회 때 ‘미국 연합장로 교회 헌볍 해설’ 을 맡아 강의하였던 강사 이현호 장로28)는 우라 교회 ‘초기 제 3번 장 로’ 였다. 그는 1977년 3월 6 일 정기 제직회에 ‘이명증서’ 를 내놓았다. 그 당시 이명증서 를 챙겨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기야 헌법을 해설하고 강의까지 할수있었음에랴 그날 제직회는 일사천리로 이렇게 결의하였다. 28) 이현호. ‘초기 제 3 번 장로’ 1979년 5월 23 일 백주에 본인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괴한에게 피격, 소 천했다. 81
〈다음 주일인 3월 13일에는 공동의회 소집을 광고하고, 그 다음주 3월 20일에는 공동의회를 열어 서무장로 투표를 하고, 4월 3일 주일 에는 사무장로 취임식을 행한다.) 아무튼, 일단은 저l 직회에서 정한 바대로 3월 20 일 오후 2시 본당 예배실에서 공동의 회가 열렸다. 세례교인 32명이 출석했다. 무기명 투표를 실시한 결과 개可) 31표, 부{否) 1표로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 득표후 이현호 장로가 본 교회 시무장로로 당선되었음을 제직회장 이희철 목사가 선언했다 여기까지는 순항이라면 순항이었다 그러나 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나 할까. 정작 법을 익히 알만도 하련만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시무장로를 서l우려면 사전에 노회의 승 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본 교회는 아직 노회에 가입되어 있지 아니한 실정인지라 노 회의 사전 허락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를 모르고 이현호 장로를 본 교회 시무장로로 허 락해 줄 것을 품신하였으니, 노회에서 승인해 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었다. 이현호 장로는 본 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다 른 장로가 없는 터라 그가 주일 대 예배 대표기도를 줄곧 맡아했다. !;; *갱 -‘’ ‘? 전기한 바와 같이 4주년 되던 해에는 별 기념행사가 없었으나; 5년째에는 좀더 각성 하고 은혜가 충만한 행사들을 대대적으로 준비해 보자고 입을 모아왔었다. 그리하여 연 초부터 매주 주보 상단에 창립 5주년을 영광스럽게 라는 표어를 네모 속에 담아 올렸 을 정도였다. 전년도 말 계획했던 대부흥회도 ‘창립 5주년 기념성회’ 라고 이름을 붙였 다 성회기간은 1977년 3월 24~27일 나흘간이었다. 표어는 “지금은 은혜를 받을만한 때입고후 6:2)\" , 강사는 이호문 목새인천숭의감리교회)였다(사진 11) 당시는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 히면 교역지들은 순서 맡기에 바쨌교 주변지역 교인들은 새떼처럼 몰려다녔다. 성가대들도 교대로 찾아가서 찬양을 했다. 이 성회에서 는 라더포드 장로교회 성가대와 뉴욕 컨즈 장로교회 성가대가 수고해 주었다. 이 성회에 순서를 맡았던 이들을 여기 열거한다. 김용주목사 라더포드장로교회시무 김해종목사 뉴저지 연합감리교회 시무 장석진목사 뉴저지 한인 성결교회 시무 82
용양평 사진 11. (좌)창립 5주년 기념성회 (우)기념성회 강사 이호문 목사 ηle picture of congregation members (left) and the guest speaker, Rev.Homoon Lee(right), after having the revival worship in commεmorating the 5th anniversary of the church 김대업목사 뉴저지 중앙교회 협동목사 김권석목사 한민교회 시무(미주동부노회 노회장) 박희소목사 동부교회시무 장영춘목사 권즈장로교회시무 박재영목사 뉴저지제일장로교회시무 김규환장로 라더포드장로교회 이동필장로 뉴저지제일장로교회 임수식장로 한민교회 이현호장로 뉴저지한인장로교회 “ 그 즈음 건물임대주인 미국 개혁교회로부터 뜻밖의 서면 한 통을 받았다. 교회를 옮겨 나가달라는 것이다. 까닭인 즉 교회당 주변을 너저분하게 쓰고 있고 아 이들이 교회당에서 뛰놀며, (한식)냄새가 난다는 것 등이었다. 서자의 설움이랄까 남의 집 셋방살이의 서글픔이었다. 하는 수 없이 1977년 4월 17일 임시 제직회를 열고 다른 예매처를 얻기 위한 위원으로 이희철 목새 이현호 장로 김기태 집새 양호식 집새 김정 구 집사 등을 뽑아 교회당 물색을 일임했다. 세를 살기에, 맘껏 활동을 할 수 없고 성탄절기 같은 때에는 우선 순위가 임차인이 아닌 임대주에게 있는 터여서 마음놓고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안 그래도 계절마다 시간을 조절해야 하고 스케줄을 수시로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 가운데 걱정이 태산이었 다. 기도 밖에는 별 도리가 없어 이희철 목사는 간단없는 기도를 회중에게 요청했다. 83
^-I-i:등 ‘ ‘j &ιp‘、‘ “ιι@’ 느주;에 ;l 。 *i고호 130 녕 Af 위원회에 일임된 새 장소로는 저지 시티의 성공회 성당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어 쩌면 너무 조급히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끝내 버틴다는 것은 좀 우스팡스러운 일이나, 서둘지 말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숙제로 남겨둔 것이다. 그라나 ‘숙재’ 에는 유효기간이 따랐다. 위원들이 장소 건물을 물색한 결과를 갖고 공동의회를 모였다. 그해는 임시공동의회를 자주 모인 진기록을 낳기도 했다~ 34명이 출석한 공동의 회에서 이 현호 장로가 그간의 배경 및 교회의 위치, 건물의 모양 등을 설명하고 저지시 타 성공회 건물로 이전할 의사를 물으니 34명 전원이 손을 들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그렇다고 바로 교회가 이전되는 것은 아니었다. g 뽑볍 뼈흥*핸새 4월의 본 대 심방도 끝이 났다. 은혜를 안겨주고 복을 맘껏 빌어준 대 심방이었다. 5월 1 일을 어린이 주일(사진 11)로 지키며, 이 목사는 자녀 교육에 대한 설교를 한다. 성경 본문은 녹 2 : 41 - 51절, 제목은 ‘성전에 있는 소년 예수’ 이었다. 그날 주보에는 교회소식 1항에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를 믿음과 말씀으로 양육 하여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합시다.’ 라고 타이핑 되어 있다 5월은 자연이 푸르름을 더해가며 각종 체육행사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매주 종목별로 행사가 다채롭다. 체력도 증진시키고 이웃과의 유대를 다지며 성도의 참된 교제를 갖는, 펙 유익한기회다. 사진 끼 해맑은 5월의 어린이들 Van Cortland Park, Bronx, NY The Children’ sDayinMay 84
ι 양4‘ 1) Little 야구 6윌7일 · 토요일) 홍무승집사가야구팀을조직,출전 2)N. J. 한인회 배구대회 6월 14일 · 토요일)에서 1등. Warinanco Park, Elizabeth 3). 뉴저지 제일교회 탁구대회 6월21 일 · 토요일) 1등 Stateα11Iege 강당 4) 한국일보사주최축구대회 6월 28 일 · 토요일) 그 외에 족구 대회도 있었다. 교회간 체육활동이 활발하고 성과도 좋아 이를 진흥키 위한 체육위원회를 신설하여 관련 활동 전체를 맡게 했다. 곽영철 양호식 이기석 이주남 치종철 김정구 공유성 김면오 아울러 체육진흥을 위한 후원회도 만들었다 위원장:홍무승 위 원 : 이현호 장기호 서광진 서태호 한원열 김명순 이정호 고흥열 후원의 물결을 타고 성도들의 희사품도 답지했다 란。 L 펴펴mm 맨 」끼 원윤팔 끼 L 써h 장기호김경렬 } 샘 이;7/ 이성희 란。 끼 -x 고 rb개 ‘ 。 교회 교육은 유아 · 유치 · 유년의 시기도 중요하다. 그라나 그보다는 소년, 소녀들이 겪는 사춘기 시 절의 교육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 으로 이민 왔다”고들 말은 쉽게 하지만 생활이 그렇게만 놔두지를 않는 것이 현실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중 · 고등부를 신설하여 그들의 적성에 맞는 신성교육 과 더불어 인성교육이 이루어지어야 되겠다는 생각들이 이때 대두됐다. 여태 고등학생 수는 그리 많지를 않았다. 그라기에 고교 졸엽시즌에는 주보에다 소식을 올리고 축하해 주곤 했다. 이를테면 ‘원길현 군t원윤팔 집사 장남)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합니다/이충 국 군(이현호 장로님 장남)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합니다’ 이런 식이었다. 당시 고등 85
학생은 청년부에 흡수되었지만 수가 점차 늘면서 분할 조직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마 침내 1977년 9월 25 일 중고교생들만 따로 불라모아 중 · 고등부를 조직 장설했다. 껏4 해 빽옳# 교회설립 5주년을 맞던 그 무렵 성령의 불길이 강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교회는 무엇 보다 전도열로 후끈후끈 달아올라야 교회답다. 그해 표어도 ‘금년은 전도히는 해, 성장 하는 교회’ 로 했었다 제직훈련, 연합 전도대회(강샤 한경직 목새, 5주년 기념 부흥성회 등 일련의 굵직굵직한 집회를 통하여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된 성싶었다. 그러나 정 작 교우들 자신이 자진 동참해 바로 내 이웃을 구원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했다. 온 교우들의 전도요원화가 선행돼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사질 그런 준비는 상당기간 전부터 해왔고? 이제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전도훈련 신 청서를 받았다. 신청명단만 보더라도 ‘300 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 라는 연초계획을 곧 이루리란 인상이 들었다. 전도훈련강습회 기간은 10윌 22 일부터 24일까지 시흘간, 강사 는 CBS에 근무하는 강용원 선생(훗날 KCCC 전국총무)이었다. 준비위원장에 김기태, 위원은 계정숙, 박광-^}, 김어금, 임영재 홍혜실 등 제씨였다. 훈 련비 (1인 $5)와 함께 신청서를 내고 참가한 교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주남 전 영 조광기 천갑엽 이성남 김면갑 김면오 계정숙 오요댄 김어금 양호식 박광자 김정구 이현호 홍혜실 김기태 고흥열 임영자 조인기 이혀1 숙 이종국 남궁진 이성희 김경열 김명순 이기석 김동희 이애순 유병국 미스사 조영수 곽영철 하희도 윤늠앤] 민묘기 공유성 이준무 (37명) 핵』뽑 홍~:輪 그해 9월 19 일 임시 제직회는 이희철 목사의 위임 추대를 결의했고, 10월 30 일 공동 의회가 열려 투표에 부쳐졌다. 위임국장으로는 김용주 목사(라더포드장로교회)가 와서 주일 대 예배 때 말씀을 증거한 뒤, 임시당회장으로서 공동의회를 소집한 대로 의장이 되어 의사진행을했다 표결에 들어가서는 총 투표자 36 명 중 찬성 35, 반대 1로 가결됐다. 유감스럽게도 86
그때까지 우리 교회는 아직 노회 청원을 받아 임시 당회장이 온 것도 아니고, 노회에 가 입도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한번의 시행착오였 다 그나P}, 10월 2 일 임시 공동의회를 열어 뒤늦게 노회에 가입키로 결정하여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제6회 미주 동노회가 1977년 11월 18 일부터 19 일까지 양일간 필라 한인 연 합 교회에서 개회됐다 본 교회는 노회가입 신청과 목사위임, 장로 청원을 했다. 노회가 입은 만장일치로 가결됐으나 목사위임과 장로청원 문제는 팬지 석연치 않았다. 연초부터 금년 5주년 기념예배에는 목사 위임, 장로 취임, 권사 임직을 누누이 강조해 왔건만 돌연 변경됐다, 1977년 11월 27일자 임시 재직회의록에 의하면, ‘3. 안건’ 이란 재 하에 이렇게 기록됐을 뿐이다. 목사님의 위임식과 장로님의 취임식에 관하여 목사님의 설명이 있은 뒤 (노회에서의 문제) 내주의 창립 5주년 기념 행사를 창 립 5주년 행사 및 오요란 집사 권사취임식으로 하기로 하다. • (하략) 떼 소g 당초 오안순 집사를 권사로 천거하기로 했던 것은 1977년 5월 29 일 임시 제직회에서 였다'7윌 31 일(주일)부터는 주보에 권사투표를 실시한다는 광고가 나개 시작했고, ‘제 직회에서는 오안순 집사를 공천했습니다’ 라는 귀띔도 곁들여졌다. 온 성도들이 기도 중 은혜로운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첫 시무 권사를 우리 손으로 뽑게 된 것이다. 장로 투표를 한 적도 있으나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무산되었었다. 8월 14 일(주일) 공동의회가 열렸다. 세례교언 39 명이 출석했다. 권사를 1명 선출키로 하고 투표한 결과 총 39표 중, 오안순 32, 홍혜설 2, 무효 4, 기권 1표였다. 오 집사가 총 투표자의 3분의 2선(26표)을 넘어 권사로 피택된 것이다. 본 교회 창립멤버의 한 사람인 오안순 집사는 지금껏 궁은 일을 죄다 도맡다시피 해왔다. 부인회(여전도회)를 결성하여 회;않 역임하여 왔고 대내외적으로 활동이 지대했다. 보이는 곳에서보다는 감추인 곳에 서 묵묵히 일하논 조용한 평신도 사역자다. 오안순 집사의 권사 취임예매는 교회장립 5 주년 기념예배와 더불어 77년 12윌 4일(주일) 에 드려졌다c(사진 12)(표 11) 본 교회 초대 목회자 장영춘 목사가 설교를, 직 전임자였던 임근하 목사가 기도 순서를 맡았다. 창립 기념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어 모든 준비를 그 위원들이 나섰다. 87
‘혈합、 #루:;;;:-I \"r 장트절1고호 l‘30 녕 At 위원장 이성희집사 접대위원 鋼램總 집 사 재정위원 김사현집사 예배위원 집사 안내위원 김정구집사 봉사위원 집사 섭외위원 김기태집사 표 11 창립 5주년 기념예배 및 오안순 집사 권사취임식 예배순서 사회: 이희철목사 1977. 12. 4 묵도 주악 일어서서 찬송 82 장 일어서서 사도신경 320 장 앉아서 롬 12 : 1 - 21 뉴욕연합교회 입근하 목사 찬송 “이상적 교회” 이현호 장로 기도 ‘거룩한성’ 성 가대 뀐즈장로교회 장영춘 목사 성경 --•---•-- 현악 5중주 서병철 선생 찬양 위원 이준무집사외 설교 E_ ζ뇨 c> 헌금 E三 /-‘ τr =i' O 권사취임식 O 서약 당회장 피택 권사에게 교뼈게 권면 피택 권사에게 • • - - • 에리자베스교회 유제선 목사 교우에게 취임기도 라더포드교회 김용주 목사 악수례 공포 당회장 선물 축 사고 위원과권사 광송 찬 당회장 - 교회와신입권사 - 뉴져지 제일교회 박재영 목사 _.- .----..--.-.--....--- 3 1 6 장 - 위원 일어서서 김대업목사 88
1977 년도 w씨 m i월 g싸 맨 킹 씨X 사진 12 본 교회 초대 시무권사로 임 임직받은 오안순 권사는 두상 투영기(頭t投影 機 :OHP) 한 대를 봉헌했다. 직한오안순권사 Oveihead Projector donated by the Kwonsa, The inauguration of the church’s first Kwonsa[Senior deaconess], Ahnsoon Oh. AhnsoonOh 이렇게 하여 모든 행사가 잘 끝난 듯 보이나 내용은 문제가 많이 있었다. 시질 창립 제 5주년 기념예배가 8월에서 10월로, 10월에서 다시 12월 4일로, 연기에 연기를 거듭 하게 된 것은 이희철 목사 위임, 이현호 장로 취임, 오안순 집사의 권사 임직 - 이 모두 를 창립예배와 겸하여 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는데 여의치 못하자 권사의 임직만 함께 행 하게 된 것이다. 창립예배 행사 주일로 잡은 D-day 12월 4 일 바로 전 주만 하더라도 (1977.11. 27. 주보) “12월 4일에 오후 5시 창립5주년 기념 및 목사 위임식, 장로 권사 취 임식을 거행하오니 위하여 기도하시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라며 광고가 나갔는데 그 리되지 못하였다. 목사의 위임이나 장로 취임의 문제는 본 교회로서는 공동의회에서 이미 가부투표를 실시해 표결된 상태였다 당시를 말히는 증인들은 사전 노회의 허락을 득하지 못하여 그 리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두 분 이희철 목사와 이현호 장로는 종래 우리 교회와는 갚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쓰겠지만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일찍 소천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최~(敎會報) ‘샤롱’ ~I 한칸 자롬’ . 우리 교회가 처음 발행한 교회봐敎離~) 제호이다. 살롬{shalom)의 뜻은 평화 또는 평안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육체 · 정 신적으로 무사하고 안전한 상태’ 를 일걷는다. 공동체가 경험하는 평안은 경제적 번영 89
듀;에 ;;;A;\"loãË=영 ;:a:2: 1 표 12 샤롬창간호 (시 147:14, 38:11, 학 2:9 참조), 정치적 번영(왕하 20:19, 역대상 22:9, 사 32 : 18)을 포 함한다꺼 그런 의미에서 이 제호는 이민교회에 걸맞은 단어일 성싶다. 비 정기 간행물인 자롬’ 의 편집인은 청년회, 발행인은 담임 이희철 목사로 되어있었 다. 창간호가 1977년 12월 4일 교회 창립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되었다. 이 샤롬지는 교 회의 소식지일 뿐 아니라 문서 선교지요 문예지인 것이대표 12) 29) 아가페성경사전《주)아가페출판사 편)794쪽. 90
‘해 야풍작빽 용 ε뼈 @한$ 1fJ77. 2.13 연세대학교 이대운박사본교회 방문 미동부연합전도대회(강사:한경직목사)참가 1fJ77. 3. 4.죄 창립 5주년 기념성회(강사: 이호문 목사). 라더포드장로교회와 뉴 욕권즈장로교회 성가대를초청,지원받다 1fJ77. 3. 24-27 청년회 주최로조국강산을아름답고푸르게 가꾸기 위한포플러 식수모금운동전개 1fJ77. 3. 27 평신도연합회주최 부활절연합예배참가{새벽 5시 30분링컨 P뼈) 뉴저지중앙장로교회(강세대 목사)장로장립식 참가 1fJ77.4. 1O Li1며e 야구 출전 1fJ77.4.17 N. J.한인회 배구대회 출전 1fJ77. 5. 7 제일교회 탁구대회 출전 총회 맹인선교회(총무김선태목사)지원 19η.5.14 한국일보사주최축구대회출전 뀐즈장로교회 (장영춘목사시무)건축기금바자회 1fJ77.5.21 성아어린이 합창단 음악회 참석(장소:라더포드장로교회) 1fJ77.5.22 뉴저지중앙교회 주최 청장년축구대회 출전(Brookl없leP,뼈 Brookfield) 1fJ77. 5. 28 권즈장로교회 찬송가부르기 대회 참가 1fJ77.6.25 뉴저지중앙장로교회(강세대 목사)부흥회(강사· 이상근목사) 참가 1fJ77.8.2 라더포드한인장로교회 창립 3주년기념성회(강사:임영재목사)참가 1이7.9.24 1fJ77. 1O.23 1fJ77. 10.28-30 1fJ77. 11. 4-6 해새 그해 5월부터 한-미 양국이 주한 마지 ÀJ군 철수 문제를 공식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 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한국 교계에서 일기 시작했다.5월 25 일 영락교회당에서 긴급 소 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미군 철수반대 대회에서 ‘주한 미 지상군 철수 반대 결의문’ 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미국 연합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그리고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C)에 보냈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일동도 지미 차터 대통령과 연방 상원의장, 하원의장에 게결의문을보냈다. 91
,,_t 트콩 ,,,((''(、 \\i: #주;언\". 。 쿄 ~I 30 없 현정g뭘政)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본국 교단이 구국 일념으로 나선 것이다. 국내에서 이런 시국과 몸짓이 보이자, 우리 교회도 열심을 다하여 기도했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를 하나님의 징중에 두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였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결의문을 받아 여기 동첩보 미국 남장로회 총회와 미국 연합장로회 총회도 덩달아 결의문을 냈다. 여기에 남장로회 총회 결의문을 소개한다. 〈미국 남장로교회 총회 결의문〉 1977년 제 117차 미국 남장로회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우리는 선교 동역 교회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미군 지상군의 철수로 인해 올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가능한 결과들에 관 한 관심의 표현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접수하며, (2)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더불어 평화를 위해 일함에 있어서 하나 님 앞에서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며 우러의 공통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실한 삼싱결속을 재확인하는 바이며’ (3) 미합중국의 대통령과 국회에 대한민국의 인권 사태에 대한 영 향과 군사 충돌의 위협성을 상승시킬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특 별한 고려를 하면서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 결정을 재고할 것 을요구키로한다 30) .....,. 3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80주년 기념집 (1912 - 19921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편), 257쪽. 92
C벼수 년도 ~ 했t 해 1978년은 교육의 해로 정했다. 슬로건을 ‘잘 가르치는 교회, 잘 배우는 교인’ , 표어 는 ’ 배우고 확선하는 일에 거하리{팀후 3 : 14)’ 로 정 했다. 교육을 통해 교회부흥을 기하지는 뜻에서였다 우선 제직의 교육부터 실시됐다. 1월 둘째 주 (1윌 15 일) 유태영 목사를 강사로 제직수련회가 열렸다. 주 일 대예배 후에 갖는 수련회에서 제직 모두 새로운 다 짐과 각오를 갖게 됐다. 본 교회로는 두 번째 제직수련 회였다. 교육의 진일보를 내딛은 그해에 제직수련회도 두 차례 열렸다.3회 째는 ‘교회의 성장’ 이란 주제 아 래 김병서 박사를 초청해 가졌다. 참된 교회교육을 위해, 우선 교사와 학부모의 연석 회의부터 가졌다. 학부모들이 교육현ε싸1 참여하여 일 선 교사들이 자기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자녀 문제를 대화로 서로 풀어나간 것이 다 펙 진지했으며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응도 고무적이 었다 우리 교회로서는 처음 갖는 ‘학부모 간담회’ 였다. 교육의 해였던 만큼 담임목사 자선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텔 성서연구를 위하여 스토니포인트 수 양관에 들기도 하였다. 자치기관들도 열성을 냈고, 여 전도회는 이 목사를 강사로 수련회를 가졌다. 기관장 회의를 열어 별도 교육을 시킨 것도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진정한 교육을 위하여 교육위원회도 구성됐다 수요 기도회에서도 성경공부률 했다. 말씀과 기도 생활은 믿 는 이들에게는 기본이 아니던가 주일학교에서는 매주 일 성경요절을 암송시키면서 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준 비시키도록 주보에 알려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93
*ι씬찌;‘ #구처 :;;;1 :;。;;~효료 쿄호 130 씹 At e 생밤짧 교회가 중흥의 불결을 타면서 학습자와 세례교인이 배출됐다. 귀한 열매를 맺게되자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온 교우들이 환호하며 축하를 아끼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우리 교회를 시무한 전 목회 A}들은 하나 같이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마다 성 찬, 성례를 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외에도 적당한 시기를 택하여 그 성스 라운 예(미뽑를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흥의 물결을 탄 지금에는 더욱 그 뜻이 다르다 하겠다. 이희철 목사의 집례로 1978년 2월 26 일(주일) 학습을 받은 이는 인경실 씨, 수세자 (受洗者)는 안재복, 하금순, 한원얼, 권경자 4명이었다 E생애얀 &械 한국에서도 유행처럼 변졌던 것이 춘계 대심방이다. 하지만 이곳 이민생활에서는 유 행이라고 부르기엔 언어도단에 가까운 절실한 문제였다; 1년에 한번 있는 붕철 대섬방은 매일 밤 9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감안한 조치였다 매주 주보에 주 중 심방 대상 가정을 알려 미리 준비케 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대심방이다 4월 11일(화)부터 시행된 봄철 대 심방 계획은 이라했다 11 일(화) 이성남 오요란 양호석 늠냉전 12일(수) 이재홍 서태호 김명순 13일(목) 양원길 든c=;〉 도1] 二C느그 장기호 한원일 18일(화) 김송월 김사현 이기석 서광진 19일(수) 원윤팔 이사원 민묘기 차종철 20일(목) 김광조 이재실 윤정자 25일(화) 하희도 인재복 3:ζ→여ι그 i/T」- 고흥열 26일(수) 박용길 유병국 27일(목) 김기태 강학자 곽영철 김정구 94
예수 짧기 원하는 사장뜰 1978 년도 션용샤 션도샤 부@』 이처럼 교왜 박차를 가하고 있는 차제에 교육전도사는 필수적이었다. 우리 교회로 서는 처음 맞는 유급 전도사였고, 그나마 보직이 교육을 전담하는 전도사였다. 그해 5월 애 밍 7일 정기 제직회에서 가결하여 한 주 만인 14일에 정식 부임했다. 정용자 전도사는 본 될ω g빠 교회에서 약 1년 8개월 큰무했다. 당시 교회학교 조직은 아래와 같았다.31) 힐 X써 지 웹갚감원딴예하 도 정용자 와째처ι 치H 랩 쩌 브 이기석 서 μ 생생 ’ 박 병연 및 조 용성 서 김변오 μ 생 부 인경실 ι 생 부 서 셰 서 ι 천교 aJ Aj 켠댐 71 운동 천캐 전교인 성경 읽기를 전개했다. 분기별로 2, 3, 4월 제 1기, 5~6월 제2기식으로1 성경 한 권을 분기별로 통독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1기 성경읽기반 중 신구약 완독자는 김명 쉰7주), 양영군(9주), 서태후 김어금, 홍혜실(12주)이었다. 제271 때는 김동희(14주), 이 애순(18주) 제씨가 신구약을 독파했다. 1회 이상 완독한 이들도 있었다. 김명쉰4회), 서태호(2회), 김어권2회), 김혜숙(1회) 등이다. 성경읽기 운동의 공식 기별 지도는 7월로 마쳤으나, 개인별로 계속 잘 마무리한 이들은 상을 받았다. 진 영, 안순익, 천갑엽, 계정숙, 이혜숙 교우들이었다. 셔서7: 1 려션무회 우리 교회는 일찍이 70년대 말부터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이희철 목사는 이스라엘 성지에 관한 한i 당대 추종불허의 베테랑이었다. 워낙 그곳에 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지리연구회’ 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연구원생들을 인 31) ‘샤롬’(본교회 비정기 간행물)제2호(1979년 4월부활절특집 )11쪽서 인용. 32) 이기석: 현 새순교회 η20 Sununit Ave., Hack;앉sack, NJ 07601) 담임목사 2002년 대뉴욕지구한인교 회주소록(뉴욕교협 )111쪽 참조
#구 Z4;l;당료료 J끄호 I 30 옆사 솔하여 성지순례를 다녀오곤 했다. 4월 정기 제직회에서 이 목사의 이스라엘 방문 허락을 받아 제 171 연구생들과 78년 5윌 22 일부터 29 일까지 8 일간 성지순례의 장도에 오른 것이 시초였다. 여기저기서 생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예가 여전도회 회원들의 활동이다. 제1회 여 전도회 수련회와 바자회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바자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부흥회 때면 으레 여전도회의 조직적 활동이 돋보였다. 특히 강사에 대한 뒷바라지는 이들의 몫 이었다. 당시의 여전도회 회의록을 들춰보자염) 1. 강사 목사님의 εt복 손질 및 내의 세탁 흥혜실, 김어금 2. 물수건 및 음료준비 • 전인호, 박광자 3 선물은 강사 목사님의 사모님 한복감 한 빌 흥혜실 뿐만 아니라, 성가대 가운을 여전도회 회원들이 모여 직접 만들기도 했다. 더위가 다 가오자 겨울용 대선 여름 가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때 교회가 북새통을 이루며 편이 갈릴 때, 성가대 가운을 몽땅 갖고 나가버린 믿기 어려운 역사도 있었다 기역에 담기조:차 싫은 일들을 되새기며 회원들이 매일 김명순 집사 집으로 모였다. 오안순 권사가 재단과 주름장식 (smocking)을 맡아하고, 전인호 집사와 정용자 전도사 가 재봉틀을 내놓고 박았다. 점심때는 가끔 이희철 목사 사모가 냉면을 말아냈다. 저녁 식사는 ‘가운공장’ 제공자인 김명순 집사의 몫이었다. 그밖에 이혜숙, 이애순, 이은자 집 사 등이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그러기를 3주. 마침내 보기만 해도 시원한 성의를 성 가대를 위해 주님께 바쳤다. 그해에 교회학퍼당시는 ‘주일학교’ 로 불렸다}가 여름성경학교를 개교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학부모들의 관심이 고조됐음은 물론이다. 중 · 고등부{부장 이주님j 33) 당시 여전도회 회장이던 김어금 집사가 지금껏 간직 했다가 본 교회 창립 30주년을 맞아 본 역사편 찬위원회에 내놓은소중한자료이다 현재 교회 역사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96
예수 닮기 원하는 사람뜰 1978 년도 하기수련회에는 학생과 부모가 연서로 서명 신청하여 동참할 수 있게 했다\", 8월 11일(금) 개h 부터 14일(월)까지의 기간 중 교회탄생 여섯 돌이 되는 13 일이 한가운데 끼어있었다. 에i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기에 온 교우들이 중 · 고등부 하기수련회에 찾아가 합석키로 Eg 했다. 야외예배를 겸한 창립 6주년 기념예배를 그곳 스톡스 주립공원에서 드렸다. 따건μ 첫 하기수련회는 예정대로 잘 진행되어 자녀들에게 좋은 체험과 추억으로 남았다. 이 씨X 희철 목사는 청소년 신앙훈련에 큰 도움을 준 교우들에게 “지정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와 주선 학부모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표현했다. 첫번 행사였기에 사후 학부모 연석 평가회도 가졌다. 대단히 좋았다고들 입을 모은 교우들의 좋은 의견들은 수렴해 두었다. 란을학교려 태동- 한인들에게는 영어 외에 모쾌인 한국어가 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알려면 그 말글부터 배워야 한다. 영어는 미국 공사립학교에서도 충분히 배우지만, 한국어는 따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고유한 우리네 전통과 역사와 문화를 자녀들에게 바로 알리려면, 아니 그러기에 앞서 자녀들과 올바른 의사전달을 하 려면, 한국어부터 가르쳐야 함이 자명하다. 아울러 부모는 자녀의 섬중을 알기 위해 영 어를 한치라도 더 배우기에 힘써야 마땅하다. 그런데, 바쁘게 부대끼며 살아가기도 힘든 이민생활의 와중에 자녀들에게 일일이 한 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무지 집에 들어오} 아이들을 볼 시간조차 없는 데다 혹여 있다해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마 한글을 가르쳐야한다는 성화가 일기 시작했고, 교회학교에서 일 주일에 단 한시간이라도 가르쳐보자는 중의를 모았다, 1978년 9월 3 일(주일)부터 한글 교육이 실시됐다. 교회학교 각반 담임교λK당시는 ‘주일학교 반재 라고 칭했다)가 성경 지도와 함께 이 일을 맡아 수고했다. 학부모들은 틈나는 대로 과제물을 지도했고 교사들 을 격려핸 일에도 소홀하지 짧다 ‘한글학교’ 라는 표현보다 ‘한국어학교’ 라 함이 옳을 것이다. 개념상으로, 전자는 한 글 글자를 가르치는 학교 후지는 한국의 말과 글을 통틀어 가르치는 학교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학교’ 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설픈 단계였다. 그저 “한국어교육 을시켰다’고해두자 \"9'7
펄쟁뼈 지난해에 우리 손으로 오안순 집사를 권사로 선임한 데 이어, 이 해에 안수집사를 뽑 아 세우게 됐다. 원래 1978년 2월 26 일 공동의회에서 3 인의 안수집사를 선출하기로 하 였으나 2 인이 피택 되었으니 김기태, 이성남 두 집사이다 그날의 주보를 보면, 선출기준 :1. 교회를 주일마다 잘 출석한 사람 2. 십일조헌금을하는사람 3. 성경을잘읽는사람 4. 교회에 충성스럽게 봉사한 사람 5. 행위가 복람11 합당하고 교우의 본이 된 사람 6. 술과 담배에 인박히지 않은 사람 7. 무흠교인 5년 이상 및 27세 이상인 사람 이라고 적혀 있다. 피택 안수집사의 약력을 소개한다:(표 13) 그들의 안츄1 은 78년 10월 22 일 거행되었대표 1껴 (표 13) 집사 약력 김기태집사 이성남집사 o l'여2년생 01947년 생 ·경복고졸 ·양정고졸 ·서울농대축산과졸 ·홍익대졸 • 안양감리교회 출석(유년부) • 웅진장로교회출석(유아서1 례) 01958년수세 01966년 입교 (황동교회) (안양감리교회 집례-이영종 목씨 01968 - 1971년 • 성가대 지휘 • 마포구 대흥 나사렛교회 01974년 뉴저지 연합장로교회 서 리집사 ·성북구창동장로교회 01975년본교회로 • 영등포구 한영 장로교회 이명 서리집사 ·뉴욕중앙한인교회 0 1<φ8년 본교회 안수집사 01972년 본교회 창립멤버, 지 피택 집사안수 휘, 교육부장 01978년 본교회 안수집사 피 택,안수 98
년도 집사안수식 예배순서 1978년 10월 22 일 사회 이희절목사 묵도 즈三 。F 개식사 사회 자 찬송 387장 다같 이 기도 련즈장로교회 ε병춘 목사 성경 봉독 (롬 12 : 1-2) 뉴저지줌앙교회 강세대 목사 찬양 성 가대 설교 몸으로드러는제사 롱아일랜드교회 임근하 목사 독창 유충렬선생 서약 피택집사와교우에게 당 회장 안수기도 당 회장 악수례 안수위원 공포 당회장 권면 신입집사에게 라더포드교회 김용주 목사 흐 교뼈거1 뉴저지연합교회 김해종 목사 }사 교역자협의회장 백예원 목사 본미국교회 케 디 목사 답사 장립집사김기태 집사 기념품증정 신임집사가 교회와 목사에게 이성남집사 교회가신임 집사에게 오요변권사 광고 이현호장로 찬송 1 일어서서 죽도 에리자베스교회 유제선 목사 폐회 성 가대 수 3쪼 7후 채채 새벽예배를 1주 1회만이라도 드려야 되겠다 결정하고 그해 10월 28 얼부터 매주 주일 6시에 드려졌다. 때를 같이하여 수요예배도 드리기로 하였으나 임대주인 미국교회의 허 락을 못 얻어 수요예배를 화요일에 드리기도 하였다. 수요예배를 화요일에 모이었으니 ‘지금부터 화요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했을까, “수요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했을까. 아니 99
#구 \"i^-l ^0I--æ-: 교호 130 닝^~ 면 “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했을까? 당시 주보에는 아래와 같이 광고가 나갔다. 픽 오 랜 기간동안 이렇게 하였다.80년대에도 이렇게 했던 기록이 있다 새벽 기도회 : 주일 오전 6시 삼일 기도회 : 화요일 오후 8시 자체 예배처소가 없어 미국인 교회에 세를 들어 있다는 것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갓 이민을 와서는 ’서머 타임’ 실시와 해제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이 있는데다 가 세를 들어 살림한다는 것은 미국인이 자기네들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하고 나머지 여 유시간을 우리가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조정을 수시로 해야했다. 어부 들이 물때를 맞추듯 팩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런데다가 수요예배는 도무지 드릴 여건이 안되었다.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각 가정으로 순회하면서 수요 기도회를 갖는 것으로 했다. 이는 78년 11월 15 일(수)부터 시작했다. 먼저 이희철 목사 사택에서부터 테이프를 끊었다. 구역예배와도 흡사했다. 매주 주보에 금주 수요예배 장소를 알리는 광고를 실었다 략쫓 &뼈핵 체육대회 말고도 교회 내에 여러 대회가 있어 화합과 질적 향상을 꾀했다 8월 20 일(주일)에는 각 구역대항 성경퀴즈대회가 열렸다. 범위는 창세기, 출애굽기였 다 구역별로 성경을 읽고 예행 연습을 하고 이러는 사이에 구역이 귀합되고 은혜스라운 교제의 장이 되었다 추수감사절에는 성가대 주최 ‘기족창 대회’ 가 있었다 지정곡은 찬 송가 573, 324, 411, 480장 중 1곡 1절을 부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유곡 1곡을 불러 자웅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 행사야말로 ‘대회’ 라는 감각 없이 온 기족이 함께 모여 주님 앞에 나아가 찬양을 드린다는 데 그 의미를 더했다 미국생활에서 가족이 함께 어우라진디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각종 악기가 동원되고 이 구석 저 구석에 삼삼오오 가족들이 모이어 연습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름다워 보였다 어느 가정은 참석치 아니할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숱한 연습을 하고 만반의 준비가 끝난 가정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전 교인의 축제, 바로 그것이었다. 박수와 웃음이 절로 나는 즐거 움이었다 100
α% 수 년도 1979 전년도는 ‘교육의 해’ 였다. 이 해는 기도하는 해’ 로 정했다. 그렇다고 어느 해는 교육만 하교 어느 해는 기도만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해당연도의 주제에 역점을 두고 강조하여 환기시키자는 의도인 것이다 ‘기도하는해’의표어는‘구하라그리하면받으라니너 희 기쁨이 충만하리래요 16 : 24)’ 였다. 구체적인 기도 계획표가 만들어져 교우들에게 배포하고 기도를 꼭 실 천하여 생활화하도록 독려했다. 기도 목표 : 기도로 능력 받자 기도로변화받자 기도로축복받자 기도생활실천 방안 1) 교회 - 교역자 위하여 각기관위히여 2) 이웃 교회 성장위하여 전도 대상자 위하여 3) 가정 - 고난당한형제 위하여 4) 자기 교민 교회와사회 위하여 가족의 신앙 위하여 직업과사업 위히여 가정의 성화위하여 믿음과 충성 위하여 말씀과능력 위하여 헌금과축복위하여 R 짱얘앵 제 직: 이희철목사 이현호장로 오안순 권사 오순닥 권사{협동) 101
김기태 집사 이성남집사 이기석 이재실 이주남 홍도열 (서리집사) 안순익 김순임 남자. 원윤팔 서광진 양호식 조광기 서태호 고흥열 이대영 여자· 전인호 김명순 김어금 홍혜실 * 위 서리집사 중 홍도열, 서태호, 고흥열, 이대영, 김수임은 신임 * 정주섭 집사 가정이 1978년 12월 24 일(주일) 새교인으로 등록하였으나 이 미 제직 구성이 끝난 상태여서 제직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제직회 부서 조직 전도부· 이성남 서태호 김어금 홍도열 봉사부. 오순덕 김수임 김명순 이재실 고흥열 친교부. 서광진 전인호 홍혜실 오안순 서무부. 이 현호 이대영 안순익 조광기 재정부. 김기태 양호식 이주남 원윤팔 이기석 * 교통부는폐지했다. * 양한} 집λ똥 이사장을 겸임했다 * 이재설 집사는 감사를 겸입했다. * 3월 11일 부회계로 이기석 집사가 보선됐다. * 이 제직회 부서는 전반기 부서이고, 7월1 일부로 하반기 부서를 새로 썼다. 약 간의 변동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사· 박병연 김면오 조용성 인경실 이기센음악전담) 기관장 성가대장 양호식 집사 유년부장: 이성남집사 중고등부장 . 이주남 집사 청년회지도 . 이재실 집사 구역장 . 제 1구역장 선봉춘 제 2구역장 계정숙 제 3구역장 정우경 제 4구역장 조순절 제 5구역장 박광자 많핵 채채 :환해 1979년 1월 14 일(주일) 네번 째 제직 수련회를 가졌다 102
단순한 연례행사로 그치지 않고 보다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제직, 기도하는 제직이 되 자고 이희철 목사는 강조했다. 강사는 김남수 목새순복음 뉴욕교회)였다. 다수의 제직들이 적극 참여하여 새로운 다짐을 갖는 기회가 되었다. 1야약 G1> 지난 해는 폭설로 인하여 부흥성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기필코 부흥회를 열자는 각오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김기태 집새 준비위원으로는 이성남 집새예배), 양호식 집새서무-), 서광진 집λH회계)등 이 선임됐다.3월 22 일부터 3월 25 일까지 부흥회를 개최키로 정하괴 2월12 일부터 준비 에 들어갔다. 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온 교우가 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주문하기 도 했다. 수요기도회와 각 구역예배 때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기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준비위원의 요구사항을 마다하는 이가 없었다. 성가대도 나름대로 열성 껏 준비했다. 믿지 않거나 은혜를 사모히는 이웃들을 꼭 데려오도록 거듭 강조했고 초청 장, 봉투, 우표까지 비치해 놓고 있었다. 한 교인이 초청장을 3장 이상씩 의무적으로 발 송하도록권했다. 3년 전 장립 5주년 기념성회가 기억에 새로웠다. 당시도 강사는 이호문 목사였는데 펙 많은 은혜를 받았다. 아마도 성이 멀 갔는지, 이번에도 같은 강사를 부르게 된 것이 다. 아무려나 모두 하나되어 받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철저히 준비하였으니 그 전국 잔치가 배부르지 아니할 턱이 있겠는가. 전 교인이 흡족한 은혜의 용광로에 빠져들었다. 쉬 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같은 시간에 4세 ~14살 또래들을 위한 ‘어린이 부흥회’ 도 아래층에서 겸하여 열렸다. 미국 어린이전도협회에서 맡아주었다. ’채 체 x 1977년 창립 5주년 기념호로 창간된 ‘샤롬’ 지가 금년 부활절 기념호로 제 2호가 4월 15 일에 발행 되었다. 자롬’ 지 제 2호 표지에는 그해가 ‘기도하는 해’ 이었음을 주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부활을 상정하는 듯 아침햇살이 강하게 나뭇가1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사진을 곁들였 다. 편집언이 직접 펜으로 쓰고 삽화를 그려 넣고 사진도 넣었다. 인쇄는 아마도 복사기 103
#추;예 --1 장중1고호 l견‘싸0 넘〈‘ 로 복사한 듯 하다. 화보에는 이전 해 5월에 다녀온 성지순례 사진과 8월에 있은 중 · 고 등부 하기 수련회 사진을 게재하였다. 여기에 샤롬 제 2호 5쪽에 실린, 젊은이의 애환을 그린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젊은이들의 기도 유정임없) 오늘도창밖에, 별빛은빛나고있습니다 두손들모으고 하루의무사함을 주님께 감사드랍니다. 외로운이때에 우리맘에 친구가되신 주여 슬픈이때에 위로를주신 주여! 이국뺑 남모를 고통의 멍에를 젊어진 젊은이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이 고통은한순간. 지금은킴캄한빔이오나 우리주오지는날 고통의 멍에는 사리질 것이요 일출의 광명은 빛날 것이라 우리 모두나가 찬송하며 신랑되실주님 반기리 옵니다 34) 유정엄:현재 본교회 집사.장기순권사의 큰딸.유정환집사는오빠,유정순집사가동생이다. 104
그해 사순절 기간을 거룩하고 의미 있게 보냈고1 부활절도 오래 전부터 기도로 준비 했다. 부활절을 기하여 신앙지도 발간됐다. 4월 22 일 부활의 아침이 밝았다. 부활주일에는 특히 유아세례가 처음으로 거행됐다. 성찬식도 거행돼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했다 부활절 학습 세례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학습:김귀남 유정임 김영옥 김은숙 세례:진상권 조용성 강윤정 윤순형 이운봉 아기.이신호 이태진 이요한조에리사 이 해에도 전년도에 이어 성서지리연구회 연구생들을 대통하고 이희철 목사가 이스 라엘을 순방했다.79년 5월 13 일 정기 제직회에 이 안건을 내놓아 통과됐다. 성지순례 기간은 5월 21~31 일 10박 11 일간이었다. 전 해보다 2 일 늘린 것이었다. 참석자는 목회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담임목사가 공석중인 때에, 마침 이성남 집사의 부친 이관영 목λ}15l(서울 남서 울교회시무)가 방문을 와, 몇 주간 설교를 담당해주었다. 1979년 5월 23 일. 청천벽력(좁天露靈)이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정말이지 맑게 캔 날, 날벼락이었다. 아니 그날은 비가 내렸다. 브루클린에 있는 이 현 호 장로의 상점에 웬 괴한이 들었디{안순익 증인에 따르면 그 가게는 이 장로가 개업한 35) 이 목사는 실로 목회자 가족을 이루었다 장남이 이용남 목사(서울 월계동 소재 장석교회), 2남이 이충남 목사(뉴욕그레이스장로교회 /201-03 29 Ave., Bayside, NY 1136이이며, 삼남 이성남 장로(부 인 안순익 권사)는 현재 뉴욕그레이스교회에 출석하고 있다(2002년 4월 19 일 안권사에게 전화 확인). 105
지 얼마 안 되는 가게였대. 그날 낮 2시경. 괴한의 총탄을 맞은 이 장로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내 하늘나라로 오르고 말았다 36) 우리 교회의 큰 별 하나가 진 것이다. 설립 후 지금껏 우리로서는 오직 한 사람 간직해온 장로가 우리 곁을 총총히 떠나간 것。1 다. 대예배 때마다 늘 은혜로운 기도로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교회행정과 치리 변에 서 늘 귀감이 되어왔다. 우리 교회와는 제1회 제직 수련회 강사로 와서 ‘미국 연합장로 교의 헌법’ 해설을 강의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 그후 우리 교회뿐 아니라 온 교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바로 한해 전 4월에는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국제기드온대회 초청강사 로다녀오기도했다. 아직도 한참 앞장서서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그가 앞서 떠나다니 정녕 우리 사람으로 서는 모를 일이다 교우들은 이 장로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때마침 이희철 목사는 성지 순례로 부재중인데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제직회 서기 김기태 집사가 고인의 자택에서 긴급 임시 제직회를 소집했마 한결같은 애도의 심정으로 교회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장례위원(김기태 · 이성남 · 서광진 · 양호 식 · 홍도열)을 정했다 담임목회자가 출타 중이었기에 모든 집례와 절차는 길웅남 목사 (뉴저지연합교회)에게 의뢰키로 했다. 그러나 ‘장례 위원’ 들이 정작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많은 교인틀이 자기 가게문 을 닫고 달려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제반 일을 도왔다 5월 27일(주일) 온 교우가 묘소를 찾아가 하나님께 예배 드렸다. 하나 고인은 이무 말이 없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끝내 사 무장로로 취임하지 못한 채 별세한 그였다 37) 서광진 증인은 고언을 이렇게 추억한대2002년 4월 11일 녹취), “이 장로님 그분 참 실력이 있던 분입니다. 그 양반이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동 노회에 상신했더니 장로고사를 치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분은 인천제일교회에서 (곽선희 목새 이희철 목사가 부목사로 있을 당시) 이미 장로로 장립, 시무하다가 도미하 였기에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시 험을 치른다해도 능히 합격할 분이었고요 문제는 그분 말대로 ‘시힘을 치르라면 치르겠는데 왜 나만 유독 시험을 치 르라는 게내 그렇다면 이민 온 다른 장로나 새로 부임하는 목사들도 다 시험을 패스해 36) 서광진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현호 장로는 사고 즉시 인근 브루클린 병원으로 후송된뒤 사 망했고1 시체확인을 내가 했t:1{2002 년 4월 11 일 녹취). 37) 본서 후미 부록 중 제직회의록 1978 년 7 월9 일자 7 항, 1978 년 10월 1 일자 5 항 A 참조. 106
예수 닮기 원하는 사랑들 1979 년도 야 하는 거 아니냐’ 며 응시를 거부했기에 그리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쩌 고 이현호 장로는 펙 박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겠 *i랜 7 주년 꾀 8월 둘째 주에 교회창립 7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g싸 그해 창립 7돌을 기념히여 밴(v.없1)을 한 대 구입하기로 하고 특별헌금을 했다. 그밖에 #킹tm 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었다면, 창립7주년 기념 * 예배 주보의 ‘교회소식’ 난이었다. /擺 오늘은 본교회 창립 7주년 기념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여 주심을 감사하고 7년 전 사일러스 콘틱트 파크에서 창립예배를 드린 선배교우들의 노고 ι 를감사합니다. 창립 당시에 계신 교우 중에 오안순 권사님, 이성남(안순익)집사님, 양호식 집 사님 그리고 이성희 집사님이 지금 남아 계십니다. 7주년 기념예배의 집례는 양호식 집사개 대중기도를 오안순 권사가 맡아했다. 그후 23년이 지나 창립30돌을 맞는 지금, 공교롭게 당시 그 순서를 맡았던 양호식 집시{현재 시무장뢰와 오안순 권사{현재 은퇴권새 두 사람만 역사의 산 증인- 지킴이’ 로 남아있다. 콰냐년 건은 콰냐년꺼l 1978년 8월 6일에는 전 한인회장을 지낸 김상진 교우가 지동등사기 (Gestetn떠를 교 회에 기증했다'.79년 4월에는 이기석 집사가 탁구대 1점을 헌납했다. 그런가하면 원윤팔 집써가 화재를 당해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전달하였더니, 79년 9 월 16 일, 그 돈을 죄다 도로 싸들고 교회로 와서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하나님의 것은 하 나님께 올려드려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원 집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보다 빨리 복구되었다”고했다. 。 l 희캠 폭샤의 샤@』 우리 교회는 역대 담임목사를 도대체 몇 대까지 세어나가야 하는 걸까? 폐 일언하고
느주^-I ^I 징}로쿄호 130 닌^~ 이 목사가 제직회 서기인 조광기 집사에 게 1979년 8월 30 일자로 띄운 서한부터 살펴보 자.(표 15) 조광기 집사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제직회의 서기이므로 본인의 사면서를 제출하니 접수하고 사후 처리하기를 바 랍니다. 본인이 귀국하여 목회 하고자 하는 뜻이 불같이 일어나 사직하는 것이니 모든 제직들의 뜨거운 성원을 기대 합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교민교회의 지도자로서 봉직하기에는 지도의 능력한계가 j 너무 절실히 느껴지므로 귀국을 결정하게 되었읍니다. 재직동안 도와주신 집사님과 여러 제직들에게 감사들 느끼며 부덕하고 부족한 종이 한 것 없이 떠나게 되어 주님과 여러 교우들 앞에 면목이 없읍니다. 좋은 목사님을 주님께서 보내 주실 터이니 모시고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이뤄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집사님과 그리고 제직 여러분께 있기를 기원합니다. 1 979 년 8 월 30 일 이희철 목사올림 첨부 : 사직서 1 통 표 15 사직서한 제직회 서기인 조광기 집사는 위의 편지를 들고 9윌 정기 제직회에 들어가 편지를 내 놓았다 임시 사회를 김기태 집사가 맡았다. 펀지 내용과 같이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작 정했다는사표의 수리 여부를무기명 비밀투표에 부쳤다. 결과는총투표 14표, 가 6표, 부 7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사표를 반려키로 하였다. 당시 제직회의록에 의하면 사 표반려위원을 뽑아 피송키로 하고 위원에 이대영, 김수임, 오순띄, 조광기 등 제씨가 선 임되었다. 사실 제직회에 14명이 참가하여 이 목사의 사표를 받자고 히는 제직 6명이 있 었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일 만은 아닐 것 같다. 하기사 이 목사의 잦은 출타도 그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었다. 그해 이 목사의 출판일지를 보면, 5월 21 - 31일 목회자들 성지순례인솔 (기간중 이현호 장로 별세) 6월 12 일 교회협의회 (뉴욕 감리교회) 108
1979 노캉ε 6월 22 일 - 27일 제 9회 동노회(카나다 토론퇴 7월 16 일 - 21 열 이스라엘 7월 31 일 - 8월 2 일 한미교육지도자회의 (미 장로교 수양괜 기묘i차 입산 8월 20 일 위의 그해 출타일지 중 공적(公的)이고 부득이한 출타야 어쩔 수 없지만 특이할 것은 성지순례요 특히 일부 교인은 그 일을 원치 않아 만류하였으나 그는 이스라엘로 떠났고 기간 중 이현호 장로의 급사로 인한 충격이 또한 적지 않았다. 여하튼 이 목사를 찾아 만난 사표반려위원들도 이 목사의 ‘한국행’ 결심을 읽고, 다음 주일인 1979년 9윌 9 일 임시 제직회를 열어 사표 수리를 가결했다. 때를 같이하여 1979년 3월 11 일 제직회 부회계로 보선된 이기석 집사가 그 직을 사 직하였으나 차기 담임목사에게 위임키로 하는 일도 있었다 (그후 이기석 집사는 양호식, 이성남 두 집사가 방문하여 권변하였으나 이미 뉴욕 순복음교회에 등록하여 성가대원으 로 있어 사표를 수리하였다:) 1979년9월 9 일 (주일) 이희철 목사 송별예배에 미주 동노회 노회장 최이열 목λL 서 기 김용주 목사 등이 본 교회를 방문하였다. 예배를 마친 후 임시 제직회를 소집하였다. 최이열 목사는 본인이 우리 교회 임시 저l 직회장이라며 인사를 하였다: (표 16. ’미주 동 노회공문서’참죄 이희철 목시는 1979년 9월 16 일 송별예배를 끝으로 본 교회 3년 4개월간 제5대 담임 목사로서의 시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떠났다38) 표 16 미주 동노회 공문 미주동노회 THE EASTERN PRESBYTE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U. S. A. 344 HOFFMAN AVE., NEW MILFORD, N. 1. 07646 법인번호 670532 MODERATOR: REY. Rlli YUL CHOI STATED CLERK : REY. YONG JU KIM 38) 이 목사는 그후 한국에서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에 재 입국해 제류하던 중 뉴저지 북부 Route17 도로선상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다고 전해진다{2002년 4월 11 일 서광진 장로 증언 녹취) 109
누주처 \"1 ^O-I--e~= ..ül호 뉴저지장로교회 제직회 서기 귀하 우리 주님의 위로와 주시는 은혜가 귀교회 위에 더욱 충만하시기를 앙축합 니다. 귀 교회를 담임하시든 이희철 목사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 교회를 사입하시겠 다고 히여 본 노회는 ζ면하게 말류하면서 교회 성장을 위하여 더 수고하여 주실 것을 애원하였읍니다마는, 하나님의 뜻을 알소 귀국의 결심을 굳게 하심으로 본 노회는 한 없이 섭섭흔떨 금할 수 없으면서 1979년 9월 6일 본인의 원인 사인서를 접수하였읍니다. 이어 본 노회는 귀교회의 당면 형편을 의론코져 노회 임원 및 임사부 연석회를 1979년 9월 13일 오후 소집하여 우선 이희철 목사님의 송별회를 함께 갖언 후 귀 교회 의 성장과 부흥을 위하여 기더한 후 귀 교회 당회장을 노회장 최이열 목사 님을파송하기로하였읍니다. 바라옵기는, 앞으로 귀한 목회자가 오실 때까지 제반 교회의 형편을 살펴 교회 성장에 지도를 하시겠아오니 기도하시면서 주 안에서 계속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주후 1979년 9월 15일 미주동노회 노회장 최 이 열 서 기 김 용 주 £뼈 쐐밴증 빽 다시 후임 목사 청빙을 위하여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목사님 청빙’이라는 제하의 신문광고도냈다. 이토록 목사 청빙을 신문에 내기도 하였지만 일각에서는 현재 전도사로 있는 김종헥 전도사가 계속 담임목사 대행을 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때 정식으로 임직하면 되 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서광진 증인 2002.4.11 녹취) 그도 그럴 것이 우라 교회에 대하여 평판이 좋을 리 만무하거니와 더더욱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도 남음이 있는 터다. 그러니 자체에서 해결승F는 것도 한 방 법일수있다하겠다. 매주 주보에는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교우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를 바랍니 다’라고 ‘교회 소식’ 난에 자주 오른다. ‘홀륭한 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기도하자 할 법 도 한데 그게 아니라 ‘새로운 목사님’이라고만 한 것에서도 어떤 느낌이 와 닫는다. uo
느퓨 전염 목사님이 지난달에 떠나셨는데 청빙위원회는 아직 이렇다할 진전이 없었나 보 다. 제작회가 열려도 몇몇 이력서 접수상황 외에는 별다른 보고가 없다. “박희소 목사 가 추천히는 목사가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담임목사가 공석인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1979년 10월 28 일 주일에는 시카고에 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순각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듣게 되었다.11월 정기 제작회에 서 제직 만장일치, 이순각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것을 결의하였다. 제직은 물론, 많 은 교인들의 의견이 하냐로 모아졌다. 이 뜻이 곧바로 이순각 목사에게 전해졌다. 그라 나 이순각 목사가 김기태 집사에게 부임할 의사가 없음을 전화로 알려왔다. (* 편찬자 주 : 설명(實名)을 써서 송구스럽다. 본지 후미 ‘생생한 기록들’ 편에 실명이 나오기에 그대로 썼다. 넓은 해량을 바란다:) 훌륭한 목자를 모신다는 것은 생엽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생엽을 전폐하고 서 광진 집사는 자기가 자동차를 낼 터이니 같이 시카고에 가서 직접 만나 종용해 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김기태, 이성남, 서광진 세 집사가 서광진 집사의 자동차에 동승하고 시 카고로 호t하였다. 만났다. 그러나 실패였다. 어쩌면 이 목사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 교회가면 힘들어, 7}지마 하는 소릴 들었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지금 내가 맡아 먹이는 주님의 어린양들이 있는데 이를 어찌 버리고 갈 수 있을까?’하 는 염려 때문에 선뜻 “노이0) !\"라고 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런 일을 여러 차례 겪고 보 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판단이 서기도 했다 이러구랴 감사절과 성탄절 그리고 연말이 다가온다. 목회자 공석이 3 개월 째언데 교 인들의 결집력은 약해가고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이 교회에서 떠나거라’는 말이 불거진 지 펙 오래였는데 그간의 노력을 게을 리 하지 아니하여 새 성전을 벌릴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미국 이민교회가 겪는 전철이 려니 하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일들이었다. 잦은 목사의 이동, 교회를 빌려쓰는 서러움 - 이런 시련들이 정녕 우리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겠지 하며 믿고 싶은 마음이 너나 없 이 앞설뿐이다. 1979년 11윌 4 일부터 새로 빌린 Jεrsey City에 1907년도에 세워진 Evangelical Fr않 Chm마 성전을 빌려 그곳으로 이사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 교회로서 네 번째 예 배 처소의 주소는 아래와 같다.(사진 14) 111
^ .. i:2. fμ 、 ιJν 누주처:0<: 1 O~ .ï:il호 I 30 년^~ 사진 14 본 교회 제 4 예배처소이다 복음자유교회 (Evan-gelical Free Church) 를 임대하여 79. 11 4 부터 지금의 펼리세이즈 파크 본당으로 이전하여 오기 바로 전까지 그곳 에서 예배드렸다 The fourth past location of the church at the Evangelical Free Church from November 4, 1979 until the church was relocated to the present location in Palisades Park 155 Vroom St., Jersey City, N J 07306 그해 추수감사절(1979년 11월 25 일)예배는 새로 마련된 예배처소에서 드려졌으니 더 욱감사한일이다. 112
예수 닮기 원하는 사릴윷 1980 년도 2;r Restoration Period 80 년대 국내외 배켠과 건황1) 매m 미국을 비롯한 세계가 1980년대에 들어섰다. UX aE 십진법에 익어온 서구문화는 한 세기를 뜻하는 센추 리 (century)와 함께 10년 주기(週購를 뜻하는 데케이드 맨 (de때려도 강조한다. 사실 한 데케이당} 무슨 새 징검 엉 X때 다리도 아니고, ‘80’ 이란 숫자가 달력을 장식한다해서 당장 달라질 것도 없지만, 연대 구분에 편리하고 긴요 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미국은 10년 단위로 센서스(인 구조사}도실시한다. 80년대는 미국이 국제 평화와 신보수주의의 시대를 연 데케이드라고 할 수 있다\"01981년 민주당 카터 행정 부가 레이건 행정부로 배턴을 넘겨줌으로써 공화당 대 (代)가 재개됐다. 라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 제 40 대 대통령은 84년에 재선돼 닉슨 대에 워터게이트로 흔들리던 공화당의 디덤돌을 굳히면서, 89년에는 부통 령이던 조지 부시에게 다시 정권을 대물림해, 90년대 초까지 10여 년간 공화당 전성기를 활짝 꽃피웠다. 조국-문샤건괜의 션7i 60년대부터 약 2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독재해 1) 시사와 직결된 부분은 인터넷 자료 다수를 참조했음. 퍼3
^-I-i::므 납~-I ^I 0-- 교호 1 30 념사 온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1979 년 박 대통령이 시해된 뒤, 12.12사태로 군사계엄령을 발동한 데 이어 실세를 거머쥔 전두환 정권으로 교체된다. 1980년 5월 18 일 광주시민들이 군사정권에 항거한 광주민주항쟁사건은 과거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이어지게 된 기나간 군사독재의 악몽에 대한 하나 의 몸부림과 절규였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148 명 등 174명이 숨지고 약400 명이 부상 당했으며, 그후 정치활동의 전면중지와 함께 김대중 · 김영삼 · 김종필 등 3 김’ 은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다 8윌 16 일 최규하 10 대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27일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제 11 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전대통령은 9월1 일 취임식을 갖고 남띄우 내각을 출범시켰고 10윌22 일 개헌투표를 실시 대통령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5공화국 헌법이 확정됐다. 그해 5월 17일 재판에서 김대중은 내란음모 · 반공법 위반 등 4개 혐의로 두 차례 사 형선고를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고, 점차 감형을 받다가 82년 성탄절 시즌에 형 집행정 지로 석방되어 신병 치료 차 도미했다. 1983년 9월에는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으로 탑승자 269명이 몰λh 민 족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미주 한인 다수가 희생됐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 (Evil Empire)으로 칭하고 소련여객기의 미국운항 금지 등 보복조치 를 발표했고 각국에서 소련기 운항 규제에 동조하는 등 소련 만행에 대한 국제적인 규 탄이 이뤄짐으로써, 냉전 기류가 극에 달하는 듯 했다 레이건은 그해 가을 한국을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2회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대통령 으로서는 최초로 전방 미군기지를 답人h 남북 대결현장을 목격한 뒤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안보가 미 국익에 직결된다’고 천명했다. 그 즈음 남북관계는 전두환 정권 당시 버매미얀매 아웅산 폭발사건 등 극적인 긴장 도 있었으나 84년 서울에서의 남북8차 본 회담, 판문점에서의 최초의 남북경제회담, 북 한 수해피해 물자 지원 등으로 무르익으면서 85년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져 이후 다 양하고 빈번한 남북대화가 진행된다. 80년대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3 김 등 정치활동 피 규제자들이 해금되고 김대중 씨가 귀국하는 등의 정치완화 조치가 이뤄진다. 김영삼 · 김대중은 신민당에 입당했다가 결별,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나 김대중이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87년 12월 16 일 제13 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김영삼, 김대중, 김 종필 순위로 차점 득표를 했다. 노 당선자는 이듬해 2월 제 12 대 대통령에 올라 6공화국 114
X 양용@쩡 이 출범했다. 그해의 가장 큰 이벤트는 묻론 88 올림픽이었다. 야해 책새치 날로더해 가는불안과한치 앞을내다볼수 없는조국정세에 질린 겨레들은 안그 래도 70년대부터 활짝 열린 이민문호를 찾아 ‘자유와 기회의 땅 으로 물밀듯 밀려들어 온다. 대(大) 엑서더스의 여건이 무르익은 셈이다.80년대 중반기에는 사상최고의 이민 전성기를 맞으면서 이민 교회 교인수도 덩달아 늘고 있었다 이민국 자료에 따른 80년대의 한인 합법 이민자 수는 표c17과 같다. 단위/명 표- 17 29387 2933 28819 3844 1980 27861 3863 81 29019 4320 82 28828 4214 83 30532 4721 84 30745 5031 85 32135 86 31071 3컸4 87 28248 88 3632 89 5974 이에 따르면, 80년대 전반 한국인 이민자는 약간의 굴곡을 보이면서 70년대 후반기 (평균 28,000명)와 대동소이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1985~1988년 4년간 연속 3 만 이상 2) 이 부분과 그 다음 섹션인 ‘80년대 한인 이민계익 특정’ 을 쓰면서 미 이민국 자료를 참조했다. ‘Korean Americans and Their Religions-Pilgrims and Missionaries from a Different Shore'(Ho-Youn Kwon, Kwang Chung Kim,R.Stephen Warnerl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2001) 115
을 웃돌았고 87년에는 32,000 명 션을 넘어 사상 최다치를 내면서 이민 붐의 절정을 이 룬다 그라나 1991년을 기점으로 90년대 이후는 이민지수가 급감하게 된다. 아울러 한인 이민교회들도 한국서 갓 들어온 새 교우들을 속속 맞아들이게 되고? 뉴 저지 한인 밀집가도에 자리잡은 본 교회도 이때 탄탄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있다 당λ1 이민자들은 중산층이 많았고 한국 중산층에는 본시 기독교 세력이 강했기 때문 에 80년대 이후의 이민자중 절반 이상은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었다. 용당챔 cH 활애 얘얘쳤 1990년도 연방센서스는 당시 미국 내 한인들을 약80만으로 보고했는데, 그중 28% 만이 미국 출신이며, 약 267,000 명이 70년대에, 339,000명이 80년대에 이민을 온 것 으로추산된다. 이민자 다수가 20~40세 연령대의 성인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 사회문화에 익 은 데다 한국 전통문화를 중시하여 2서l들에게도 심으려고 적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들은 문화충격 (cultu때 shock)속에서 미국사회에 나름대로 적응하려 몸부림치면서도 한국의 것을 놓지 않으려는 특정을 지녔었다.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은 연고자를 통해 왔기 때문에 미국 정착지 인근에 보통 친척 들이 있었고 가족친지끼리 소규모의 네트워크를 이루곤 했다. 그들 다수는 대학졸업자이 고 화이트칼라 전문직 경험을 지녔기에 이곳에서 전문언으로부터 자영엽, 서비스업 육체 노동 등 직종이 다양했다. 그러나 미국 노동시장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가 비주류의 변 두리 직종이나 소규모의 자영엽자로 장시간 근무했다. 학자틀은, 그러한 직장과 사회 행 동반경의 제약, 그와 관련된 심리문제 등이 이들을 교회에서 삶의 의미와 위로를 찾게 만든 주 요인으로 분석한다. 반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초기에 미국화되고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기 때문에 그들의 경력 전망은 부모들보다 훨씬 밝고 따라서 백인 주류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줄 생각하 지만, 중 · 고교시절을 거치며 자선들이 백인계가 아니라는 사질을 점차 인식하면서 한 국 전통문화와 교회의 소중성을 깨닫게 된다. 한편 부모들은 자녀에게 학구적 탁윌성과 경제적 성취를 강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u6
j 챙행 독립심과 자율성을 배워온 2세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세대차이와 상호괴리감이 늘어가 고 친구들을 부모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갔다. 뉴저지장로교회도 1980년대로 성큼 진입했다 본 교회로서는 가히 ‘은총의 시대 를 맞고 있었다.80년대로 새롭게 진입하는 1980 년 그해에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강이 기다리고 있은 것이다. 하필 한 십 년대가 바 뀌는 때에 새 목회자가 부임한 것은 어찌 보면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1970년대의 8년간 지속 반복된 목자‘양떼간 관계 정립상의 시행착오 속에, 이픈 생채기로 얼룩진 뉴저지장로교회에 새 시대를 열어주고 계셨다. 돌이켜보면, 70년 대는 우라교회의 시련기인 동시에 수련기였다. 교회가 세워진 이래 1979년까지 8년간을 거의 곤고와 탄식으로 채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목에 따라 ‘수난기’ 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고쳐보아도 좋을 법하다 80~90년대를 거쳐오며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 교회의 성장저력은 그런 볼시련 을 맡바탕으로 구축돼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반복되는 연단 속에 처한 뉴저지장로교회를 보시교 “이젠 족하다!\"(Enough 1S εnough!)라고 선언하선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 : 1)고 말씀하신다. 탄식과 애통 으로 움푹 패인 골과 웅덩이를 메우고 대로를 고르게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오랜 성도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기울여 들으신 것이요, 응답하섬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은총의 시대를, 준비된 새 목회자를 통해서 였다. & 70년대 이민개방시대 초, 하나님의 뜻 가운데 희망찬 탄생의 고고성을 올린 우리 교 회. 그러나; 70년대를 여러 목회자로 점철된 ‘단기 수습기간’ 처럼 보내버린 우리 교회. 그런 교회가 1979년 이희철 목사가 떠남으로써 또 한번 교착상태를 맛보면서, 이저1 차기 목회자 선정이 당장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갚이 산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차제에 성도들이 희구하는 목자상과 새 목회자의 신선한 이미지는 서로 부합했다. 3) 당대의 역사적 정황들은 80년대 초기 주보칠과 제직회의록 등을 참조했음 U7
써~(('f,、 #루\"'.. \"',장토를.:;:a호형 Q 얹^~ 김창길 목사는 1980년 2월 8 일에 도착, 주일 인 10 일에 정식 부임했다(사진 15) 우리 교회에 오기 전 70년대 말까지는 캐나다 토론토한인장 로교회4) 교육목사로 있으면서 시카고의 맥코믹 (McCormick)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을 밟 고있었다 학업 차 캐나다와 미국 양쪽을 번갈아 오가 사진 15. 저16대 담임 김창길 목사. 던 그는 양국의 여러 한인교회에서 수시로 설교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던 중 본 교회로부터 청 1980 년 2월 8일 부임하여 현재 까 빙을 받고 기도와 숙고 끝에 응하게 됐다. 당초 지 시무중이다 πle 6th senior pastor of the church, Rev. 우리 교회에 “선보인” 날은 1980년 1월 6 일 새 Samuel Chang Ghil K.im (2/8/1980 - 해 첫 주일이었다. 오후 1시 30분 이성남 집사 Present). 가 인도한 그날 주일예배 중 김 목사는 창세기 22장 1-14절 본문과 ‘여호와 이레’ 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당시 예배처는 바로 전년도인 1979년 끄월 4 일자로 이전한 저지시티 소재 미국인 복 음자유교회(Evangelic떠 Free Church) 였고, 당일 출석 교인수는 33명 이었다. 그날 주보 교회소식란 제1항은 “오늘 설교해 주신 김창길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2항은 “예배 후 제직회로 모입니다’로 적혀 있었다. 김기태 집사가 사회한 그날 정기 제직회는 동의와 재청을 거쳐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김 목사 청빙 건을 통과시켰다. 김 목사의 목자다운 인품과 설교에 온 교회가 일단 대 만족한 결과였다. 위.로와 ~I 유 7~ 렐요한 교꾀 대맴大望)의 80년대까지 우리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 어, 초기의 선진들이 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인고(忍苦)와 경건의 연습이면서 안간힘으 로 타다 실아남은 밑 둥지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기대감을 갖고 정들만 하면 훌쩍훌쩍 떠나버리던 목자들의 ‘시행착오’ 4) 당시 그 교회 담엄목사가 현재 나성영락교회를 시무하는 박희민 목사였다.2002년 현재는 박철순 목사 가목회 중이다. 퍼g
예수 짧기 원하는 사합릎 19 80 년도 때문에 양들의 섬경은 실망과 쓰라림으로 갈가리 찢기고 오만애간장이 썩고 멍들었다 kVE 해도 과언 01 아니었다. 목챔뿐 아니라 평신도 지덮}인 과도기 장로들과 ‘장로감’ 들까 지도 이래저래 우리 곁을 떠나갔다. 가장 최근에는 바로 전년도에 큰 일꾼 이현호 장로 E 를불시에 잃었다. 앨 호감이 가는 새 목회자가 선보인 주일(80년 1월 6 일)까지도, 교회는 아련한 슬픔의 맨 깅 ÓJ금 같은 것으로 심경이 엇갈리던 때였다. 그날 교회소식 3항에는 “고 이현호 장로 비 뾰 석이 세워져 유족들이 교회에 감사드리며 오늘오후 4λ130분에 유가족들이 묘소에서 예배를 보오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3’ 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우리 교회에 절대 필요한 것은 올바른 목자와 지도자를 통한 성령의 위로와 치 유목회였다. 김창길 목사는 이러한 교회의 시기적 필요와 부름에 부응하여 하나님이 보 내주신 적절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해서 결정된 청빙 건을 토론토의 김 목사께 알렸다. 이 무렵 김 목사는 우리 교회 외에도 이미 100여명이 출석하고 자체건물을 가진 유 타 주 솔트레이크장로교회의 청빙과 60여명이 출석하는 캔사스 주 캔사스장로교회의 청 빙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작고도 주위에서 힘들다고 만류하는 뉴저지한인장로교회로 가라는 응답을 받은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은 오묘막측하여 우리 교회로서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밖에 없다! 김 목사는 교회측의 고무적인 반응을 알재 성령의 뜻으로 확신하기에 이른다. 뉴저지 에서 목회하기로 최종 결의를 다진 김 목사는 약 한달 후인 2월 둘째 주일 본 교회에 부 임했다. 우리 교회에서의 두 번째 설교는 ‘썩는 밀알의 결실’ (요한복음 12:24-26)이었다. 김 목사 자신부터가 썩는 한 알의 밀이 되기로 각오하고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호소한 셈이다. 김창길 목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t실 우리 교회를 잘 알고있던 주위 사람들이 나 더러 ‘그 교회 어려우니 가지 말라’ 고 만류했다’고 토로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지금까 지 22년간 줄곧, 본 교회 주보에 새겨진 목회자의 이름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의 첫 설 교 제목 ‘여호와 이레’처럼 과연 주님이 예비해두신 우리 교회 목자였던 것이다. 2월 10 일 주보 교회소식란에는 김창길 목사님께서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셨습 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말이 떠올라 있었다. 새 목회자의 사례 문제는 부임 전부터 논의돼왔다.2월 3일 제직회에 79년도 결산안 과 함께 차기 연도 예산안이 상정됐었는데, ‘예산안 상 교역자 사례비가 적으니 연 n9
찢(、’ ‘듀 Ã -I ;;;;;1 ^。-l- 도E프쿄호 I 30 년^~ 14,000 달러로 올랴;zf’는 동의와 재청이 있어 통과됐다 아울러 6월 정기 제직회에서 재고하여 필요하면 추가예산에 반영키로 했다 당시 캐나다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던 김 목사의 이민 수속 건도 7윌 제직회에서 건의 가 되어 변호사 비용을 교회가 부담키로 하고 수속에 들어갔다. 처음 거주하게 된 아파 트의 위치는 저지시티였다.5) 그후 4월 중에는 토론토에서 김 목사의 어머니 안마리아 권 사와 정영선(김에스더) 사모 등 식구들도 합류했다. 식구가 많아지자 5월에는 목사관을 포트리의 아파트로 옮겨 간다.6) 쪽-책 쪽새짧 빽-싫 1)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교회 30년 역사의 22년간이란 긴 세월동안 시무해온 김장길 목사의 성장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별다른 의미가 있을 성싶다. 김창길 목사는 어느 모로 보나 목회자로서 큰그릇이다. 키는 작은 편이나 ‘작은 거인’ 이다. 김창길 목사는 모진 고난과 이품을 아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맛보고 자랐다. 그래서 그와 우리 교회는 더욱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김 목사의 출신집안부터 가 본가와 외가 쪽이 다 목회자와 순교자 가정이다. 김 목사의 삶과 목회에 가장 큰 영 향을 끼친 세 사람을 꼽는다면, 아버지 김동철과 외삼촌 안길선, 목회선배 서금찬일 것 이다. 김동철 목사와 안마리아 사모 사이에 난 여섯 형제 중 다섯 째 아들인 창길은 1940 년 만주국 북간도 선경(오늘날의 장춘)시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처음 개척한 만주 입선 정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말하자면 어릴 적에 이미 타국생활을 했었다. 1945년 조국 해방과 더불어 아버지를 따라 월남한 뒤로는, 1' 4 후퇴 당시 부산 피난 시절 3년간을 제외하고 줄곧 서울서 자랐다. 역시 부친이 설립한 서울 서소문교회에서 유년부와 중 · 고등부 시절을 보내며 2대 서금찬 목사가 시무할 당시 입교한다. 부친의 순교 후, 고학으로 배재중고등학교를 졸엽한 김창길은 학창시절 단짝인 친우 5) 333 Fainnount Avenue, Jersey City. 6) 3010 Edwin Avenue, Fort Lee 7) 이 부분부터 이하 김창길 목사의 배경에 관한 5 개 섹션은 다음 자료를 참조했다. ‘서소문교회 50년새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소문교회 역사편찬위원회11996 년). 세계 속의 한인교회<llI>(정석기). 기타 인터넷 의 한국교회사자료 120
X 쟁용 g 녔 김영구의 어이없는 요절에 충격을 받고 반년동안 방황하던 중, 부친을 이어 목회여정을 밟기로 결심하고 농과대학을 가려던 생각을 바꿔 장로회신학교로 향한다 신학교 졸엽 후 서울노회(예장 · 통합)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육군 군목으로 복무하다 대위로 예편한 김창길은 서소문교회 부목사로 70 년 1월부터 75년 6월까지 ~l:6년간 봉 직한다. 아버지로 받들어온 서금찬 목시를 이제 목회선배로 모시교 어진 인품과 목회경 륜을 본받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또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과 기독교교육도 전공했다. 서소문교회에서의 김창길 목사의 사역 면모를 엿보면 이렇다. “학생회 시절을 본 교회에서 보낸 김 목사는 중 · 고등부, 대학, 청년부 지도 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그가 둥 · 고등부를 사무하던 시기에는 150명에서 180명까지, 대학생회는 50여명까지 모였는데 그 열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8) 이때가 서소문교회 학생회 최고의 부흥기였다 그후 해외에서 목회를 하면서 신학연구를 계속하고 싶던 차 캐나다 토론토한인교회에 교육목사로 청빙받아 대륙으로 건너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을 밟 게된다 샤벼샤 김창길 목사에게서 종종 엿보이는 대쪽같은 성미는 순교의 길을 간 아버지로부터 물 려받았다. 양친은 함경도 출신이었다. 아버지 김동철은 일찍이 애국지사들의 근거지로 이름난 북간도 용정에서 살면서 민 족 · 애국운동의 요람 명동학교에서 민족의식과 신앙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만주 영안 (寧웠학교 교사로서 미래의 일꾼들을 기르던 그는 안마리아를 만나 결혼한다. 안마리아 역시도 굽힘 없는 순절의 신앙으로 순교자 대열에 낀 안길선 목사의 누이동생。l 다. 교편생활만으로는 불타는 열정을 가눌 길 없던 동철은 민족의 참 소망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있음을 확선하고 경성(서울)으로 건너가 협성신학교(현 감신대학교)에 입학 했다. 같은 시절, 부인 얀마리아도 태화여지중학교에 다닌다. 8) 서소문교회 50년사 114쪽. 121
선학교 졸엽 후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용정으로 돌아오+ 과거 믿음 생활하던 용정교회 의 부설 소년학관 사감으로 사역을 시작한다. 규모가 크고 신앙 · 체육교육이 탁월했던 소학관은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했다 아울러 고국을 떠난 나그네 한인들에게 눈을 돌려 숙식을 제공하며 사랑을 베풀어 ‘북간도의 사마리아언’ 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빈민목회를 하며 신경에 개척한 교회 가 입선정(入船뼈η교회였다 아들 여섯을 양육하며 가정을 돌보랴 양떼를 돌보랴 어려운 목회였지만 주님께 있는 충성을 다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들 김창길은 올곧고 한결같은 목회자의 모습 을 마읍에 깊이 각인(刻印)해두고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김동철 목사는 실향민의 귀국을 도우면서도 정작 자신은 굳이 귀국 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당초 만주 선교에 뜻이 있었고 중국어도 능통했을 뿐더러 돌보던 양떼를 두고 떠니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선정교회 제직회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서울로 가자’는 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1945년 12월 식솔과 교우를 거느리고 신의주와 사라원, 개성 등을 거쳐 목숨 을 내결고 38션을 념어 서울 서소문에 자리잡는다. g^ι-~τ.!:,~\".i’J!. 서소문교회는 김장길 목사에게는 지금도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만 국경과 38선을 넘은 신앙동지들이 함께 세운 교회로, 아버지 김동철 목사가 실 향민 나그네들→소외당하고 고통받는 만주 동포들의 어버이 역할을 감당하다 순교의 길 을 걸어간 곳이다. 김동철 목사 가족은 재정적으로 궁핍했지만, 날로 성장하는 교회의 미래 꿈을 기르며 마냥 즐겁게 초기시절을 보낸다 아들 형제들은 제각기 탈렌트를 살려 성가대와 중 · 고등부 청년회 등에서 봉사 활약했다. 김 목사 가족은 주일예배 후 사례비를 받는 즉시 쌀을 사다 밥을 지어야 그날 요기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생활이 어려워 안마리아 사모가 밥장λ}를 해 여넓 식구의 생계를 근근히 이어갔지만 얼굴에는 늘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이 무렵 가족 중에는 1948년 단신 월남한 한진관 학생(현 뉴욕 권즈한인교회 목λ9도 끼여있었다. 한진관은 초기 서소문교회 시절 김 목사 아들들과 함께 성가대원도 했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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