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이었기에 사울처럼 죽음으로서 저주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특이한 점 은 반대로 제사장이 왕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기도 있었기에 왕의 역할은 한정되었다. 염격히 이스라엘 성직자의 기능은 레위 가문에서 세습했던 과 거 조항4이 이들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핵심이었다. 결국 왕의 기능과 별개 로 주어지는 예배 집전이 사제의 독점역할이었다.5 비록 하나님의 왕권이 이웃 나라에 거부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예언 자들은 백성들에게“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6이라고 예언했다. 또한“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7라 고 주장하는 스가랴의 예언을 늘 가슴에 새기며 기억하라고 끊임없이 충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들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 눈에 이방인들의 정치 시스템, 즉 이웃나라의 왕정 체제를 과 도하게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신으로서 추앙 받았던 왕에게 제물을 바치 고, 세를 내야 하는 계약관계가 유대인들의 눈에 더 빛나 보였다. 급기야 다른 나라들의‘왕정 제도의 채택’이 결국 화를 자초했다. 그 왕정 제도의 화려함은 세월이 흘러 왕을 기리는 신전 예배 의식으로 발전해 규모가 커 지고 화려해진다. 부패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성 위에 망을 지켜보는 왕의 보초들 혹은 영적인 눈 을 가진 예언자)을 향해 앞 못 보는 소경이고, 집을 지키는“벙어리 개”라 고 말할 정도로 몰지각한 자들에게 저주와 비난은 일상이 되었다.8 결국 왕이 세워진 후, 세월이 흘러 영화『벤허』에 등장하는 메살라처럼 변질된 유대인들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활개치기 시작했다. 그들 은“왕이 신이냐 아니냐”를 놓고 갈등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고 있었던 것 이다. 요세푸스의 저서에도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잠시 독립된 유대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99
나라 최초의 왕 아리스토불루스의 행적에 대한 말을 남기며 과거 제사장의 위치에서 왕권에 대한 위치로 다시 바뀌는 대목을 나타내고 있었다. “요한 히르카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가운데 맏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위에 올라 통치했는데, 이는 유대민족이 바벨론의 종살이에서 해방되 어 고국 땅으로 돌아온 지 471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왕좌에 앉게 된 일이었다.”9 그렇게 왕위에 오른 아리스토불루스 8세는 기원전 B.C. 104년, 유대 연 도로 537년의 귀한 이후 433년째 되는 해에 오르게 되는 것을 착오로 남기 게 된다. 어째든 요세푸스에 의거 대제사장이면서 마카베오 가문의 지도자 인 아리스토불루스Judah Aristobulus I , 104-103 BC가 과거 대제사장의 권한을 누락시 키고, 왕King의 칭호를 사용함으로 왕의 자리 에 오르게 된다. 그는 결국 사제이자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럼으로 이제 신의 통치에서 벗어나 진정 인 간들에 의한 정치가 다시 시작되면서 역사의 주역인 신약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비록 로 ▲ 아리스토불루스 1세 마의 평화가 있었지만 유여곡절 끝에 식민지 로서 로마의 통치 영역에 들어오면서 유대에도 역겨운 피의 정치인 유대 왕들이 확고히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사복음서, 특히 누가복음의 저자는“디베료(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 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Iturarea와 드라고닛Trachonitis 지방의 분 봉 왕으로, 루사니아Lysanias가 아빌레네Abilene의 분봉 왕으로, 그리고 안나스 Annas와 가야바Caiaphas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라고 우리를 로마시대와 100 버려진 예수
당시 유대 사회라는 역사 앞으로 옮겨 주며 눈과 마음을 자극시킨다. 그들의 활동 모두를 아우르는, 게다가 그들의 목격담들이 줄기차게 끓어 올라 용솟음치는 로마의 현장과 유대 땅 위에서 벌어진 일들이 곧 펼쳐질 것이다. 이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이방인의 통치를 받아들 임으로 그들의 파멸은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외부적인 사항들만 간파하 여 명맥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지만 내부적인 신앙, 즉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미 파괴되어 로마처럼 몰락의 길을 가게 된다. 그것은 이미 과거 예언자 들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피어 오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에도 그렇다. 곧 유대인들에게 왕이라고 하는 하나님은 인간들에 의해 버려지고 있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없이 하소서(Kill him!), 없이 하소서(Kill him!),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Crucify him)’ 빌라도가 이르되‘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가이사(카이사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 니라.”10 카리스마, 독재자 카이사르 리들리 스콧의『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보면 로마사의 일부분을 조명 할 수 있다. 첫 장면부터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했던 전쟁 장면을 시작으로 호화로운 목욕탕이나 원형극장에서 열린 연회를 배경으로 하는 방탕함과 잔혹성이 로마의 역동성을 한층 더 승화시키는 듯하다. 고대에는 어느 나 라든지 전쟁과 평화가 끝없이 펼쳐지는 소용돌이치는 시절이 있었다. 전쟁의 완료는 어느 한 나라가 멸망하여 사라질 때까지 서로를 벗어나지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01
못하듯 과거 공화국을 자처한 로마 역시 잦은 전쟁은 극구 불가피했다. 또 한 위대한 고대 그리스 문명이 예술, 문예, 철학의 동시대를 뒤로 한 채 여 전히 그러한‘고대 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그 때에도 그들은 역시 별다른 명분 없이 이웃 나라의 약한 모습에 기회를 틈타 전쟁이라는 명분에 이바 지했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어린이 남녀노소 불문하지 않고 저지르 는 살육과 잔인함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지처럼 피와 시체들로 우글거리던 로마 역시 전쟁이 비켜가고 평화 가 찾아올 무렵, 과거 찬란한 공화국의 면모를 구가하였던 로마의 축은 어 둠으로 수놓았다.“로마의 승리를 위해 죽음을 과감히 버렸던 로마 시민이 왜 실업자의 처지로 전락했는지 아는가?”라고 외치며 30세에 시민들이 뽑 아준 호민관에 당선된‘티베리우스’는 과거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 즉 한 니발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격동의 세월 가운데 카이사르는 어느 한 시골구석에서 자라 나고 있었다. 카이사르 어린 시절부터 갑자기 불어 닥친 내전과 동료들간의 학살로 죽 음의 그림자들이 그렇게 자행되고 있었다. 그것이 카이사르가 태어난 시대 의 불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그에게 로마 집정관에서 지속적으로 통치할 수 있 는 독재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그러한 기회를 만 들어 준 잔인한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여전 히 남아있다. 그 당시 학살이 기본이었던 슐라의 독재로 인해‘혁명’이라는 이름 하 에 잔인하고 무례 없는 짓을 펼쳤던 그의 ▲ 나폴리 국가 고고학 박물관Naples National 존재가 마치‘학살과 처형’이라는 로마의 Arc-haeological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흉상 102 버려진 예수
기억이 여러 서적들에게서 아로새겨졌다. 이는 나라들간의 전쟁이 아니라 로마인들 서로를 향한 칼과 폭력, 그리 고 잔인한 살인이라는 엄청난 파멸로 치달아가고 있었던 현장에 카이사르 는 자라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으로 보았을 카이사르의 어린 마음에 시민 들 못지 않게 상처로 얼룩지고야 말았을 것이다. 잔인한 슐라의 독재 정권 으로 로마공화정의 시작은 좋았으나 또 다른 권력의 욕망으로 인해 비극 은 그칠 줄 몰랐고, 추후 권력과 권위적인 지휘만을 노리기 위해 폭력이 남 무하고 정치적인 뇌물, 게다가 공공연히 뿌리고 다녔던 정치자금은 식민지 속주들의 세금을 포탈하고 가로채고 있었다. 그래서 속주들의 불만과 폭동 을 야기시키기에 이르려 급기야는‘카이사르’라는 위대한 혁명가를 낳았 다. 그 여파로 카이사르의 살아생전에 그 역시 뇌물과 자신이 이룩한 부를 전쟁에서 갈취했다. 심지어 시중에 돈이 없을 때에도 자신의 전우에게 빌 려 돈을 사용하여 자신은 빛을 어마어마하게 지지만 반대로 백성들의 주머 니를 두둑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자신의 품으로 모두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택함으로 종신 독재관이라는 타이틀을 검어쥔다. █ 출생지 █ 로마 공화정이 본격화되기 훨씬 전, 작은 마을에 불과하던 로마 초기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라틴인의 발상지, 곧 로마인에게는 조상의 땅이 기도 했던 알바 롱가를 정복한다. 그들을 로마에 이주시키고 시민권이나 원로원의 의석을 전면 개방하여 정복당한 자들을 노예로 삼거나 죽이는 일 은 삼가하고자 했다. 이들의 사고에서는‘관용’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 기 위해서는 많은 백성들이 필요하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쥐고자 했다. 후 손의 고향이 그곳인 카이사르는 혈통적으로 전통 로마인이 아니었다. 곧 고향 알바 롱가에서 로마로 이주해 와서 원로원석을 차지한 그 후손의 자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03
손일 뿐이다. 정치적으로 좋게 말하면 강력한 유력 가문인‘율리우스 가’ 의 후손으로, 나쁘게 말한다면 역시‘로마사에 동화된 패자’의 후손이기도 했다. 예수가 태어나기 약 100여년 전, 그 즈음 출생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는 로마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학자마다 내세운 그의 태생 날짜는 천차만 별이다. 다만 확실한 연도가 B.C. 100-102년 사이라는 것이다. 또한 매년 7월에 개최하는 아폴로 신을 향한 존경으로 루디 아폴리나레스ludi Apollinares 라는 진지한 게임과 연관이 서려 있다. 『Rome of History(로마의 역사 - 지은이 역주)』의 역사가이며 저술가인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Velleius Paterculus, 그는 로마인이며 초기 열두 황제의 전기를 저술하는데, 카이사르의 일대기부터 시작된 자신의 저서에서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의 피는“베누스(비너스)의 여신에게서 출발한 신의 후 예”라고 밝힌다. 예수, 그 또한 하늘에서 보내서 왔다는 성경과 사뭇 비슷 하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를 가리켜“가장 고귀한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 어났으며, 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안키세스와 베누스(비너스 신)을 만나게 된다. 이는 고대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주장이다. 그 의 빼어난 외모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압도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 던 인물이었다. 즉, 아버지 계보에서는 불사의 신으로, 어머니의 가계는 왕 으로 이어진다. 마치 신의 후손으로 느껴지게 만들기도 했다던, 그가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us Julius Caeser ,B.C. 100-44 를 두고 한 말이었다. 예 수가 왕의 후손이라고 하는 다윗의 자손에 의해 태어난 것과 비슷하다. 예수와 그럴듯하게 화려한 이력의 소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젊은이였던 어린 시절의 카이사르는 무척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로마 지역 내 수부 라Subura라고 하는 다소 서민적인 지역에 위치했던 초라한 집이었기에 지금 으로 말하자면, 그곳은 로마의 빈민촌이나 다름없었다. 초라한 나사렛에서 나신 예수를 유대인들이 바라보듯 어찌보면 예수나 104 버려진 예수
카이사르, 이 두 인물의 출생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고 여겨진다. 이들의 출 생연도도 정확하게 유추할 수 없다. 물론 예수보다 카이사르의 출생연도가 더 확실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 알다시피 예수는 유대 땅 베들레헴, 그 초라한 곳에서 태어난 배경은 대부분 알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예수의 출생이 나사렛이냐 베들레 헴이냐”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은 베들레헴에서 나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성격 █ B.C. 58년 경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넓은 대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기회를 버리지 못했다. 남부 갈리아 서쪽 끝 자락에 위치 한 헬베티이족의 오르게토릭스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왕이 되고자 하는 야 심을 시점으로 카이사르는 그들의 야욕을 꺽고 마침내 갈리아를 정복한다. 『갈리아 원정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의 저술자인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 중 한 에피소드를 통해 자신의 갈리아 이방인을 향한 족속의 관대함 을 보여주는 대목을 보인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계속 간청하자 카이사르는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 며 이제 알았으니 그만 애원하라고 했다. 그려면서 그는 자기는 디비키 아쿠스를 존중하는 만큼 그의 아우가 로마의 국익을 해친 것을 용서하 고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카이사르는 둠노 닉스를 소환해 그의 형 디비키아쿠스가 보는 앞에서 자기가 그의 태도 에 불만을 느끼는 이유를 말하고, 자신이 보고 받은 것과 그의 부족이 그에게 제기한 혐의를 말해주었다.”11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내전을 통해 그 지역을 로마의 속국으로 통합하려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05
는 시도를 로마 독재자의 절정으로 바꾼다. 그의 야욕에 갈리아 내전이 한 몫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믿을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을 인간적인 따스함을 지닌 지도자라는 점을 자서전에 남긴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저술한 원로원이자 역사가 살루스티우스Sallust는 카 이사르와 동시대 인물인 B.C. 40년 후반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로마 의 내전 중 독재관을 꿈꾸던 카이사르의 편을 들기도 했다. 또한 카이사르 의 후원에 힘입어 추후 로마 원로원이 되기도 했기에 카이사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칭호에 걸맞는 그의 당당함과 열정 그리고 과하 다 싶은 열망과 열의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정력까지 그의 저력적인 행 군은 계속된다. “카이사르는 많이 일하고 조금만 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친구들의 일을 해주는 데 전력을 다했으며 호의를 베푸 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만 한 큰 임페리움(군 최고 사령관 혹은 황제)과 군대 그리고 새로운 전쟁 을 열망했다.”12 카이사르를 대단한 포부의 사나이로 평가하는 살루스티우스와 다르게 평 가하는 자가 있다. 1994년 옥스퍼드 대학원에서『고대 전쟁사』로 박사학위 를 받은 저명한 아드리안 골즈워디Adrian Goldsworthy는 다른 평가를 내린다. 그 의 저서『로마전쟁영웅사In the Name of Rome』에 의하면 카이사르를 어떤 자로 평가하는지 극명하게 나타내 천재로서 카이사르를 치켜 세우는 것과 달리 냉정하게 평가한다. 골즈워디는 그를 두고“차가움과 재능을 가진 자”라고 결론 내린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의 일 106 버려진 예수
부 군사 행동을 비판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카이사르 자신의 저서였다. 많은 역사가들에게 카이사르는 결함 투성이 천재로 비춰진다. 즉, 돌발적이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때로는 자신의 실수로 야기된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병사들을 구해낼 때 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인물로 받아 들여진다는 얘기다.”13 카이사르, 자신이 누리고자 한‘행운아’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고 자랑한 그가 정작 필요한 것은 야심과 재능, 그리고 굳어진 결심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을 동원하여 자신이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인내 와 결실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마의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대내외적 으로 유럽의 땅을 모두 밟아본 자로 그에게는 전쟁이 그의 인생의 반에 해 당되는 일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 쳐버릴 만도 하거늘, 그는 전쟁 앞에 카리스마를 타고났다. 전쟁에서 늘 천 재라는 칭호가 붙었으며 정치적인 수단도 천재두뇌집단인 공화정의 원로 원들과 못지않게 구사할 정도여서, 결과적으로 필요하다면 이들 적들도 자 신의 편으로 만드는 재주가 그에게서만 보이는 듯하다. 유스투스 괴펠Justus Goepel 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조각상을 보게 되면 군인 기상과 기개가 숨어 있는 듯한 늠름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전형적인 군인의 형태로 머리카락의 길이가 짧았고, 곱슬곱슬한 고수머리 에 눈은 크고, 부리부리한 콧날은 높은 산등성 같다. 그래서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갸름한 턱과 이목구비를 모두 갖춘 남성적 아름다움을 가졌기 에 남자가 보기에도 부럽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두루두루 가진 듯 했 다. 몸젠의 평가에 의하면 카이사르는“로마 역사상 최고의 창조적 천재였 다.”14고 극찬을 했다. 이상한 점은 인물을 자세히 연구함에 있어서 카이사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07
르의 다른 면을 사려 깊게 알아가면 갈수록 그에 대한 의문투성이는 여전 하다. 그가 죽은 지 2000년이 지났건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공직 생활 및 개 인 생활을 하면서 그가 느꼈던 심리적 감정들, 나약함과 야망, 그리고 실 패를 극복하는 정신적 인내뿐만 아니라 외부로 보이지 않았던 그의 다양한 성격의 측면들, 특히 말년에 가졌던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그에게만 존재 했던 야망의 실체들이 다양한 결과의 실타래로 얽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라틴어처럼 고전 문학에서 카이사르, 그의 존재는 여지없이 드러나기도 했다. 추후에 남긴 자들의 공통적인 그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난애한 성격 과 그가 실제 느꼈던 감정과 고통에 대해 드러나는 인간적인 모습과 비슷 하게도 카이사르의 성격에 대한 판단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기도 했 다. 물론 예수 또한 카이사르처럼 성격을 좀처럼 유추할 수 없다. 한 예로 지도자들에게서 도망가거나, 절기를 앞두고 친척들에 비해 예루살렘에 늦 게 도착한 점만으로도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카이사르는 어릴 때부터 최고의 의회인 공회당의 썩은 정치를 개혁해야 하는 절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은 여기에 안주할 수 없는 인 물이었다. 결국 그 사명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도 모르는 체 말이 다. 예수도 자신의 사명, 곧 개혁을 지상에서 이루고자 했다. 그 한 예가 바 로 하나님과 인간의 죄를 잇는 예루살렘 성의 파괴였다. 예루살렘 파괴로 인간이 신에게 바로 기도할 수 있는 길을 튼 셈이다. █ 신의 호칭 █ A.D. 3세기 초, 그리스에 태어난 로마 시민이자 원로원 의원을 지내며 활 발한 공직 활동을 구사했던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추후 카이사르가 죽기 전부터 그를 스스로 로마 최고의 신인‘유피테르 율리우스’로서 숭배되었 다고 한다. 108 버려진 예수
그 사건을 뛰어 넘어 신의 동상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자신의 동상을 나 란히 옆에 두어 로마 최고의 신 유피테르(제우스 신이며 주피터)와 동일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이 미 일부 헬레니즘 세계의 의식 속에 신에 대한 의식을 생각해낸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법령에 의거하여 공식적으로‘신’이라고 칭해진 기록도 있다. 그런 카이사르와 달리 예수가 신 그 자체인지, 아니면 신으로 승격된 자 인지 곧 드러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가 스스로를 신과 자신이 하나 라는 복음서의 인용을 통해 그가 인간이자 신이라는 점을 미리 집고 넘어 가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로마인들이 바라 본 카이사르나 그리스도인들이 신으로 본 인간 예수, 이들 모두 스스로를 신으로서 불리 는 것에 익숙해진 듯 보인다. █ 지도자의 자질 █ 키케로는 카이사르와의 편지를 주고 받았던 인물들 중에 한 명이다. 그 의 입에서 카이사르의 연설과 문장들을“그 이상일 수는 없다!”라고 감탄 의 말을 남긴다. 사실 카이사르는 먼저 상대방이 누구인지 혹은 어떤 부류 인지를 간파한 후 원로원들과의 연설과 전쟁의 부하들에게 하는 연설을 필 요에 따라 달리 사용하여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여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를 바꿀 수 있었다. 비교적 카이사르와 더불어 언변적인 면에서 예수는 타에 추정을 불허하 였다. 물론 예수의 학식과 언변에 대한 주변 반응의 응답은 다양했다. 배워 본 적 없지만 학식이 풍부했던 예수, 또한 유대인들의 찬사였던 일순간에 도 연변에 능한 그의 시선과 그의 입술을 통해 가히 동요되기도 했었다. 그 는 심지어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기도 했다. 한 예로 그를 시험코자 세금을 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 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언을 남기어 카이사르의 말재주 못지 않게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09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지혜로운 자이기도 했다.15 리더십과 연관된 지도자적인 면에 대한 평가는 이탈리아 안에서도 현재 존재한다.“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지적 능 력’,‘설득력’,‘육체적 내구력’,‘자기 제어 능력’,‘지속하는 의지’로 이는 곧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이탈리아의 일반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이름과 평가는 지도자라는 면 에서 최고라는 찬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16 예수도 이러한 다섯 가지 지도자적인 면을 사실 두루 겸하고 있었다. 유 대인들의 사상을 뛰어넘기도 했던 지적 능력, 부유한 자들과 함께 가난하 고 멸시 받은 사람들을 품에 안았던 설득력, 십자가 사건이라는 고통과 멸 시를 참아냈던 육체적 내구력, 세계를 모두 함께 나누어 주겠다던 사단의 유혹에 거절한 자기 제어 능력, 죽음까지 몰고 간 자신의 십자가 길을 걷고 자 했던 지속하는 의지력은 카이사르 못지 않았다. █왕 █ 땅 위에서 살았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할 때 카이사르와 예수의 공통된 것 은 각자의 나라들에게서 불렸던‘왕’이라는 칭호다. 훗날 로마 나라의 왕 이라고 불렸던 카이사르는 로마 지도자들이자 원로원들이 그를 향한 질투 와 독점을 빼앗고자 망명을 주선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거부했다. 이들의 목적을 알고 카이사르는 고심한 끝에 로마의 정치적 시스템을 뒤엎고자 갈 리아 원정을 마치고 루비콘 강을 건너감으로써 이탈리아 전역을 다스리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추후 B.C. 44년 1월 26일, 그는 로마 외곽에 있는 알반 언덕에서 열린 전 통적인 라틴 축전에 약식 개선식으로서 주인공이 된다. 마치 오늘날 거리 의 퍼레이드를 연상케 하는 성대한 행렬과 함께 로마로 돌아오던 중 일부 군중들이 그에게 환호하기를‘렉스’Rex 라고 칭송했다. 이는 라틴어로‘왕’ 110 버려진 예수
이라는 뜻이다. 로마 원로원들에게 극구 부인하고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곧 절대적인 왕임을 알면서도 로마 시민들은 절대적인 군주로 필요치 아니하는 로마공 화국의 기존 법과 틀을 깨고 왕이자 독재관으로 이탈리아 밖에서 들어오는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들을 환영했다. 사실 그 때, 카이사르의 군대는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로마를 정복했다. 그렇게 그를 왕으로 추대한 반면 예수는 억울하게도‘유대인의 왕’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제자들에게 버림 바 되어가는 결과로 치다른다. 그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예수의 삶을 조명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카이사르가 가난한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서 자신의 권력 과 야망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취함으로 막강한 권 력을 구사하여 카이사르는 모든 것을 얻은 반면,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린다. 그렇게 유대 다윗의 왕조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임에 자신의 존재를 펼 치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현대인들, 심지어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를 왕이나 혹은 신으로서 거 부하며 그저 예언자나 랍비(학자)로서만 그를 인용하기도 한다. 물론 예수 는 신비에 싸인 인물이자 스스로를 신이라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도 있 다. 물론 복음서를 참조하면 그러하다. 특히 예수는 카이사르와 달리 자신 의 욕망과 권력을 요용하거나 남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왕으로 서의 행실은 죽음이라는 때를 기다리기까지 극히 사양함으로 자신의 피조 물인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는다. 다만 복음서에 따르면 이 땅의 왕이 아 니고 저 하늘의 왕이라고 빌라도 앞에서 선포한다. 예수의 사건을 더 깊이 파고들수록 확신하는 바, 로마인들에게는 카이사 르가 영웅이 되었다. 반면에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자신의 종족인 유대인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 극단적인 사건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알고 나서부터 이상하게도 아련한 마음으로 뭉클해지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11
는 것은 무엇일까? █ 저술 █ 예수와 카이사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에 의해 남겨진 저술은 많 다. 단지 예수는 자신의 글을 전혀 직접 남기지 않았고, 오직 제자들의 글 로서 후대의 기독교에 영향력을 장악했다. 반면, 카이사르는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을 토대로 직접 집필한다. 그로 인해 그의 시절 내에 자신은 로마 의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에 쥐게 하였던 계기를 가지고자 그것을 사용하 였다. 또한 당시의 역사가들과 그와 함께 했던 수 많은 시간들 속에 독재자 로, 게다가 후대 그에 대해 집필했던 사람들 속에서 그는 영웅이자 로마의 한 획을 그었던 주인공으로 오늘날 남아있게 된다. 예수가 살던 자신의 시절에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에게 늘 조 롱과 멸시 혹은 구별됨을 강조받아 그의 대한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의 이스라엘 나라에서 발표한 기고의 내용이 나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내용에 담긴 것은 지금까지 현대 유대인들에 게 가장 영향력 있는 자들 중에 포 함된 한 명이 바로‘유대인 예수’라 고 언급했다. 그것을 보면서 한 사람의 카리스 마와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부인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작품, <갈리아 전기Commentarii de 하지 못한다.Bello Gallico>로 가울Gaul 지역에서 9년동안 벌인 전쟁을 진두 지휘하며 그 사건 내용들을 스스로 집필한 저작이다. 특히 카이사르, 그는 남달리 자신 이 직접 편찬한『갈리아 전기TheGallicWar』와『내란기TheCivilWar』라는 서적이 여 전히 읽혀지고 있다는 것이 역시 놀라울 따름이다. 나폴레옹은 거기에 수록된 상세한 로마 장군들의 역대기를 세부하나하 112 버려진 예수
나까지 극히 방대한 양과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고 비평하는데 시간을 할애 할 정도로 카이사르의 서적이 그를 카이사르 독재자가 존재했던 로마 시대 로 흠뻑 빠지게 했다고 한다. 『(열두 명의) 카이사르들의 』생애De vita Caesarum 를 집필한 수에토니우스Gaius 를Suetonius Tranquillus 비롯하여 역사적으로‘카이사르’, 그 단어는 로마의 시 대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에서 거론하는 이름들 중 그의 이름은 공 중에 뜬 상상의 역사적 근거가 아니라 실제 인물이었기에 저자들은 성경에 그 이름을 기록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진실성에 근거하는 복음서들을 더 욱더 뒷받침해주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 근거로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바, 예수의 사실성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음에 몸서리처지기도 했다. 특히 영감으로 쓴 성경이면서 동시에 사실적 근거가 뒷받침되어버린 역사 서와 성경이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접하는 순간, 마치 역사적으로 성경에 다시 새롭게 다가서게 된다. 또한 종교적 해석 측면에 있어서까지 역사성 을 함축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그러한 매료적인 측면에서 출발함으로 나의 회의적인 시각은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욱이 많은 사료에 의거하면 카이사르의 집필 속도가 보통이 아닌 엄청 나게 빠르게 써서 자신의 전쟁 업적을 그 누구보다 더 칭송 받고자 노력했 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의 집정관이 되고자 헌신과 노력을 숨김없이 보 여주는 전략이 그 안에 필시 숨어있었다. 카이사르 그의 시절, 최고의 웅변 가이자 원로원으로 지냈던 키케로는“카이사르의 전쟁 회고록이 라틴 문학 의 걸작 중에 걸작”이라고 그를 칭송하기도 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던 카이사르의 존재를 알리는 바, 그 자신은 이제 로마의 불꽃이 되었다고 감 히 말해도 될 정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책은 정치적인 색깔을 띄 고 있음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그 한 예로 유독 카이사르의 부하 중 한 명은 그의 목격되지 않았던 사건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작업을 조금은 소홀히 했다고 주장함으로 시작하여 당시 많은 역사가들이 로마 집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13
정관 이후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의 일부 군사 행동에 제동을 걸고 나 서기도 했다. █ 타살과 죽음 █ B.C. 44년 3월 중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피톨리누스 언덕 근처 로마 의 회당 안에서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유 니우스 브루투스 및 그의 원로원 의원들의 한 무리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동상 앞에서 스물세 번이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의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료들에게 살해되어 억울한 죽음이라 는 사건을 추가로 만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독재자로 등극하여 내 전을 막아 살아생전에 이룩하려고 했던 업적과 행실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아 자신이 꿈꾸어 놓은 과거의 업적을 초라하고 무색하게 만들었던 것이 다.17 ▲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의 작품 <카이사르의 죽음The Death of Caeear>, 1867년대 작품, B.C.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율리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모의에 의해 암살당하 는 장면을 그린 작품 114 버려진 예수
무릇 한 나라의 지도자는 다수의 기존 장악하는 집단들에 의해 일순간에 버려진다. 이는 정치든 경영에서든, 또한 사회에서든 엄연한 전 세계적 상 황이다. 유대인들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나 추후 암살을 모의하는 원로원들 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카이사르나 별반 다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인간이 신을 버렸다고 하는 니체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역 사적인 현장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대립과 갈등 가운데 핵심은 이러하다. 기존 집단의 위협이 되는 요소는 그 누구도 제거해야 한다고. 그 전략을 사용함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나 심지어 종교의 터 전이며 역사의 시작이었던 유대 땅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더더욱 우리의 가슴을 쓸어 내리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시대적으로나 역사 적으로나 영웅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시대나 역사 스스로가 현명한 자를 탄생시키거나 난폭한 자를 만들어낸다. 영웅이나 악인을 알아보는 자는 결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실로 인해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첫 번째 상대는 다른 자의 몫이거나 엉뚱한 자가 되고, 진정 세계를 구원코자 한 사람의 운명은 적대자인 이들 의 손에 달려 있던 것은 다반사였다. 시대가 영웅을 알아주면 고맙겠지만 언제나 그 정반대가 진실이 되어 간다. 그 현실에 예수, 또한 그렇게 되었 고 곧 버려진다. █ 죽음의 애도 █ 카이사르의 죽음에 수많은 시민들이 장례식 며칠 동안 밤마다 수많은 외 국인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그를 애도했다. 심지어는 로마 안의 유대 인 회당을 설립한 것을 방해하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관용의 미덕이 작용했 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째든 그를 슬퍼했던 것은 로마의 유대인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18 반면, 예수의 죽음에 모두가 애도한 것은 아니며 실제로 죽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15
음에 이르러서도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군인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고 게다가 그의 죽음에 그의 시체를 옮기고자 하는 자는 전혀 다른 제삼자였 다. 더불어 시체를 지키고자 노력한 것은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이었다. 예 수 죽음의 애도 물결에 열두 제자들도 흩어져 문을 걸어 잠그었다. 아마 예 수에 대한 마음까지 빗장을 걸어 잠갔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은 뒤 얼마나 슬퍼했을까? 비난과 조롱만이 예수 무덤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예수 죽음 뒤 에 나타난 부활에 대해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진 채 유대를 활보하고 다녔 음은 복음서에 나오는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를 상기시킨다. 그리스 도인이자 유대인 동료들을 핍박했던 바리새인‘사울’을 떠올리는 것 또한 너무 쉽다. 그렇게 죽음에서조차 유대인들에게 버려진 예수는 2000여년 전, 하염없이 무덤에 홀로 누워있었다. 펄펄 나부끼는 바람에 흩어지는 낙 엽들과 바람, 그리고 잔디만이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로마를 연구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로마 역시 찬란한 경제와 문화, 그 리고 그런 행복한 나라의 꽃으로 남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는 것이다. 예수, 또한 하늘에서 준 임무를 만들고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 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사료된다. 그럼에도 기독 교 입장에서 다신교도의 집합인 그리스∙로마 신화가 다분히 신들의 고향과 같은 이들의 시대에 다른 종교를 죽임으로 동조했다. 더군다나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다수의 죽임으로 몰고가, 그것에 동조 혹은 방 조했던 인물로 남는다. 한때 그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악의 제국’이라고 몰아 갔다. 그러나 사 실 나라 백성들이, 아니 더 깊이 들어간다면 천재 집단이 제국을 만들어내 고, 또한 그 제국을 신의 제국으로 변모시킨다. 더 나아가 한발 한발 점진 적으로 신의 제국을 악의 제국으로 교묘히 변화시킨다. 그것은 역사가 말 116 버려진 예수
해주고 있었다. 서양 역사가들의 분석대로라면“공화정 시대는 깨끗하였고 정치적 시스 템적으로는 볼만하지만 제국이 되자마자 그 로마는 더 이상 완벽한 나라가 아니고 로마의 타락이 시작되었다!”라고 외친 자는 그 현상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과 반대로 로마의 타락을 알고 있었던 카이사르는 완강하면서 야심적으로, 그리고 시민의 힘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논리적 바탕에 근거한 채 정치적 결론으로 밀고 나간다. 그저 시민을 활용하여 원로원의 보수파와 대적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공화국의 법적 통치를 완전히 벗 어나고자 하는 그런 정신의 소유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분명 자신의 주무기인‘관용’을 삼기도 했지 만 집안의 재물을 탕진해가면서 시민들과 원로원들 그리고 관련 공직자들 에게 뇌물을 사용했고, 여성편력이 강해 당시 원로원들의 대다수 부인들을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였고, 그것을 즐기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공개 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카이사르는 속주(식민지)로부터 이들의 세금과 전 쟁으로 거두어들인 수 많은 부를 자신의 빚 갚을 여력으로 시작했고, 그렇 게 부를 이룩해 갔다. 그는 더 나아가 속주들을 만들고 그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그들에게 저지른 수많은 잔혹한 살인과 살육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속주들에게 향한 잔혹한 횡포와 살인, 강간 등에 침 묵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실수로 인해 희생된 아군의 군인 들 숫자는 거의 모든 전쟁에서 100만에 달하였던 그런 전력으로 인해 수 많 은 잘못과 착오에 대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하늘에서 내린 신의 아들일까? 예수가 태어나기 전, 수백 년 동안 로마에서‘해방과 자유’라는 약속의 이념은 격렬한 논쟁이요 혹독한 체험을 낳게 했다. 곧바로 충돌된‘귀족’ 과‘평민’이라는 두 가지가 그 약속의 이념에 결코 공존하거나 붙을 수가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17
없거니와 하나로 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이한 자유가 로마 공화국이 무 너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내전으로 치닫게 되어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 대인에게까지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문장인‘해방과 자유’가 죽음과 맞바꾸 게 된다. 그 자리에 선 자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부패한 자신의 손으로 부패한 원로원 체제를 바꾸고자 했다. 그는 로마공화정 내에 권력으로 자리잡았던 원로원들의 독점적인 지배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살인과 권력의 횡포는 시민들 사이에 서 진동하였던 것을 잠잠케 하고자 했던 것이 그에 의해 또 다른 비극을 낳 게 된다. 로마의 역사 한복판 사이로 엄연히 내포되고 있던 그 비극은 식민지의 통치하에 예수와 함께 유대 사회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이중성을 가진 카이사르와 달리, 자신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을 법한‘신이 라는 자’로서 버젓이 잉태했던 예수도 이런 경우를 이룩하려는 제안을 받 게 된다. 바로 사단의 유혹이 그에게 부조리하고 부패한 나라를 새로운 세 계로 이룩하려는 꿈과 함께 힘과 무력으로 승부를 거는 세상적인 방법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시험에 들었지만 카이사르처럼 행동하지 않았 다. 정치세계에 뛰어들지도 않았거니와 그러한 세계가 반드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카이사르의 꿈도 허무하고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지상낙원은 분명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예수가 그것을 직감했던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 는 바, 추후에 벌어질 지상의 왕으로서 꿈꾸었던 나라가 아닌‘하나님의 나 라’에 관한 것으로 질문에 대한 해답은 분명한 사료라고 생각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예수의 대해 알지 못한 채 비장 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단지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만 이 남는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랴 황제뿐이라는 정 치적 관계를 이룩하고자 했던 유대인들 속에서 그는 후대 역사의 한 줄을 118 버려진 예수
이바지함은 물론이고 성경에 그 이름이 당당하게 올라간다. 그것이 그에게 인생의 목적이자 전부였을까? 로마의 신, 옥타비아누스? 마키아벨리가“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를 피할 수 밖에 없다”라 고 말하듯 훗날 초대 로마의 카이사르 황제가 될 카이사르의 양아들‘옥타 비아누스’,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로마 공화정을 더 이상 쓸모없는‘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지혜와 무력을 동원 하였던 것이다. B.C. 이전시대에 중동 지방은 왕이 신격화되었듯이 옥타비 아누스, 그도 자신을 디비 필리우스divi filius라고 불리고 있었다. 즉‘신의 아 들’이라고 하는 그 말을 종교 의식에서 시작하여 그는 잘 써먹으며, 그것을 잘 이용했다. 그가 왕이자 신이 되기까지 그의 양아버지 의 공은 무척 컸다. 그의 양아버지 가이우스 율 리우스 카이사르는 실제로 내란을 일으키던 시 기, 즉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레미콘 강가에 서 자신의 신복들인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 로 진격하였을 때, 그리고 그 이후 심지어 로마 공화정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전혀 피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적인 원로원들 ▲ 젊은 시절의 옥타비아누스 조각상 을 처단하거나 살인하지 않았다. 단지 필요 시 에만 결국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국외 속주에서 벌어지는 내란과 민란의 소 지가 있었던 상황만 고려했다. 그리고 한때 자신의 목적을 함께 이루었던 친구였고 전우이기도 한 폼페이우스의 군대만을 추격하여 몰살시킨다. 추후 내란을 수습하고‘임페라토르’라는 황제 혹은 군대의 총사령관이라 는 칭호를 영구적으로 받았으며 시민들에게 환호와 사랑을 받았다. 죽음에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19
이르기까지도 백성들은 그를 로마 시민들의 영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럼 에도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는지 그는 유언장을 남겼다. 그의 유언장에는 피를 나눈 자식이 없는 관계로 자신의 양자를 삼았던 옥타비아누스가 그의 대를 이을 자로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그의 양자가 되었다. 곧 그의 이름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바 뀌게 된다. 그는 불과 18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탁월한 능력과 자신 감을 시민들에게 부과하여 자신의 입지를 구가하게 된다. 그 입지가 올바 르게 전개되어 옥타비아누스의 등극은 원로원들에게 생각지 못한 충격이 었고, 공포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의 경쟁자는 생기지 못했고, 그렇게 만 들도록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행동했다. 그는 양아버지 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자신도 그의 길을 가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 를 쓰게 된다. 카이사르의 죽음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장 핵심적인 교훈이 자 전략적 요소에 무기였던 것이다. █ 아우구스투스 █ “그 때에 가이사Caesar 아구스도Augustus가 영을 내려”19라는 성경의 구절처 럼 그의 이름은‘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라는 말과 함께 당시 가장 잘 알 려진 이름이었다. 로마의 황제 이름은 보통‘가이사’혹은‘카이사르’Casear 라는 이름을 줄곧 사용했다. 사실 그의 양아버지‘율리우스 카이사르(혹 은 한글을 사용하는 다른 말로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라는 그 이름을 옥 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르며 잘 사용했다. 또한 그‘카이사르’ 라는 첫 독재관으로서 양아버지의 행보를 이어갔고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 게 될 차세대 황제들의 지휘봉을 물려주었던 그의 아버지 이름, 즉‘카이사 르’독재관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사용하는 그의 탁월한 두뇌를 엿보게 된 다. 더 나아가 독재관 카이사르를 이어받아 곧 추후에 또 다른 카이사르 독 재자, 즉 다른 말로 황제의 권한을 강하게 키운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120 버려진 예수
그가 바로 첫 카이사르 황제로 탄생하게 된다. 그의 별명이자 이름인 아우구스투스는 문자 그대로‘성스러운’혹은‘신 성한’그리고‘존경받는’뜻의 의미다. 그러나 이들 원로원들 스스로의 생 각에 그것이 조금도 신이라는 뜻으로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원로원 들과 기타 로마 시민 지도자들에게서 공화국에 견줄 수 있는 대등한 자로 혹은 경의와 존중 받는 자로서 최고의 자리로 위협된다고 한다면 이들이 이러한 사안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먼 베이커의 저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을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신들의 관계를 틀림없이 암시 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신성한 신호를 읽는다는 라틴어 단어 ‘augurium’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식으로든 종교 적이고 신성하고자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을 품고 있다.”20 그는‘아우구스투스’라는 단어와 그것이 사용되어질 초기의 사건은 반드 시‘혁명의 전조’라고 언급하고 있다. 결국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승화 되어 황제로 거듭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이자 현재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 그 이름을 빌려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전후를 지켜보면서 그는“일순간, 옥타비아누 스는 사상 유래가 없는 최초로 국가의 모든 권력을 혼자서 손에 움켜 쥐었 다”라며 불쾌한 뒷맛을 남기는 듯 그의 명성과 호평을 글로서 여운삼기도 했다.21 █ 정체성의 은닉 █ 옥타비아누스 혹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그가 가진 야망을 원로원들에게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21
처음부터 숨겼다. 또한 수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 속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전략 속에서 밝혀지게 될 다양한 직업과 사상을 그는 무차별적으로 흡수하 고 적용했다. 그는 전략가였고 법률가였으며, 사상가이자 공연연출가, 시 인, 연극인, 더욱이 평화애호가였으며 발명가였다. 그런 전략을 펼치면서 악랄한 존재였지만 처음부터 밝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야심을 숨기며 행보 를 이어갔다. 그렇게 자신의 야망을 천천히 옷깃의 단추를 풀듯 서서히 드 러내기 시작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예수도 신 성과 인성의 양면성을 처음부터 드러내지 아니한다.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후 그의 종손자이자 양자 그리고 상속인으로서 지명되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드러낸 것 중에 하 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은 다름아닌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자신을‘카이사르’라고 부르길 요구했다. 그 사건의 발단은 사람들에게 남 겨진 이미지, 즉 로마인들에게 강력한 자석의 힘을 발휘하는‘카이사르’라 는 브랜드 이미지를 잘 사용했다. 그의 주장대로 탁월한 선택을 했으며 나 중에야 비로서 그 선택의 올바름이 증명되게 된다. 카이사르가 죽던 바로 그 일로부터 7일 연속으로 해 지기 직전에 나타난 혜성으로, 보통‘카이사르’라고 부르면 그 별명에서 신적인 영향력을 발휘 하게 되는 신비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단어가 가지는 힘을 신으로 추대되는 확증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고, 이 사실이 고의 로 만들어 퍼트린 소문이든 진실이든 간에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한다.22 로마 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그때, 그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집권 한 얼마 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로마의 식민지에 지배를 받았던 유대 땅 위에서 숨을 쉬고, 그 땅 위에서 자연과 대지를 누비며 이제 곧 살아갈 것 이다. 어린 예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반대로 잔잔한, 그러나 폭풍을 몰 고 오게 될 유대 백성들 간의 추종자로서 유대인들은 그를 따른다. 그를 찬 양하는 소리가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의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널리 울 122 버려진 예수
려퍼진다. 그러나 인간의 질투와 배신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다 더 높고 푸 르른 명성과 아름답고 영광스런 광경이 유대 땅에 몰아치자 적대자들은 예 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가 죽는 시간 정오부터 오후 3시 사이에 암흑이 온통 하늘에 들어 찾고 그가 죽자 비로서 땅이 진동하고 무덤 돌문 이 열리며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쪼개지는 놀라운 사건이 터지는 결과가 일어난다. 그것 또한 카이사르의 죽음의 징조보다 더 뛰어난 기적을 보인 것을 옥타비아누스가 알았다면 그는 자신의 별명을 아마도‘예수 황제’라고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 사건을 아무 말 없이 지켜 보고 서있던 자들은 하나같이“그 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떠오르게 하듯 말이다.23 비록 부활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로마 백성들 사이로 영웅이 되었던 카이사 르의 죽음 후의 징조처럼 신의 아들로서 죽음의 증명이 자연을 통해서 나 타나고, 또한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복음서의 첫 기적 중의 하나인 별이 나 오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동방박사들(별을 연구하는 자, 지혜로운 자 그리 고 혹은 천문학자들)의 인상과 아주 흡사한 사건도 동시에 말이다. 사실 카이사르 살인 사건의 징후가 진정성을 무시하든 안튼 아무 상관없 이 진정 로마인들이 그 별이자 혜성을 보았거나 그 소문을 들었다면 그것 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즉 양아버지에게 절대적인 신으로서 추앙 받 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진정 컸다. 드디어 그로부터 진정 자신을 부를 때‘신적인 용어’를 남발하며 그렇게 출발하여 곧 초기 황제 의 권한을 가지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이자 카이사르 황제의 통치가 시작된 다. 추후 그러한 권한이 계승되어 다른 황제의 등극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미치게 만든다. 그렇게 그는 신으로서 자신을 극대화시켜 군사적인 면에 서 혹은 정치적이자 권위주의적인 외적 요소를 부각시킨다. 실제 키가 작 고 왜소해 보이는 옥타비아누스의 단점을 스스로 숨겨 거의 드러날 수 밖 에 없는 자신의 단점을 왜곡시켜 버린다. 결국 다른 것을 부각시키는 작전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23
으로 그에게만 존재하는 전혀 다른 영웅적인 모습을 차츰 보여주기 시작했 다. 그와는 다르게 신이자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될 예수, 그는 정작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처럼 자신이 진정 만들고 가꾸어 놓은 곳 인 하늘과 땅의 총체적인 권한을 이어받은 유일한 아들이었으며, 통치자로 방치하게 두어도 손색이 없는 그에게는 뜻밖의 반대로 전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누설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대립적 구조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 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 가지 않았다. 성경에 비춰볼 때 이사야의 예언의 메시지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통해 그의 길을 준비하였고 예수는 다만 그 길을 가고자 한 것밖에 없다. 죽음이라는 침묵 과 함께…. 예수는 그저 겸손하고 온유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받 았던 자24로서 살아갔고, 세례 요한을 통해 처음 그가‘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 고백25으로 이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비록 추후에 드러나 겠지만 예수의 육체적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잉태소식이 전해지면서‘임 마누엘’로서 구약의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하나님 의 아들이자 세상을 구원할‘구주’라고 부여 받았지만 부모들은 이를 숨긴 다. 더불어 동방박사에 의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 났다는 소식에 유대 사회는 들썩거렸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헤롯의 살인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갔기에 처음부터 구세주 왕으로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유대 율법의 준수 사항인 장남은 반드시 할 례를 받아야 하는 일로 아이 예수가 할례를 받는 때에만 일부 당시 대제사 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자들이 보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유대인들도 예수라 는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 당시 구세주가 이 땅에 발을 딛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백성들은 틀림없이 베들레헴과 예루살 렘 성전을 배회했을 것이다. 124 버려진 예수
예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르게 자신을 신으로 서 부각시키는 일을 거부하고, 극도로 자신의 존재를 최고로 올리기 위해 온갖 분위기를 만들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옥타비아누스처럼 자신을 황제 혹은 신으로 추앙 받는데 스스로 준비하 여 극히 예민하게 생각한 반면, 예수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함부 로 남발하지 아니하고 온통 다른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진정 안타까운 것은 예수가 타인의 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실제 그렇게 드러내었음에도“하나님의 아 들”이라는 말을 사용하려 했던 깨끗지 못한 영들에게도 호통을 치며 말하 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극단적인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26 복음서에서는 나병 들린 자를 고치는 기적을 선사함에도 그자에게 경고 하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요구하시거나27죽은 자를 살렸음에도 아우 구스투스 황제처럼 신으로서 자신을 추대하고 싶은 마음도 강렬하건만, 그 는 절대 이러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28 다른 일상에 서 본다면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자들에게 물음으로서 세상에서 자신 을 누구냐고 물어보는 질문을 통해 세상의 분위기가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 고, 어떻게 조명하는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판단을 묻기도 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길 자신의 마지막 예언을 함으로 장차 죽임을 당하고 사흘(3일) 만에 다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커다란 기적을 작은 항아리에 담 가두어 내내 숨기다가 제자들에게만 선포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충고한다.29 로마 황제와 비교해볼 때 다소 황당하면 서도 엉뚱하기 서슴없다. 기적을 보고 싶어 하던 자들에게서 멀리 떠나가 는 당돌한 행위30까지 펼쳐 보이는데 강한 자만심을 넘어서고 있었다. █ 권력 승계 █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양아버지로부터 받은 높은 권위와 권력을 본받아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25
야 함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했다. 그렇게 이어받아 사용함으로 그것 을 무기로 삼아 소화시키는 황제의 정가운데 길을 가는 반면, 예수는 자신 의 길을 돌아서 자신의 일을 꼭꼭 숨겨두어 전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 록 행동하면서 그러함을 은근히 기대하고 그렇게 피한다. 그저 자신을 포 장하는데 급급하다. 어째든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백성들에게 신으로 추앙 받기를 애썼던 반 면, 예수는 신으로서 추대 받는 것을 일체 거절했다. 그것이 아우구스투스 와 예수의 다른 점이며 나름대로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속에서 그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B.C 17년, 아우구스투스는 마치 자신의 양아버지와 같은 형태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로마 시민들에게 지상 최고의 화려한 공연을 사흘 동안 펼친다. 신전과 사당에서 거창한 제례와 전차 경주, 희극과 비극 의 공연, 재주꾼들의 묘기 경연, 전투 놀이, 동물 사냥 등등 주도 면밀한 사 전 준비와 철저한 분위기 속에 관중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축하 퍼레 이드로 흥분을 자아내어 로마가 살아있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 같은 분위기 를 연출해낸다. 사전적 열성적인 길거리의 홍보덕분에 그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고 감 독 그리고 사회자로서 자신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전 110년마다‘시 대의 경기’의 축제를 열었던 경험을 더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 어떤 공연 보다 더 화려하고 눈요기 거리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원로원의 공화정 시스 템과 자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조화롭게 만들어 피와 독재의 얼룩진 잔해를 말끔히 제거하려는 그의 치밀한 계획 안에 모든 것들이 제대로 먹히고야 말았다. 그렇게 늘 그가 지목하고 주목하는 것마다 새로운 매력을 발산했다. 원 로원들의 발을 묶었던 탁월한 정치가, 로마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리 더십을 가진 경영지도자다운 면모들, 철학과 문학 게다가 법학자로서 다수 126 버려진 예수
를 섭렵함으로 확고부동한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결국 공 화정의 원로원들은 빈 껍데기로 전락하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벌어 졌다. 실로 중국의 제갈량과 맞먹는 교활하면서 책략으로 무장한 병법과 영리 함을 겸비한 최고의 지략가가 아닌가? 그런 반면에, 하늘의 권력을 받아 누리는 예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박하고, 무뚝뚝하고 조용했다. 때 로는 유대인들의 사상을 무자비하고 날카롭게 공격하고 바로 피하는 하나 님의 아들인 신으로서 실망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책임 회피하 거나 교묘히 죽음을 피해가는 철없는 청년이라고 그의 생각을 진단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바다 위를 걷기도 했고,31 자신의 메시지를 듣고자 모인 오천 명의 배를 불려 먹이기도 했고,32 오래된 병자를 고치기도 하였지만33 유대인들의 예 수를 향한 질투와 증오로 심지어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사이, 이제 곧 초 막절이 가까워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자신의 친척 들에게서 느껴지는 바, 그가 혹 유대인들을 무서워하는지 아니면 필시 다 른 사정이 있어서 숨어있는지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묻 혀서 일하는 자가 없다고 하는 친척들에게 호되게 구박 당하기도 했다.34 █ 시스템 직무 █ 유대인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피하는 예수와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모든 로마 백성들과 식민지 속주들의 영향력을 잘 발달시켜 로마 시스템을 주무른다. 그렇게 모든 자들을 두루 섭렵하여 로마 전체를 부강하게 하고, 나라 전체를 융화하여 발전하는 시스템을 사용하거나 훈련시키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했다. 로마의 황제와 다른 면모를 보이는 정체성의 우유부단한 성격 같은 예수 는 유대 시스템을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 모든 일마저 무시하고 유대인의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27
왕으로서 유대 사회의 변혁을 꾀하여 궁극적인 로마 통치의 시대에서 자신 의 동포인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독립에서 벗어나게 하 는 기지와 술수를 사용하기는커녕 늘 유대 지도자들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모습으로 예루살렘과 유대 지도자들의 주위만을 맴돌고 있었다. 그가 유대 에서 말하는 메시야인가 하는 의구심에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유대 사 회에 소외된 계층인 가난한 자 혹은 굶주린 자, 그리고 병든 자와 더불어 유대 사회에서 격리된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현재의 식민지 삶을 즐기는 듯한 풍경을 비추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가 메 시야라고 한다면 비웃음만 늘어간다고 별로 해가 되지 않는다. 개방성과 유연성이야말로 국가 혹은 회사에서는 최대의 핵심경쟁력이라 고 말하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맞물려 굴러들어온 돌이 정체된 조직을 살리는 로마시대의 선택된 인재 활용에 적극적인 모습과는 달리 예수는 그 러한 주제로부터 삶의 목표나 방향이 빗나가게 되어 버린다. 예수가 이 땅 에 와서 정체된 돌을 제거하기보다 정체된 돌과 따로 움직여 정체된 돌에 게 전혀 힘과 손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정치적 혹은 군사적 힘이 들어가지 못하고 이내 풀이 죽듯 체념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효과가 그의 전략일까? 사회와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예수는 고작 12명의 제 자만을 데리고 유대 안에서만 놀았다. 간혹 사마리아 혹은 유다 땅 국경 너 머 외각 지역만을 잠시 들르는 정도로 좁은 무대(?)를 거니는데 그쳤다. 특 히 갈릴리 호수 주위를 맴도는데 안주한 예수와 반대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태생이 로마인은 아니었지만 유럽 전 세계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 는 초라한 속주의 청년에서 시작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율리우스 카이 사르 독재관의 양아들이 되었다는 점도 잊어선 안된다. 그럼으로 그는 예 수의 생애와 차별된 전략을 세우게 된다. 사회·경제에 걸쳐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일은 목표와 방향성이 선택된 후에는 과감하게 해결하고자 노력한 128 버려진 예수
다. 절대자, 그 신이 후원하는 시스템을 추구하는 이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엄밀히 따져 보게 되면 당시로서 신의 편은 아마 아우구스투스일지 모른 다. 사는 동안 그의 업적은 예수의 삶의 그것보다는 훨씬 방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예수의 행보적 측면에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비 길 수 없는 광활한 땅 위에서 펼쳐지는 판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때 는 그랬다. █ 평화 █ 로마 황제에겐 늘 숙제가 하나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속주들과 로마 인들을 안정 노선에 들여놓느냐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추후 펼칠 황제로서 로마의 전부를 자신의 손 위에 놓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데 아우 구스투스는 그러한 손쉽게 구상할 수 있는 전략적인 방법과 함축적인 기호 로서‘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표어를 제시하여 안과 밖의 평 화를 동시에 지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드넓고 그 광활한 유럽의 땅을 과감 하게 통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로마의 새로운 전략인‘팍스 로마나’ 를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그는 과거 이룩한 군사력을 보급품과 증원부대로 강화시켰고, 그러한 속 주들을 제대로 관리하는 제도를 마련하는데 이른바‘전군 최고 사령관’이 라는 직책을 스스로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원로원 의원들에게서 먼저 언급하여 나온 사실인데,‘공화정 복귀 선언’이라는 타 이틀을 그들이 제공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들의 군사 방위를 위탁하 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 그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원래 속주들의 방위는 원로원들의 권리와 의무인 것으로 속주의 방위를 펼치기에는 로마 땅의 영역이 너무나 크고 방대해서 이들 원로원들이 감당 하기에는 버거워하는 생각에 초기에 감추어진 아우구스투스의 겸손과 칭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29
송만을 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보답하려는 의미로 제안 한 것이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아우구스투스는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 니었다. “하찮은 것들은 나에게로”라고 하며 오히려 제안을 역이용하려는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부유하고 다스리기 쉬운 로마에서 가까운 나라들은 원로원들이 방위를 맡고, 나머지 적들의 침공이나 적대적인 나라들의 귀찮 은 행위를 맡아야 하는 먼 속주들의 일들에 자신의 일임을 맡기는 방법을 선사하여 원로원들의 귀감이 되게 만든다. 이런‘가증스런 위선’울타리에 숨겨진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 이들은 아 우구스투스에게‘최고의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전 군 단의 사령관으로서 권한과 지휘라는 권력을 쉽게 내어 주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그의 두뇌에서 뿜어져 나와 군사력까지 거머삼키어 사실상 로마 의 모든 것에 막강하게 지휘하는, 그래서 사실상 모든 군력을 획득하게 되 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원로원들은 나중에야 비로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농락에 휩싸인 자신들 을 보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추가적으로 이미 그는‘아우구스투스 황제’ 라는 타이틀을 취득하였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역대 최고의 군사령 관, 원로원들과 대등한 호민관으로서 모든 권력과 권한을 송두리째 뺏기게 되어 아우구스투스 초대 황제의 명칭은 쉽게 얻게 된다. 예수에게는 어떠할까?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평화가 없었다. 늘 유대 지 도자들에게 평가받아야 했으며, 스스로 평화를 원하는 것보다 지독히도 검 을 택했다. 즉, 늘 목이 곧은 지도자와 백성들을 따끔하게 나무랐다. 자신 의 백성들은 여기에 없다고 했으며 유대 땅에 태어날 때부터 살인이라는 배경 속에서 메시야 예수는 죽음이 그를 도사리고 있었다. 유대 땅은 그 예수가 오기 전부터 이미 전쟁과 나쁜 감정들, 자칭 메시야 들이 우글거리기만 했다. 그 땅에는 평화가 전혀 없었다. 물론 그가 부활한 130 버려진 예수
후에도 여전히 로마는 이스라엘 땅을 다스렸고, 유대 땅 위에 펼쳐진 장엄 한‘팍스(평화)’라는 그 단어는 사치 그 자체였다. █ 죽음의 길 █ 아우구스투스 황제, 그의 긴 여정과 삶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했던 계기 는 그의 양아버지의 살해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건은 저주와 비난 속에서 대립적인 관계가 지속됨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런 양아버지의 과거 전력을 비추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의 업적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 했다. 죽음의 길…, 그 방향을 피하는 전략을 세워 당돌하면서도 치밀한 계 산으로‘숨겨진 야망과 위선’을 사용해야 했다. 어쩌면 시대가 만들어 놓 은 부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죽음보다는 삶을 원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야심가로서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나라의 다양한 시대와 인물들을 모여들 게 하여 문화와 인재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시대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아마 구약의 예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죽음을 향한 하나 님의 뜻…. 예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전혀 반대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의 목표와 방향성은‘죽음’이다. 그는 실제로 죽는 길을 선택하였고 적 극적인 죽음의 길, 즉 성경에서 말하는‘하나님의 일’을 향해 가는 고난의 길을 제자들이 만류함에도 과감하게 거절했다.35 그 이유는 아우구스투스 처럼 이 땅 위에 평화를 바탕으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아닌‘하나님의 나 라’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예수는 동시대인물로서 각자가 독자적인 결단과 그 에 맞는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듯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나라에 삶을 ‘팍스 로마나’라는 평화로운 길로 선택하여 현재 로마를 시작으로 하여 유 대지역을 포함한 유럽의 전역에 그의 과업은 밝히 드러나 남아있었다. 그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31
러나 예수는 그저 십자가에 죽는 길로 가는“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36의 내용처럼 그는 하나님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 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코자, 예수는 특별히 자신의 모든 능력을 로마 전 지역에 휩쓸고 다니는 존재로 부각시키지 않았다. 손 마른 자처럼 병든 자를 고치거나 죄인의 친구와 놀고 마시며 간혹 유대 지도자들의 간사함과 율법을 호되게 호통 치는 것이 전부인 듯했다. ** * 자신을 점차 드러내어 목적을 성취하려 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달리 예수는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 했다. 유대지도자 중 바리새인들의 눈 앞에 서 갑작스럽게 나타나 기적을 취한 뒤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사라지는 독특 한 행동37에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또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독특한 깨끗지 못한 영을 고치는 이적을 베풀자 두려워 동네사람들이 그를 내쫓기까지 하는 사건38을 잠시라도 묵상한다면? 그에 대해 도무지 뭐라 말 할 수 없기에 예수의 숭고한 사랑과 희망의 단어를 연결할 수 없어서 결국 속이 거북하기까지 하다. 로마의 황제이자 유럽을 통치했던 막강한 권력의 핵심에 율리우스 카이 사르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있었다. 예수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 자신이 있어야 할 온 세상의 황제로 등극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황제는 고 사하고 자신의 길과 하나님의 일마저 이루지 못할 것만 같다. 이 땅 위에 그 어떠한 업적도 존재하지 않게 될 거짓 선지자로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 과 같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죽음도 예수가 두려워했기에 그러하다. 과거 유대인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같이 대접받기에 결코 뒤떨 어짐이 없는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게 펼치지 못함에 변명 아닌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하거늘…, 그에게는 그러한 기색은 눈금만큼도 보이지 않게 되 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로서 혹은 그리스도로서 당시 예수의 추종자들과 그의 제자들 눈에 드러내어 일하지 않는 그를 어처구니 없이 답답하게 느 132 버려진 예수
꼈을 것이다. 로마사 연구에 관해서 세계적인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랭크 에드콕 교수는“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처럼 압도적인 지성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세계는 바로 그 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했다.”고 언급한다. 그와 반대로 예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하는 하늘의 지성을 지녔음에도 그의 세계는 자신을 필요치 않았고 세상이 그를 용납하지 않았음은 확실했다. 로마 백성들의 오랜 바람인 평화와 공존이라는 커다란 숙제를 해결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로서 세계가 그를 원했던 것과 달리 이제 예수라는 인물은 세계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아닌 듯싶다. 비록 내게도 성경과 예수에 관해 극단적인 배격을 가한 자로서 그를 한 시대 하나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처럼 시대를 요하는 한 인물로만 남았다면 나에게 이 책은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을 줄로 안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역 사가들이나 다양한 전문가들의 시대 흐름상 어느 나라든지 꼭 필연적인 요 소를 갖춘 영웅적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했고, 오늘날 그 어느 누군가 이 시 대의 흐름과 편견을 깨며 자신의 주어진 일을 넘어서 세계가 필요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생기고 그렇게 생각하여 목표를 최고 인재로서 세상에 있는 줄 안다. 그러나 현재 예수를 그때나 지금, 현대의 관점으로써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청년 예수는 오늘 아니 어쩌면 과거 유대인들 세계에 절대적인 유대 인의 왕처럼 필요로 하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가 결 단코 아니었다고 주장해야 올바른 성경관 해석이다. 이는 정말 당연한 듯 보였다. 그만큼 당시 유대인의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영웅과 인물이 그에게 부합 되지 못했고 단지 나사렛 메시야 예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리고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33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라고 여기는 올바른 예수 추종자들의 관점에도 지금 그 시기가 결코 부합되지 않거니와 여전히 전쟁과 핍박이 예수 시대 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과 굶주림, 가난과 편협된 부, 질 병과 재난, 범죄와 마약, 섹스와 향략 속에 허우적 거린다. 예수가 보란듯 말이다. 예수가 전한 사랑은 그 어디에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현대인들에 게 없다. 상호 관계가 아닌 극단적인 대립적 구도로서 안과 밖, 선과 악, 아군과 적군, 물과 불, 유전자와 대립 인자 사이의 관계와 같은 대등이 아닌 적의, 반목 혹은 적대적 항쟁을 하도록 심심찮게 만들어감으로 스스로 그렇게 유 도하는 예수로서 그의 삶과 행동은 당연히 유대인 세계관과 극한 대립을 보이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사회적 또는 국가적 이슈로 정치적인 메시야 혹 은 유대 통치자라는 왕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상황에 예수는 한 낫 가난 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자들, 특히 자신의 고향이고 자라난 터전이자 삶의 고요한 장소인 갈릴리 안에서만 맴도는 지극히 작고 소심한 형태의 전략가 일 뿐이다. 그의 사명인 인류의 구원 작전은 이미 패배하고 유대인들의 이 슈, 즉 정치적 독립에 전혀 맞지않아 퇴출됨은 어찌보면 당연하듯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당시 예수가 살았던 동시대적 시점에서 지금 막 상상한 다면 그 사실들이 못내 아쉽게 남는 바이다. 표징예언자들Sign Prophets 예수가 살았던 시대는 차마 꺼내기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고, 날마다 암 울했다. 민란, 폭동, 살인과 강간 그리고 학살, 굶주림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대인들은 애타게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그 심리를 이용한 많 은 거짓 메시야들이 만들어진다. 유대 역사에 참고하여 볼 때 수천 아니 수 만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고 사라졌다. 그들도 예수의 삶과 생애를 밟아 134 버려진 예수
아무도 모르게 묻히고 말았다. 어쩌면 시대가 예수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뜩 들게 한다. 아직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 메시야가 왔다거나 앞으로 오게 될 것인지 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니 그보다는 아직도 혈투가 난무하고 죽음과 고통 에 방치가 되는 비참함과 가엾은 선한 사람들에게 과연 예수의 탄생은 무 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표도르 도스트예프스키FyodorDostoyevsky가 말한“전쟁이 없다면 인류는 안락 과 풍요 속에서 정체되고, 위대한 사상과 감정의 능력을 잃으며, 냉소적이 되고 미개상태로 내려앉는다.”라는 그의 말에 수긍해야 하는 걸까? 유대 사회에 전쟁의 피는 안락과 풍요 속에 정체되지 않고 공포와 두려 움으로 뒤바꿔 버렸다. 유대 백성들의 속마음이 그것들로 들어차있는지 알 수가 없던 유대 지도자들은 이 모든 것을 방치했다. 오늘날 역시 이스라엘 땅 위에서도 과거나 현대 모두 똑같이 창자가 뒤집힐 것처럼 피비린내가 걷히지 않는 혈투와 복수극으로 파워 게임의 전쟁에 찌들어가고 있었다. 예수 시대 이전, 온 몸에 피와 잔인성이 가득 들끓어 넘치는 유대 인간과 사회를 로마시대와 주위 환경에서의 동일한 조건에서 닮은 현상 가운데 놓 여 있었다. 예수가 오기 전부터 이미 유대 땅에는‘강도들의 전쟁’,‘메시야 운동’, ‘예언자적 저항운동’들이 들끓었다. 심지어는 예수의 시대 역시 못지 않지 만 더한 것은 예수가 지상에서 사라진 연휴에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전쟁과 예수의 범주가 마치 다이나믹한 역학관계가 아닐까? 이 땅에 내 려와 군림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 세상이 그가 올 것을 미리 알고, 팔레스 틴 땅을 불꽃같은 폭력과 전쟁으로 뒤덮는다. 그리하여 예수의 탄생이 가 까울수록 더욱더 역동적이며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이제 강력한 장치와 같 은 역학관계로 인해 그를 위해 격렬한 음모, 기만, 사기, 절도, 폭행과 방 화, 게다가 살인과 같은 폭음과 함께 폭파시키는 역할의 원천에 기여하는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35
듯 관찰된다. 로마시대가 세계를 주름잡는 동안, 게다가 예수가 오고 나서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그가 남기고 간 이 땅의 흔적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것만 같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 스투스, 티베리우스 황제,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 본디오 빌라도, 네로 황제 등이 이 땅에 남긴 흔적과 자취는 여전히 피어 오르고 있지 않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부수게 할 것이고, 하늘에서 천 둥을 동원하여 이들을 치게 하여 땅 끝까지 심판하실 것이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하는 한나의 기도39가 지금은 먹 히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하루를 계산하여 얻은 일년의 365일에 몇십 배로 제곱하여 그 숫자만큼을 기다려온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려는 이들 가증스 런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는 저주를 퍼부어야 하거늘 이들은 이방인의 속주 가 되어 불쌍하게 구원할 자를 여전히 찾고 있는 것이 속을 태운다. 시리아 총독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Varus의 집권시기에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는“민중은 헤롯의 아들들과 그리스인들에게 저항하여 들고 일 어섰다”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이것을 가리키어“반헬레니즘적 목적을 가진 폭동”이라고 규명하였다.40 유대인들은 그 시리아 총독 시절, 늘 헬레 니즘이나 로마인들을 극히 싫어했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폭동을 일으켰 는가? 이들과 달리 여전히 연약한 마음들을 가진 대부분의 유대 백성들은 좌우 로 치우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어두운 눈과 마음에 비춰지는 메시야는 다르게 변질된다. 즉, 정치적인 메시야를 여전히 꿈꾸며 반란을 일으키고 카리스마를 가진 유대 지도자의 헛된 이상과 거짓 능력을 바라보 았다. 그 결과 로마의 정치 해방을 꿈꾸었던 인물들이 유대 본토에 판을 치 게 되어 버렸다. 136 버려진 예수
한 예로 헤롯1세(헤롯 대왕)의 부하였던“본토 출신의 왕”시몬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스스로 자신을 왕이라고 선포했다. 또 다른 자‘아트롱게스’ 라는 평범한 양치기였던 그가 자신을“제2의 다윗”이라고 소개하기도 하 며, 므나헴Menahem은 왕위를 노리고 왕의 의복을 입었다. 또한 시몬 벤 기오 라SimonbenGiora, 그 역시 왕권 계승에 눈독을 들이다가 처형당했다.41 예수의 시대에도 유대인들과의 파워 게임은 존재했다.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의 추종자들과의 막강 파워를 서로 자랑하며 힘겨루기가 한창인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작은 유대 땅 갈릴리 호수의 중심에 있는 나사렛에 서 시작하여 유다를 넘어 예루살렘을 끝으로 번져가게 되었다. 추후 베들 레헴과 이웃 작은 마을들까지도 한데 어울려 뒤섞여 터지는 반란이 유대 지도자들 혹은 로마 총독들에게 피곤한 나날들이었을 법하다. 무력 폭동의 기세가 이내 수그러지듯 하더니 또 다른 저항운동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더욱이 예수가 오던 해부터 대내외적으로 폭동과 전쟁의 소용돌이는 더욱더 거세지고 거칠어짐이 다양하게 몰아치고 있었 다. 과거 예수가 오기 전, 연속적으로 시리아와 그 맥을 곧바로 이어간 로마 의 통치에도 예루살렘은 이들 이방인들에게 강탈과 탈환함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더니, 급기야 B.C. 4년에 누군가가 세포리스Sepphoris라는 장소의 군사 물들이 들어있는 무기고를 부수고 전리품을 가로채어 동료들을 무장시켰 다. 그 일로 인하여 봉기와 민란에 참가한 자들 중 이천 명 가량이 십자가 형에 처형되었고 셉포리스 지역은 불에 의해 잿더미로 되어 황량하게 남아 버렸다. 추후에 다시 재건되어 로마는 다시 평화를 되찾은 듯 싶었으나 그 유대의 불씨는 여전히 숨어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누군가 그 자리를 뒤 엎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C.A. 에벤스C.A. Evans의 저서『Jesus(예수 - 지은이 역주)』에서는 다른 야 심가들이 등장했을 법한 자들로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 갈릴리 유다,42 기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37
샬라의 요한도 포함시켰다. 더불어 70년대에는 퀴레네의 루쿠아스(A.D.115 년), 시몬 바 코흐바(A.D.132-135년)를 추가적으로 등장시키며 거론하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 많았다는데 주목해야 했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메시 야 시대에 역시 메시야적 왕, 즉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다 림과의 사상은 전혀 맞지 않았다. 예수가 만들어간 메시야적 사상과 행위가 유대인들이 애타게 기다려온 메시야적 사상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큰 오산이다. 더불 어 그것이 예수 사후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오류적 판단력으 로 가득찼다고 가정해도 말이다. 예수 시대에 과격한 시위로 저항운동 집단의 불을 지핀 집단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그의 제자인 시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복음서에 등장하는‘셀롯이라는 시몬’43과‘드다’44, 그리고‘갈릴리 유다’45라고 불 리던 자도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예수 시대 사람들이거나 후대 사람들 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가 이룩하고자 하는 그의 나라가 아직 도달 하지 않았음을 절대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요세푸스를 주목하지 않으면 로마 안에서 벌어 지는 당시 예수와 유대적 상황에 점점 더 가까워지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 낼 수 있다. 즉, 요세푸스의 저서에 의하면 갈릴리 지역에 사는 갈릴리 유 다가 등장한다. 그는 실제 가울라니티스 가말라 출신이다. 자신의 출생지 와 상관없이, 그는 주로 갈릴리에서 당시 세 가지 거대한 종파, 즉‘바리새 인’,‘사두개인’,‘엣세네파’라는 종파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종파를 설립한 현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자다.46 A.D. 6년부터는 사마리아를 포함한 유대 지역 모두가 로마의 직접적인 속주로서 이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내야했다. 그 일이 저항을 만들었다. 퀴리니우스(시리아의 보좌관, A.D.6(?) -11년까지 통치)가 시행했던 호구 조사는 이러한 세금 징수의 토대이자 기초가 되어갔다. 이에 맞서 갈릴리 138 버려진 예수
헤롯 왕조 시대의 팔레스틴 땅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39
유다는 인간이 하나님 한 분의 통치를 받아야 함에 있어서 지극히 유일신 통치 사상을 들먹거렸고, 그럼으로 인하여 한 분의 통치에 기반되기 위해 이중으로 세금을 내야 할 명분이 사라지는 결과를 제시했다. 요세푸스는 이러한 사상을‘제4의 철학’이라고 명패를 내걸기도 했다. 그러한 사상의 토대가 A.D. 66-74년 유대 백성들의 아주 커다란 반란 의 시초를 이룩하였다. 그 봉기의 원인이 되어 결국 예수가 최초로 예언하 였고, 곧 예루살렘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예루살렘 성전이 불바다 가 되는 밤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그 몫은 이데올로 기 사상의 시초가 되는 흔적을 남기어 (시온주의 사상, 사회주의, 공산주 의, 민주주의 같은) 갈릴리 유다만의 능력을 시험하는‘열심당’으로 다가 와‘유대 이데올로기의 시금석’이 되어갔다. 갈릴리 유다에게 자식이 둘 있었다. 이 두 아들은 한 때, 그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결국 A.D. 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헤롯 대왕의 손자)의 사후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사상과 목숨은 세금을 걷 어가야 하는지 아닌지 정치적으로 매우 시급한 문제로 인해 로마 지방 태 수인 티베리우스 알렉산더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 당하고 나서야 종료되었 다.47 그 영향력의 파급효과는 카이사르 황제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할 로 마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곁들이게 되기까지 말이 다.48 앞에서 언급한대로‘젤롯당’이라는 헬라 명칭은‘열심당’으로서 시몬 역 시 이 단체에 속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근거의 확실성은 바로 로 마에 묻힌 한‘열심당’비문에 숨겨 있었다. 이 사람의 고향이 갈릴리의 세 포리스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49 갈릴리 근처 세포리스는 B.C. 4년부터 A.D. 39년 동안 로마가 직접 집권하였다고 한다.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다른 지역의 유대 활동은 어떠했을까? 복음서에서 알다시피 예수를 십자가의 죽임에 동조했던 자는 바로 헤롯 2 140 버려진 예수
세인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예수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죽인 장본인은 헤롯 대왕(헤롯 1세)이다. 그 의 아들에 의해 갈릴리 한복판에서 당시 로마에서 들여온 헬레니즘 문화를 촉진시킨다. 근처 사마리아의 중심지인 세바스테는 헬라 문화에 이미 젖어 있던 도시였다. 결국 예수가 거느렸던 갈릴리 주변에는 이미 과거부터 헬 라 문화의 영역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A.D. 44-46년 쿠스피우스 파두스 총독 시절, 유대고대사와 사도 행전에 기록된 표징과 기적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인 드다Theudas라는 자는 사 람들을 모아놓고 요단강을 갈라지게 해 보이겠다고 했다. 또 그는 그리로 모인 자들에게 자신을‘유대인 마술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결국 로마 총독이었던 파두스는 군대를 보내어 군중을 죽이고 체포했으며 마술사 드 다는 참수형을 당했다.50 A.D. 62-64년 동안 유대 총독을 지낸 알비누스는 유대 전쟁이 있기 4년 전, 어느 날 유대인들이 평화로운 예루살렘 성 주위를 돌며 예루살렘의 멸 망을 계속해서 부르짖는 자라고 하는 자를 자신 앞에 끌고 온다. 결국 그는 한 사내를 추궁하고 급기야 고문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체와 출신지, 외치 고 다니는 이유를 물어 보았지만 헛수고였고, 그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 하게 채찍질을 당하는데도 그는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울지도 않 았다. 오히려 그렇게 고통을 가할 때마다“화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아!”라 고 외치기만 하였던 자가 바로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였다. 결국 그가 미쳤 다고 생각하고 다시 풀어주었다고 한다.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그의 선포는“동쪽과 서쪽에서 한 음성이 들려오 고 사방에서 한 음성이 들려오니,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말씀이며, 신랑 과 신부에 대한 말씀이며, 온 백성에 대한 말씀이로다!”라는 예레미야의 구 절51을 외치며 장막절을 준수하고 있던 때에 성전으로 들어와 말함으로 끊 임없이 예루살렘 멸망을 소리치기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과거 7여년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41
전부터 시작된 그 선포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매질을 당하기는 것은 부지기 수였지만 이들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그의 목소리를 울 려댔다. 절기 때마다 외쳐댄 지도 어언 7년 이상이었던 아나니아의 아들 예 수의 목소리는 이겼다. 그의 눈 앞에서 예루살렘은 포위되었고, 그제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멈추기에 이른다. 로마 군의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이 그에게 명중하면서“예루살렘과 그 백성과 그 성전에 화 있으리라!”라고 외치고 또한 연속으로“또한 내게도 화 있으리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러한 상황과 징조에 대해 요세푸 스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주제와 연관이 있는 것을 사용 하는데, 그는 그 용어를‘쉐키나’라고 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던 기간에 유대 반란군과 요한(?)에게 예루살렘 성 전을 두고서 연설을 하는 티투스의 말을 들어보면“… 저주받을 이 악당들 아! 그런데 지금 너희는 성전 안에서 시체를 짓밟으며 돌아다니고 있지 않 느냐? 너희가 그곳을 더럽히도록 놔둔 것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내 조 상의 신들을 두고, 그리고 이 도시를 굽어본 적이 있는 어떠한 신(여호와 하나님)을 두고도 맹세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신도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진 것이 하 나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게 되는‘쉐 키나’라는 이해방식을 요세푸스는 기본 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P.W. 버넷P.W. Barnett 의 저서『Sign Prophets(표징 예언자들 - 지은이 역 주)』에서 그는 정치적인 지배층인 유대 지도자들이나 총독들에게 보통 이 들(앞에서 언급한 민란 주인공들)을 위험한 인물로 여겨져 강제적인 무력 으로 진압을 하는 것에 위안 삼아야 했다고 하며 이들이 바로 표징 예언자 Sign Prophets들이라고 가리키기 시작했다. 심지어 네로 황제의 취임 이후 자신은 로마에서 파견한 유대 총독으로 ‘펠릭스’라는 자를 통해 표징 예언자들을 단속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네로 142 버려진 예수
는 순리를 역행한 행위와 재물에 대한 탐욕, 그리고 자신의 운명의 힘을 기 만하기 위해 자기 형제와 아내 또한 어머니까지 살해한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결국 그 황제의 통치기간에 못지 않은 혈투와 살인, 그리고 거짓 선 지자들이 판치는 세상임을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자세히 드러내고 있었다. “… 또 다른 사악한 집단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 았으나 살인을 일삼는 자보다도 더 악독한 마음을 먹고 예루살렘의 평 화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기꾼이자 거짓말쟁이였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속여서 소요와 폭동을 선동하기를 일삼았다. 마침내 그들은 백성을 광야로 이끌고 가서,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독립을 선포하시는 표적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펠릭스는 이를 반란의 첫 조짐으로 파악하고 기병대와 중무장한 군인들을 보내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었다. 유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몰고 온 자는 이집트 출신의 한 거짓 예언자였다. 이 자는 속임수를 사용하여 기적을 행했고 자기를 예언자라고 말했다. 속임수에 넘어간 3만 명의 사람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를 돌아 올 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갔다. 그는 자기와 동행한 무장한 자들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예루살렘에 쳐들어가서 로마 주둔군을 습격하고, 자신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주권자가 될 것이라고 외쳤다. 펠릭스는 로 마병사들을 동원해 이 자를 공격했다. 온 유대 백성도 로마에 맞서 방어 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그 이집트인을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은 도주할 수 있었으나, 그의 추종자 대다수는 죽거나 체포되었다. 나머지 사람들 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피신했다.”52 요세푸스도 이런 상황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과거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며 구원의 길을 예비하였고, 그럼에도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43
불구하고 인간 자신의 무지로 인해 유일신 여호와보다 추월하는 이방신 섬 김의 자세가 문제의 시초였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는 그러한 자세가 이들의 고통을 더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땅은 이제 반란과 민란 그 리고 저주의 땅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예수 사후에도 유대 나라는 좀처럼 쉴 수가 없었고 조용해지지도 않았다. 마치 병든 몸에 염증이 도지듯 또 다른 지역에서도 마술사들과 강 도들, 그리고 예언을 빌미로 유대를 장악했다. 심지어는 유대 총독, 알비 누스와 결탁하여 뇌물을 받았던 패거리들이 약탈과 방화, 심지어 살인으로 번져가는 이들의 행위에 그 누구도 제동 걸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드 러내어 공개적으로 허용할 정도로 유대 곳곳의 도시들은 그야말로 아수라 장이 되어갔다. 그 연속적인 씨앗의 결과가 이제 예루살렘 멸망의 전주곡이 되어 저주와 죽음의 벌건 핏빛 같은 것들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 위로 뿌려져 갔다. 그 러한 사건들이 점점 커져 가는 일만 남은 듯했다. 이러한 전쟁과 폭동은 예 수가 말한 참된 메시야적 운동은 아니라고 주장함을 성경에 나타내고 있는 데“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53라는 거룩 함이 수놓은 하나님의 마음 사이로 이들에 의해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마음과 함께…. 144 버려진 예수
▐ 3장 미주 ▐ 1. C.J. Gadd, Ideas of Divine Rule in the Ancient Near East(London, 1948), p33. 2. 오비디우스,“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천병희 옮김, p734-740참조. 3. 아브라함 J. 헤셀, 예언자들, 삼인, p672. 4. 신명기 33:8~10. 5. R. de Vaux, Ancient Israel, New York, p 113-114. 6. 이사야 33:22. 7. 스가랴 14:9. 8. 이사야 56:10. 9.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p35. 10. 요한복음 19:15-16. 11.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기, 2012, 천병희 옮김, 숲, p39. 12. Sallust, The Catilinarian War, 54.4. 13. 아드리안 골즈워디, 로마전쟁영웅사, 강유리 옮김, 말글빛냄, p296. 14.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한성례 옮김, 부엔리브로, p33. 15. 마태복음 22:21. 16.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부엔리브로, p306. 17. 사이먼 베이커 지음,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웅진 지식하우스, p170 참조. 18. 아드리안 골즈워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비박스, p836. 19. 누가복음 2:1. 20.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사이먼 베이커, 웅진 지식하우스, p187. 21. Cassius Dio, Book 51.1. 22. Suetonius, Life of the Deified Julius Caesar, p88. 23. 마태복음 27:54. 24. 누가복음 2:52. 25. 요한복음 1:34. 26. 누가복음 4:41. 27. 누가복음 5:14. 28. 누가복음 8:56. 29. 마가복음 8:29. 30. 누가복음 4:43. 31. 요한복음 6:19. 32. 요한복음 6:12. 33. 요한복음 5:9. 34. 요한복음 7:3. 35. 마태복음 16:23 36. 요한복음 6:29. 37. 마태복음 12:15. 38. 마태복음 8:34. 39. 사무엘상 2:10.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145
40. 게르트 타이쎈·아네테 메르츠,“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p218. 4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1권, 박정수∙박찬웅 옮김, 나남 42. 사도행전 5:37. 43. 누가복음 6:15. 44. 사도행전 5:35. 45. 사도행전 5:37. 46.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1권, 박정수∙박찬웅 옮김, 나남, p200. 47.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102. 48. 마가복음 12:13. 49. 게르트 타이쎈·아네테 메르츠,“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p264. 50.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편, 정옥배외 옮김, IVP, p390. 51. 예레미야 7:34. 52.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권, 박정수∙박찬웅 옮김, p229~230. 53. 요한복음 10:10. 146 버려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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