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이라는 사명을 시작하는 예수에게 곧 닥쳐올 사건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노인과 바다』같은 폭풍의 환란 가운데서 사단이 퍼트리는 유혹의 바람 속에 소용돌이 쳐지는 영적인 바다와 싸워야 하는 그의 안타까움을 우리는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이들의 싸움의 장소는 대략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에 위치한 메마르고 돌이 많은 구릉지대, 곧 사해사막이라고 한다. 그 런 황량한 벌판에서 그는 외로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내야만 하는 숙 명이었다. 그러한 숙명을 알고 있는 예수는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아담 과 하와의 전처를 밟을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창조한 때, 뱀과의 유혹 또한 자녀와 재산을 몽땅 잃어 버린 욥처 럼 어쩌면 예수는 자신을 버릴 자들에게서 느끼는 오랜 고통과 좌절, 통치 에 대한 열망,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굶주림이라는 다양한 유혹의 고난 을 인내해야 했다. 그것들이 곧 부활의 승리에 필요한 일련의 전제 조건 속 에서 하나하나 차례로 맞보게 된다. 구체적으로 예수는 모두에게 버려지는 외로움과 배고픔, 그리고 명예심 또한 십자가의 잔인한 고통에서 몸부림 을 치면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이는 마치 야구 경기장에서 야구 선수들이 또한 올림픽 경기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팬들의 함성을 듣는 것과는 반대 로, 그는 외로이 경기장 한 가운데 혼자 선 채로 사단을 맞이해야 하는 극 적인 대목이다. 반대로 이러한 부활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 과업을 가진 그 에게서 고통과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최대한 살려 무자비도록 빼앗 고자 사단은 그 어떤 추악한 방법을 짜낼 것이다. 사단은 결국 마지막 금식이 끝나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3가지 질문을 하 면서 40일간을 먹지 않는 채로 허기진 배를 가진 예수와의 한판 승부를 가 렸다. 사단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 게임은 이미 한 판 이기고 출전하는 시 합과 같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은 주 중에 한끼를 금식하던 관습이 있지만 예수는 그런 단순한 방법이 아닌 자신만의 잔인하면서 독특한 방법, 단순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199
히 40일을 금식 기도함으로 영적인 충전을 통해 이겨내는 전략을 사용했 다. 그러나 40일 동안 과연 예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순히 금식기도만 하였다는 표현 말고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궁 금증을 시원하게 털어놓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 듯이 금식기도로 이겨내는 방법을 사용하였을 추측은 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추론할 수 있는 그 마지막 상상에 맡겨야 할 것 이다. 굶은 채로 거룩한 영(성령)과 사십 일을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 일까? 나중에 그가 사단과의 승리 후에 천사의 도움을 받았음을 미리 알았 을까? 예수는 지금 추후에 실패할 그 사단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구약 성 경에 시험하는 자인 사단의 명칭이 많지 않다. 단순히 몇 개 되는 것을 보 게 된다. 그러나 구약과 비교하여 신약에서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약과는 달리 악한 영에 대한 언급으로 말하는 구약의 사단은 히브리어 로 사단Satan 이라고 호칭되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고 구약의 욥기에는 서술한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경 배하라는 그에게‘사단아!’라고 혼쭐을 내며 그의 숨겨진 존재를 예수의 입으로 드러냈다. 구약적인 사단의 방법과 대조적으로 신약에선 독립적인 방법을 취하는 듯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자신만의 권한으로 싸우는 사단이 과연 앞으로 예수와 의 싸움에서 질 것을 알았을까? 구약이나 신약을 자세히 살펴보면‘디아볼로스’혹은‘옵히스’라고 하는 사단 그리고 그의 영적인 부하들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다. 만 약 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하염없이 자신의 힘을 낭비하거나 패배를 위 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몽땅 써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세는 그가 하지 않 을 것이다.“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5라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면 정확히 알 것 이다. 그런 어리석은 영적인 존재가 지금 예수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200 버려진 예수
『악의 역사』4부작을 집필한 제프리 버튼 레셀은 노트르담 대학에 서 역사와 종교학을 가르친 사람이다. 그는 신약성경에 사단의 용어로 ‘satanas(사타나스)’가 33번이나 나온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의미의‘Ho diabolos(호 디아볼로스)’로 역시 33번이 나온다고 한다. 마태복음 4장에 출현하는‘시험하는 자’가 바로‘Ho diabolos’의 영문식 표기이다. 그를‘악마’라고도 하며 더 정확한 명칭은‘사탄’(혹은 사단)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이 세상의 임금’,‘공중에 권세 잡은 자’,‘시험하는 자’ 로 인식하면 된다. 레셀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악마(사단)을 기독교에서 구 약의 유대교 사상, 특히 종말론과 랍비 전통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악과 사 단에 대한 구·신약의 비교를 내놓았다. 기독교의 신론에서 악과 악마에 대한 문제가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제 기되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탄이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의 대응물 또 는 대응원리로 간주될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학적인 편향을 가진 신학자 세대들은 악마나 악령들을 기독교의 메시지에서 거의 의미 가 없는 미신적인 유물로 여겨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반면에 신약성 경의 저자들은 예민하게 악마를 직접적으로 의식했다. 악마는 기독교의 본질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정도의 주변적인 개념은 아니다. 악마는 신약성경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신의 왕국과 악 마의 왕국이 싸움을 벌여 급기야 신의 왕국을 이기고 있다고 설파하면 서 신약성경의 중심을 차지한다. 악마는 기독교의 신론에서 중요한 대 안을 형성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악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6 사실 따져 들어가 구약과 신약을 특별히 비교한다면 레셀 말처럼 신약은 구약과 달리 날카롭게 여기면서도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 구약에서는 사단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01
이 하나님과 대적하면서 구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로 대적하는 면을 볼 수가 없다. 욥기에서 나타나는 사단은‘고발자 혹은 송사자로서 활동하는 자’로 이 단어는 법정에서 다른 사람을 고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그가 하는 일은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하므로 이것을 하나님께 송사하는 존재로만 부각된다. 특히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선 여 호수아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단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눈을 떠 직접 그의 눈으로 보기도 했다. 스가랴 예언서의 저자는 자신의 입으로 여호와께서 사단을 허술한 불에 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다고 하며 하나님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찮게 여기심을 목격하게 된다.7 그런 하나님 보시기에 하찮은 존재인 사단이 지 금 신약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시험하려 하고 있다. 구 약에서 나타난 사단과 이제 곧 전쟁을 선포한 예수와의 한판 대결이 새로 운 신약에서 그의 등장으로 인해 가히 치열하고 옹졸해져 가고 있었다. 게 다가 더욱더 인간의 마음속 깊이 또한 인간 속으로 들어가 못살게 구는 직 접적인 조종에 들어간다. 예수의 시험하는 자 곧‘디아볼로스’는 구약에서 충동질을 욕구시키게 하여 다윗의 인구 조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반항적 과 업을 성취하게 하는 업적이라는 수단으로 다시 예수에게 써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다웠다는 두로 왕 같이 기름부음을 받고 이 땅을 지키는 의무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교만하여 영화로움으로 자신의 지혜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산에서 버림받았던 그의 수치를 예수에게도 동 일하게 적용시키려고 노리고 있다. 두로 왕처럼 마치 옛적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있었던 각종 보물과 보석으로 단장했던 그 땅에서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지만 자신의 과오로 슬픈 노래를 지어 가는 상황처럼 예수 또한 결국 버림을 받게 될까? 어째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복음서에 갑자기 출현하는‘디아볼로스’, 202 버려진 예수
즉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마귀는‘거짓 비방자’,‘악마’, 혹은‘중상모 략가’, 공통적으로‘사단’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은유적 표현으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사단의 편에서 행동하는 자를 일컬은 말이다. 또한 복음서 에 나타나는‘귀신’, 혹은‘더러운 귀신’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다‘깨끗지 못한 영’uncleanspirit으로 본래 해석되고 있어야 했다. 성경 전체를 찾아본 결과 앞에서 언급한‘프뉴마(영)’라고 불리는 단어 는 407개나 등장한다. 특히 마태복음 6번8, 마가복음 12번9, 누가복음 16번 10, 요한복음 15번이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영적인 성경임은 분명하다. 물 론 다 같은‘영’이라는 단어이지만, 통상‘거룩한 영’과‘깨끗지 못한 영’ 두 부분으로 나뉘어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약에 등장하 는‘귀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전부가‘깨끗지 못한 영’이라고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 원문 해석상으로 그렇게 해석해야 하지만 한국 정서에 맞추 어‘귀신’이라고 해석하여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유일하 게‘귀신 들린 자’역시 해석을‘다이모니조마이’라고 읽으며, 이는‘악한 영의 권세에 있는 자’로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 어째든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포영화에 관한 매체에서 등장하는 여자 귀신 을 포함하여 등장하는 기타 인물들에서 나타나는 그 어느 것을 예수가 만 난 자로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현대인들의 기독교인마저 혹은 종교 지도자들마저 그렇게 평가하고 오해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가 만난‘시험하는 자’혹은‘마귀’라고 해석되어 있는 문구 는‘디아볼로스’라고 해석되어 있다는 점을 미루어 예수가 만난 자는 우리 가 알고 있는‘깨끗지 못한 영’에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영 적인 존재보다, 그와는 반대로 걸어가고 있는 나쁜 행동을 하는 영적인 존 재로 보아야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단과의 전쟁은 마치 그가 땅의 제국을 돌아다 니며 탐사관으로서 특정집단과 사람들을 판단하여 법정에 고발하는 적의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03
부하들처럼 예수를 처단하기 위해 이리 저리 그의 약점을 보기 위해 판단 하는 준비가 한창이다. 그 사단은 예수를 죽이거나 음모를 꾸며 그를 세상에서 몰아내는 수작을 부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예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 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세례를 받은 즉시 광야로 영에 이끌리어 사단과의 전쟁을 불사했다. 마치 세례 요한의 물 세례를 허락하셨듯이 광 야의 금식 기도를 예수는 스스로 영에 이끌리어 허락하게 된다. 왜 예수는 우리들의 기도처럼 자신의 하나님에게 기도하여“사단의 공격이 곧 시작되 오니 멈춰 서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했던 예수, 그는 그 예언을 성취하고자 그 고난의 길 중 하나인 사단의 유혹적인 사과를 던진 것을 받았다. 과연 순탄치 못한 삶 가운데 여러 유혹에서 벗어 나야 하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을까? 마치 해야 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래서 오늘 중으로 마감해야 하는 원고 혹은 경영자의 과중한 처리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무엇이라 꼭 집어 표현할 길이 없지만 예수는 그 이끌림을 잘 이용 하고 있다. 자신이 앞으로 계속 싸워야 할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알고 있던 미래를 볼 줄 아는 자가 예수가 아니던가? 미국의 서부 영화에 나오는 대결 처럼 상대방과의 대화로 약속시간을 잡고 그 시간을 기다리며 무엇을 어떻 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승부를 그들은 생각했을까? 혹 아니면 상대방의 약 점과 장점의 모든 것을 알고, 그 상황을 예의 주시하듯 구경하는 관중처럼 지켜보는 자로써 사단은 예수를 40일동안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하였을까? 또한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상대방과 마치 대결을 앞두고 미리 서로 만나 심리적인 탐색작전을 방불케 하는 사무라이의 결투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지금 필요한 심리적인 느낌을 수록하지 않은 복음서 저자들의 그 결과, 예수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자신에게는 상 204 버려진 예수
황의 대 반전으로 여겼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사역에 일대 혁명이 분다. 그리하여 그의 색다른 구별된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듯 이 당연한 모습을 선사하게 된다. 물론 예수의 광야 사건을 보는 관객들은 마치 마술사의 마술을 보고 놀라거나 의심하거나 혹은 매료된 이상한(?) 기 적을 볼 수 없다. 다만 표현적 측면에서 마가복음은 세례를 받고 곧바로 거 룩한 영(성령)이 그를 광야로 내친다는 표현으로만 설명하려 한다.11 복음서들의 표현은 대략 이러하다. 세례를 받은 그 즉시 예수에겐 비둘 기 같이 내린 영이 안에 들어가 있고 충만했다. 그 영을 바로 예수가 받았 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영이 있으니 그 영에 의해 예수는 조정 당한다. 이 를 이용하여 헬라어 표현으로 말한다면“예수 안에 있는 영 자신이 신체를 가진 자신을 광야로 몰아간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결국 하늘 의 영을 가진 예수가 그 영으로 인해 광야로 내몰린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 게 된다. 황량한 벌판으로 수 놓은 광야로 거룩한 영에 이끌리어 아무도 없는 곳 으로 그를 내몬다는 상상이 머리 속에 비춰지는가?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자세히 기록한 누가복음에선 예수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요단강 에서 돌아오사 광야에 사십 일 동안 거룩한 영에게 이끌린다고 되어있다.12 마가복음의 저자는 독특하면서도 짧고 간결하게 예수가 겪은 광야의 전쟁 을 사십일 동안 들짐승과 함께 하였다고 진술한다. 이는 피조물 중 사람이 아닌 동물과 함께 있었다는, 결코 가볍지 않는 표현을 터치하고 있었다. 예수는 지금 중상모략을 좋아하는 사단에게 유혹받는 상황에 앞서 거룩 한 영(바람, 기운, 생명, 영적인 상태)이 그를 사십 일 동안 이끌고 있었다 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이미 사단에게 유혹당하는 상태 이전, 이미 그는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13 그 준비된 상태로, 더 군다나 이 사건을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음식을 하루 세끼 먹어야 하는 우 리들에게 그 사건은 치명적인 약점이자 난이도 높은‘금식’이라는 것, 그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05
것도 사십 일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느 누구나 가능할 까? 아무리 영이 충만 한다고 한들 그 어느 누가 과연 그 기간 동안을 무사 히 버틸 자가 있을까? 예수는 사단과의 전쟁 속에서 그 어떤 자신의 군대들을 이끌지 않았다. 적의 영토 속으로 아무 것도 들지 않고 빈 손으로 의기양양하게 나아가 마 치 적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어 적의 소굴 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아 니겠는가? 이 굶주림의 나약함을 들고, 예 수는 적진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적진에 서는 지금 그가 사십 일을 굶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을 삼켜 버릴 태세로 적군 의 총사령관인 예수를 사단은 지금 가장 적에게 절실한 무언가를 주면서 그를 유혹 ▲ 에리 세퍼Ary Scheffer 1854년 작품, <그리스도의 한다. 이제야 비로서 거룩치 못한 영의 입 시험> 장에서 예수와 함께 카이사르 황제들처럼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냥 놓치지는 아깝고 싫다. 그런 사 단의 그 유혹은 교활할 데가 그지없다. 가장 치명적인 음식으로, 또한 이 세상을 다 준다는 명예를 가지고 걸고 넘어지고 있다면 그 어느 누군가가 거절하겠는가? 영화『일곱 가지 유혹bedazzled』에서 보면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컴퓨 터 프로그래머 엘리오트 리차드에게 한 아름답지만 차가운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눈부시게 강렬한 인상을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 악 마와 손을 잡고 리차드의 소원을 성취하려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 러한 강렬한 이미지가 될 수도 있는 사건 앞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았 던 것은 복음서에서 사단이 언급한 문장이 등장한다.“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거든~.”이를 원문으로 직역한다면 사실“넌 그 아들이다. 난 하나님이 206 버려진 예수
니~”라고 하는 말이다. 또한“네가 그 아들이거든 난 하나님이다.”라고 해 석해야 옳다. 사단과의 시험에서 나오는“네가 (선택된) 그 아들이다”라는 말은 오히려 예수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말이다. 혹 그렇게 인정 한 후 시험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뜻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면 난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사단은 그에게 유혹하며 주장하는 꼴이 된 다. 그 깨끗지 못한 영이 말하길“너는 그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이니 네게 말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를 주겠다”는 유혹을 감히 제시하고 있 었다. 그 영은 마치 일곱 가지 유혹에서 등장하는 한 아름다운 여인처럼 감 미로운 목소리로 넌지시 제시했을까? 복음서 전반에 걸쳐 공통적인 사안으로 깨끗지 못한 영은 언제나 예수가 등장하면 그의 신변을 이미 알고 대처한다는 사실이다. 그 앞에 사단과 그 의 무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광 야의 한 사건에 단서를 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이제 예수는 사십 일을 마치고, 기력이 소강상태인 그에게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속이고 기만하고 있었다. 또한 사단은 원초적인 갈급함을 들이댄다. “물론 원수(예수)도 지금 긴장된 상태로 자신을 적에게로부터 방어하는 모습으로 준비 중이다. 사실 강한 내면의 거룩한 영이 존재한들, 인간의 몸 을 입은 껍데기에 불과한 약한 모습과 동시에 굉장히 거룩한 모습을 보이 는 임재가 보이는 힘을 가지고 있던지…,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 은 그런 하나님의 임재도 과거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그리 오래가는 상태는 없었다. 기껏해야 몇 일이 전부가 아닌가? 예수, 그가 하나님의 아 들이면 나를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나타낸다면 그는 필시 나의 유혹에 속을 것이다.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야 할 감정이 일어나면서 유혹을 쉽게 뿌 리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원수, 굶주린 자여!”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07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단은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예수에게 하나 님의 아들이니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말대로 유대백성들에게 먹을 것이나 주면서 슬슬 달래주고 심심하면 기적을 그들에게 선사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십자가의 살이 찢기는 아픔과 고통, 매맞는 아픔 과 침 뱉는 수모와 그로 인한 백성들의 환호 또한 예수가 죽어야 할 고통의 순간을 넘어 사단이 그에게 주는 쉬운 방법, 즉 깨끗지 못한 영을 믿어 자 신이 주는 이 땅을 함께 정복하자고 교묘하게 예수를 유혹했다. 그것은 하 나님을 곧 버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 다. 예수에겐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 아닌가? 사단이 말하는 방법은 참 으로 쉽다. 그냥 기적을 보여주고 자신의 말로 간단히 죽은 자를 살리고, 죽어야 할 사람들을 죽인다. 자신이 왕이 되면 그만이며 특별하게 뭐가 부 족하여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켜야 하는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는 광야의 대결이라는 주제로 예수와 깨끗지 못 한 영, 즉 사단과의 눈부신 결전과 지극적인 광야의 유혹에 대해“예수는 얼마든지 요구대로 음식을 만들어 내 군중들을 설복시키고, 그것으로 세상 왕국들을 지배하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내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라고 진술한다. 이런 생각을 예수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매일매일 자신이 언 젠가 백성들에게서 버려지는 상상을 하면서도 자신 내면의 심각한 갈등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천하만민을 준다는 사단의 솔깃한 제안에 안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누구나 부와 명성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도 배고픔 속 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자에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저주스런 유혹의 손길은 한걸음 다가서기 마련인 것처럼…. 영화가 불연듯 떠오른다. 한 불쌍한 주인공에게 게임을 하자고 유혹한 다. 유혹자와 게임을 하여 이기는 자가 수 억을 현찰로 받는다. 영화『더 게 208 버려진 예수
임』이라는 내용에서 그러한 내기를 볼 수 있다. 주인공은 거리에서 초상화 를 그리는 가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어느 날 한 노인을 그려준 대 가로 수표를 받고 잠시 후 그 노인의 한 통화를 받는다.“나와 내기를 하지 않을 텐가?”하고 말이다. 그 노인은 주인공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임의 의 번호를 번갈아 선택하여 전화를 걸어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를 맞추는 게임이다. 처음엔 반대하여 집으로 돌아오지만 자신의 빚을 진 여자친구 집에 요구하는 깡패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허겁지겁 그 집에 달려 온 주인공을 깡패는 때린다. 이윽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주인공은 마음 이 변하여 게임에 나선다. 그는 여자로 선택하여 내기를 하지만 이내 지고 만다. 그리하여 자신의 여자친구를 빼앗기고 자신의 몸과 영혼까지 빼앗기 게 되는 극단적인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그다지 극단적인 현실성은 없다고 하지만 돈이라는 환경에 의한 지배에 서 벗어나지 못한 유혹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잘 이용하였다. 그러한 노 인처럼 예수는 자신의 몸을 대가로 영혼을 사단에게 팔지, 아니면 자신의 고통과 수모를 당하는 고난의 길을 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늘 우리가 받는 유혹은 솔직히 매일 매일의 삶에서 나타나며 결정하는 몫은 우리다. 진리 와 욕설, 사랑과 이별, 칭찬과 비방, 참음과 분노, 욕망과 버림, 성욕과 절 제, 탐욕과 나눔, 부와 가난이 세상에 동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라고 유혹한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지독히 그 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머삼켜 쥘 수 있는 부의 세상에 옮기고 싶고, 육체적 고 통과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그리고 버림 받고 싶지 않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서 우리는 늘 이별이라는 쓰라린 가슴을 끌어 안는다. 그렇게 이내 누군가에게 버리고 버려지며 고통을 맞보게 된다. 사실 사단은 특별 히 예수를 헤치려는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사단과의 광할한 한 사막에서 벌어지는 사건 앞에 현대판에 나오는 국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09
회, 종교 전쟁, 나라 안과 밖의 전쟁 등 서로를 비난하고 죽이고 싸우는 그 런 대결은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사단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 고, 그저 그 인정된 기적과 위치를 조용히 물리고, 그냥 나와 같은 방법으 로 세상을 지배하자는 간단하고도 명쾌한 이론을 내세울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마음 속으로 수채화를 그리 듯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 일련의 사건처럼 이스라엘의 과오, 수치, 분열, 포로 생활, 귀환 등을 통해, 게다가 미래에 닥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는 눈을 감으며 기도하고 묵상하였을까? 다행인 것은 그의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에 자신을 내어 던진 결과, 그는 승리의 깃발을 달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임에 목이 곧을 지라도, 그들 이 표적을 구하는데 혈안이 되있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일지라도, 그들을 향하여 피리 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을지라도, 구슬피 슬 퍼해야 그들이 가슴을 치지 않는다 할지라 도, 예수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이 땅의 뜻이 함께 이루어지는 역사의 현장에 그가 놓여 있었다. 그로 인해 평화와 천국이 그 시간에 잠시 놓여 있었던 것은 분 명하다. 만약 사단의 유혹을 거절하지 않고 ▲ 토마스 콜Thomas Cole 1843년 작품, <광야에서 사단과 같이 세상을 지배하였다면 끔찍하였 예수를 보살피는 천사> 으리라! 시험에 놓였던 예수의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후에 사단은 그의 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축복과 함께 천사가 그에게 시종 들게 된다. 그 어떤 선지자나 예언자도 하지 못한 일을 그는 해낸 것이다. 통쾌한 승리 를 맞본 장본인이지만, 장차 십자가의 죽음 앞에선 그도 두려워해야 했다. 210 버려진 예수
그가 가는 길에는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한 채로 그의 나아가야 할 방 향을 거룩한 영과 함께 이루어 나갔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게임이지만 앞으로 수 많은 두려움과 장애물 그리고 슬픈 애통과 가난, 멸시와 천대와 의 싸움은 남아 있다. 사단이 예수의 품에 떠났을지라도 그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곧, 예수 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려고 지속적으로 발버둥을 칠 것이다. 반대로 예 수, 그는 자신의 일, 곧 여전히 진행중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하나 천천히 걸어가며 건설해 갔다. 사단은 이렇게 천천히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나아 가는 예수의 길에서 깨끗지 못한 영에 의한 방법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방 법을 종용함으로 사단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길을 갔다. 이 제 그 길은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예수는 걸어가고 있다. 조용한 길을 걸어가며 그는 자연을 느끼고 감상하며, 그러면서도 인간의 선택에 놀랍도록 채찍질하지 않는다. 오직 열두 제자를 채택하였으며 그들이 자신 의 죽음에서 벗어나도 그들을 미워하거나 별로 화를 내지 않는 길을 간다. 물론 작은 충돌이 발생하지만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 여겼다. 아주 가끔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뒤집고, 깨끗지 못한 영들을 쫓아 냈으 며 알곡과 가라지 비유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였고 자신의 집을 귀신의 소굴로 만드심에 화를 내곤 하였다. 또한 죽은 자들 앞에서 눈물을 떨구시고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사해주시기도 했다. 물론 사단도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그의 곁에 떠나 있는다. 14 그러나 그 깨끗지 못한 영은 아직도 발자취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다니며 사단 자신을 통해 세상을 화나게 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죽음의 길로 재촉하지 않고 그 십자가 의 길을 비난하고 경멸한다. 그러나 이미 예수가 선택한 길이기에 그저 가 는 길이다. 하나님이 택한 종,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서 그에게 필요 없었던 거룩한 영을 부어주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이방에게 전 하는 그의 사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수, 그는 말씀을 통해 하늘의 메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11
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의 영, 그 능력이 사방에 펴진 사건으로 인해 그는 회 당에서 메시지를 선사한다. 더불어 자신의 사역 방향을 누가복음에서 그는 소상히 밝힌다. 즉,“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 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 려 하심이라”15라며,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을 넘치게 하려고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눈먼 자, 사단의 포로 된 자들에게서 거침없이 그들을 건지 시는 그의 능력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작전 구상을 세상에 떠벌리고 다니면서도 군인과 군중들 의 무력 진압에 떨게 하는 군사 작전을 과감히 버린다. 그는 구약의 예언 처럼“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여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 지 못한다”고 말이다.16 자신을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상한 갈대를 꺾지 아 니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마음의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도 아니한다. 그는 모든 관련된 심판과 저주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까지 미루고 하나님의 뜻에 맞긴다. 그는 자신의 길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걸어 간다. 다만 우 리들의 오류인 과거 아담과 하와의 슬픈 서곡을 자신의 죽음으로서 잠재울 뿐이다. “악마The Devil, 그는 오래된 존재이다.”괴테의 그 말처럼, 오래된 악마의 존재와 함께 놓여진 이 모든 타락은 자신의 손 안에서 마구 쉽게 주무르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했다. 그 존재가 바로 타락의 원천이었다. 그 생각의 역 으로 본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 존재가 없다면, 사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우리는 잘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도 필요 없으며, 구약 성경은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여 신의 존재 역시 우리의 뇌리 속에서 지워진 존재 로 남아있거나 아예 처음부터 존재 자체는 없었을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 을 것이다. 212 버려진 예수
하지만 역사는 반대로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뱀의 유혹으로 먹었 던 맛있는 사과! 우리의 후손이 먹음직스러운 유혹의 어리석음에 속아 넘 어간 것은 그러한 사실 앞에 진실이 아닐까? 아담과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 지만 예수는 이겨냈다. 그것도 극한 고통인 굶은 채로 말이다. 아담과 하 와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모든 환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 고, 그렇게 행복한 상태에서 뱀의 유혹을 당했다. 우리는 인간이자 그런 존 재다. 하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는 무언가 우리와 달랐다. 사과의 거짓과 진실의 혼돈 속에서도 예수를 통해 결국 뱀 같은 사단과 의 세 가지 유혹에서 이겼고, 지금도 진행형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영적인 전쟁인지 아니면 진정한 보여진 사단과의 싸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게 사 실이지만 우리는 그와의 싸움에서‘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 사실은 중요 한 것이라는 것을 통달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온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승리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명단이 오른다는 것이 그 증거가 아 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담과 하와의 치명적인 단점을 비교할 때 몇 배로 열 악한 환경에서조차 이겨낸 그 힘은 바로 성스러운 하늘에서 내려온 영이 다. 그 영과 함께 함으로 우리는 그의 안에 있는 듯 그렇게 느껴야 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 머물게 하신 것과 달리 예수가 시험 당하던 곳은 아름다운 빛깔의 찬란한 영광이 가득한 곳이 아니었다. 반대로 애굽에서 불러 내었을 이집트의 환경보다 더 악조건 가운데 예수는 황량한 사막 그 어디선가 외로이 서 있었다.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찾은 자로서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막에 그는 서 있었다. 그러나 과거 광야 이스라 엘의 참모습은 어떠한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 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13
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17 하나님은 호세아의 입을 통해 자신들의 이스라엘 민족을‘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불러낸 동일한 아 들인 예수와 광야의 이스라엘,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점이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자신의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표현과 비 슷하다는데 주목할 것이며 또 하나가 더 있다. 첫 교훈으로 단일민족인 우 리나라처럼 오로지 한 민족을 이끌어간 주역들 중 모세는 당연 이들 중 가 장 으뜸이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가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애굽에서 불러내 40년 동안 광야에서 굶주림 과 더위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삶 가운데 그들의 날개가 되어준 하나님 을 버린 이 첫 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전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 다. 물론 모세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자 백성들이 자신을 버렸지만 자신은 백성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 는 하나님을 그들은 무참히 버렸고, 그들의 사랑을 다른 곳인 땅 위에 있는 물질로 만든 우상에게 눈을 돌린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부르면 부를수록 더 멀리 떠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들은 속임수로 애워쌓고 있었다. 번성할수록 하나님에게 범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에 입맞춤하였 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 하나님에게 받은 자신의 잔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결국, 예수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서 동시에 세상을 발 아래 두기 시작했다. 두 번째가 여기 있다. 습관적으로 입을 빠는 어린 아이처럼 늘 길바닥에 서 말이 없는 금조각에게 절하고 서로 음행한 40년 생활동안 하나님과는 반대의 길을 택했던 겁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 엘 백성들의 고통스런 생활과 숫자 면에서 40일 동안 혹독할지도 모르는 214 버려진 예수
그 모진 굶주림과 지치게 만드는 광야, 이러한 비슷한 환경과 기후에서 그 는 모든 일을 해냈다. 그것도 홀로 서 있었다. 물론 그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늘 함께 하였다. 인간의 식욕에 대한 욕망!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욕망! 세상을 가질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욕에서의 선택! 세상이 자신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게 하고자 하는 달콤한 사탕발림의 명예욕! 피와 정복에 대한 인간적인 정복들! 예수는 그 것들을 십자가로 하나님의 영과 함께 끌어 내렸다. 그 일로 자신을 죽음의 길까지 걸어가며 견디는 고난과 저주의 잔을 거 둬들이지 않는다. 진정한 땅의 정복인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구약의 하 나님 언약과 메시지는 같지만, 그 완성을 무참히 밟아 버리고 후회해버리 는 유대인과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예수를 통해 여기 사단과의 승부에서 이미 결론은 내리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시험에 대한 복종과 불복종을 가리는 사건 속에 서 이 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하였던 반면, 예수는 그 시험을 스스로 피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이 움직이는 대로 하여 그 어떤 후회나 원망을 하지 않 았던 고난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이 주신 권한과 능력으로 세상 에게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목적을 보이고자 했고, 물 론 이 땅을 몽땅 쓸어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버린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고유한 선택을 가차 없이 이방 인들에게 전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 속에만‘혼자만의 구원’이라는 쓰레기 통의 쓰레기를 여전히 품고 산다. 그렇다! 선택은 후회가 없어야 한다. 우 리는 예수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어디로 쏟아 부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 을 해야 한다. 부와 명성? 신에 대한 시험의 피할 길? 아니면 고난과 죽음 에 맞닥뜨리는 운명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영? 그 영이 하늘로 올라가기 전, 예수는 이미 자신의 할 일을 찾은 셈이다. 제 5 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215
▐ 5장 미주 ▐ 1. 톰 라이트,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노종문 옮김, IVP, p45. 2. 요한 계시록 19:1-20. 3. 요한 계시록 20:7-10. 4. 디모데후서 3:2-5. 5. 요한복음 13:35. 6. 제프리 버튼 러셀,“데블(Devil)”-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 화, 김영범 옮김, p280. 7. 스가랴 3:2. 8. 마태복음 3:16, 10:20, 12:18, 12:43, 26:41, 27:50절 6곳에 수록되어 있다. 9. 마가복음 1:10, 1:12, 1:26, 3:29, 3:30, 5:8, 7:25, 9:17, 9:20, 9:25, 13:11, 14:38 10. 누가복음 1:35, 1:47, 2:25, 3:22, 4:18, 8:55, 9:39, 11:13, 11:24, 12:10, 12:12, 13:11, 23:46, 24:37, 24:39절 16곳에 수록되어 있다. 11. 마가복음 1:12. 12. 누가복음 4:1. 13. 사실 이 대목에서 성령에 이끌리는 의미와 시험을 받고 있는 행동을 동시에 보고 있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어려 학자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40일 14. 의 시험을 받으신 후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며 또한 어떤 학자들은 40일 15. 동안에 주리고 영적인 체험을 통해 그 기간 동안의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는 16. 의견도 있다. 사복음서에의 저자들은 각자 독특한 방법으로 위의 의미를 여 17. 러 다양한 의미로 내포하게 표현한 관계로 본인에게는 포괄적이면서도 단순 의미로 사단의 유혹에서 승리한 예수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는 점이 중요하다 고 사례된다. 누가복음 4:13. 누가복음 5:18. 마태복음 12:19. 호세아 11:1-2. 216 버려진 예수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서 말하노라” - 요한복음 8:25~26 -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받는다. 아무튼 앞서 말했듯이, 그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다. -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에서1 - 당시에 예수가 사람들에게 받았던 정반대적인 반응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유대인 소년임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 필립 얀시 -
세례 요한의 의문 사해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케투스Machaerus라는 요 새 지역 내 어두운 성체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감옥 안에 한 사내가 있다.2 이 사내는 헤롯 안티파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화를 자초했다. 무슨 이 유에선지 유대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 왕은 그를 자신의 궁 안에 있는 감 옥에 가두었다. 그 사건의 내막은 헤롯이 자기 친 동생 아내 헤로디아의 일 과 여러 가지 악한 일로 자신에게 꾸중하였기 때문에 그를 가둔 것이다. 그 헤롯 안티파스 왕은 자기 잘못을 아는지, 실제 친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 아를 아내로 맞아 들었기에 조금은 인정하는 눈치다. 그런 그가 감옥에 있 는 한 죄인를 쉽게 죽이지 않은 듯했다. 겨우 자신을 따끔하게 혼낸 그를 옥에 가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감옥에 잡혀 들어온 자는 바로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의롭고 거룩 한 사람이기에 헤롯 왕 안티파스가 두려워하였는지, 오히려 보호하고자 하 는 마음도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 그는 세례 요한의 따끔한 질책에 번민하 면서도 달갑게 들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일로 반성의 기미가 조금은 있 는 듯하다.3 세례 요한, 그는 예수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서 그 길을 밝히는데 비록 예수와 함께 동행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은 지금 충분히 자신의 과업 을 이룩하여 땅의 축복보다는 하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자신의 투옥을 마지막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선포 와 함께 그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았고 또 들었다.4 여전히 헤롯 안티파스 왕에 의해 감옥에 있는 것이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 게 되지만 요한의 제자들과 기타 관련 사람들의 면회를 허용한 것이 아마 도 그에게는 조금 위로가 된 듯 했다. 당시 가버나움 남쪽 20마일 떨어진 곳으로, 또 다시 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나인’이라는 성, 그 감옥에 갖혀 있는 세례 요한에게 그의 제자들 220 버려진 예수
은 예수의 능력이 죽은 자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만지자마자 다시 일어 나서 걸었다는 말을 전하고, 또 가버나움 어떤 유대의 적대적인 로마인 백 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하고 있는 중이다.5 세 례 요한은 이윽고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고, 진정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야인지를 알아내고자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이 상한 점이 하나 있다. ▲ (대) 젠 블루걸Jan Brueghel the Elder(1568- ,1625) 세례 요한의 가르침 자신의 제자들에게“너희 제자들 중 둘을 보내 예수에게 묻고자 한다. 진 정 오실 그이가 당신인가?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더 애타게 기다려야 하는 가?”6라는 말을 왜 제자들에게 전달했을까? 이러한 말을 전하는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세례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적과 능력을 의심하면서도 놀 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들 가운데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의심을 걷어주려고 했는지 혹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고 하였던 자신의 말을 곱씹으며 아직도 예수의 정체성에 의문시 하였을지 애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21
석하게도 성경은 드러내지 않는다. 성경에선 다만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고, 그와 동시 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환상을 함께 보았으면 서도 예수가 진정 우리가 찾던 그런 메시야인지 몰랐을까? 자신의 제자들 을 보내어 그런 의혹의 실마리를 풀어야 했을 그의 진정한 의도는 진정 무 엇일까? 묻고 싶은 건, 세례 요한이 과연 나의 의심처럼 예수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적으로 의심 의 안개가 더 사무치듯 의심의 폭풍이 세례 요한에게도 동일하게 요동쳤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다 시 한번 더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 그들에게 확신을 동시에 심어 주었을 거 라는데 조금은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또한 오늘날 여전히 예수를 과연 누 구라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더욱더 선명하게 보이기 위해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어째든 복음서 전체의 정황 속에서 세례 요한은“진정 아버지께서 아들 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에게 주었다.”7는 예수를 향한 예언을 깊이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품었던 의심을 종 료하고자 물어보게 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이는 당시 유대인이 거나 헬라인이거나 혹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나 모슬렘 사람들에게나 유 럽인을 넘어 아시아 전세계에서 가장 궁금한 의혹의 증폭이 되는 동일하고 도 신랄한 질문이 되고 만다. 비단 제자들만의 아픔과 고민이 아닌 나에게도 적용시킨다면? 그 궁금 증의 사고처럼 나의 예수에 대한 의혹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혹은 오늘날 현대인들을 위해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세례 222 버려진 예수
요한을 언급하며 질문을 유도시키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가 가진 어두운 그 마음을 풀어 해치기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불현듯 그런 긴장된 순간을 애타게 찾아 헤매었을지도 모른 다. 우리 모두가 예수에게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내면의 고요함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또한 이런 내면의 고요함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예수의 행 적을 통해 스스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나타난 궁금증을 물어보듯 내 가 느꼈던 과거의 회의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긴 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느 정도 내게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러한 애석한 마음의 혼란을 가져온 나의 심장에서 뛰는 소리를 애써 감추지 못했다. “내가 전에 너희들에게 말한 것이 있으니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앞선 사람이니, 또한 그는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결국 세례 요한은 그가 하나님 본체이자, 처음과 나중이라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 한 자가 바로 여기 예수라! 나도 (한때는)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여기서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베푼 후에야 그를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에게 나 타내어 나의 증거를 보일 것이라! 또한 내가 물로 세례를 베풀 때 성령 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무른 장면을 내 두 눈으 로 똑똑히 목격했다. 다시 한번 말하노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 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 하시길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걸 보게 되면 그가 곧 성 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가 바로 그이 인줄 알라고 내게 말하였도다. 결 국 난 그를 통해 나타난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난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노라”8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23
요한복음에 나타난 내용 중 그의 예수에 대한 사실을“나도 그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라는 문구를 두 번씩이나 사용하여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표현을 오히려 극대화시킨다. 혹자는 이 문구로 들어 세례 요 한과 예수가 전혀 상관없다는 근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나보다 먼저 계신 자”혹은“성령으로 세례 베푸는 자”라고 하는 말에 주의하여야 한다. 더 한다면 복음서의 앞뒤 문맥 정황을 놓고 볼 때 마땅히 세례 요한 이 친척인 그를 잘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성에 의 문을 하는 자들은 복음서 전체 문맥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처신이다. 비둘기같은 거룩한 영이 하늘에서 내려온 그 계시를 통해‘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그는 고백한 대목을 잊지 않아야 한다. 더불어 혈연적 관계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낳은 형이지만 예수를 두고 서 자신보다 먼저 난 자라고 고백했다. 이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자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이유다. 성령, 곧 거룩한 영이 우리의 길과 마음,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한 예수의 말처럼 ▲ 프렌세스코 트리브스니Francesco Trevisani 의 부모의 태부터 그 거룩한 영이 임했던 세례 작품으로 <예수에게 물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 임하기까지 요한> 예수의 어린 시절에 누린 기적도 추억처럼 아련하였을까? 세례 요한, 그는 과거에 세례로 인한 자신의 사건과 일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내려준 그러한 사명을 그는 늘 간직했다. 오늘도 제자들 에게 전하면서 감옥에 있는 그는 이미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러한 사건은 마치 나 같은 헛된 제자들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남긴 기록과도 같다. 어찌 보면 교회를 수십 년간 다니면서도 정작 예수에 224 버려진 예수
대해 진정 몰랐던 나의 헛된 과거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여실히 그려주 고 있었다. 곧 임의적으로 과거부터 예수를 온통 무시하고 있던 것이다. 그 것에 더하여 그를 찾고자 갈망하는 마음이 동시에 싹트는 그런 느낌도 함 께 말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얀 종이 위에 새로 시작 하는 느낌과 함께 그리는 수채화처럼 그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다윗 의 후손, 그를 쓰고 지우는 작업을 병행한 후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은 결국 갇혀 있는 감옥을 뒤로 한 채 예수가 있는 곳으로 요한 자신의 제자 둘을 보내게 된다. 때마침 예수는 질병과 고통, 그리고 깨끗지 못한 영에 들린 자를 많이 고치며 자신의 과업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 앞에 서서 자신의 스승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 였고, 그리하여 이들은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 의 예상치 못한 허공을 향한 대답이 이들을 더욱 당혹케 한다. “…너희는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 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9 예수는 과녁을 향해 조금 빗나간 화살처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내놓았 던 질문의 답을 피한다. 그저 자신이 찾던 예언자이자‘메시야’라는 직접 적인 대답을 비켜가는 것이 우울할 뿐이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한 질문에 예수는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자 신이 바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표현을 묻어두고, 다만 그 예수는 자신의 행적을 보며 자신을 보라고 한다. 구약의 예언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방어한다. 중요한 것은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25
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라워하여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니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하나님의 나라’이며 또한 그 하늘의 뜻이 지금 이 땅 위에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있었 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10 그를 통해서만이 유일한 아버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심치 않게 되 는, 그런 기적을 말이다. 게다가 예수 자신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 고 더불어 과거에 전무하던 그 아름다운 기적을 이들에게 선사한다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낸다고 말했다.11 그는 자신을 구약부터 외친 메시야로서 구주이며 자신을 부활의 첫 열매 로 남기기를 원하면서도 이미 그 전부터 불쌍하여 가여운 가난한 백성들의 영적인 혹은 육적인 부활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 앞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 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과업을 과장하고 포장하 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치스러운 사람의 말보다는 진실로 실행에 보여주는 기적과 표적을 행함이 더 진지해 보인다. 그것으로 인하여 놀라 운 솜씨를 보여주어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더 먹혀 들어 간다. 대답 대신 이미 과거부터 드러난 예언으로서 나타나는 구약의 완성 으로 그리는 것 말이다. 예수 자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필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 수의 언급도 과거 율법에 얽매어 있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의 눈으로 볼 때 권력과 탐욕으로 가득한 이들 자신을 위해 예수를 등지게 되어 하나님 의 뜻을 저버린다.12 이러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예화는 예수가 거론 한 것으로,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우리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 하는 모 습을 거론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우리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우리는 절대 춤을 추지 않는다. 더불어 그들이 곡하여 슬피 울어도 우리는 울지 아 니한 것과 같다고 말이다.13 226 버려진 예수
성경에 쓰인 바, 예수를 조롱하고 버린 우리들과는 반대로 깨끗지 못한 영에 들린 자, 집에 있지도 않고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로 오로지 무 덤 사이에 거하는 그 어떤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예수 가 귀신들린 그의 곁에 오자 그 안에 있던 영은 이렇게 소리친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14 이는 거짓의 영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는 발걸음을 보 고서 단숨에 알아차린 것이 더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알 수 없는 정체 어느 날 멕시코 2004년 11월, 대형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고생이 숨어있었던 그곳은 과거‘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의 옛 유적지 ▲ 현재 멕시코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의 유적지로‘태양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이곳은 유 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멕시코의 자랑인 거대 유적지이다. 여전히 거대한 피라 미드 건축물들이 우뚝 세워져 있음에도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 다. 인 태양의 피라미드에 인접한 곳이었고, 그 부지에 대형 마트가 슈퍼마켓 을 세우기로 한 계획은 주민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곳 주민인 아스텍 사람들은 테오티우아칸을‘사람이 신이 되는 곳’이라고 믿었기에 주민들은 항의하고 있었다.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27
그 기업이 그들의 항의와 앞서 발굴된 제단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기 때 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믿음과 신념이 현실과 이미 동떨 어진 행동으로 표출하는 21세기 최첨단시대에 사는 비조화적인 상태가 여 전히 존재하고, 그렇게 동조하며 살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만들어진 신』에서 위와 같이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현실들 사이로 무신론인 그는 과감히 개인적 혹은 과학적 논리와 경험, 게 다가 성경의 논증을 들고서 철저하게 신을 비웃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신(혹은 천사나 푸른 옷을 입은 성모마 리아)의 모습을 보았다고 확신하기에 신을 믿는다. 혹은 신이 그들의 머 릿속에 말을 걸기도 한다. … … 당신이 신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가? 일부 사람들은 분홍색 코끼리를 보았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아마 그 말을 시답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 … 바로 예수가 오해를 받았다 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받는다. 아무튼 앞서 말했듯이, 그 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다.”15 설계자로서의 신은 예수를 자신과 같은 신으로 만들었을까? 예수는 과연 자신을 누구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신이 인간이자 신인지 알았을까? 의구심과 정직한 회의주의가 교회 안으로 파고 들어오면 서 시답지 않은 무질서한 질문들을 쏟아낸다. 예수가 과연 주관적 판단을 가한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판단 속에 가해진 이론인가, 아니면 필연인 가? 어떤 자들은 초기 자료들과의 연구를 토대로 예수가 인간이자 복음을 전 하는 전도사이며, 혹은 랍비처럼 교사인 것뿐이고 민중의 지팡이 노릇을 한 민중의 선동가일 뿐, 더 이상의 다른 존재가치는 없다고 토로한다. 나 또한 교회 안의 울타리 혹은 예수에 대한 좁은 지식적인 면에서 알던 228 버려진 예수
과거가 전부인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 많은 학자들과 신학 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에 나 역시 다소 구심점을 잃어가려고 한다. 실제 성경의 사복음서 모두가 모조리 예수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과 고유적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지 않아 현대인들마저 그 답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대기 속에 사라지는 희미한 안개처럼 무언가를 보여주더니 이내 사리 지는 그의 모습에서 신으로서 보기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듯하다. 대부 분의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그는 그저 하나의 사람일 뿐”이라고 하거나 정녕“그가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는 내용을 담 고 있는 탈무드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저 지나간 안개와 같다고 해야 할까? 예수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에 대해 사람들은 뭐라고 표현하고 있었을까? 과연 진실한 정 체가 어떤 사람들의 입으로 시인되고 그로 인해 사역과 자신의 정체를 드 러내는데 한 대목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가히 나쁘지 않을 듯하다. 내게 도 삶에서 죽음까지 버려진 예수에 대한 의혹과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복음 서에서 언급한 그의 정체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바라보고 찾는데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내게도 지금 이 순간에 과거를 회상하건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사실을 잊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 나는 그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예수가 사람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를 넘어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지 혹은 하나님 그 자신이 며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처음과 나중되시는 영원한 태양과 같은 빛, 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그의 말에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내 눈에는 단지 사람이었을 그 신의 아들에게…. 유일한 분? 독생자? 누군가 이렇게 지적한다. 예수가 창조자가 아니라고…. 다만 피조물된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29
존재로 만들어진 명백한 암시로서 골로새서 1장 15절, 그 성경의 구절을 제 시하고 있다. 곧“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난 자”라는 의미는 예수를 두고서 피조물의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한 목을 한 것 아니냐고 고래고래 소리칠 수 있는 상황을 직감한다. 진정 예수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 중 제일 먼저 난 피조물일까? 그 구절을 살펴보면“먼저 나신”이라는 표현이 질문에 대 한 힌트다. 골로새서를 저술한 사도 바울은 예수를 표현하는데 보이지 아니하는 하 나님의 형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모든 피 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가 곧 예수라고도 말한다. 결론적으로“먼저 나신”이라는 의미는‘하나님의 첫 아들’혹은‘장자’ 라는 본래의 의미를 지닌다. 곧 피조물에 대한 의미보다는“모든 창조물보 다 하나님의 충만함을 소유한 장자”라는 의미가 더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깝다. 그렇게 문맥의 일부분으로 구체화 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또 다른 논란이 되는 구절에서 우리는 단지 예수가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하나뿐인 혈통이고, 그래서 인간적인 핏줄인 아들 혹은 첫 아들로만 오해 할 소지가 분명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독생자’라고 표시한 대목 을 해석한다면‘유일한 분’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하고 있다. NIV 단체가 성경 해석을 한 대목이 눈에 띈다. 그 문장에서 보듯“하 나뿐이고 유일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번역본보다 훨씬 더 원문에 충실 하고, 무척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더 나아가‘유일한 아들’이라고 말하는 예수 주위의 배 후 세력들, 즉 열두 제자들과의 대화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예수님 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동시에 하나님과 같은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둘 중 어느 하나뿐이 아닌가?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같았다면 어떠한 위치 의 하나님인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230 버려진 예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전체적인 하나님과는 조금 낮아진 위치의 레벨적 상황이 되는 작아진 하나님인가? 이제 예수와 열두 제자 그리고 유대인들과의 삼각관계를 통해 우리는 예 수가 진정 누구인지 혹은 그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구체적인 연관관계와 그에 따르는 신분의 레벨을 선택해야 할 시간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배운 것을 마음 속에 새겼으며 어려 움이나 고통에서도 메시야의 구원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금 막 구약 성 경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 많은 단어가 떠오른다.‘창조자’,‘생명의 근원자’,‘죄를 사하시는 거룩한 분’,‘구세주’,‘왕’,‘알파와 오메가’,‘주’, ‘구주’,‘구속자’,‘목자’,‘심판자’,‘빛’,‘반석’등등…. 이로서 위대함 과 거룩함 그리고 유일한 자로 자신을 묘사한 것을 볼 때 예수가 모든 것에 자신을 적용시키고 그 다양한 정체성을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 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예수의 속성에 대해 전부를 보는 것에는, 이 책의 분량을 늘리는 것 이기에 전체를 나열하기보다는 일부분만을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인 윤곽을 함께 나타내었으면 하고 싶다. 간단하게는 예수, 그는 구약의 표현들을 드 러내어 자신의 것으로 입증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과연 자신 이 누구인가를 천하가 알게 되기까지 그의 민족을 준 하나님과 그 사람들 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은 하나님을 잘 사용하였다. 물론 그것이 화를 자초 한 일이었다는 전제가 앞으로 당연시 해야 할 과제 중에 하나일지라도 문 제는 예수가 한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절실하다.“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 라.”16 성전이라 외치는 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지혜자인 예수를 만나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31
그를 찾아야 함에도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쾌락과 화평을 주는 어리석은 우매자의 부류에 들고서 그분을 찾고 있다. 그것이 내게 무척 고민스럽게 만든다. 예를 들어 세상의 진리와 지식에 찾았던 결과, C.S.루이스는 한때 무신론, 이원론, 신비주의 경향과 더불어 영적인 유혹과 그리고 관념론과 범신론에 입각하여 고통과 악의 문제 등 여러 난제에 고민하고 그런 문제 들의 수수께기를 여러 해 동안 풀지 못하자“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어!”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7 신에 대한 회의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신랄한 종교 비판을 내놓았던 자 신의 책에서 우주가 우연한 사건의 산물의 일종이라고 외친다. 더불어 종 교는 자연 앞에서 허무함과 무력함을 버리지 못하여 공포와 두려움에 싸인 인간들이 이제 위대한 힘의 원천인 자연을 정복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연 앞에서 죽음과 고통에 몸부림치려는 배 위의 바이킹 정복자 들처럼 인간은 그런 헛된 야심에 가득 차 스스로 만든 가르침으로 신을 만 들어낸 허구적 상상을 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자들의 말에 귀를 쫑 긋 세우기도 수십 차례, 그 사고는 나에게 매일매일 삶의 일과이기도 했다. 오히려 세상의 유혹과 그들의 진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밖에서 주는 환락과 엄청난 이 땅의 지식으 로 인해 하나님을 등한시하게 된 결과로 구약을 통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 면 잘 알게 된다. 마치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야 할 이 땅이 거친 폭풍 우의 잔해로 뒤바뀌게 만들자 도저히 참지 못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와 불사르고야 마는 가히 분노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수모를 받고 있었 던 것이다. 이 땅은 정령 잡초만 남고 넝쿨들이 바람에 돌아다니는 황야의 사막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을 뒤엎고 예수는 모든 것을 수용하듯 겸 허히 이 땅의 것들을 잠잠히 받아들였고, 그저 자신을 하늘의 대리인으로 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구약 태초부터 시작되어 그 모 232 버려진 예수
양을 갖춘 십자가와 부활이 창조된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된 구약의 메시 야를 이제 땅에 보내어 자신의 일을 수행토록 해야 했다. ** * 신약성경의 맨 처음인 마태복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밀 이삭을 안식일에 자르던 행위에 대해 유대인들이 훼방을 놓자 자신을 가리켜 성전보다 더 큰 자18라 표현하며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19이라고 유대인들의 분노를 활활 타오르게 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이 유대인들의 주인이라는 의사 표시이 며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한 자로 평가해 달라는 주장이다. 아니 그가 진정 유대인의 주인이라고 분명히 말을 한다. 그가 진정 유대인의 주인이자 성 전보다 큰 하나님이란 말인가? 인간 예수는 사람들의 두 눈에 잘 보이고 있 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감히 쳐다 볼 수 없다고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유대인 예수가 감히?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보고 있다면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그곳은 이미 이 땅이 아니라 저 어딘가 하늘 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분을 섬기고 있 다는 증거임이 당연하다고 말이다. 그런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 앞에 예수 의 말은 믿을 수도 없거니와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마음의 문을 열기에는 인간 예수가 신이 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그들에게 결코 아니라 고 판단하고 있었다. 여러 동네를 다니며 권능과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곳에서 사역하고 있 는 예수는 이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분노로 차오르고 있을 것 이다. 그 이유인즉 그 기적을 많이 행한 동네들이 회개치 아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20는 말을 복음서 저자들은 언급한다. 아 무리 기적과 권능을 베풀어봐야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못하며 회개를 하지 아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인간 존재란 어떤 존재인지 간접적으 로 체험하는 순간이다. 아버지 외에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목을 박는 그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33
의 말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인간이기에“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 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으니라”21고 한 말에 거부감이 든다. 감히 하나님에 대하여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잘 아는 종족들이 없거늘 예수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실례를 보면서 어찌 보 면 무지한 언어를 사용한 건지 아니면 진정 그의 말이 사실인지 이들의 주 위를 당혹하게 만드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자신에 대해 구 사하고 있었다. 21세기에 사는 이 세상이 예수에 대해 모르는 자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 을 정도로 그는 유명한 자다. 오히려 전례없는‘몸의 부활’이라는 그의 성 취는 놀라운 쾌거를 달성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실업률, 가난, 살 인, 교만, 부와 노동력의 착취, 병들고 죽어가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듯하다. 예수가 혹 하나님이라는 신이 만약 다시 이 땅에 왔다고 해도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이룩하기에는 불가능 하다. 그래서 너무 어지럽기에 구토가 날 지경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예수가 땅에 디디고 있던 이 순간에도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의 기적과 권능은 죽은 듯 조용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 면 예수의 그 말이 사실일 정도로 현기증을 느낄 수만 있다면 진정 하나님 의 마음에 합당할 것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 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으면 좋으련만…. 예수는 이 땅에 왔을 때 하나님과 자신의 뜻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늘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 원의 계시가 이 땅에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럼 자신 에 대해 사람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탄원을 한 기도라도 했단 말 인가?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에 대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여전히 서서 아직도 몸부림을 치고 살아가듯 예수에 대한 정체를 알기에는 그의 기도로 234 버려진 예수
인해 우리의 마음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여전히 의 심의 씨앗이 차가운 겨울을 지나 잎 파리를 내듯 봄처럼 솟아나고 가을 오 색 단풍이 물듯이 내 맘의 색깔이라는‘진실과 허무’가 예수의 메시지들과 함께 물들고 있었다. 다윗 후손의 아들, 인간?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 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22 여전히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들의 수수께끼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듯 예수의 다소 어지럽게 만드는 대답과 언쟁을 탐구하면서도 이상하 게시리 빠르게 물에 흡수되는 휴지처럼 나도 모르게 예수에게 빨려 들어가 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포장 지처럼 예수의 메시지는 진정한 의미를 숨기는 말로서 좀처럼 알 것 같으 면서도 모르게 숨긴다. 그래서 오묘하고 심오한 비유를 쓰고 있는 예수를 계속적으로 지켜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또한 예수가 스스로 비유를 통 해 자신의 의도를 선사하면서도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려 하는 그의 의도를 보고자 한다.23 예수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을 살펴보자! 어느 날 그가 고향에 돌 아와 회당에서 설교하는 대목에서 말씀의 지혜와 통찰이 주위를 놀라게 하 자 자신들보다 더 높은 하늘의 언어로 표현하는 예수에게 향한 이들 유대 인들의 선택은“단순히 목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24라며 비비 꼬는 말을 내놓는다. 이는 통해 무시당하는 기분을 예수는 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35
그저 다윗의 자손이자 단순히 인간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난 과거의 고 정된 생각과 잘못된 편협한 생각들, 혹은 난해하여 어지러웠던 생각들이 다시 스쳐 지나가고 있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예수는 당연히 우리들처럼 두 눈과 두 귀, 그리고 한 입을 가진 두발 달린 사람이었다. 근거 있는 말은 아닐지 몰라도 혹자는 예수의 외형을 보고 허리가 구부러진 꼽추라고도 표현할 정도다. 도대체 그를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던 생각이 더 지배적 이다. 예수 탄생의 비밀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 무지한 것이 자명하 며 그러한 시각에서만 바라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에서 더욱더 그를 비밀스 럽고 신비한 자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신비스런 이면과 달리 그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듯이 지금 자신의 제자들과 걸어 다니며 인간 대 인간으 로 담화를 나누고 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관점 을 비방하고 있지 않은가? 또 다른 어느 날, 예수는 더운 지방 한 가운데 태양 빛의 열기 때문인지 땀을 흘리며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에게 목이 아프도록 여러 번에 걸쳐 자 신에 대한 정체성과 하늘의 삶의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자 들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놓치기도 했다는 것은 사복음서에 자세히 나 와 있다. 두 발자국만 가면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연히 마리아와 요셉의 아 들임을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며 그는 마리아의 배 속에서 출생하지 않았 는가? 또한 예수에게는 요셉이라는 아버지도 눈 앞에 있지 않는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다윗 왕조의 혈통이 아니던가? 그런 상황 가운데 무리가 모인 곳에 누군가가 깨끗지 못한 영에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예수 앞으로 나아왔다. 결국 그는 데리고 온 병든 말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 이를 지켜본 무리들은 이 거룩한 기적을 보고 혹자가 이렇게 말하는 걸 지금 듣고 있었다.“이는 다윗의 자 236 버려진 예수
손이 아니던가?”,“사람의 아들이 어찌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는가?” 이러한 극단적인 정반대적 반응은 그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을 계속적으 로 야기시킨다. 복음서에서 과연 예수를 신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격이 갖추어져 있 는지에 대한 다른 구절을 보자!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모여 들었을 때 예수 는 역으로 그들에게“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25라고 질문 하나를 던진다. 즉, 유대인들에게 메시야 그리스도 가 누구의 자손이냐는 예수의 질문을 통해 바리새인들은 그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우선 예수가 언급한‘그리스도’에 대한 말은 일반적인 메시야 그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으며 질문을 받은 자들 중 한 사람이“다윗의 자손 이니이다”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그제서야 예수는 그 말을 맞받아치고선“다윗이 그리스도를‘주’라 칭하 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계속적으로 질문한다. 사실 다윗 왕이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는‘주’이자‘메시야’로 정치적인 해방자로 오해했다. 또 바로 그가 이제 로마의 억울한 압제에서 드디어 회복을 이루 어지는 장면을 통해 그들은 지금도 늘 위로 받으려 했고, 그렇게 이해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현재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해방 하게 할 메시야 환상에서 비추어 보는 듯한, 그 착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반드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구약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와 반대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는 메시야에 대한 기 적과 메시야 사상, 즉‘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드러내는 설교에서 감히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여‘구주’, 즉 다윗이 그를 신으로 묘사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제 그에 대 해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신비한 언변을 바리새인들은 듣고 있었다. 결국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신의 영역에 들 어서 있다는 것을 다윗의 입술로 고백한 대목을 예수는 유감없이 드러냈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37
다. 우리는 과연 예수 정체의 의문성에 대한 정답이 예수의 입에서 나온 것 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물론 이러한 회복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 복음 서에서도 그의 족보를 통해 그가 확실히 다윗의 자손임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복음서 두 곳,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더 나 아가 그를‘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럼, 신의 아들이란 말은 그도 역시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말인가? 현재 예수 주위에 모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분명 사람이다. 그 사실에는 변함 없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문에 꼬리를 무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비춰진 예수의 능력은 인간의 언어(아람 어)를 사용한 자이면서도 바로 신의 재능과 능력으로 중무장한 자였고, 이 런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들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그를 그저‘한 여인에게 서 난 예수’라고 함부로 말하는 자들의 입을 틀어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 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능력 을 십분 발휘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의아해진다. 신의 역사에서 바람과 물로서 인간을 쓸어버리거나 그 일부만 손을 대면 알 수 있을 텐데…,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 한마디를 남겨둔 채 그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귀신들린 자, 앉은뱅이, 눈 멀고 벙어리 인 자, 죽은 자,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뜻밖의 능력과 그 말씀’이라는 의 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인간이 어떻게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고치는가? 사실 내 가 예수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예수의 치유와 병 고침은 비단 그만이 갖춘 유일한 사역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당시 에도 치유에 대한 갈증과 목마름으로 기적과 같은 일은 있었다고 전문가와 학자들은 일치한다. 치유와 기적을 가지고 있던 신비한 자들은 약 혹은 물 질인 무언가의 도구와 주문을 동시에 사용하곤 했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 238 버려진 예수
의 스승처럼 신적 존재인 악한 영을 물리쳤고, 올리브 기름을 부었고, 치료 하기도 했다.26 예수처럼 말 한마디로 깨끗지 못한 영들과 상처, 죽음들의 부활을 행했 다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나온 하늘의 치유 이외에는 없었던 일임 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런 치유의 사역으로 과연 그가 우리의 구세주이 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다윗의 왕이란 말인가? 그 가운데 바리새인들은 이 무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 바로 무력해 지도록 만드는 연타를 날린다. 그들은 예수에게“이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 의 힘입지 않고는 귀신(깨끗지 못한 영)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7고 자신 을 스스로 변호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이 자신의 커다란 증인이라고 말이 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 모인 무리들이 깨끗지 못 한 영에게 현혹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시키려는 찬란한 선포를 하고 있 었다. 혹은 예수를 사단에 비하하는 공격의 방어로 야심에 찬 또 다른 언어 적 작품이라고나 해야 할까? 모두가 알듯이 이들 바리새인들은 예수 앞에서 과연 유일신인 야훼를 믿 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무토막이나 돌로 만든‘바알세불’이라고 하는 조 각인 이방신이 예수에게 적용시켜 기적을 부르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취는 듯하다. 또한 그렇게 죽은 물질을 살아있는 자에게 적용시킨다. 물론 자신 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과거 바알세불이 기적을 베 풀었다고 말이다. 그것도 이상한 기적을…. 이들의 판단과 생각에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 예수는 그들 에게 한마디를 던지게 된다. 인간과 자연과 물질들을 동원하여 만든, 허울 좋은 거짓된 신의 한 낫 미물에 불과한 나무나 돌 같은 물질이 그것에 의해 인간을 조정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말을 함부로 거론하면서 그들 은 신과 무리들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먹칠하고 있는 순간을 드러내 고야 만다.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39
유대인들의 상식에 진정 어리석은 말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연에서 만 든 물건을 보면서 이 물건이 살아있는 어떤 영과 같은 형태로 인지하고 치 유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 손으로 만든 형태의 목각인형이 살아 기적을 베 푼다면 그가 신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혹시 나무가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오는가? 달이 우리에게 말을 건넬까? 우리가 모래를 밟는다고 그 가 소리를 지르는가? 과연 예수가 깨끗지 못한 영들 중 한 명이라는 가정하에 유대인들의 지 도자가 말한 것이 사실일까?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나라처럼 혹은 예수를 믿는 것이 쉽다고 해석하는 나라에서 나무를 깍아 만들어 두 손을 비비며 외쳐 소원을 이룬 것이 곧 자신의 노력이 아닌 나무가 이룩하여 놓 은 것인가? 그것에게 영광을 돌리어야 하는가? 또한 여러 인간이 손수 만 든 물건을 두고서 스스로‘만들어진 신’을 믿는 사람들처럼 자신이 직접 손수 제작한 물건을 만들어 그것이 마치‘신’처럼 그 앞에 엎드려 절하거 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가? 예수, 그가 이러한 질문공세를 받으며 언급한 마지막 발언에서 자신이 하려는 예언이나 설교 혹은 말에 책임을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충고를 제시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정한 참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인상적인 멘트 하나를 보게 된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그리고 합 법적인 행사와 기적을 보여주었고, 추후에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겠다고! 앞에서 언급한 모세의 예언을 기억하는가? 그 메시야를 향한 심판의 결 과는 참혹한 시체와 같은 죽음이거나 혹은 부활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잘 못된 길로 인도하고 유린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과 동조하는 자들에게 예수는 그 반대의 징조를 울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말에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일체를 인정하라고 몰아간다. 그렇게 조심하여 자신의 가는 길에 방해하지 말고 겸허히 따라 오라고 하는 예수의 내면 심리를 읽 240 버려진 예수
어야 했다. 꼬리에 무는 이상한 문제는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기적과 병 고침, 죽은 자를 살리는 일에 주력한 여러 다른 사건을 통해 구원이라는 같은 목 적을 둔 여러 가지 방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 지 않고, 더 나아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죽음과 함께…. 그는 기적을 베풀고 다니면서도 지금 사람들에게 버려지는데 익숙해지며 또한 천천히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답변으로 상대방의 허를 찌 르는데 전문가로 나온다. 여기서도 유대 백성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 의 모습을 보고 그가 과연 메시야인지 아니면 이상한 기적을 베푸는 거짓 메시야인지 혼돈하고 있었다. 그 혼돈 사이로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과시하 기 위하여 예수가 사단적인 방법, 즉 깨끗지 못한 영이 쓰는 방법을 사용하 여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그런 나쁜 자인지 궁금하게 여긴다. 그것도 아니 면 이와는 반대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하 는지 의문에 휩싸였다. 내가 그니라IamwhoIam 거룩한 영적인 방향에서 바라 보아야 할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정 체성과 자신의 일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면 될수록 더욱더 극적으로 자신 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의구심을 이내 포장하여 보이지 않게 감춘 다. 마치 주위의 환경과 광선 그리고 온도에 따라 자신의 몸을 변하게 만드 는 카멜레온처럼! 그 또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 는데 솜씨가 가히 일품이요 귀재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 을 만났을 때나 혹 죽음의 문턱에 거의 다가갈 무렵, 또한 대제사장 앞에서 자신을 드디어 공개한다. 한 예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의 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각, 공회 앞에 선 예수에게 대제사장은 무거운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41
“예수! 당신은 누구냐?” 그의 질문에 예수는 대답을 하지 않거니와 오히려 서로의 무거운 침묵만 이 흐른다. 그 침묵이 조금 지났을까? 대제사장은 똑 같은 의미의 다른 질 문을 추가한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조금 전 침묵을 유지하던 예수는 드디어 잠잠하고 고요한 정적을 깬다. “내가 그니라!” 그가 지금 자신이 변호하고자 하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언급한 다. 이제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이라고 표현을 우회적으로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한다. 그러나 시인한다는 점에서는 늘 상대방이 예수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먼저 나와야 시작되었다. 그러한 수 사적 방향으로 성경 저자들은 인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에 늘 충실하고 있었고, 또 역시 대화하는 지금도 하나님과의 동일한 연 출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죽음의 그림자는 그를 짙게 드리우게 되 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다른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대목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를 무대에 올려 다시 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동족인 유대인에게는 포장하다가 이방인 여인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거리낌없이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예수임을 나 타내며 사마리아인들을 자신의 품으로 거두게 된다. 자신이 메시야임을 이 방인들로 인하여 더욱 분명하게 자신을 던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내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자신을 통해 구원하여 믿게 만드는 작전을 요한 복 음의 저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저자에 의거 예수가 모세오경만을 굳게 믿는다는 사람들이 극히 꺼리는 지역인 사마리아 땅을 밟으며 지나가고 있 었다. 당시에는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유대인들이나 순례자들은 지름길인 242 버려진 예수
사마리아 땅을 부득이하게 가로지르고 가곤 했다. 그러나 분명 알아야 할 것은 평상시에는 대면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사람들로 여기는 곳이 바로 사마리아 땅이다. 이들은 평상시에 그곳을 절대 거치지 않고 돌아서 갔다. 유대인들에게는 명절 때 혹은 특별한 날에야 비로서 예루살렘을 가야 하는 절박한 예외만이 존재했다. 유대사람들, 특히 유대교사들은 보통 여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을 경계했다고 한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인들을 보면 반드시 피 하곤 했는데, 이들의 말에 의하면 사마리아 여자들은 날 때부터 부정한 여 인이라고 낙인 찍혔기 때문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음식 을 부정하다고 여기기까지 했다.28 그러한 상황을 예수는 모를 리가 없다. 예수 역시 자신이 거룩한 영으로 비록 잉태하였지만 이들에게 증명할 수 없었으며, 보여주어 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가운 데 예수는 분명 유대 자신들이 보기에 유대인 부부에게서 난, 게다가 다윗의 혈통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의 집안이다. ▲ 자므 띠조James 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 의 작품으로 <우물가의 사마리아 뭐 어째든, 그는 지금 유대 여인> 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 해야 하거늘, 그는 지금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마리아인과 담화를 나누고 있음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여인하고 가까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사역에 추가적으로 불미스런 장소까지 택하여 종교적인 장소로서는 부적격인 사마리아 땅의 우물에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마리아 땅 여인은 지금 우물가에 혼자 왔고, 게다가 혼자라는 몸으로 우물을 길러야 할 정도로 주위의 논치를 살펴야 함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의미는 곧 이 여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43
인이 신분 낮은 사람이라는 증거와 함께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한다 는 증거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여인이 자기 혼자 우물에 온다는 사실은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피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는다. 그런 상황을 모두 주시한 예수는 물 길러온 여인에게 처음 말을 건넨다. “물을 좀 달라!”29 이 여인은 극도의 경계심의 눈빛으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마도 자신에게 말을 건넨 첫 유대인 남자였을까? 나름대로의 추측을 뒤로하고 이 여인은 어찌하여 자신에게 물을 달라는지, 또 상종치 말아야 할 여인에 게 말을 건네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그런 지극히 당연한 대답을 듣고 예수 는 다시 받아 친다. 하나님의 선물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오히려 물 이 부족한 우물 앞에 두고 자신에게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라 맞받 아친다. 예수가 만난 그 여인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지극히 이방인이기에 부정한 취급을 받는 여인이다. 게다가 예수는 야곱의 우물이라는 장소에서 자신을 생수의 강이라고 표현하며 이 여인을 과거에 알던 사람처럼 그녀의 남자들 을 다섯 번이나 만나 헤어짐을 반복하였고, 또한 지금 만나는 남자랑은 결 혼을 하지 않았다고 경계를 했던 여인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30 여인과의 대화는 계속된다. 이제 이들은 과연 어느 장소가 예배할 장소 인가를 낮선 자에게 물었고, 예수는 이전과 비교하여 전혀 비유로 나타내 던 메시지를 과감히 사용하지 아니하고자 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입장과 다르게 자신과 대화하는 부정한 여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한 결 론을 내린다.“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 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31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낳다? 자신을 말하고 있는 예수의 언급으로 인해 유대인들 사이로 궁금해 한 것이 하나있다.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소망에 매우 목말라하였고, 지 244 버려진 예수
금도 간절하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장소까지…. 현재 지구상에 사는 기독 교인들이나 유대인들 그리고 모슬렘까지도 동일하게 구원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죽음으로서 구원을 얻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신앙의 잣대를 대고 서로를 어리석게 비교하고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의 말처럼 자신이 태어난 유대인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은 유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은 예수가 자신의 입으로서 자신이 유대인의 전통과 신앙에서 기준이 되는 말 을 남겼다는 구원의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여인은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 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을 당장 제거 하십시오.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라고 말했다. 현대 교회들은 예배 참석 하고 십일조를 잘 내면‘그는 기독교인이고 신앙인이다’라고 하며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종교인이지 기독교가 아 니다. 더불어 예수는 장소와 또한 어디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중요 치 않게 여겼다. 만약 그런 공간적인 장소 혹은 예배 안의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면? 자리에 앉는 순위를 정하고, 예배 시간 에 그러한 은혜에 대한 차이를 주었다면 이런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 속에 내포된 장소적 의미와 연결되지 못하는 전혀 엉뚱한 대답이 오고 갔을 것 이다. 예수는 담담히 자신을 통해 이 유대인에게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온 인 류 구원의 성취를 이미 이룩하고자 건설하고 있다고 제기하면서 여인의 마 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어찌 보면 예수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구약의 예언 을 바탕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성취될 구약의 완성에 목표를 삼고 있는 것 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여인에게도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사마리 아 여인의 눈에는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어느 곳에 나타나든지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표적과 기사처럼 눈에 보여야 하는데 인지하지 못하고 있 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45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아직 남아있는 진정 자신의 마지막 심리적인 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예수에게 말을 했다. 아직 그녀가 진정한 예수가 바 로 이 유대인, 멀쩡히 두 눈과 손과 발을 가진 유대 사내에게 묻고 있었고, 그렇게 궁금해 하던 우리의 질문을 대신하여 그 여인은 공개적인 질문을 다시 한다.“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32 사마리아 여인는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예수를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있 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 여인처럼 옆에 서있었다 면 이들의 대화로 인하여 일체심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이 여인뿐만 아 니라 유대인을 포함하여 사마리아 사람들, 이들 모두가 다 유대인 못지않 게 그토록 애태우며 기다림을 갈망한 메시야의 출현을 함께 고대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를 눈 앞에 보면서도 예수가 메시야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 모두의 심 장을 내어 꽂아 확고히 하는 대답을 시원스럽게 내뱉는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33 메시야임을 거부한 자? 윌리엄 브레데의 말에 의거,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가 아닌 하나님의 아 들임을 밝힌 성경의 구절을 무시하듯 예수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지 않았 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거나 생각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더불어 사마리아 땅 여인의 이방인이 고백했던 사건과 달리 유대인 들 땅을 거느리는 예수가 가진 또 다른 초능력적인 능력 앞에서도! 그렇게 기적을 선사하는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자 자신의 권한과 치유 능력을 과시할 때마다 입을 담을 수 없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었을까? 246 버려진 예수
복음서에 보면 예수 자신이 하늘에 존재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 에게 모든 능력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발휘할 수 있는 참과 거짓, 선과 악, 그리고 그에 대한 심판의 판단력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래 서 초능력적 영웅과 같은 방법으로 무언가를 선사했다면 그를 영웅으로 추 종할 수 있는 근거는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능력 과 치유 그리고 하늘의 권세 있는 언어로 이들을 잠시 사로잡는다 해도 눈 과 귀와 입이 달리고 숨을 쉬고 지치면 쉬어야 하는 예수가 가진 육체적인 한계를 유대인과 지도자들이 보고 있었다. 즉, 인간의 한계적 판단력과 연 약함에 대한 진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눈으로 예수의 말에 늘 경계하며 말하는 데에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나에게도“그가 과연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대목에서 늘 두려워하던 대답과 마음에서 출발하였던 과거를 가지고서 그를 나름대로의 방법과 해 석을 가지고 추적해 보았다. 그러나 가끔 불행하게도, 그의 사역의 행위와 스스로 말을 하지 않았던 그가 미울 따름이었다. 다만 그는“하나님의 영이 전해주는 하늘의 말을 전한다”는 그로 인해 그 마음을 돌이켜야만 했다. 유세비우스의『교회사』에서 도미티안 황제가 예수의 친척들을 심문한 내 용을 들여다 보면 예수의 가족을 언급한다. 메시야가 예수의 가족에게서 나오게 된 글에 유대인들이나 현대인들에게 닥친 죽음으로 난해한 곤경에 발을 들여 놓을 수 밖에 없었다는 단적인 예가 나타나게 된다. 바울은 특히 예수가 다윗의 혈통임을 자랑스럽게 복음서에서 밝혔으며 그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이임은 객관적으로 나타남에도34 이 제 더 이상 예수는 그러한 논란에 개의치 않는 장면을 볼 것이다. 당시 유 대인들 중엔 족보를 제대로 보유할 수 있던 자들은 오직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뿐이라고 말한다. 예수 자신의 말에 다들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을 법한 어느 날, 성경의 언급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생수의 강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47
도 예수는 성전에 올라 백성들에게 다음을 선포한다. 자신은 너희들이 알 고 있는 메시야도 아니요 또한 다윗의 자손에게서 난 유대인의 왕도 아니 라고! 이는 복음서를 읽는 독자에게 새로운 판단을 하게 만든다. 진정 예수 를 추종하거나 그를 끌어내리려 하는 자들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과감하게 깨어 부수고 있었다. 예수 자신에 대해 진정 누군가를 나타내려 하는 조사를 하고 있는 내게도 어떻게 보면 결정적인 단서를 모두 송두리 째 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전에 올라 이들에게 오히려 반문하고 나선다.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35 서기관들 혹은 유대 지도자들의 논리에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야 혹은 그 리스도라는 자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주장이 세대를 흐르면서도 동일한 교육으로 배웠다. 현대 신학자들도 역시 예수를 ‘왕’이자‘선지자’게다가‘메시야’라고 가르치고 우리 역시 그렇게 배우 고 있다. 예수는 이러한 사상을 사실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진정한 의미를 부여 하기 위해 질문을 유도했다. 즉,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그리스도 곧 승리의 구원자, 그리고 통치자가 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 엇이냐고 묻고 있는 중이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 에 확고했고, 나 역시 그렇게 앞에서 언급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기 초에서 움직이는 기본적인 유대인의 신앙을 예수는 모를 리가 없다. 그러 나 예수는 지금 모여 있는 서기관들에게 과거에 가졌던 고정관념을 완전 히 깨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있었다. 어지러웠던 구약의 생각에서 이 제 새로운 질서정연한 사고를 심어주기 위해 신약을 파헤치는 이 순간, 자 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나를 힘겹게 하여 주저앉힌다.“주께서 나의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원수(사단)를 너의 발들 아래 둘 때까지 나의 오른 편(메시야의 권능과 권세, 그리고 통치권)에 앉아라!”36 248 버려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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