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한 영적인 나라와 달리, 일반적인 국가에 대해 나 열하는 마키아벨리의 책에서는 권력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비도 덕적이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수단으로 정당화함을 묵인하기도 한다. 왜냐 하면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빈번히 만들어 놓았고, 곧 그런 발자취의 권력 산물을 단지 옮겨 놓은 책이 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지상의 나라와 동일 하다면 지금까지의 해왔던 방식, 즉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 속에 서 피어 오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늘 나라의 방식이 아닌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시면 된다.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가끔은 폭력과 나쁜 수단이 용인되는 것을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고 있듯이 그 내용이 현실로 나타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 ** 황금에 눈이 먼 미국인들 사이로 인디언들의 잔혹한 살인을 일삼는 일이 벌어져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다. 기독교 선교와 일치시키는 헛된 신앙을 주장한 사건이 1864년에 일어난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 발생한‘샌드 크리 크 학살’ 의Sand Creek Massacre 42 기록을 살펴보면 존 시빙턴John Chivington목사와 관련된 일화는 기독교의 수치로서 유명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디언과의 싸움이었다. 물론 일방적인 싸움이었고, 승패는 확실하였음에도 학살은 계 속되었다. 그러나 처음은 달랐다. 이들이 들어오기 전, 다른 첫 정복자들은 서로를 만나고 친해지면서 처음에 가졌던 잔인하고 반항적이며 게다가 피에 굶주 린 자들로서‘야만인’이라는 생각은 사실 없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향한 편견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내 사라지고 이들은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 다. 그러나 그 행복한 나날은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서 이제 진정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전쟁이 되었다. 그 작고 긴 전쟁이 있던 그런 힘든 싸움이 끝 나고 과거 힘들게 일구어 놓았던 미국과 인디언과의 평화를 지지했던 윈쿱 제 7 장 바실레이아 299
소령의 업적을 후에 들어온 존 시빙턴 목사가 완전히 사그라뜨린다. 미국 연합 감리교회 출신의 존 시빙턴 목사는 100여명에 달하는 인디언 을 살해하는데, 처음 인디언 공격에 반대하여 만류하던 군인들에게 주먹 질하면서 자신은 인디언을 살해코자 왔으며 인디언을 죽이는 일에는 하나 님의 나라에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야 함을 인지시키며 주장을 밀어붙였다. 그 일로 죽음과 정복으로 인해 인간의 피를 말리고 싸늘한 나 뭇가지로 변한 인디언을 정복하는 일에서 자신의 업적을 남긴다. 영화『미션』에서 등장하는 두 주인공들의 삶과 사고와의 대조를 연상케 한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싸움과 죄악이 참 혹한 땅 한복판에서 잔혹과 죽음이 땅에 사무치고 하늘에는 찬양이 메마르 게 되어 가고 있었다. 때가 이르면 순교자들을 죽이는 것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완수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다녔던 것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였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자신이 한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일들이 마치 완 성된 것처럼 오해하는 일은 역사적 사건들을 들춰보면 많을 것이다. 과연 이들이 내세운 업적이 예수가 이룩하고자 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가? 현대인들이 과거에 느꼈던 사람들 마음 속의 심리에 내려 앉은 하나님 의 나라는 어떤 걸까? 그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있는 걸까? 아니면 저 먼 하 늘 위에 어딘가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나라의 개념인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존 시빙턴 목사처럼 바리새인들과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견의 오해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과거 부터 무언가 의사소통의 부재로 출발했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나라의 개념은 땅과 백성들 그리고 식량과 가축들, 이웃 나라와의 교역, 무역, 정 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존 시빙턴 목사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동일하게 선포했다. 그 러나 방법과 결과는 달랐다. 그가 이 땅 위에 온 이후 가장 처음에 선포한 300 버려진 예수
것도‘하나님의 나라’이며 계속적인 복음서의 연속적 선포에 빠지지 않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의 개념이 아 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로마 역사처럼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어 커다란 나라를 세우려면 당연히 무력과 전쟁, 정복을 주된 무기로 삼아 세계 다수의 소수 민족과 부족, 더 나아가 이웃 나라들까지 정복으로 인한 땀과 피를 흘려야 세워지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바라는 강한 나라가 아닌가? 나라를 부강시켜 넓은 영토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임대하여 이들이 먹 고 살기에 아무 염려 없이 풍족하게 살게 해주려는 영토와 백성들이 필요 하거늘 예수는 자신이 외치는 나라는 정녕 그러한 나라에서 볼 수 있지 않 다는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예수가 추구한 그의 나라와 달리 우리는 하나 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동분서주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 으로 애쓰고 있는 인간의 노력, 즉‘인간의 의’라는 그런 모습이 있지 아니 한가? 하나님의 나라의 오해에서 비롯된 점들을 지목하고 있었던 로이드 존스 목사도 로마 카톨릭 교회 역시 자신들을‘하나님의 나라’라고 오해하였는 지 혹은 의도를 가지고 사용했는지 몰라도 이것을 조장하여 스스로 하나님 의 나라를 일궈낸 예수의 제자들로 인한 교회를 무너뜨리고 그의 나라의 개념을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더불어 천주교에서 개혁을 주장하여 나온 개신교, 그들 역시 천주교 못지 않게 같은 일을 만든 사건으 로 전개했다. 이들은 순수한 과거의 개혁정신을 흐리멍텅한‘하나님의 나 라’에 목숨을 걸게 된 사태를 로이드 존스 목사는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솔직히 말한다면, 개신교도 동일한 오류를 범한 적이 때 때로 있었습니다. 세계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군대를 모으고 칼로 생 명을 위협하면서, 사람들을 강제로 믿게 하려고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 제 7 장 바실레이아 301
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43 그는 마치 샌드 크리크 학살 사건을 염두해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 하지만, 그러한 일들에서 과거 자신들의 수치를 아주 각성하지 않는다면 진정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이고 예수가 다시 온다 해 도 또 다시 되풀이되는 역사 앞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 시대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는 제법 20세기가 지나 고 있는 요즘에도 여전히 자신의 나라, 제국의 나라 혹은 영토적인 나라에 목숨을 걸고 자본과 토지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는 자들이 많다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포함되고 있었다. 그만큼 예수의 가 르침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예증이다. 이는 우리가 각 성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이를 오해하고 잘못 사용하게 만들 었는가?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하나님의 나라와 그 교회 - 지은 이 역주)』의 저자 보스G. Vos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 나라를“왕권Kingship, 왕 의 지배권kingly 과dominion 왕국”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권과 공간적 혹은 실제적인 국가 를a static entity 묘사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신의 통치이자 하나님의 주권 이the supremacy 숨쉬는 공간으로 원수의 정복인 정치적인 기본 개념에서 예수는 한 단계 뛰어 넘는 숭고한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그것은 구약성경 에 나타난 정치적인 해방과 왕국의 개념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려“우 리 마음 속에 자리잡은 마음”44이라고 하는 영적인 내면 세계를 향하고 있 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내면 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밖으로 표출하는 세계가 아닌 내면이라고 하는 우리 영적인 공간에서부터 시작되 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땅의 정치적 왕국의 개념과는 차 302 버려진 예수
원이 다른 내면적 영적 세계, 즉 사단이 꼭꼭 숨겨놓은 죄와 악을 전파하려 고 하는 전력과 전술을 가진 세계를 무너뜨리고 병든 자를 고침을, 약하고 소외된 자에게 희망을, 게다가 파괴적인 세력에서의 해방에 대한 내면의 소유물인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 안에 팔복이 있음을 예수를 통해 상기 시킬 수 있다. 상산수훈에서 말하는 여덟 가지의 행복 안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름다운 해석이 도덕적으로 혹은 영적인 최고의 상태를 가지고 나 타나고 있다. 최상의 즐거움, 즉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만이 소유한 그들의 내면에 가득 들 어찼다면 이미 내적인 천국이자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그의 것이 되어 버렸다45고 예수는 전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돈이나 재물, 그 모든 것 을 버리고 나에게 오라고 하면서 청취자들 각자에게 주어진 참된 의가 서 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46고 두려움 을 주기도 했다. 더불어 죄로 인해 한 쪽 눈을 실족하면 다른 눈을 빼버리 라고 하든지47, 원수를 사랑함과 동시에 자신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 해 기도하라48는 얼토당토 아닌 말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로 가히 힘든 바를 요구했다. 내 안에서 가진 하나님의 나라를 내 임의의 장난감을 조립하듯 혹은 요 리사가 입맛대로 주문한 식사에 비껴가는 것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내 자신의 생각한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그 생각을 멈추고 하나님의 영 안에 서 주장하는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의 소유인“의와 화평과 희락”49 인 것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필립 얀시의 저서『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그는 예수가 산상 수훈 에서 다음과 같은 절망 속에 숨이 막힐 듯한 목소리로 예수가 설교한 팔복 제 7 장 바실레이아 303
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팔복Beatitudes에 대하여 불후의 진리를 오랫동안 인지하여 알아차린 바, 예수가 말한 것들 중에 완고한 엄격함 뒤에 숨겨진 것을 이리저리 궁리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있다. 그의 엄청난 절대주의자 성향이 나를 옥죄 고 있는 것 같았다.”50 산상수훈을 억지라고 하기도 하고 그 글을 싫어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여 서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이고 읽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는 그 어느 나라의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사실에 주목하고 나아갔 다. 또한 그 팔복 안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노력하고 의를 이루고 선한 행위를 통해 도달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르고 모순됨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것을 노린 것 같다.“너희는 할 수 없으니 나를 보고 믿으라!” 는 내면의 소리를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우리가 누린 노력의 열매가 아닌 예수의 영과 함께 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팔복에 해당하는 자들만의 품성에 들어서야 한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예수의 길과 그의 가르침에 그 해답이 있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공간들…, 힘쓰는 자들에게 굴복 당하는 억울한 자가 되고 몰매를 맞으며 애통하고 울부짖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고. 그가 이룩한 길은 비둘기와 같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변 화 받고 나서 반드시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 수 안에 거한 자들의 참된 모습을 제자들이 나중에서야 체험했고, 그것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 영을 가지지 못한 유대인들은 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이 착해도 온순함을 가진 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과 세례를 거치는 자만이 들어가는, 그래서 단순한 하나님의 나라에 304 버려진 예수
들어서 그 관문을 통과하기에는 자신들의 종교라는 벽이 오랫동안 그 길을 막아 섰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르쳐준 하나님의 영과 세례 속에 드러나는 사랑의 길 안에 들 어섬에서 출발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곳이 영적인 길임에도 그 한 가지 단 계를 거치지 못하고 과거 구약적 오류의 해석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리스 도인들은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믿겨지지 못하고 납득이 될 수 없는, 그래서 그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는 몰상식 그 자체였다. 사도 바울이 말한“하나님의 의”보다 자신의 노력이 더 앞서 넘치는“나 의 의”는 결코 용납되지 못한다. 결국 예수는 반란을 일으키고 내란을 통해 나라의 소용돌이를 없애고, 게다가 로마 군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 의 피가 난무하는 고통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러한 세속적인 행위를 비껴갔다. 물리적인 전쟁과 살인을 통해 이끌어가는 1세기 로마시대의 통치전략과 그에 맞서는 민란과 혁명을 주도하고 가담하는 유대인들, 게다가 21세기 선진국들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들의 정복 전략들과 맞물리는 것들이 전혀 다른 팔복과 비교해서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현대인들을 포함하여 틀어잡 고 휘감아 검어쥘 수 있는 하늘의 시민권은 예수가 마련해 놓은 문턱에 다 다르기 전에 지쳐 유대인들은 스스로 그 권리를 짓밟고 유린하고 있었다.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중세 시대는 신앙과 도덕의 몰락 또한 동시에 교회의 또 다른 개혁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세 사람들의 생각은 오늘날 돌이 켜보면 어이없는 미소를 짖게 만드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지상에서의“하나님의 도시”라고 일컬어가며 복음 전파에 열정을 쏟은 선교사와 기독교 전통과 문화를 수호하려는 봉사인으로서 수도사, 신학을 제 7 장 바실레이아 305
바탕으로 철학과 법학, 건물 설계 등을 포함한 다양한 범위를 가진 학문의 발달을 이끌어 교회는 세금포탈과 과중한 부과에 목매인 자들에게 영적인 역할과 의학적 교육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열성에서 멀어진 뒤 변질되기 시작했다. 성지순례를 다녀옴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이 돌기도 했고, 천 상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하늘 위에서 천국이 지상으로 내려온 가나안의 땅이자 팔레스틴 땅에 머무르고 있는 성지의 예루살렘 울타리 안에서 죽음 에 이른다면 최후의 심판 날, 그무렵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음을 고백하 기도 했다고 한다.51 그런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행복의 절정the seventh Heaven임과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는 그 럴싸한 구실이요, 위장된 명목이 생기게 마련이다. 6세기 무렵, 계속적으 로 장악하고 있는 무슬림 사람들의 성지 순례 동안 없었던 통행에 관련된 세금, 순례자들에게 거두었던 상당한 액수의 통행세를 부과함으로, 10세 기 초 교황 우리바노 2세Urbanus II, 의1088-1099 재위기간 중 드디어 십자군 원정 이 그 발단을 이룬다. 그것이 바로 살육과 약탈 그리고 파괴의 진상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피에르Pierrer의 십자군 원정대는 니케아와 안티오크 를 점령하면서 위세를 몰아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 어오게 되지만 무슬림의 살육과 학살극은 극에 달해 무슬림의 피가 허리 에 차오를 정도로 종교적 갈등의 뿌리는 절정에 이른다. 이들의 행진과 십 자군 운동과 같은 높은 이상주의가 죽음으로 인해 피에 발목이 잠겨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그와 더불어 예수가 펼쳐놓은 하나님의 나라의 진수성찬 은 누군가가 먹고 남은 빈 접시만이 이들의 허기진 배를 더욱더 움켜지게 만들었다. 늘 시대마다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고 했다. 로마시대나 중세시대, 그리고 그들의 세대를 거친“과학과 이성으로서 306 버려진 예수
신을 배척한 현대 문명의 시대”까지 두루 추종자들을 끌어 모아 그들의 마 음을 흔들어 호소하고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현금과 부를 내놓아 뇌물이 성행하였고, 그럼으로 일반 부한 자를 가난하게, 무식 한 자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성경 지식의‘무능증’, 즉 뇌의 일부 또는 전부의 선천적 결여처럼 성경의 지식에 우둔한 자들을 선동하여 흡수하려는 지지자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았던 나조차 거부반응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가려 노력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어느 날 예수는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던 한 바리 새인 지도자의 초청에 응하여 떡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으로 하나님 의 나라에 진정 누가 들어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열쇠를 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일로 큰 잔치를 베풀고자 많은 자들을 초대하였다. 하 지만 일괄적으로 초대받은 자들이 자신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않 는다. 사유는 이러하다. 그들에게 마침 새로 산 밭일 때문에, 다른 자는 얼 마 전에 소를 여러 마리 구입한 것을 시험하고자, 또 다른 자는 장가 들어 바쁘다는 핑계로 잔치에 응하게 하려 보낸 자들의 거절에 대한 이유에서이 다. 이러한 이야기를 종을 통해 들은 주인은 상당히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이에 밖에 나가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돌아다니며 또 다른 자들을 초대했 다. 곧,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 그리고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초 대한다.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라고 충고한다. 즉, 그 주인은 바로 예수 자신이며 핑계를 대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로 비유한 큰 잔치에 초대되었음에도 초대된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았 다는 엄청난 비유로 사람들의 숨통을 막히듯이 조이고 있었다. 예수는 지금 하나님의 율법을 인하여 부유한자들과 일부 박식한 자들 제 7 장 바실레이아 307
로 구성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의 틈에서 돌을 맞아도 손색이 없는 엄 청난 파괴력을 지닌 충고의 메시지로 아마 이들은 뒷목이 뻐근함을 느꼈 을 것이다. 또한 일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자 마음이 뜨 끔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이들은 과거에 그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를 돌보기보다는 제사에 쓰 이는 물건들을 독점하여 이윤을 챙겼으며, 제사장들은 가난한 자의 식량과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수한 것들도 있었을 것이며, 병든 자들과 불구자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성전에 들이지 못한 자신들의 과오 로 신뢰가 하늘에 떨어진 것을 잘 알았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올바로 서지 못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포함하여 십 자군 전쟁이나 종교 전쟁, 게다가 현대 교회의 가르침과 예수가 전한 복음 의 오차와 편견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울렁증을 맛보고 있다. 그 일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같은 제사장들 혹은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끼리 도 양심에 가책을 가진 자들의 충고를 무시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개인적인 이득과 불의의 마음을 가지고는 주인이 이들을 다시 청하지 않 는 것처럼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주위의 소외된 백성들과 가난한 자, 그 리고 멸시천대를 받은 낮은 자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큰 잔치를 베푸는 것 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된 목적임을 예수는 이들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하나님의 선지자나 예언자들의 충고를 무시한 유대 지도자들 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 받지 못하거니와 자신들의 손으로 그 하나 님의 나라에 초대를 거부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받지 못할 자들에 대해 찾아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금방 쓰러질 기둥이 없는“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52 복음의 씨를 뿌렸지만“가시떨기에 혹은 돌밭에 뿌린 뒤 열매 없는 자들”,53 쓸 모 없는 가라지 같은“악한 자들”,54 물고기를 모은“그물에 걸린 못된 308 버려진 예수
것”,55 예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반대하는 자”,56 장터에서 피리를 불 어도“춤추지 아니하는 자”혹은 애곡하여도“울지 아니하는 자”,57 악 한 일곱 귀신(깨끗지 못한 영)이 함께 하고 있는“악한 세대”,58 본받지 말아야 할“이 땅에 지도자들”,59 멸망의 시기에 밭에서 일하다가 어느 새“버려짐을 당하는 자”,60 실과를 얻지 못하여 땅만 차지하고 있는“열 매 없는 무화과나무”,61 잔치에 초대한“참여하지 않은 자”,62 포도원 일 을 한다고 한 채 일을 하지 않고“뉘우치지 아니하던 자”,63 재산을 맡겼 음에도 땅에 묻어 둔 채 열매 맺지 아니한“한 달란트를 묻어둔 사람”,64 “모세의 자리들”에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65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들을 죽인 자로서“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66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서 스스로“지키지 아니 한 자”,67 천국 문에 들어가지 도 않으면서 문 앞에 막아선 채“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자들”,68 등불을 가지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미련한 처녀들”,69 “외식하는 자”,70 헐 벗고·굶주리고·병들고·감옥에 갇힌 보잘 것 없는 나그네를 돕지 않 은“저주받은 자들”.71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가르친 문장들은 전부가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위의 내용들을 통해 우리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 훈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순위를 좀처럼 이해하기 쉽게 나열하기에는 유 대인들이 너무 납득할 수 없는 비유와 비밀투성이다.72 심지어 열두 제자들까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서에서 말하지 않았는 가? 들어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들어도 이해할 수 없거나 깨닫지 못하여 돌 이킬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러한 비유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린 셈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부분들 중 다 한 가지씩 가지고 있 기에 그러하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이 가진 대부분의 사고에서 하나님의 제 7 장 바실레이아 309
나라는 바로 비유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일치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입장 상황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성경의 말씀이 내게 전달되는 순간 마음의 상태, 즉 뿌려진 말씀을 온전 히 잘 받아 먹는 자들은 상관없다. 다만 말씀을 받는 순간, 다른 누군가가 그 말씀과 생각을 채가는 자들이 있거나 세상의 염려와 걱정, 기타 욕심이 그 안에 자라잡고 있다면 그 결실이 사라지는 징조다.73 그러나 반대로 온 전히 씨를 좋은 땅에 뿌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열매를 맺 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공중의 새들이 깃들도록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적과 표적 그리고 여러 가지 예언을 통해 모든 것이 그의 나라에 숨겨 진 보물과 같이 꽁꽁 숨기기도 하며, 때로는 하나 정도를 열어 재치는 은유 와 직유를 통해 유대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늘 상기시키곤 했다. 이 대목에 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 가 나중 된다74는 예수의 가르침이 수면 위에 떠오름으로써 진리가 올바르 게 선포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 같지만 실상 예수가 언급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방인들이 이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우선적으로 맨 앞에 있어 일 순위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인지하지 못 한 자들이었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후에는 충격 그 자체로 남는다. 현대 인들 역시 새겨야 할 대목이다. 늦게 믿은 자들이 나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믿은 자들보다 먼저 들어갈 자들이다. 비운스런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복음서의 메시지는 어떠할까? 마태복음 역시 더 세부적인 혼인 잔 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진입에 대한 한 예를 들고 있었다. 천지 창조 후 아름다웠던 천국과도 같은 그 시기처럼 하나님이 이룩한 땅 위에 펼쳐진 온 인류의 임금이 베푸는 천국은 우리들에게 마치 하나님의 아들 310 버려진 예수
예수를 위한 기쁜 잔치로 비춰진다. 그 초기에 택함을 받았던 최초의 종들은 청원을 받았음에도 하나님 나라 의 잔치에 참여하기는커녕 자기 사업에 바쁜 자들을 제외하고, 심지어 청 함을 받은 자들은 잔치의 성대함을 알리는 왕의 종들을 잡아 괴롭히고 죽 이는 과정에 임금은 분노하여 이들을 쓸어버린다.75 이는 마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장정을 생각나게 한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종들을 초대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땅의 행복을 맘껏 누리고 있기에 하나님의 초대는 가히 먹고 남은 빈 껍 데기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유대인들에게는“택함을 받은 자”로, 이방인들은“청함을 입은 자” 76들로 비유한 예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인 것을 알리고 있 었다. 더 중요한 것은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극소수라고 하며 청함을 입은 자 들은 많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은 참으로 바늘구멍처럼 작고 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전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예수의 비유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한가지 놀라운 통찰력을 얻은 것 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만만한 그 어떤 쉬운 관문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재물 많은 청년도 들어가지 못했다.77 물론 그 청 년의 근심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석같이 믿고 살인과 도둑질, 간음과 부모 공경과 이웃 사랑 실천에 대한 그 행위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는 저주받은 자들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이 보기에 관대한 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치명적인 한계는 있었다. 부를 축척하는 욕심이 그러했다. 그 부자 청년은 하늘에 부를 쌓지 않고 이 땅 위에 쌓고 있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음에도 자신의 부 는 어쩔 수 없는 현대인들의 고민거리와 일치했다. 그 청년에게 죽을 때까 지 선택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가지고 있던 근심거리를 내내 머리 속에 제 7 장 바실레이아 311
짊어지고 살아갔을 것은 자명하다. 재물은 어느 사람에게도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재물에는 문제가 없지만 재물로 인해 예수를 따르는 행위에 제약을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문제의 현주소다. 마치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듯이 쉬운 일이 없거늘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되는 것이 누구나 한 번쯤은 다가오지만 하 나님 나라 안에 포함되기는 힘들다. 앞에서 나열했던 예수가 말한 대목을 리스트로 나열하여 모든 것에 해당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 쉽지 않는 길이다. 우리의 삶이 쉽지 않은 고단한 인생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 만으로도 어렵고 고달프게 느껴진다. 먼저 선택을 받았다고 좋은 것도 아 니고 그렇다고 늦게 믿어 더 좋을 것도 없다. 더욱이 이방인이 아닌 신의 선택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에게 좋은 일도 아니다. 우리 들도 예외일까? 비록 하나님에게 최고의 영예를 선사하기도 했고,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거들떠보지 않으려 노력했던 구약의 유대인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율 법들을 철썩 같이 믿고 의지한 후대의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 가 소수라고 한다면? 그처럼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는 것 같이 허무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더욱더 깊은 연구하고 짚어 넘어가야 할 관문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런 캄캄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하나님의 나라 취득 문제는 예수가 언제든 혹은 어느 때에도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시간과 공 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무시되고 버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 다. 예수는 우리들에게 잔치에 응하라는 사인을 늘 보내고 있다는 점은 확 실하다. 다만 우리는 그 잔치에 참여하고 먹은 음식을 받아 먹기만 하면 그 만인 것이다. 이 사실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312 버려진 예수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다. 세례를 의미하는 물은 기독교인들에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그것은 전 지구상의 기독교인들이 평생에 한 번을 거쳐야 할 하나님의 나 라 입장권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 즉“하나님의 영”혹은“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기정사실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이 빠져 있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뿐만 아니라 과거 초기 기독교 이후 로마 제국이 전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중세 시대 에 성령 세례보다는 물세례에 더 치중했다는 것이다.78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79 편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나라 현대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는 말은 바울의 두 번째 편지라고 할 수 있는‘고린도 교회’the church of 에Corinth 보내는 편지에 담겨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 받지 못할 자의 여부로 얼룩져 있었다. 당시 문화는 고린도 지역의 문란한 성 생활과 비리, 게다가 탐욕과 욕구가 팽창했다. 바울은 이러한 가운데 육체로서 가지게 될 사람의 습관이라고 하는 정 의를 다양하게 드러낸다. 위반한 사람, 즉 의롭지 못한 자 혹은 사악한 자 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한다. 미혹 받지 말아야 하는 정 욕에 강한 열망과 욕망을 가진“음란한 자”fornicator, 성적 부도덕한 짓을 서 슴없이 하며 이방신을 섬기는“우상 숭배하는 자”idolater, (종교적으로도 해 당되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인 감정과 육체의 교환인“간음하는 자”adulter, 여자를 너무 좋아해 몰래 훔쳐보는 것을 즐기는“탐색하는 자”effeminate , 사 람끼리 자신을 더럽히는 행동과 감정을 남용하는“남색하는 자”abusers of 제 7 장 바실레이아 313
themselves with ,mankind 손버릇이 나빠 절도 혹은 횡령하는“도적하는 자”the ,thief 더 가지려고 애쓰는 탐욕스러운“탐람하는 자”the covetous , 습관적으로 술타 령하는 주정뱅이를 일컬은“술 취하는 자”drunkard , 맹렬하게 폭언과 비방으 로 조롱하는“후욕하는 자”reviler, 바르고 곧지 않는 협잡하며 강탈함과 동 시에 탐욕스럽게 갈취와 폭리를 취하는“토색하는 자”extortioner …, 이런 자 들과 함께 예수 안에서“거룩함”과“의롭다 함”으로 씻음 받지 못하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서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80 바울은 또 다른 지역을 그러한 타겟으로 삼는다. 율법이 자리잡은 모세 의 의식에 문제 삼아 회귀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기독교 회심자들에게 바 울은‘갈라디아 교회’the church of Galatia 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행위에 대 한 문제를 삼았다. 그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받지 못 할 정당치 못한 행위와 무의식에 호소하고 있었다. 육체적 혹은 도덕적으로 불결한“더러운 것”impurity , 자유로운 욕망을 가 진 음탕함의 대명사인“호색한 자”the sensuality ,“악령의 힘을 빌려 행하는 마법 하는”혹은 약의 투여로 중독성을 가진“술수하는 자”the sorcery , 증오 를 가진“원수를 맺는 자”the ,enmity 다툼과 불화 또는 언쟁을 하는“분쟁하 는 자”the strife , 하나님에게 향한 질투와 마음의 흥분으로 언동하며“시기하 는 자”the ,jealousy 격분과 격노가 활화산처럼 끓어올라서는“분내는 자”the wrath , 선거와 관직 같은 개인적인 야망을 위한 한 집단에서 자신의 편을 가 르는 집단을 만들기 위해 음모와 계략이 숨어있는“당 짓는 자”the ,strife 구 분과 의견 따위의 충돌과 분쟁을 동원하는“분리하는 자” ,the dissension 자신 들의 개인적인 교리를 우세하게 돌려 분열을 조장함으로 의견과 목표를 갈 라서게 하는“이단아”the schismatic ,heresy 부러움을 통하여 시샘과 질투를 가 진 악의 화신인“투기하는 자”the ,envying 술에 대한 중독성에 약한“술 취함” ,the drunkness 시간과 돈에“술 마시고 떠들기”같은 흥청대는“방탕한 자”the ,revelling 이들을 경계하도록 바라고 있었다.81 314 버려진 예수
바울처럼 강한 어조로 편지를 써 분쟁과 시기들을 잠재운 것과는 대조적 으로 예수는 뉘우칠 줄 모르는 선택 받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인 유대인들보 다는 세리나 창녀가 차리리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예수의 메시지와는 상충되고 있었다. 예수는 오히려“택함을 입은 자들”보다 연민 에 싸인 불쌍한 자 혹은 죄를 지었지만“청함을 입은 자들”인 회개하는 자 들은 어떠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것이 다. 반면, 바울은 당시 교회의 분열과 교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가 르침과는 사뭇 다른, 또 다른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곤란과 미결상태인 묵 힌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과제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각기 다른 충돌이 존재 하는 것으로 다분히 비춰진다. 물론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이미 전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의 문제는‘배척’의 문제로 삼아야 할 일이고, 예수의 선택은‘포용’과‘관용’의 도입이 시급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관용에 대한 미덕을 보인 예수가 사뭇 칭찬한 경우도 있었다. 드물게 그 하나는 서 기관 중 한 사람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조건 을 갖춘 자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로마에 바쳐야 할 복잡한 세금문제와 죽음에서 부활하는 질문,82 포도원 농작주와 소작인과의 실랑이 속에 농작주의 아들과 종들의 죽음83 등에서 놀라운 질문들을 소화해내는 예수에게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 한 서기관이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 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 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 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84 라고 대답을 함으로 재물과 제사보다 사랑에 초점을 둔 밝은 마음을 가진 그는 일약 하나님의 나라의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가 혹 앞에서 언급한 나쁜 행실을 했을까? 이는 사실, 아주 가깝고도 먼 나라일 것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 그는 하나 제 7 장 바실레이아 315
님을 사랑하고 이웃 또한 역시 사랑해야 하는 제일의 계명이 바로 하나님 의 나라에 가까이 가는 정확한 지름길을 알았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 는 열린 마음이 그 속에 들어차 있다면 언제라도 예수 자신에게 올 수 있는 충분한 자격 조건을 갖춘 자이다. 그의 미래를 예수는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며 그 나라 백성이라면 바울이 금한 행 실을 버려야 한다고. 제사와 번제물에만 극단적으로 치중하는 유대인들 속에 하나님 안에 사 랑이라는 포괄적인 내면이 꽉 차고 넘친 자들을 보았다. 그 이방인이나 다 른 모든 피조물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 간과하고, 그 자신 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구와 편만한 생각이 자리잡았던 유 대인들을 예수는 보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버린 청함을 입은 자들이다. 비록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하늘과 같은 풍성한 열매 같은 심장을 가지 지 아니 한다고 가정해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자들은 과연 유일하 신 하나님을 믿고 주위에 배고픔에 떨고 있는 자에게 먹을 것을 공유하는 자, 추위에 언 몸을 녹이게 하는 자, 질병에 걸린 자를 깨끗게 하려는 노력 을 하는 자, 아픔 마음을 간직한 자에게 위로를 할 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그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자, 고통과 아픔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 마음이 넉넉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울은 문화와 예술적 측면에서 과도한 축제와 풍성한 잔치가 늘 가득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로마서에“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85고 말한 것을 기억 함으로,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는 거룩한 영과 피로서 거듭난“청함 을 입은 자들”이다. 택함을 입은 자들을 포함하여 청함을 입은 자들마저 하 나님이 주신 의를 가지고 더불어 평강은 물론이거니와 희락까지 곁들어 먹 고 마시고자 하는 자, 그들이 진정한‘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 그 본 316 버려진 예수
질을 가리키기도 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예수가 하고자 한 언급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 가 나열한 사실들을 열거한 후 그의 행실에 따르게 되는 마음을 성령과 물 로서 거듭난 후에야 비로서 준행할 마음이 시작되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발짝 내딛는 근간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 리스트 예수는 자신의 사명, 곧‘하나님의 나라’라 대한 복음을 전하는 일(눅 4:43)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에 더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다는 쾌하고 장한 행위 를 애타도록 놓치고 있었다. 그분의 손과 함께 더러운 영을 쫓아내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기 시작했다고 예수가 말했기 때문 이다.86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배운 것과 함께‘하나님 나라에 대한 핵심적 리 스트’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전한 복음의 비밀이 그 안에 숨어 있기에 그러하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가 말한 복음의 비유들과 숨겨진 진 리를 마음판에 반드시 새겨야 한다. A.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에 있다.87 그리고 예수가 태어나면서 이미 시 작되고 있었다.88 B.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거치는 유일한 조치는 거듭나야 한 다.89 즉,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예수가 말한 의미는 물과 성령(거룩한 영)에 의해 죄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들이 바로 인간의 죄를 탕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C. 그의 나라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유대의 율법을‘행하고 가르치는 자’가 들어갈 자이다.90 바리새인의 의보다 커야 들어간다.91 팔복에 해당되는 자만 들어간 제 7 장 바실레이아 317
다.92 D.‘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해야 들어간다.93 그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예수의 사역 안에 그것 은 꼭꼭 숨겨 있다. E. 이 땅에 가장 작은 자가 그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이다.94 예를 들어 어린 아이처럼 낮추는 자의 특권이 하나님 나라의 입장권이다.95 F. 하나님 나라의 시작 기준은 악한 영(귀신)이 떠나간 후부터 이미 시 작되고 있다는 것이다.96 G. 하늘들 나라에 빚진 자 한 사람처럼 갚을 것이 있는 자가 주인에게 탕감 받을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다.97 하나님 나라에 빚진 자 가 없다면 일부러 들어가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당연히 죄가 없다 면 세례와 거룩한 영이 없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갚아야 할 빚이 없는데 주인에게 찾아가 빚 탕감을 호 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H. 부자, 곧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무척 어렵다고 했다.98 하늘들에 쌓기보다 땅에 쌓기 때문이다. I. 하늘들의 나라는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집주인과 같다.99 곧 집주인은 품꾼이 오전 6시나 9시, 또 놀다가 오게 된 10시에 시작 한 품꾼 모두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고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하나 님을 믿는 시각이 달라도 동일한 추수의 품삯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J. 때론 세리들과 창녀들, 이 땅에서 가장 더러운 일을 하는 자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100 이 표현을 창녀 나 세리같은 사람이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닌 죄인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는 열려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K. 하늘들 나라에 들어갈 자가 빼앗길 위험 요소도 있다는 표현을 예수 는 말하고 있다.101 곧 그의 나라에서 이미 열매 맺어야 들어간다고 318 버려진 예수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획득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늘의 열매를 주관하는 하늘들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다면 이보다 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할 수 있다. L. 하늘들 나라는 혼인 잔치다.102 잔치를 벌이는 임금의 수라상 앞에 초 대 받은 자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초대에 응하지 않은 변명을 지닌 자는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M. 하늘들 나라에 들어가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예수는 경고했 다.103 곧 다른 복음과 이단에 의거 그리스도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자는 그의 나라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N.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보이지 않으나 여기에 있지도 저기에 있지 도 않고, 우리 맘 속에 자리하고 있다.104 혹시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고 가지 말라고 예수는 이미 충고했다. O. 하늘들 나라는 열처녀에 비유할 수 있다.105 달란트 비유처럼 늘 그 의 나라에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혹시 언제 올지 아는 자 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도 그 대답에 자신도 모른다고 침묵으로 일 관했다. P.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예수가 말하길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곧 주릴 때 주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 고, 옷을 입히거나,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보는 자 들은 자격이 있다고 했다. Q. 그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늘들(하나님)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충고 했다.106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쓰레기에 버리듯 우리가 손과 발이 범 죄하거든,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그 모든 것을 자르고 버린 후 돌 이키는 자에게 그의 나라에 티켓ticket을 따게 된다. R.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했던 예수의 제자처럼 하나님 나라의 비 제 7 장 바실레이아 319
밀을 알고 병 고칠 자 혹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은사 도 필요하다.107 더불어 예수가 따로 세운 칠십 사람도 하나님 나라 에 전파하였다.108 S. 하나님 나라는 하늘들(하나님)이 예수에게 맡긴 것처럼 우리에게도 맡겨 놓았다.109 T. 예수가 말한 자신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살던 시기에 땅 위에 세워질 나라는 결코 아니었다.110 예수가 다시 와야 모든 것이 종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그 일을 아는가? U. 하나님 나라는 자기 정원에 겨자 씨 한 알을 심은 것과 같다.111 그 작은 씨앗이 시간과 햇빛, 물을 공급 받아 오랜 시간 동안 자라난 뒤 에라야 나무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새들이 깃들고, 쉼터로 작용 하는 놀라운 열매를 통해 우리 인간에게 열매와 편안함이 깃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의 상관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속한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인‘데살로니가후서’를 보내는 바울은 첫 장부터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자주 닥치고 있는 환 란, 고통과 더불어 당시에 불어 닥친 종교적 박해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거 짓 소문이라고 하는 회의적 문제를 통하여‘믿음’과‘인내’라는 두 글자를 유지하게 만들고 있는 방법들에 자랑하고 뽐내라고 종용했다.112 이는 상당 히 역설적인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하나님의 나라 쟁취에 획 기적인 파급 효과를 노린 그는 오히려 마지막에 가서는 바울처럼 고난과 고통에 거하는 자신을 포함하여‘인내’라는 두 글자를 수면 위로 올리면서 함께 거론하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치 있는 판 320 버려진 예수
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 현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바울을 포함한 기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현대인들이 맞보지 못 한 고통과 모진 고문, 게다가 죽음이라는 단어들을 늘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욱더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찢겨지고 헐벗고 굶주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고통을 즐기라는 듯이 말이다. 과연 우리는 하나 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가 끝난 이 시점에‘고통’과‘고난’, 그리고‘십자가’ 에 대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가? 비즐리 머리 는G.R.Beasley-Murray 마가복음에서 저자가 열정적으로 선사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이지만 공통된 연관 성을 갖춘 내용물이라는 컨텐츠contents를 두루 갖추고 있다. 성경을 깊이 연 구하게 되면 알 수 있는 바,“인자”the Son of Man 라고 하는 모든 것들 안에는 예언이라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소지하고 있던 상상을 깨어 부수어 버린 바, 자신을 인자라고 말 하던 예수가 소위‘세 가지 문구’로 언급하고 있었다. 즉,‘죽임을 당하는 일’to be killed,‘부활이라는 일어서는 일’to be raised ,‘삼일 후’after three days 라고 예수는 말했다. 유대인 게다가 현대인들에게 다소 황당한 예언으로 비춰지 는 이 세 문장들이 고통과 고난의 연속상에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들 이‘하나님의 나라’속에 내포되어 있었다. 『고린도전서Corinthians』의 저자 H. 컨쥬먼H. Conzelmann 은 부활과 하나님의 나 라를 연결짓는다. 그는 곧“예수가 일어났기에, 그의 나라는 이 땅의 출현 후에 있었던 구원 사역의‘부활’resurrection과‘완성’consummation 사이에의 시 대로 가득 차도록 메운다.”113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 은 그것이 마치‘눈에 보이도록 되어 있는 평화의 나라’라는 것은 결코 아 니다. 그 나라의 내막은 고통과 고난으로 보였기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 었다. 나라의 개념인 지도자와‘그의 통치’라는 그 어느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세상이 이 황당한 사건에 이해하지 못했고,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 제 7 장 바실레이아 321
는 나라의 개념에서 도저히 비켜서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 개념은 잘 서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 나라에 대한 시점은 십자가로서 확고히 정의되었고, 그 렇게 그의 나라는 출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십자가 사건이 바로 마 지막 종말적 언어 형태로서‘우주적인 묵시 관념’에 대한 모습이 감추어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문장이 어렵지만 이것은 분명하 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기 때문 이다. 그 내용이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특히, 십자가의 사건을 방해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에게서“사단의 자식아!”라고 혼쭐나기도 했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 라에 대해 완고한 자세를 취한 예수에게는 자신의 나라를 이룩하는데 반드 시 필수 관문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세 가지 문구’와 함께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제자들은 이해 하지 못했다. 예수의 죽음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제자들이 만류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들 제자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 모두가 느끼듯, 이 땅에 지 상의 왕국이자 하나님의 나라가 지배하고 통치함으로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굴뚝 같은 육적인 욕망, 그 무언가가 무한대로 용솟음치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 아 닐까? 우리의 삶의 갈증과 피로를 채워야 할 그‘하나님의 나라’라는 보물 의 뚜껑을 열어보니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고난으로 득실거린다면? 소름끼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열었던 뚜껑을 다시 닫을 수만 있다면?”하는 상상 속에서 다시 과거로 되돌리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삼일 후’라는 단어 속 에 감추어진 보물인‘하나님의 나라’는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저자들이 숨 겨놓은 보물의 핵이라고 할 정도로 꼭꼭 숨겨놓은 비장의 무기인 셈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 322 버려진 예수
한 자들이 당시에도 대다수였듯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끔찍한 단 어들이다. 현대인들도 이 사실에 대한 비밀을 알까? 아름다운 꽃과 푸르른 나무와 열매들로 가득 찬 열매의 나라가 바로 하 나님의 나라임을 생각했던 지난날들의 과거를 모두 부수고서 십자가의 고 통과 죽음이 기다려지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하니 무엇이라 말할 수 없었 다. 주님의 음성과 그의 나라의 뜻에 쫓아 가야 하는 목표가 바로 죽음과 고통의 잔을 함께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과연 기뻐할 대상일까? 그‘삼일 후’에야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서막을 알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단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설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은 예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짊어지지 않았다. 그 고통과 굶주림의 연속에, 또 알아야 할 것은 다른 곳인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편지인 고린도전서 내용에도 그들에게 쓴 편지 내용물에 들어있는 비밀은 예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부활’이라 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을 이들 고린도 교회에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한없이 넘친다고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쓰여진 대로 죄에 대한 죽음을 가리 키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뒤에 역사하고 있었던 그의‘다시 일어섬’이 세상의 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음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생명의 잔이 죽음의 잔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죽음 의 잔이 진정한 삶’이라는 그 말 한마디에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었던 것이다. 누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는가?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핍박에 대한 자신 의 측면이 아예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 진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단언컨대, 성경에 쓰여진 대로 결국 삼일 후에 한 생명이 일어났다는 사실 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 일은 바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하 제 7 장 바실레이아 323
듯 열두 제자에게 나타난 사건을 들은 뒤 그렇게 시작된 복음을 말하고 있 었다. 더 알려주고 싶은 그의 마음은 바로‘부활을 본 소수가 살아 있지만 여전히 다수가 죽은 시점에서 작성한 편지’라고 할 증거를 보였다. 그 편지 에서 나타나는 바, 열두 제자에게 나타난 그 후 오백 명에게 동시에 나타남 을 드러내었고, 대부분이 죽었지만 그 편지를 쓰는 시점에 여전히 예수를 본 자들이 살아있다고 하는 내용이 당시 찬란하지만 저주스런 로마 시대에 불고 있었던 유대인이자 초기 기독교의 사상 곳곳에 들어차고 있었다. 그 편지의 사실이 곧 자신의 죽음과 연관이 생길 줄 아는지 모르는지 간 에 예수의 한 사건과 함께 속속히 드리워질 커다란 죽음의 그림자가 예수 의 열정에 찬 십자가 사건을 들추어냈다. 그 연관된 그의 내용을 다시 살아 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내포된 죽음의 거래와 맞바꾸게 된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진리이자 자유였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바울 이 언급한 대로 그 일이 구약에서 성경이 바라본 예수를 미리 본 예언자가 있을까? 우리는 선지자 호세아hosea가 살고 있던 B.C. 721년 사마리아Samaria의 멸 망이라는 불안한 시대를 연상케 하는 북쪽 이스라엘 시대로 되돌아가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남쪽 유다와 갈라선 북쪽 이스라엘은 믿음을 연상 케 하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우상숭배에 힘 껏 고민하고 절망하던 호세아를 볼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허락으 로 인해 부정한 여인과 연을 맺는 잔혹한 결혼을 접하게 되는 하나님은 자 신의 신세와 호세아의 신세를 교묘히 결합시키는데 성공했다. 부정한 여인 과 결혼한 호세아나 자신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결코 뒤서거나 앞서 거나 할 수 없는 일치의 현장에서 이제 사람들은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했 다. 호세아의 회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강렬해졌고 역시 단순했다. “주님에게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우리를 상하게 하였으나 그는 우리를 324 버려진 예수
회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우리를 손상시켰으나 그는 우리의 상처를 붕대로 감싸 안았다. 이틀 후에 그가 우리를 되살릴 것이고 세 번째 날,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우리는 그의 존재 앞에서 살게 될 것이다. 주님을 힘써 알자. 그는 우리에게 실추된 그 날만큼 혹은 이 세 계 위에 떨어지는 봄비처럼 확실하게 다가설 것이다.”114 사계절이 풍성한 이 지구 상에 매일매일 어디선가 내리는 봄비처럼 삼일 후의 사건은 그렇게 구약부터 줄기차게 드러나 있었다. 삶이 죽음에 이를 지라도 그 언젠가 승리하신 부활의 잔을 들이켜 마실 자! 그 자가 바로 그 리스도였다. 삼일 후 그에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은 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울이 고백하였다. 호세아 역시 미래의 일을 자신의 글로서 적 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예수가 곧 십자가 나무에 달리는 참혹한 죽음 앞에 찬란한 영광 대신에 고통과 고난을, 면류관 대신에 가시관을, 왕에게 올릴 찬양과 찬송 대신에 비난과 조롱을, 아름다운 옷과 칼 대신에 벌겨 벗겨진 수치스런 몸과 못으로 대신하게 되는 광경과 시야 속에 하나님 나라는 속 히 진행되었다. 그것을 본 유대인들은 실망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을 것이 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고 있던 예수가 과연 지속적으로 생 각하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 가 나무가 연관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모순된 순교적 작업을 해 야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떠할까? 지금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사야 자신의 예 언과 죽음 앞에서 아직도 진정 무서워해야 할 하나님이 세워준 언약을 지 키기는 고사하고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도록, 예루살렘이 황폐하 도록, 주의 찬송이 희미한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들리도록, 자신들의 죄악 이 바람 같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몰아 가고 있음에 안타까워하고 있었 을까? 우리들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가? 제 7 장 바실레이아 325
우리의 마음을 미리 아는지 구약의 이사야는 유대 사람들에게 자신이 품 고 있는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하소연을 하듯 묻고 있었다. 이사야 가 본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 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이들은 전혀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에서 예 수가 온 시점까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 라가 자신들의 편협한 생각들로 뻔뻔하게 가득 차, 자신들의 제국이 메시 야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굳게 자부하고 있었다. 비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수가 나중에 알았지만, 결코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거나 다른 사람들의 교훈의 형식과 문체를 빌려 쓰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상에 그 어떤 자들도 예수의 생각과 사 고와 전혀 일치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말이다. 또한 그렇게 신약 성경에 등 장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리라고는 비록 기대하였지만 상상치 못한 이야기에 얼룩진 그의 나라에 그 누가 생각했단 말인가? 그 누가 그런 생각 과 상상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언어를 사용했고 복음서의 핵심내용의 일부이자 전부였다. 그 복음서의 주인이기 도 했기에 그가 바로 그의 나라를 획득할 유일한 제목감이었다. 그랬던지 예수는 너무 정직하여 세상과 타협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따라오라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우리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 는데 묘한 감정이 느껴지기까지 하다. 고상하고 죄 없이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심히 당혹케 하거나 누를 끼치는 일에 지극히 예민한 거룩한 자들에게 그는 가혹하게 하여도‘융통 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나라 또한 융통 성을 발휘하여 이 땅의 유대인들의 사상과 생각에 조금이라도 겹쳐 붙이지 도 않았다. 그는 제자들까지 자신의 발 밑에 두었지만 정작 나무 십자가를 지려는데서는 모두가 남남처럼 흩어졌다. 그렇게 십자가와 하나님의 나라 326 버려진 예수
는 결코 일치될 수가 없는 혼란스러움으로 더욱 커져만 갔다. 심지어는 유 대인들의 마음에도 그를 탐탐치 여기지 않은 자가 많다는데 의아함을 넘어 서 이젠 뻔뻔스럽게도 버려지는 예수의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그에게서 무엇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 라가 십자가와 무슨 상관 있는가? 제자들과 유대인들, 현대 그리스도인들 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그리고 고통과 고난 속에 피어 오르는 한 줄 기 새싹이 우리와 무슨 영광이 일치하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115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환호와 영애를 한 몸에 받을 영화의 영웅과 같은 인기몰이를 하게 만들지 않았고, 다만 마지막 남은 숨겨놓은 카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로서‘아들의 죽음’이라는 것에 우리들은 도저 히 먹혀 들지 않는가 싶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뭍혀졌다.‘그의 뜻’과‘그의 의’가 유린 당한 느낌이 어떠할까? 자신이 꿈꾸었고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숨조차 쉴 수 없 는 살벌한 피비린내 나는 광경과 어우러져야 하는 모습들에서 몸서리치듯 그 광경에 넌더리가 나기 무섭게, 또 한 방 맞은 유대인들이 느끼게 된 복 수들의 느낌은 이해가 슬슬 가기 시작했다. C.S. 루이스 혹은 필립 얀시 같은 기독교 최고의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 로 예수의 죽음 앞에 비스름하듯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 금은 안심이 되었다. 구약과 신약 모두를 읽고 또 읽으면서 정말로 그런 생 각이 들었다. 예수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일반적인 인간을 넘어 최고의 사 상가이며 자선가 혹은 최고의 선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신으로서 승격시 제 7 장 바실레이아 327
켜도 손색이 없는 자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십자가 사건은 심각한 도전을 던졌다. 우리들에게는 십자가 앞에 부활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 십자가 앞에 하 나님 나라는 상상 밖의 일이다. 지금 현대인들에게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 에 대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 추종자들은 십자 가의 죽음과 부활의 연관성은 결코 이해 하지 못했다. 아니 제자들은 생각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대인들도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에 대한 연관성을 진정 믿고 있을까? 죽음과 부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몇 명이 들어가 려고 할까?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들 의 생각과 의견에서 전혀 달랐다. 마치 유대 땅에서 늘 지켜지던 관습과 문 화에 도전하는 자처럼 여겨지고 이단취급 당하듯 그렇게 버려지고 찢기게 자신을 혹독한 추운 겨울 앞에 그 어떤 대비 없이 한복판에 벌거벗은 채 자 신의 온 몸을 던지고 있었다. 예수의 한 가지 남은 행동인 죽음의 십자가, 곧 한 번 해볼만한 거룩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의 손과 발에 의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만인의 순교자의 교본이자, 마지막 아담! 그 예수의 역량이 이제 소진되어가는 모 습을 지켜볼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럽고 추한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잔의 빛깔을…. 328 버려진 예수
▐ 7장 미주 ▐ 1. Barrett/Thornton Nr. 293,376f 참조., 게르트 타이쎈·아네테 메르츠,“역 사적 예수(Der Historische Jesus)”,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p365 인용. 주 후 2세기 사람인‘시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저자를 알 수 없 고, 다만 그 책은 위경으로서 묵시문서 중 하나일 뿐이다. 2. E. Käsemann,“commentary on Romans ”(Grand Rapids:Eerdmans,1980), p377 3. 바와 뮤헤아이딘은 필라델피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바와 뮤헤아이딘 단체 (Bawa Muhaiyaddeen followship)을 설립한다. 이를 필두로 약 1000여명의 따 르는 무리가 있으며 그 단체의 뿌리는 미국과 캐나다를 통하여 확산되고 있 으며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영국까지 뻗어나가 있다. 스리랑카, 콜롬 보, 스리랑카 북단 자프나(Jaffina)를 거치 미국에까지 도착했다. 그에게 배 우러 오는 자들에게 이슬람교와 힌두교 전통 사이를 포함하여 학생들과 청 취자들이 모여들고 있고 모든 전통과 배경들을 가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흡 수하려고 노력한다.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사이트에서‘ Bawa Muhaiyaddeen‘라는 단어 참조. 4. 마태복음 4:8. 5. 마태복음 24:7. 6. 시편 145:13. 7. 출애굽기 19:6. 8. 사무엘하 7:16. 9. 사무엘상 8:7. 10. 크레이그 에반스, 만들어진 예수, 성기문 옮김, (서울:새물결플러스, 2011) p58. 11. John Reumann, “Jesus in the Church ’s Gospels ”(Philadelphia: Fortress, 1968), p142. 참 조 하 라. Marcus J. Borg, “Jesus ”(New York: HarperCollins, 2006), p251에서 인용하고 있다. 보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 한 언급은 기독교 전반에 걸쳐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용어 정의나 개념에서 는 여전히 혼선을 빚고 있다. 12. Kanufmann Kohler, The Jewish Encyclopedia, p502 참조. 또한 하나님의 나 라에 대한 유대 사전 내용을 보고 싶다면 Jewish Encyclopedia.com 웹 사이 트에서‘The kingdom of God’을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3. Passages by Sibylline Oracles. 14. 마가복음 3:10. 15.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I 권(살림출판사:Sallim, 2005), p284. 16. 히브리서 1:1-2. 17. 스가랴 14:9. 18. 이사야 52:7. 19. 이사야 33:17-22. 20. 요세푸스,“유대교대사”, 4,223. 21. 누가복음 17:21. 22. 창세기 6:5-8. 23. 창세기 7:1-10. 제 7 장 바실레리아 329
24. D. Martyn Lloyd-Jones(마틴 로이드 존스), The Kingdom of God(하나님 나 라), 복 있는 사람, p90. 25. 누가복음 17:20. 26. 요한복음 6:30-31. 27. 요한복음 18:36. 28. 이사야 1:6. 29. 누가복음 17:20-37. 30. E.P.샌더스,“예수의 역사적인 위치”, p274~276 참조. 31. C.H. Dodd,“The Parables of the Kingdom ”, 1935 참조. 32. 모세 승천기 10,1 이하 문구 참조. 게르트 타이쎈·아네테 메르츠,“역사적 예수(Der Historische Jesus)”,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p365에서 인용. 33. 요한복음 18:28. 34. 요한복음 11:48. 35. 요한복음 18:31. 36. 요한복음 18:36. 37. 마틴 로이드 존스,“하나님 나라”, 복 있는 사람, p116. 38. 요한복음 17:3. 39. 고린도전서 2:8. 40. 이사야 2:33. 41. G. R.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86), 11., 장세훈 교수·폴 하우스(Poul R. House), “주의 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06, 도서출판 그린심, p92. 42. 샌드 크릭크의 전쟁(the Battle of Sand Creek) 혹은 샤이앤 인디언 족의 학 살(Massacre of Cheyenne Indians)이라고도 명명한다. 43. 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 나라, 복 있는 사람, p92. 44. 누가복음 17:20. 45. 마태복음 5:10. 46. 마태복음 5:17. 47. 마태복음 5:29. 48. 마태복음 6:44. 49. 로마서 14:17. 50. Philip Yancey,“The Jesus I never Knew”(zondervan, 1995), p129. 51. 유재덕,“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서울:브니엘, 2008), p179-180. 52. 마7:26. 53. 마13:19~22. 54. 마13:38. 55. 마13:48. 56. 누가복음 11:23. 57. 누가복음 7:32. 58. 마태복음 12:45. 59. 마태복음 23:10. 60. 마태복음 24:40. 61. 누가복음 13:7. 62. 누가복음 14:24. 330 버려진 예수
63. 마태복음 21:32. 64. 마태복음 25:18. 65. 마태복음 23:2. 66. 마태복음 23:31. 67. 마태복음 23:16. 68. 마태복음 23:13. 69. 마태복음 25:11. 70. 마가복음 7:6. 71. 마태복음 24:41. 72. 마가복음 4:11. 73. 마가복음 4:20. 74. 누가복음 13:30. 75. 마태복음 22:2-7. 76. 마태복음 22:14. 77. 마태복음 19:16-22. 78.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3권, p348. 79. 찬송가 [204]장. 80. 고린도전서 6:9. 81. 갈라디아서 5:19-20. 82. 마태복음 22장, 누가복음20장. 83. 마태복음 21장, 누가복음 20장. 84. 마가복음 12:32-33. 85. 로마서 14:17(개역판). 86. 누가복음 11:19. 87. 마태복음 10:7. 88. 누가복음 11:20 89. 요한복음 3:3. 90. 마태복음 5:19. 91. 마태복음 5:20. 92. 마태복음 5,6,7장. 93. 마태복음 7:21. 94. 마태복음 11:11. 95. 마태복음 18:3. 96. 마태복음 12:28. 97. 누가복음 16:1-13. 98. 마태복음 19:23. 99. 마태복음 20:1-16. 100. 마태복음 21:32. 101. 마태복음 21:43-44. 102. 마태복음 22:1-14. 103. 마태복음 23:13. 104. 마태복음 24:23-24. 105. 마태복음 25장. 106. 마가복음 9:39-50. 제 7 장 바실레리아 331
107. 누가복음 9:11. 108. 누가복음 10장. 109. 누가복음 22:29. 110. 요한복음 18:36. 111. 누가복음 13:19. 112. 데살로니가전서 1:4. 113. H. Conzelmann,“Corinthians”, p 270. 114. 호세아 6:1-3, Good News Bible(GNB)를 참조하였다. 115. 누가복음 17:21-25. 332 버려진 예수
제 8 장 버려진 예수 하나님은 이토록 버림받은 자들의 비참함에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겉으로 비참하게 보이는 것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 엔도 슈사꾸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 시 22:1~2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14-15 -
예수, 이 세대에 버린 바 되다.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행위로 이 세 대에 버린 바 되었는지 그 이유를 나열한다면 대략 8가지로 요약할 수 있 다. 누군가 말하길 예수가 하나님이자 자신을 신으로 평가하지 않고 언급 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을 염두하고서 아래의 글을 읽어보라! 심리적 변화 가 드러날 것이다. 1. 하나님을 자신과 동등 됨을 취한다.1 2.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2 3. 안식일에 고치는 행위를 함으로 모세로부터 나온 규례를 어긴다.3 4. 죽음을 앞두고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자 행해야 한다는 다소 황당하고 섬뜩한 말에 군중들이 흩어진다.4 5. 유대인의 사상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죄사함’의 권세를 예수는 마음대로 남용한다.5 6.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6 7.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는 무리들을 미혹한다고 경계한다.7 8.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다소 황당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말을 한다.8 9. 많은 표적으로 인해 이방인 민족들이 유대 땅과 민족을 로마로부터 빼앗아 갈까 염려하게 만든다.9 극성스런 비만을 걱정하는 시기에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전세계적으 로 배를 곯는 인구 수는 무려 10억 명에 달한다고 보도한 것을 보았다. 빈 곤과 어려움에 버려진 자들을 방치하는 현대 사회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세 계를 구원하고자 장밋빛 아름다운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 할 예수의 모습 에 불행한 이미지가 겹쳐지고 있다.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수모는 좀처럼 336 버려진 예수
이겨내기에는 가슴 아프다. 숙명의 고통 속에 잊혀지면 좋겠지만 이미 시 각을 통해 뇌에 전달된‘버려짐’에 대한 자각이 숨가쁜 일상에서도 고통만 을 선사할 뿐이다. 현실과 하나님의 나라에 잇닿아 있다고 해도 이 땅 위에 사는 발자국이 기다릴 수 없는 지옥의 고통으로 내리 달아가는 무거움이 존재하는 것은 예수의 몫이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이처럼 고통스러울 수가 있을까? 인간을 만든 장본인이 정작 만든 사람에게 버려짐을 당하는 수모를 감수할 인내를 만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에게 짓밟힐 시간이 다가오는 시점을 앞두고 제자들의 흩어지는 사 건, 채찍질과 모진 모욕감과 견디기 힘든 살의 찢겨짐 속에 홀로 방치되는 사건들의 말할 수 없는 이미지 앞에 서 있다. 그에게 외로이 견디어나가야 하는 무거운 십자가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렇기에 신 앞에서 수 많은 질 문에 대한 만족스런 답은 찾기 쉽지 않다. 누군가의 찬송 가사처럼“초가산만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 물론 내 게 없지만... 내게는 저 하늘 위에 집 있네!”라고 즐거이 부를 수 있을 여유 가 예수에게 없다는 고통의 시간이 노래하고 있는 시기가 점점 다가온다. 현대에도 예수의 삶을 절대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듯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물질과 부가 우리 내면의 벽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과 추 위 속에 덜덜 떠는 버려진 자아를 본다면 이들은 몸서리 칠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황금 길과 풍성한 열매와 사자와 뛰노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늘의 공간으로 생각하였다면 우리는 예수를 버린 바 리새인과 별 다를 바 없게 된다. 저 하늘 위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 이 땅에 왔고 버려질 그 분이 우리의 이전 상상력을 무참히 부수 고 있었다는 점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버려질 운명이라는 예수의 사명을 이야기하기 전, 어느 날 바리새인들은 늘 그랬듯이 뜬금없이 예수를 시험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제 8 장 버려진 예수 337
나라에 대한 언급, 곧 로마 제국의 어둠 가운데 언제 이 땅과 하늘 위에 찬 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안개가 점차 사라지듯 그렇게 전개될 여부 혹은 혹 독한 추운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날의 기운이 솟아나는 그 어느 시점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때를 물어보는 시험…, 이들의 공간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이미 모질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미리 언급했다. 우리가 바라는 하늘 위에 있는 저 천국과 동일한 유대인들의 천국에 대 한 사상과 달리, 그것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10 그런 공간과 시각적인 마인드에서 벗어나 이미 예수 시대에 그들과 호흡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하 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다고 진행중인 현재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이 또 있다. 추가적으로 예수는 이것을 남겼다. 곧, 그는 자신 을 가리켜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되어야 한다11고 여운을 추가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악몽이나 다름 없는 십자가 사건이 수반되는 이 상한 내용! 그 일을 기점으로 이제 진정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그러한 시점 의 세대가 흥청망청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 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 드디어 나타날‘멸망’ 이라는 참혹한 전쟁과 같은 서곡이 펼쳐질 상황은 불연듯 아무도 모르게 전개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내밀고 있었다. 지금 이 세대는 그런 세대이다. 향락과 물질 만능주의, 파티문화, 교회의 타락과 예수라고 사칭하는 사람들 사이로 예수가 외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미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세대의 기본적인 상황은 전개 되어가고 있었고, 이미 예수는 2000년 전에 그러한 상황을 미리 보았다. 예수의 관점에서 지 금의 사태는 기가막힌 미래이자 현실이다. 물질 만능에서 우리는‘겸손’,‘나눔’,‘사랑’을 치부한다. 그렇게 보다 338 버려진 예수
더 좋은 욕구인‘재물과 명예’에 쉽게 흥분하고 그런 방향으로 초점이 맞 추어 나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있다. 더불어 술과 흡연, 마약, 대마 초, 성적 문란은 이미 최악으로 향하고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부자 여 인들 혹은 현란한 차를 타고 다니는 남자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당현한 현 실이다. 그 현실에 좀 더 나은 미래와 함께 그렇게 만들어가고자 혈안이 되 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 일이 오늘만의 현실은 아니다. 이미 과거 성경이 나타난 배경이 되는 세대가 시작되면서 이미 시작된 향락과 방탕의 수치가 조금씩 올라가는 그래프형식처럼 점점 더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문제는 그 일로 예수가 이제 곧 이 세대에 버림을 당해야 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처 지를 유대인들이나 당시 로마인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기고 있다는데 더 슬퍼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대의 아픔을 예수는 가슴에 앉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세대가 가진 닫친 마음을 열었던 예수의 메시지는 점점 멀어져 가는 희 미한 기차소리와 함께 묻어간다. 그래도 예수는 무덤덤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예수의 메시지로도 그들을 진정 하나님 께로 향하는 마음에 바뀌지 못하고 버려진 때가 이미 오래이기에 더욱 그 러하다. 성경을 더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당시 예수 시대에 그를 따르고 다녔고 회개한 자는 극히 소수였다. 오히려 이들보다 더 그를 추대하고 영웅시하 던 자들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소외된 자들의 안식 처만이 예수를 고대하고 추종했다. 그러한 사실에 나는 또 한번 놀라고 당 황해야 했다. 우리에게 최고의 지도자이며 신적인 존재로 부각시켜 모든 자들이 그 앞 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환상적이며 영웅주의적인 부분의 시각으로 신약 을 대했던 내게 이제 다시‘버려진 예수’에 대해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더 욱더 그 가치를 잃어가는 예수를 보아야 했다. 철저히 그 자신의 능력과 존 제 8 장 버려진 예수 339
재 가치를 꺼져가는 양초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그 의 길을 보면서 예수에 대해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눈들처럼 나 또한 희 망이 사라지는 동질감을 느낀다. 향락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에게 버려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고 다녀서는 아무리 유능한 자가 이야기 한들 먹히지 않았다는데 오히 려 불안하고 초조해가고 있었다. 스스로 깨우쳐야 하거늘 그림자처럼 달려 드는 순간의 쾌락은 주체할 수 없이 쇄잔해져 다시 그 쾌락을 찾는다. 그만 큼 또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그것에 이끌리게 된다. 부에서 부로, 쾌락에서 쾌락으로, 계속 높은 곳에서 어두움을 향하고 있다. 심리적 혹은 영적으로 깨끗한 자에게 달려들어 그에게 손을 내밀지만 내 면의 외로움을 알지 못하고 또 다시 쾌락과 부에 손을 담그어 버린다. 그들 과 달리 버려질 운명에 처할 그런 미운 오리 새끼처럼 예수는 도움의 손길 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만 차별된 모습과 외톨이로 이 땅에 미움과 버림을 준비하려 온 것만이 전부인 것 같았다. 버려진 예수가 드러낸 이스라엘 땅 위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었다.12 또한 이 땅에서 병들고 죽어가고 배고픈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찾고 찾 아 구원함13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 온 것이 전부였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만 위하는 옹졸한 자도 아니요, 그는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 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어야 함을 미리 알리게 된 다.14 제사장의 입을 통해“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 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5라고 말 하는 자처럼 이는 예수를 향한 계시는 계속 행군하고 있었다. 그 구절은 예 수의 시대에 대제사장인 요셉 가야바가 했던 말이다. 모든 흩어진 민족들의 마음 속에 있는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구 심점으로 모여 이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예배하는 중요한 340 버려진 예수
목표를 예수는 알고 있었을까? 그의 신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 었고, 그럼에도 그는 가장 낮은 자로서‘낮아진 통치’라는 계획으로 작정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까지 꼭 끌어 안아야 부활의 종점에 이르렀을까? 예수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혹은 메시야로서 부르심을 받아 이 땅 위에 내려가야 할 사명을 받았을 쯤에 혹시나 하나님에게 제안 을 여러 가지로 하지 않았을까? 만약 예수 자신의 말대로 수만 명에 달하는 천사들과 대행 받은 하나님의 권한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달리 무언가를 제 안하지 않았을까? 그런 또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 그에게서 우리는 심 한 좌절을 느낄 수 있다. 신이라는 미명아래 그는 자신의 권능과 능력을 세상에게 선포하는데 주 안점을 두는 훌륭하고 완벽한 작전 대신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죽음을 곧 선택한다.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마치 E.T.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외부에서 온 외계인처럼 신적인 상상력을 불어 넣어주도록 한 그러한 예수의 삶과 흔적들이 찬란하게 무력감으로 바 뀌게 된다. 그에게 둘러싸여 있는 놀라움의 연속과 하늘의 능력, 그리고 재 주까지도 죽음 앞에선 무용지물인가? 그를 둘러싼 마지막 선택과 심리를 죽음에 두고 있는 우리가 마치 그의 죽음이라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두 려움의 상황에서 이제 밝은 햇살 위로 날아오르는 연기처럼 공개하려는 상 황으로 서서히 움직이려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버려짐과 죽음으로 향하는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애석할 따름이다. 죽음의 그늘에서 그도 인간임을 두려워한 나머지 십자가라는 잔인한 고 문과 아픔이라는 고통, 또한 앞으로 당할 수모 앞에서 그도 잔을 옮기고자 생각했음에 더 인간적인 모습을 넘어 가련해 보인다. 이제 그는 유대인들 사이로 수 많은 논쟁들과 신성모독이라는 극한 대립에 이르기까지 방치된 상태로 지속될 것이다. 과거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논쟁거리였던 부활 문제로 양대 찬반론의 논 제 8 장 버려진 예수 341
쟁처럼 당대의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난처한 상황에 앞서 논쟁을 불식시킬 당연한 결론이 그를 사형대에 올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은 분 명하다. 언제 예수가 태어났는지, 그가 또한 누구인지, 그래서 태어날 날짜 도 잘 알지 못하여 신변에 둘러싼 끈임 없는 논란 속에 예수는 자신을 지속 적으로 공개된 곳에서 드러냈으며 곧 사라졌지만, 계속적으로 존재했다. 예수와 유대인과의 갈등에는 오늘날 말하듯 인간적인 성격을 가진 자가 신과 동일시 하거나 죽은 자를 살려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나 로마인들에 게 위협적인 인물로 비춰지는데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것으로 예수 자신 은“하늘에서 온 자”라는 얼토당토 되지 않는 말에 그들은 못마땅해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예와 신변 보호가 이제 그 나사렛 청년 으로 인해 이들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받을 상황에 이르는 것을 가 만히 두 손 놓고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도원 농부들과 주인 가족의 소중함을 다룬 존 번햄 슈워츠의 서적『내 생애 가장 슬픈 오후』 라는 책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한 가족의 비극과 슬픔을 극대화한 작 품이다. 흘러가는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일어나는 일이지만 절 대 겪어서는 안될 가슴 아픈 그 사연을 바탕으로『레저베이션 로드Reservation Road』라는 영화까지 이어지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을 데리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에단은 피크닉을 다녀오던 그 때 영화 제목과 같은‘레저베이션 로드’라고 불리 는 길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한다. 눈 앞에서 아들을 잃은 에단은 무너져가 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 슬픔에서 위로를 받고자 범인을 추적한다. 반면 사고를 낸 가해자 드와이트는 곁에 있었던 어린 아들이 장차 받을 고 통과 충격에서 잃을지도 모르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며 생애 가장 슬픈 추억을 에단 가족과 함께 서로 그 사건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아이를 잃은 342 버려진 예수
부모의 마음은 보는 사람에게까지 가슴 뭉클하게 전해져 오지만 분노와 안 타까움의 치수 역시 같아만 간다. 피해자 에단이 의뢰한 변호사가 바로 드 와이트라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 부모의 자식 사랑은 점점 더 극한에 이른 다. 전 세계적으로 불행한 가족을 떠 올리기란 쉽다. 그래서 진주보다 값진 현숙한 여인을 찾기 힘든 상황16은 가늠할 수 있다. 한국에서 불과 얼마 전, 부모가 아기의 시신을 냉장고에 넣어 몰래 보관하고 방치해둔 것이 밝혀 져 전세계가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체류중인 프랑스 여인 의 영아유기 사건은 온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원 치 않은 임신이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 없을 수 있다는 충격적 인 사실 앞에 현대인들의 무감각은 실로 위험 수위에 있다. 더욱이 믿을 수 없는 일은 주위 이웃에게 거짓말을 일삼으며 사회를 더욱더 충격에 빠뜨렸 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부모는 눈 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지는 자 식을 낳은 부모는 잘 알 것이다. 역시 하나님이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아 들 예수에게 하늘의 능력과 권위 또한 권세를 부어주었음에도, 그는 자신 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인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자식을 죽임에 당하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극적인 잔인함에 방관해야 했다. 급기야 우리 눈에 그렇게 예수의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동조한 것 같다 는 생각이 함께 스쳐간다. 심지어는 추대하고 추종하던 유대인들에게까지 그를 등진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 예수의 죽음에 방조 하고 있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난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더욱이 부모가 되지 않는 사람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잘 모른다고 하는 말 처럼 내게도 결혼하지 않은 심정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 여간 불편할 수 밖 에 없다. 임신 후부터 출산을 직면하기까지 고통과 아픔을 몇 개월 동안 겪으면서 제 8 장 버려진 예수 343
여인들은 계속적으로 출산의 고통과 인고와의 싸움을 가진다. 그 고통을 통해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일반적인 행사이지만 누구나 벗어나고자 한다. 여자가 아니기에 더더욱 출산의 고통은 체험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오류 가 있다. 다만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 온 힘과 정성을 다하는 여리고 힘들어 하는 여자들을 간접적으로 들어보면서 자녀를 낳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자신 과의 싸움인지 알 수 있다. 아이를 원만하게 출산하게 끔 도와주는 다양한 노력과 방법을 제시하는 출산관련 책을 뒤져보거나 자녀를 낳았던 부모들의 심정을 털어 놓는 친구 들의 아내 입에서 나오는 과거 산고의 고통을 헤아리면서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 힘들고 아픈 고통에서 낳았던 자식을 버려야 할 부모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 에 보낸 자신들의 자녀와 마찬가지인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유대백성들 의 손에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두 눈으로 바라보는 심정은 오죽할까? 출산의 고통보다 더한 것은 자식의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본다는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외아들로서 옆에서 보기만해도 흐뭇하 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며 혹시라도 나의 자녀가 배를 굶고 다니는지 아프지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부모의 심정은 동일할 것이다. 그런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가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면? 자식을 대신해 죽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는 부모의 심정은 다 똑같다. 그러나 신의 마음도 그러할까? 부모처럼 예수가 죽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도 동일한 고통을 느꼈을까? 예수는 유대인들, 즉 유대 지도자 혹은 랍비 자신들이 여전히‘이스라엘 을 다스리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또한 이들이 우주와 지구가 형 성될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최고의 명예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자존심이 센 나라들의 백성임은 이미 알고 있 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자17로서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344 버려진 예수
논과 밭을 수고하여 그에 해당하는 삯을 받아 누리는 그러한 직책을 맡은 최초의 관리인들뿐이라는 것을 예수의 메시지로 잘 나타내고 있었다. 예수가 말한‘포도원 농부의 비유’의 설교를 들어보면 예수에게 직면해 있던 유대인들의 심리적 혹은 문화적 상황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다. 포 도원을 경작하던 주인은 어느 날 집을 비우게 되고 얼마간을 외국에 다녀 와야 할 급한 일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인은 외국에 있으면서 포도원 경작의 일부를 받으려 동행한 종들 중에 한 사람을 보내 게 된다. 그러나 포도원을 경작하고 있는 농부들은 그 보낸 종을 사정없이 마구 때리고 난 후에 돌려 보낸다. 이에 주인은 다른 종들을 연이어 여러 번이나 보내지만 모두 하나같이 같은 방법으로 주인을 업신여겨 돌려 보내 게 된다. 하는 수 없이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이 포도원에 가게 되면‘죽음’이라는 사실에 직면 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을 보내게 된다. 설마 주인 의 아들마저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될지 걱정스런 마음은 현실이 되고 만다. 결국 주인의 예상대로 농부들은 유일한 상속자를 죽이고, 포도원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18 이러한 비유를 면밀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하나뿐인 유일한 상속자 예 수는 결국 유대인들과 예수와의 언약적 성립과 정의관계 또한 다른 한편으 로는 그럼으로써 생겨나는 적대적인 관계를 서슴없이 잘 묘사하고 있었다. 여기서 잔인한 일을 서슴지 않던 농부들은 유대 지도자들로 비유된다. 하 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는 각각 포도원 주인과 그의 사랑하던 아들로 비유 하였으며 농부들에게 몰매를 맞은 주인의 종들은 모세, 다윗, 솔로몬, 예레 미야, 에스겔, 하박국, 스가랴 같은 예언자이며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과거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버리고 죽이고자 했던 유대인들은 동일한 과오를 예수에게도 적용시키려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인 예수 제 8 장 버려진 예수 345
를 버리는 것에 아무 거리낌없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던 목이 곧은 백성들로서 이들을 바라볼 때 예수는 자신의 상황을 비교한다. 이를 간파한 유대인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그렇다 고 동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 그가 만들지 않았을 피조물들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전지전 능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은 언약과 선택의 집중을 받았음에도 이상하게 하늘에서 보기에 그저 그런 인물들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심리적인 판단력에는 흐려지고 있음을 보인다. 그러한 결과로 유대 인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들만이 누리고 느꼈을 하나님의 백성됨과 축복이라는 유산과 상속을 유지시키고 빼앗길 염려로 부터 종들인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모질게 버리거나 죽이는 잔인한 방법 을 택했다. 그것에 대한 마지막 선택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자신들의 입 지를 돈독하게 하려 한다는 것에 경악할 따름이다. 예수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한 줌의 권력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언행으 로만 유대인들의 마음을 흔든 것이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할 정도로 무감각 해진 그들의 생각에는 그러했다. 혹시 그를 죽음에 이르지 않고 유대인들 에게서 추방시키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머나먼 타지에 살게 하여 유대인 땅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취할 현명한 조치도 고려할 상 황이 아닌가? 어물어물 넘어가 그러한 조치를 내리지 못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 존재하였는가? 이처럼 비유에서 보듯 실제 성경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루살 렘 근처 베다니에서 행한 기적을 보고 있다. 예수는 죽음이라는 살인을 방 조하여 선택하던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죄목을 찾기 어렵자 누명을 씌울 죄목을 찾는데 혈안이 돼버렸다. 입을 열지 않던 예수는 결국 그의 입 으로 고백하려고 애쓰던 장면을 성경에서 쉽게 떠올리게 된다. 유대인들의 유일신을 섬기며 하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려 노력 346 버려진 예수
하지만 십계명과 율법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듯 칼같이 지키려는 그들의 외적인 모습 뒤에 감춰진 사악하고 잔인한 모습을 점점 나타나고 있었다. 마치 늠름하고 멋있지만 그 모습 뒤에 감춰진 자신보다 열등한 동물을 잡 아 먹어야 사는 약육강식적인 이빨을 드러내는 사자와 같은 모습을 생각나 게 만든다. 자신들이 진정한 상속자임을 시기와 질투로서 옹호하던 유대인들의 거 룩함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이들의 거짓되고 추악한 모습이 상상하기 싫 어진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그리고 온 민족의 흩어짐을 모으고자 한 예 수의 행위와 사역에 이를 갈고 있는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그는 읽었던 것 이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이라는 주인은 그런 사악한 마음을 가진 농부 들을 진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포도원을 다른 이방인에게 자리를 넘겨 주는 방법을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럼과 동시에 유대인을 향 한 것이 아닌 다른 선물을 이방인에게 주는 상황을 언급한다. 즉 유대인들 이 빠지고 이방인들이 예수가 선언한 믿음과 하나님의 영이라는 놀라운 최 고의 선물을 받아 누리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 볼 때 자신이 직접 써 보낸 서찰과 함께 왕의 사랑스런 아들임을 이 땅 위 에 밝히고자 했고, 그로 인해 지구 위에 조그마한 별에 태어나고 죽음이라 는 작지만 큰 일로 인해 세상은 시끄러워야 했다. 하나님은 필시 놀라운 언약으로 선택 받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면서도 어리석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어쩔 수 없는 백성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나마 기적과 치료를 통해 입증하려 했던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잘 알 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 자신 을 따르고 귀를 기울이던 백성들이 고마울 따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 을 적대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던 자신의 백성들이 대다수였음이 현실로 되 고 만다. 신의 아들이라는 죄가 이닌 죄로서 핍박을 받고 저주 받으며 결국 외면하는 현실로 치달아 죽음에 이르는 아픈 현실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은 제 8 장 버려진 예수 347
얼마나 애통해 하셨는지 짐작되는 결정적인 단서를‘포도원 농부들과 주 인’에서 그것을 나는 찾았다. 여기서 예수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게 된다. 마치 배 속의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안간힘을 쓰지만 이 제 더 이상 남아있는 힘이 없게 되는 것처럼 이제 예수에게도 하늘에서 알 려준 메시지가 고갈되어 이제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짐과 질타 그리고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혐오스럽지 않는가? 그 느낌을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들은 알까? 남아있는 힘마저 모두 소진하게 되는 아픈 현실에서 우리는 그를 옹호하 려 하지만 오늘날 사는 현실적인 기독교인들마저도 성경의 말을 이해하지 도 가꾸지도 않는다.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들에게 저 하늘의 해와 달처럼 그저 멀리 있어서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바,“누가 예수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느냐?”19고 말하는 바를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 예수의 삶과 그의 행위, 그리고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는 돈과 권력에 목말라 하는 하이에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서 점점 더 멀어짐 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예 수의 영원한 떡과 같다는 표현을 한 매개체인 피부와 살을 먹고, 참된 음 료수와 같은 예수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를 마셔야 하나님 안에 있으며 살 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말에 과연 당시 누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가 말한 그 시점에서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당연히 그 말을 이 해할 수 없었고, 성경의 저자 또한 당시에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사 실을 당연히 글 속에서 부각시켰다. 사실 예수가 말한 죽음에 대한 설교 시 기는 아직 그가 죽음에 직면하지 않았고, 예수의 기적과 병 고침에 관심을 둔 추종자 무리들은 과연 그 속에 내포된 의미를 재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여 늘 예수 주위를 맴돌던 제자들 348 버려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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