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할 수 있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사람이며 자신의 지휘를 잘 이용할 줄 아는 뱀처럼 교묘한 구석이 숨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 보물을 훔친 적이 있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폭행을 일삼 아 소란을 피웠던 그는 이제 갑작스럽게 예수라는 청년의 심판을 주시하면 서 그와 대화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복음서는 말한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무죄에 대해 호소했다. 그 러나 빌라도의 그 말은 유대인들의 분노로 이내 묻히고 말았다. 이들은 아 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왕은 로마 황제일 뿐 유대인의 왕인 예수를 업신 여기며“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몇 번을 연속으로 부르고 있는 장면 에서 지금 분노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통해 잘 나타내준다. 로마 경기장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려는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오늘날 터키에 위치한 서머나의 경기장에서“무신론자들을 쫓아내라! 폴 리카르푸스(폴리캅)를 찾아내라!”라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로마 에서는 여러 신들을 부정하는 시민을‘무신론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요한의 첫 제자로 알려진 목회자였던 폴리카르푸스 는 재판정에서“무신론자여 물러가라!”라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어떻게든 회유하려는 총독의 노력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의 입은 자물쇠처럼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결국 순교를 택했지만 총독의 회유는 집요해지면서 “맹세하기만 하면 그대를 풀어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라는 말에 군 중들 역시 한 음성으로“저주하라! 저주하라!”라고 외치는 장면47에서 예수 와 유대인 사이의 극단적인 대립적 관계를 대신 보여준다. 그 많은 시간 동 안 전세계로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요한의 제자 폴리카르푸스의 순 교를 통해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었다. 예수가 이전에 언급한 예언으로“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 로다”48라고 말한 것처럼 이제 진정 반대 세력들의 세상이 되어 가고 있었 다. 과거 예수의 행동과 언어에 반하여 죽이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를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99
따르는 추종자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해하려 하지 못하여 건들 지도 못하게 되었던 그 때를 잊은 듯하다. 이제 그와는 행복했던 시절과 정 반대의 사건이 계속 전개되고 있기에 예수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이 제 이들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주무르는, 또 다른 힘의 세력으로 전향되어 가는 것이 눈에 선하다. 예수가 이들 어둠의 세력에 대해 방관적 자세를 취해 잠시 엎드리고 숨 죽이는 자세를 마치 구약의 표현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비교 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과거에 환호성이 넘쳤던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입성에 대해 말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시절과는 사뭇 다른 현상 속에 서 힘의 세력이 뒤바뀐다. 그 순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기독교인에 게는 여간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나이 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49 신이라는 미명아래 그는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깡그리 써먹지 않아 마치 녹슨 칼처럼 그의 기술과 능력은 역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군의 무덤 앞에 빈 손으로 있는 듯하다. 사실 사복음서 시대, 즉 예수가 탄생한 후 부 활 이전까지 어디를 찾아보아도 객관적이거나 직접적인 하나님 도움의 손 길은 온데간데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직 적대적인 경계를 유지해야 하는 유대인들이나 예수의 추종자들 같은 이들에게 부활이라는 낯선 환경을 마련하지 않은 예수는 또 다른 마지막을 남겨둔다.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르는 유대 지도자들은 신의 아들인 그를 매몰차게 버려 내동댕이치는 것을 예수는 참고 인내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 사실을 400 버려진 예수
아직도 알지 못하고 이제 그를 죄인 취급하여 죽이는 꼴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필립 얀시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펼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나는 수난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예수의 편은 그 누구도 없었다는 점에 번번이 주목하게 된다. 그를 위해 변호하고 나서는 증인이 하나도 없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 중의 그 누구도 이 재판의 부당함에 입 하 나 벙긋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 자신도 스스로를 변호하려 들지 않았 다. 그리고 시련이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도 역시 침묵하고 있다.”50 더불어 재판관 빌라도의 입으로 말했듯이 예수를 가리켜“그에게서 죄목 을 찾지 못했다”51고 하고 있음에도 이들 유대인들은 예수를 나무에 매달리 고자 했다. 이제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제자들까지 모두다 그에게서“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52와 같은 예언처럼 스스로 양의 떼가 흩어 지게끔 예수 자신을 유도했다. 그 버려짐과 죽음의 결론이 그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로 써 자신이 그토록 버려지고 찢기는 아픔과 함께 자신과 하나님의 손으로 이룩하려는 속셈을 넌지시 내비친 예언을 적중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결국 재판 장소에 있어야 할 제자들 모두가 예수의 체포 앞에서 뿔 뿔이 흩어지고야 만다.53 도마만이 배신한 것이 아닌 제자들 모두 동일했음 을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었다. 굳이 다르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도마는 ‘자살’로, 다른 제자들은‘순교’를 선택한 것이 다를 뿐이다. 최고 극한의 고통, 십자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제자들의 광경에 펼쳐질 거북하며 환상적인 날들 에 앞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새로운 재조명을 선사하여야 한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01
다고 말한다. “십자가를 새롭게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한쪽으 로 치워놓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를 재발견하고 처음 부터 다시 배우기 위한 항해 길에 올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활의 지식에 대해 마음을 닫는다. 우리는 죄 용서에 대한 바울의 영광 스러운 선포를 잊는다. 우리는 마치 처음인양, 십자가를 경험할 준비를 하고 우리가 목격하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54 우리는 곧 우리가 보았고 들었던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깨지는 것을 보게 된다. 유대인이든 혹은 이방인이든 간에 철썩 같이 믿었 던 하늘에서 온 예수에 대해 배신감이나 억울함에 대한 것들을 말이다. 예 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다른 곳에서의 사실적 묘사덕분에 그 당시 로마 십자가 처형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볼 수 있다. 현재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출판되고 있는 유명한 로마인들 중에 잘 알고 있는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키케로Cicero는 한 연설에서 십자가형을‘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 라고 혈색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그 연설은 B.C. 63년 살인죄로 고소되어 법정에 선 고참 원로원 의원 가 이우스 라비리우스Gaius 를Rabirius 변호하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다. 로마 시민 을 십자가에 목 박는 것은 로마인으로서 로마인을 결박, 매질 혹은 죽이는 것이 곧 범죄요, 가증한 행위이자 또 다른 살인이라는 말로서 키케로는 청 중들에게 라비리우스를 변호하는데 깔끔하게 성공한다. 로마인들도 끔찍하게 여기는 이러한 처벌인 나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그만큼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실 속의 저주다. 이러한 저주에서 보듯 유월 절 어린 양들마저도 이보다는 훨씬 쉬우며 자유롭게 도살된다. 유대인들의 죄를 대신할 제물, 즉 한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동물들과 비교하여 402 버려진 예수
예수의 죽음은 오래간다. 실제 모세가 누린 출애굽 사건에 예수 죽음은 이미 내포되었다. 열 가지 재앙 중 장자의 죽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의 죽음을 예표하고, 어린양의 피를 바른 문설주가 죽음을 면케하는 징조이기도 했 다. 문제는 우리의 피가 아닌 그의 피, 곧 죽음은 그를 덮치고 있던 것으로, 곧 그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 양의 피 같은 죽음의 고통은 오 래 걸리지 않는 최소한 의 아픔이지만 로마인들 은 자신들만이 가진 독 특한 죽음의 양식과 틀 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 로 십자가의 처형이고 ▲ 디리크 반 바브런Dirck van Baburen, 의1595-1624 1623년 작품,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 그 그 과정이다. 리스도>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 때, 형 집행자들은 고통을 길고 오래가게 하는 것으로 선호하는 방법을 택했다. 로마인들은‘십자가형’crucifixtion, 즉 사전적 의미를 볼 때처 럼 수난, 괴로운 시련, 심한 박해, 엄한 벌 등을 나타내듯 처절한 처형법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잔인하고 혹독한 고통을 합법화한 장본인인 로마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처형법은 죄수만이 가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다. 로마 시대 십자가의 잔인성은 대항하는 속국들에게 확실한 광고의 이미 지처럼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식민지 혹은 속국으로서의 안전한 관리나 방패막이는 십자가의 형틀 위에 잔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사이로 로마의 속국들이 쉽사리‘자유와 희망’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속국의 백성들은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리하여 로마 통치자들이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03
누리고 있는 희망의 씨앗으로 출발한 제도를 가진 로마는 그런 가혹한 형 법을 택한 것이다. 과연 정치적이거나 혹은 영적인 메시야이든 예수라는 유대인의 왕이자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자가 매를 맞으며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에서 과연 회사의 광고나 이미지 마케팅처럼 그가 과거 가지고 있었던 신 이라는 존재의 이미지가 떠오를까? 게다가 그가 과거 병든 자 혹은 죽은 자 를 살린 축복받은 유대인이라는 존재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가운데 무슨 신 의 아들이라고 추앙 받을 만한가? 오히려 이 시점에서 예수가 자신의 능력 이나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제자들 혹은 무리들을 배신하지 않았는 가? 무리들과 제자들은 혹시나 기적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으로 더 더욱 그 마음에서 출발하여 마침내‘비참하다’는 단어와 같은 허무한 생각 들이 그들의 마음과 몸을 들쑤시고 있었을 것이다. 연약한 이스라엘을 도 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멀어져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음을 당하는데 자 유와 희망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까? 이러한 참혹한 현실 앞에 가만히 넋놓고 있었다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란 말인가? C.S 루이스는 고통 혹은 울부짖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 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는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55 십자가 처형 그 앞에 하나님의 존재는 점점 사라져가는 희망의 불씨같 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십자가 처형!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 404 버려진 예수
는 유일한 희망의 의지를 아주 부러뜨리는 완벽한 작용을 하였다. 그 사건 으로 이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잠시라도 안심하게 될 것이다. 로마 시대 안에서 벌어지는 유대인 한 명에게서 나타난 희대의 사기꾼이 죽어가는데 무엇을 더 걱정하겠는가? 여전히 매어 터지는 메시야 추종자 들과 거짓 메시야 당사자들을 잡고 형틀에 이끄는 반복적인 일에 현기증을 낼만한 로마는 예수의 재판과 죽음에 더욱더 견고해져만 간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들의 음모자 가운데 잔인하게 죽어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한동 안 잠잠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신을 논한다는 것은 무신론자 혹은 비기 독교인들과 신의 부재에 대한 싸움에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그 뻔한 결론을 가지고 천연덕스럽게 설명하고 논쟁하는 것은 남아있는 힘 마저 없애는 일로만 남는다. 마치 로마에 대항하려는 유대인에게 십자가의 비인도적 행위를 통해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만들어 반란의 의지를 텅 빈 무덤같이 강하게 꺾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듯이 신의 존재를 다루는 수 업시간이 오히려 무의미한 헛수고라는 행위로 결론을 더욱더 부추기만 할 뿐이다. 로마의 대항하려는 속국이 더 이상 대항할 수 없게 만들어 가듯 야심으 로 들어찬 정치적인 목적에서 사용된 십자가 사건들은 로마에 저항하려는 자들의 의지를 강하게 꺾는다. 그 의도로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위를 아무렇지도 않는 듯 십자가에 죽은 시체를 줄지어 매달아 놓는 것으로 유 대인들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예수 시대 전후로 흔한 일이 되어 버렸 다. 이처럼 반란의 참혹한 결과를 진정 몸소 보이는 행위 같은 사건이 또 있 을까? 유일신 야훼 하나님을 잊으라고 외치고 그를 업신여겨 깔보는 무신 론자들에게 역시 예수의 사역과 신의 존재를 망각해도 별무리 없는 당연한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05
십자가의 사건은 침묵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가장하더라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가운 얼 음바닥같이 냉혹한 범죄와 흉학한 범죄 세력 단체들, 부도덕과 비인간성 대우와 세대 갈등, 이혼으로 파탄 나는 가정들, 부의 편승과 일괄적이면서 세뇌적인 교육갈등, 권력 욕망과 뇌물이 판치는 정치세계, 기아와 굶주림, 끊임없는 종교적 전쟁과 무한적인 자연 훼손적 자원개발과 그 속에서 벌어 지는 갈등과 의혹들 속에서 기하급수적으로 그들의 사상이 맹위를 떨치는 세대가 사라지지 않고 그 반대로 발화되거나 점점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가 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십자가의 처형된 자들의 즐비한 비린내 나고 역겨운 피의 냄새와 까치 때와 벌레들이 그 시체들을 갈아먹는 현장 속에 서 하나님의 존재를 만들어가야 하는가? 아마 유대인들은 죽어가는 예수를 통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없다고 했을 것이 당연하 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주장했던 예수 라는 신의 존재를 잊혀진 채로 살아온 지 오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역겨운 피가 솟구칠 고통의 시간 사이로 십자가 근처로 모인 자들은 이 제‘태영’이라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십자가 처형 전의 고문, 그것을 소위 태영이라고 한다. 3세기 역사학자였던 유세비우스는 이를 두고“태형을 당 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라고 진술하는 대목을 보게 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실제로 십자가의 고통을 겪기 전, 이러한 십자가의 과정 중에 하나인‘태 영’이라는 과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 과정을 당하는 중간에 죽는 자들도 있 다. 그 말을 들으면 십자가의 무서움과 심리적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고통에 고문을 가하는 로마 병사나 주위 사람들은 그 모습 속에서 잔인함 에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지만 혹자는 그 광경을 눈여겨보면서 나름대로 희열감이나 쾌락을 누릴 것이다. 그들은 고통을 가하면 할수록 몸부림치고 울부짖는 죄수의 고통에 비웃으며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선호할 지도 모른 406 버려진 예수
다. 특히 범죄자는 검거된 후 자백하는 과정에서 고백하는 특이하고도 중 대한 심리적 요소가 있다. 가해자는 살인 현장에서 죽어가는 피해자의 고 통과 호소에 더 만족감과 나름대로의 과거에 느끼지 못한 쾌감을 받는다고 범죄자들은 진술한다. 이들의 내용을 보게 되면 이러한 십자가의 진실이 어느 정도 인정된다. 그 만족감과 쾌감을 잊지 못해 범죄자들은 다시 한 번 더 잔인하고 아무 나 느낄 수 없는 짜릿하면서 알게 모르게 느끼는 묘한 성적인 쾌감처럼 그 것을 맞보려고 오늘도 늦은 밤 누리는 지도 모른다. 그런 고통과 쾌감을 잊 어버리기 전에 이들 로마의 가해자들은 각자의 죄수에 맞는 십자가 틀을 짊어지게 하고 해골의 장소(골고다의 언덕)를 향한다. 이들은 죄수의 힘을 있는데로 다 기진맥진하게 하려는 일종의 반란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 이다. 이제 죄수이자 희생자들은 처형 장소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거의 힘이 소진된 상태에서 이들의 옷을 모두 벗긴다. 그러 면 군중들 속에서 웃어야 할 상황에 놓여 모인 자들 중 상당수는 키득거리 며 웃을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을 가한 후 부가적으로 전라의 노출 속에 공 개적인 망신을 주는 것으로 곧 죽어가야 할 희생자들의 사기는 땅으로 꺼 질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비웃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로마병사들과 군중들 의 환호와 웃음 뒤에 감추어진 고통과 저주는 당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지 못한다. 이러한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십자가의 형틀 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밝혀진 사실이다. 1968년 예루살렘의 고고학자들이 로마에 대항하던 유대인들의 유골을 발 견했다. 이들의 시체는 참혹했다. 거기에는 올리브 나무에서 나온 조각을 볼 수 있었으며 수십 명의 시체들 중 한 명은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채로 그의 발에는 7인치의 대못이 박혀 있었다. ** * 어느 날 안산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를 만났다. 그는 그 때 수련회를 준비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07
중이라 한 창 바쁜 시간에 나를 만나주었고, 우리는 잠시 편안한 시간을 누 렸다. 마침 수련회 준비중인 여러 아이들을 도와 본디오 빌라도의 옷, 예수 의 옷, 그리고 로마인의 옷 등을 만들고 있었다. 필자 또한 함께 즐거운 마 음으로 도움의 손길에 내 몸을 던졌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한 청년 전도사가 보던 영화를 틀었는데 맬 깁슨 감 독의『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였다. 우리는 그 영화에 매료되어 한참을 보 던 중 한 꼬마 숙녀가 질문을 던졌다.“빌라도 혹은 유대인들 중 누가 가장 나쁜 사람들인가요? 예수를 넘기고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나쁜지 혹은 한 순간의 실수인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의 잘못인지 잘 모르겠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던 우리들의 침묵 을 깼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 아이는 다시 스스로 질문에 대답을 알고 있었는지 힘있게“내 생각에는 빌라도가 제일 죄가 커요!”라고 말하는 것 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녀의 귀엽고 가냘픈 몸에서 나온 힘있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문뜩 과연 누구에게 더 죽임의 대가 를 물어야 할지에 대한 궁금증을 솟구치게 하였다. 조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는“오늘날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책임지라고 현대 그리스에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지난 1900여 년간 을 이미 대가를 치를 대로 치른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피를 더 흘리라고 요 구하는 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유대인들이 누린 피의 대가에 대한 현실 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인지 또는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 료하지 못한 사태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었다. 필립 얀시는 이러한 안일한 생각과 사태에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는 말 을 했다. 그는“유대인이란 종족 전체가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식의 주장은 역사에 있어 크나큰 허위요 모략이다”라고 진술하면서 잘못된 생 각을 꼬집고 있다. 기독교인들조차 유대인들이 히틀러 시대에 왜 전멸하지 못했는지 분개하기까지 하는 의문과 분노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던 기억이 408 버려진 예수
아직도 생생하다. 어째든 꼬마 숙녀의 질문 속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 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심리적으로 무언가 놓치고 있었고, 그렇게 나사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계의 소리를 듣고 있음을 실감했다. 사실 예수의 죽 음에는 유대인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관련 유대 지도자들의 공저도 있지만, 죽음을 이끌어간 로마인들의 손에 죽어야 했다는 사실만으로 예수의 죽음 에 대한 면제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벗어나게 될 수 없다. 쉽게 설명 한다면 과연 예수가 죽어가는 그 당시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을 면할 수 있 는 면제권이 있었을까? 즉, 가톨릭에서 말하는 소위 이른바 죄에 대한 면 제부처럼 우리에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죄가 전혀 상관없단 말인 가? 그런 사유에서 면제를 받을 자신이 있는가? 그런 사유가 존재할까? 누군가가 예수의 시절에 태어났다면, 외부인으로서 예수의 죽음에 동조 하지 않았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감히 예수의 면전에서 말할 자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그에게 진정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그러한 문제의 질문을 한다는 사실은 예수 앞 에서 자신 있는 태도로서“자신의 죄를 위해 죽었다”고 한다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거스르는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 아닐까? 바울은 이 사실을 자신의 남겨진 서신들에서 밝히듯 모든 사람들에게 대 적이 된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았기에 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언급56 하기도 하며, 또 다른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무식한 이 세 상 통치자들의 지혜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7 더 나아가 바울은 스스로 내어준 바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58이 몸 소 행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자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한 하 나님의 섭리59를 들춰내어 그 아들 예수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그리고 거기에 첨부하여‘섭리적 허용’이라는 전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09
제 조건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그냥 인간의 지혜에서 뿜어져 나온 허무한 결과뿐이라는 반전이 숨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누군가의 죄가 더 크고 누구의 죄가 더 작은가?”라 는 말을 한다는 어설픈 생각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의 죽음을 또 다시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섬뜩하고 놀라운 기억으로 남겨지는 것 같아 마음 이 쓰리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자신들에 해당되는 비 싼 값을 치르겠다고 하는, 죄값에 대한 질문과 대답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 을 이들은 알지 못한 채 유대인들의 피와 후손의 피까지 죽임을 당하게 되 는 끔찍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혹시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독일의 유 대인 학살 사태를 예상했을까? 디트리히 본회퍼 의Dietrich Bonhoeffer 방대한 자료 토대와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독일 교회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핍박하는 나치의 만행에 저항하여 죽 음 앞에 기꺼이 목숨을 내건 그에 대한 저서『진노의 잔』을 쓴 메리 글래즈 너 의Mary Glazener 글에서 우리는 독일 히틀러의 독재 정치에 맞서 싸우는 유대 인이자 목회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저서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했던 잔인하고 끔찍한 만행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디트리히, 그는 마치 광야의 외치는 세례 요한처럼 광야 한복판 위에 대 변자의 목소리로 자신의 죽음을 내걸고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나라인 독 일 나치의 억압에 조금도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유대인을 격멸하고 저주하고 핍박하는 나치 돌격대들과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 러의 세력을 무서워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도 인간인지라, 때론 남모르게 나약한 모습과 연약한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예수처럼 죽음을 미리 예상하듯 간담이 서 늘한 적도 많았다. 죽음 앞에 회피하지 않았던 그도 동료들의 모진 고문과 핍박 속에 만만 410 버려진 예수
치 않는 충격과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재촉 한 예수의 길을 비켜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죽음과 같은 상황이 닥쳐오면 올수록 그도 그 길을 가야 했다.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한 목숨 을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갔다. 이 때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1970년에 노벨상을 검어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폭력은 저절로 양산되지 않는다. 폭력은 거짓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는 다. …… 폭력은 거짓으로 적절히 위장되고, 거짓은 폭력에 의해 유지된 다. …… 용기 있는 시민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행동은 거짓에 동 조하지 않는 것이다.”60 죽음과 신의 부재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의 저자 존 스토트John R. W. 는Stott 그리스도 인들에게 고난과 영광을 함께 짊어지고 가자며 포괄적인 주장을 던진다. 그러한 대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언급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 님의 연대적 사랑 의solidary love 증거, 즉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 두 손을 놓 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연대적으로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과 그리스도인 들까지 포괄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고 미리 제시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뇌리에 자극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고난이 주는 진정한 아픔은 불행 자체가 아니고 또는 심지어 그것이 주는 고통이나 그것의 불의마저 아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버 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61 세상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아무 말 없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일까?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11
그렇게 소위 지식인들과 같은 자들이 신을 향해 조롱과 박해와 같은 갖은 양념을 섞어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 듬뿍듬뿍 들이 붓는데도 하늘은 아무 말이 없다. 지금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도 세상을 구원하겠다던 그의 입은 또한 아무 말이 없다. 고통 앞에서 예수는 더더욱 침묵을 지키고 있는다. 혹시 그가 진정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것일까? 이러한 대목을 볼 때, 나 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62고 하는 구약의 유대인들에 대한 죄의 대가처럼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과 같은 형벌을 이제 예수는 져 야만 했다. 이토록 잠잠하고 있을 예수는 혹시 자신의 아버지인 하나님에 게 훈계를 지속적으로 받았을까? 패역한 아들이 부모의 올바른 징계와 훈계를 주어도 순종치 아니하여 부 모가 끌고 한 마디의 말을 남긴다. 즉, 수 많은 군중 앞에서 말하길“내 아 들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여 술에 떡이 된 자라”63라고…. 이렇듯 예수를 돌로 쳐 죽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훈계 했을 까? 만일 누군가가 죽을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그를 나무 위에 매달라고 구 약시대의 유대인들은 동조했다. 또한 그 시체를 오래 두지 말고 그 날 바로 장사하여 이 기업의 이스라엘 땅을 피와 역겨운 냄새로 더럽히지 말라는 하나님의 훈계가 기억나기까지 하다. 니느웨의 산헤립(B.C.704-681) 왕궁에서 나온 앗수르 부조들Assyrian 을Reliefs 보게 되면 그 당시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부조를 보면 이런 훈계를 설명한 저주와 같은 신명기에 의한 하나님의 명령과 사뭇 비슷하다. 죄인 들을 나무 혹은 기둥을 이용해서 시체를 꿰찔렀음을 증명하는 묘사가 드러 난다. 즉, 군인들이 라기스 남자들의 시체를 말뚝에 꿰찔러 매달고 있는 모 습이 부조에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예수의 처형 장면은 이러한 상황 에서 드러난 예고된 형태로 설명해야 할까? 핏빛으로 물든 벌건 색채를 지닌 지구 위에 불과 얼마 전, 예수는 유대인 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마치 유대인들은 그를 정치적인 412 버려진 예수
혁명가인 메시야로서 영원히 로마 군인들의 숨을 끊어놓을 줄 알았고, 그 래서 자신들의 왕으로까지 추대해 예루살렘 성전에 그의 발을 들여놓았다. 반면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의 죄 인 취급에 여느 다른 시체들처럼 죽음 앞에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렇게 변 변하지 못한 모습 가운데 예수는 이들의 실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십 자가에서 팔이 벌린 채 야유를 보내는 이들 속에 높이 서 있었다. 인간의 신체는 고통이 찾아오기 전, 자신의 몸에서 찾아오는 극도의 예 민한 피부를 가지게 된다. 즉, 자신의 몸으로 불이나 창 혹은 날카로운 물 건이 자신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면 신경이라는 세포는 저항하고 긴박성을 알리기 위해 주인의 뇌를 자극함으로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간파하 고 상처가 난 몸의 주인은 반응을 감지하여 어디에서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알고자 자신의 몸을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심한 상처나 고통 의 반응을 느끼고도 방치된 상태로 심한 출혈이 지속된다면 혈압이 떨어지 고 심장이 피를 퍼 올리지 못하여 맥박의 주기는 늦어져 결국 죽게 된다. 이런 일련의 죽음이 어느 한 순간일 수도 있지만 예수의 죽음은 스스로 무덤을 판 격으로 제자들처럼 도망을 가거나 숨지 않았다. 그 길어지는 아 픔과 고통과 함께 몸부림치며, 그것들을 감내하고 있었다. 특히 멀쩡한 몸 에서 느껴지게 하는 십자가의 고문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런 잔인하고 극도의 고통이 찾아올 때 C.S 루이 스는“심한 육체적 고통이 짧게 닥칠 때, 당사자는 그 고통에 압도되어 버 립니다. 그는 대게 큰 소리로 불평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 그 사람이 자 제력을 잃거나 난폭해지거나 이성을 잃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라고 말 하는 것을 참조하고 있었다. 나 역시 대학교 시절 마취가 되지 않는 상태에 서 치아의 충치를 제거하는 경험을 생각나게 했다. 그 시간이 짧으면서도 오히려 고통이 너무 커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참았던 적이 기억난다. 왜 이 렇게 길었던 고통의 순간인지 그 고통에 잠시나마 몸서리치던 시절이 있었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13
다. 다소 부정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느끼려고 필리 핀에서는 매년 고난절 주간에 실제로 손에 못을 박고, 그 고통을 체험하려 는 자들을 매체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싶 다. 동시에 그 고통을 통해서만이 예수를 만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 는 듯하다. 아직 골고다 언덕에 오르면서 태형에서 전가된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그런 정신적 혼란의 상황에 놓인 그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음에도 마 시지 아니한 사실64에 마음이 매여진다. 혹 그 고통마저 감수하고 싶은 마 음에서일까? 죽음을 더 단축하거나 더 나아가 죽음을 진정 맞고자 노력하 는 것인가? 어째든 이미 손과 발에 못을 박힌 그는 피와 물을 천천히 추가적으로 쏟 아내고 있다. 이제 십자가에서 예수는 서서히 죽어간다. 이미 태형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넘어 피와 물이 부족하여 혈압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 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간 너덜너덜한 등에 나 부끼는 피부가 십자가의 나무에 거슬려 그는 고통이 또한 배가 되었을 것 이다. 그 상태로 나무에 매달린 예수는 또 다른 고통이 그를 기다린다. 일 반적으로 우리 몸은 숨을 쉴 때 등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예수가 숨을 쉴 때마다 나무에 매달린 등과 함께 몸이 움직여야 함으로 느끼는 그 고통은 넘어선다. 문제는 아직 예수의 죽음은 이제 현실이라는 것과 로마의 식민지 내에서 유대인들의 행복은 이 땅 위에서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예수이자 이제 십자가에 죽어가는 사람을 과거에 옹호했으며, 그의 기적을 보며 놀라워했던 것이 못내 억울하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는 예수야말 로 배신자가 아닌가?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 속국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를 바랬건만 역시 과거의 죽음으로 초래된 유대 혁명가나 유대 지도자들과 414 버려진 예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커다란 지성을 가진 현대인들에게‘신의 부재’, 즉 하나님이 진정 존재하는 자인가 아니면 인 간이 만든 하나의 헛된 결과물로 전락되고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두려움 앞에 서있는다. 신의 존재는 애당초 존재치 않는 인간의 상상 속에 만들어진 부산물이자 망상의 하나인가? 지금 이순간 하나님의 선하심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선하심을 근거하는 사유나 증거가 우리에게 없다고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버려진 예수, 그리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은 능력이 없 고 선하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의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 그는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유일신이라는 유대인의 하나님, 그가 과연 존 재할까?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충만한 자로 묘사되는 신의 존재를 의문시하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 현대의 과학과 생물, 그리고 천문학자들은 즐거움을 토 로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그러한 의문점은 증폭되어 이내 커져만 간다. 유대인 학자 로비 커쉬너Rabbi 의Kushner 저서『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 어날 때 (지은이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역주)』에서 그는 말하길“신은 마 지막까지 우리들의 고통을 자신에게 가지고 오는 것을 간섭하길 원하고 있 다. 그러나 그의 손은 묶여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삶에서 주어지는 고 통에 잘 대처하기 위한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옆에 서 있는 자이 다. 그렇지만 그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어떠한 짓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 하면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의 절대적인 힘에 대해 제한하는 것을 넣으려고 노력 중인 사상가도 있다. 또한 혹자는 신은 절대 사랑에 목숨 거는 절대자가 아 니라고 충고한다. 이처럼 현시대에 사는 불공평한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 과 절망 가운데 우리들의 불안과 초조한 마음을 신에게 분노로 쏟아내 버 린다.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15
우리는 이들의 말에 공감할 수 있듯이 재산을 날리고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 슬픔에 잠긴 욥이 느끼는 감정처럼“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 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 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사면으로 나를 허시니 나는 죽었구 나!…”65라는 고백이 용솟음친다. 신을 경외하는 자들과 그 반대자들 사이로 모두에게 그 신의 부재는 비 껴갈 수 없는 고통이요,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수수께끼를 절대 풀 수 없다는데 개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고통으로 숨이 가빠지고 있는 십 자가 위의 예수, 그는 과거 신적인 능력과 메시야의 호칭에서 타격을 입어 전락한 초라한 이미지적 요소의 한 단편적인 모습을 통해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그런 그의 가냘픈 모습과 같이 서 있는다. 십자가 앞에 하나님의 음성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 듯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대신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 사이 에서 아무나 집게로 집어내어 한 명씩 매달아 꿰찔러야 하거늘…. 구약성 경에 나타나는 신의 개념으로 볼 때 예수는 범죄자이자 죄인이 되었고, 또 한 그는 신을 가장한 극악무도한 사기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찔한 생각이 오늘날의 현실로 자리잡고 있음을 우리는 여실히 깨닫고 있기에 무 신론자들에게는 기쁜 일이 아닌가? 예수를 잘 믿고 매일매일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도 어김없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거짓 섭리(?)를 숨겨 땅 속에 묻 어야 한다. 그 섭리는 이 땅에서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전혀 보 이지 않는 영적 세계, 즉 땅에서 벌어지지 않고 다만 하늘 위에서 시작되 는 한 바탕 전쟁의 승부를 대신하여 우리는 날카롭게 혹은 슬기롭게 세상 에서 주는 비판적인 질문에 우리들은 신에게 버려진다. 냉혹한 생존본능과 차디찬 얼음 같은 자연과의 사이에서 전쟁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난 416 버려진 예수
투극적인 추한 사실들에서 우리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듯하다. 이 땅 위에 일어나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더럽고 추한 사실들이라는 것은 한 발짝만 딛 고서면 알게 된다. 그 사실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거나 혹은 반대로 예 수의 죽음에 방조한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신을 생각지 않고 살면 그만이다. 예수의 죽음에 방조한 인간에게 문제를 넘겨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의 부재에 목놓아 부르짖어야 하는가? 십자가 지는 것은 가장 최후의 잔인 한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남아 있었다.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유대 땅은 이 제 잔잔한 심리적 파도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새로운 전략적인 운동이 시작 됨을 알리는 것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 너무나 친숙 함을 느끼고 잘 알기에 그저 가슴이 벅차고 따스하게 생각할 것이다. 심지 어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 사건을 들으면 믿어지지 않 거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숨겨진 사실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그 하나 님의 아들이 죽음에 방치된 상태로 버려지는 상황을 상상해보며 눈물을 흘 릴 때가 많을 줄 안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맬 깁슨 감독의『패션 오브 크 라이스트』라는 예수의 수난 시기부터 시작되어 십자가의 잔인성과 죽음만 을 보도한 영화를 보고, 나의 친한 친구는 영화관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필 자에게 고백한 적을 생각케 한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심리적 갈등과 음모와 배신, 그 리고 처절한 죽음 앞에 그 친구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애통하고 따스한 눈물을 흘리듯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혹은 그 죽음의 사실이 나 자신 때 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의 죽음만 생각하면 매어지는 아픔과 슬픔 을 가슴 속에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눈물 을 보인다고 혹은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물론 눈물을 흘릴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동정의 대상이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17
아니요, 눈물을 흘리라고 만들어놓은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다. 예수의 주 장대로라면“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 를 위하여 울라”66고 요청하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슬픔을 대신하여 다가올 미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과의 단절 또는 무관심에 대한 것들에 대해 오직 울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의 죽음이 우리들의 고통과 절규 속에서 피어나는 울분, 인내없음의 자세, 분노, 욕함, 시기, 저주 등 그러한 잘못되어 가는 자녀들이 그것들에 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울음에 대한 예수의 지적은 우리 자신에게 묻 고 또한 반성하지 않은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라는 말로 오늘날 우리의 심각 한 심리적 상황을 십자가 나무에 매달렸던 예수의 메시지로부터 심리적인 통찰력과 위안을 잘 말해준다. 다른 표현으로는, 하늘 위에서 온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울고 있는 자들 을 향해 자신은 결국 십자가를 등에 엎고 저 처음 있던 하늘로 돌아가지만 앞으로 세상에서 고통과 환란, 그리고 축복과 저주 속에서 수 많은 난관과 어지러운 세상에서 몸부림을 쳐야 할 미래의 자녀들, 게다가 우리 자신의 육체적 혹은 영적인 고통에 울부짖는 안타까운 모습에 울라고 소리치고 있 었다는 상상도 아우른다. 마리아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남은 예수를 따르던 몇몇의 무리들 사이로 퍼진 흐느껴 우는 슬픔을 뒤로 한 채 예수는 고개를 떨구기 시작했다. 예수 의 고통과 죽음이 방치된 체로 하나님 또한 마리아의 슬픔과 함께 메아리 쳐 하늘에 소리를 알렸을까? 아니면 그 시간에도 어둠이 임했듯이 하늘에 있는 분이 이 땅 위에 잔인한 죽음과 시체의 썩는 냄새, 그러한 광경을 차 마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을까? 혹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예수가 바라 고 고대했던 전략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의 뜻이 이루어진 것일까? 아들의 죽음 말이다. 그 길이 비록 고통과 저주 와 비난이 동요되어야 한다고 해도, 또한 반기독교인들 혹은 무신론자들이 418 버려진 예수
쏟아내는 비난의 화살 속에서도 과거 구약의 죽음과 죄에 연관된 흠이 없 는 동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은 예수에게 힌트를 주었을까?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의 과거 전통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던 삶의 죄 악과 고통 그리고 나쁜 마음, 그 모두를 하늘에 올리는 구약의 제사방법, 그러한 전통적인 제사를 도입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그 일에서 다른 방법을 갈망하고자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 신의 아들을‘흑암 속의 죽음’이라는 곳을 향해전진하도록 이끌었고, 영원 한 안식을 지금 이 시각 팔레스틴 땅 위에서 누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죽음에 이르렀던 그의 사건을 통해 그를 신으로 믿을 것인가 아니 면 방관자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죽음이라 는 것은 이미 세상이 창조되는 날부터 혹은 아담과 하와의 실패한 모습을 통해 멀어지면서 준비된 하나님의 잔인하면서도 놀라운 선물일까? 아니면 예수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죄값의 대가일 뿐일까? ** * 인간의 재물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다신론적 믿음을 가진 나라에서 살던 아브라함, 그가 갈대아인의‘우르’라는 장소를 떠나라고 명령한 하나님이 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역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결과로 부활에 대한 당위성에 열변을 토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그것을 말이다. 아브라 함의 아들은 이삭이다. 그러나 그 이삭을 낳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 니다. 곧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 라는 자식이 잉태할 수 없을 정도로 경수가 끊어진 여인이었다. 그런 가운 데 사라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잉태하게 된다.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낸 하 나님은 그를 인간인 아브라함의 손에 의해 죽이라고 한다. 나의 어린 시절, 도저히 이러한 이야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과거와 달 리 십자가의 죽음을 간접 조명했던 이삭을 바친 것에 하나님은 만족했고,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19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연결할 수 없게 되었 다. 과거 구약의 제물은 지속적인 측면에서 흠 없고 깨끗한 양 혹은 소 같은 가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이 자신 의 예수를 버림과 어쩌면 동일하게 되어간다. 그와 달리 인간은 그저 지속 적이고 맹목적인 동물 제사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혐오스럽게 느낀다고 구 약 성경은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물에 바쳐지는 억울한 동물의 재물 에 혐오를 느끼고, 더욱이 금과 은 혹은 돌로 만들어가던 그런 우상의 재 물에서 벗어나려 했던 하나님은 재물의 종류를 교체한다. 즉, 순수하고 깨 끗한 동물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포함된 계획에 그 는 동조하고 있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잠시 강요했 던 하나님이 이제 그가 그 사건의 지휘봉을 지고 자신의 아들 예수에게 동 일한 방법으로 강요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지만 하나님의 뜻이었 고, 그분의 계획이었다. 나중에 예수를 배신한 베드로는 거룩한 영을 입은 뒤 유대인들에게 이렇 게 설교하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스스로 본 시점을 기억하며“이 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 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 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67라고 토 로한다.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었다. 법 없는 자, 곧 유대인의 법에 해당 되지 않는 이방인이자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내어준 아들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시작, 그리고 인류의 구원 완성! 인간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어리석고 미련한 계획안에 포함된 자신의 독 특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야한다는 사실 앞에 예수의 삶과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런 미련한 짓이 아닌 좀더 과감하 420 버려진 예수
거나 세련되게, 그리고 사람의 이목을 끄는 광고들의 신선한 이미지들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이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적인 성 향으로‘완벽한 인간’(제2의 아담‘예수’)이‘불완전한 인간’(구약의 대표 적인‘아담’)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표! 그 한 인간의 구체적인 죽음을 향한 로마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십자가를 하나님은 선택해야만 했 던 것이다. 그 일로 바울의 전략이 십자가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특성과 이방 교회의 근간이 된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모두가 수치스럽게 여기고 꺼리고 미친 짓이라고 한 것에 하나님은 개의치 않고 동조하듯 가 만히 있었으며 예수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사건과 유대 종교의 부조화로서, 그것들이 서로 종교적 갈등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 유대교와 섞일 수 없는 십자가 사상은 이들을 갈라놓았던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 안다. “그리고 여기, 역시 보편적인 종교적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종교적 희 망과 바램이라는 약속에 있어서, 그것은 적대적인 현실 앞에 놓여 있는 암석 앞에 산산이 부수어져 좌초 되어 버렸다.” 그렇게 엄포하고 있는 게르트 타이쎈 역시 종교적 희망의 약속이라는 예 수의 선포가 십자가라는 가증스러운 현실의 암초에 가로막혀 좌초되어 깨 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만 사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의 위대함에 벗어나 실제 당시 사건은 우리의 생각과 다 른 방향으로 전개된 듯 입장을 보고 있어야 올바른 해석이다. 타이쎈처럼 당시 예수의 사건은 유대 사상에 입각한 종교적 부조리 혹은 부조화를 들 고 나온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조화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세상을 바라본 이들에게 닥친 절망과 아비규환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 사고가 철저한 죽 음으로 비치게 되어 버렸기에 예수 십자가를 생각함으로, 지금 떠 오르는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21
것은 결국 잔인성 혹은 극악무도, 고통과 절규, 죽음과 비난, 모욕과 저주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십자가는 버려진 예수를 생각하게 한다. 만약 당신이 나사렛 예수의 추종자였고, 곧 정치적 인 유대인의 왕이 될 나의 스승이 고통에 절규하며 신음하고 있는 그를 보 면서 즐거움과 행복, 살아있음과 희망, 사랑과 축복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 을 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는 내가 그 장소에 있었으면 아마 인상을 찌그리고 있었을 것이 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라고만 여길 것이고, 신의 아들 이 죽어가는 모습을 꺼려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는 표현을 이럴 때 써야 할까? 왜 하필이면‘십자가’냐고 말이다. 그리고 결국 그를 버리게 되는 상 황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른 다. 도스토예프스키는“왜 하필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결정적인 때 얼굴을 감추고 마는 걸까?”라고 말을 하면서 보통의 인간과 자연 앞에 굴복하는 예수를 마지못해 안타까워한다. 더불어 당시 예수 추종자들의 눈물이 흐르 고 목이 매인 채 말을 하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을 대신해서 도스토예프스 키는 잘 표현한 것 같다. 오히려 그의 표현보다 한술 더 뜨는 자들이 있다. 수수방관하며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유대인의 왕 예수 앞에서 대제사장들 과 서기관들이 그에게“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68라고 핀잔을 주는데도 아무도 그 말에 반대로 서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 자신도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 지 않는다.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는 결국 소리지르고 죽음을 맞이 하였고, 그리하여 하늘의 도우심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 순간, 무신론자들 혹은 신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자들의 공통점 사이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있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422 버려진 예수
있는 그런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반대로 피어 오르는 소망이 하나 있었다. 예수는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 고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의 지성인이며 스마트한 현대인들도 그러한 바램 이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그 바램에 대해 누군가는 한 가지 대답을 해야만 한다. 곧, 시간적으로 머지않아 어려운 상황과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해도, 그 길이를 줄자처럼 재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것이 종료된 죽음의 시점에 출발한 것이 하나 있었다. 결국 이들에게 드디어 한가지 결정적인 단서를 하늘에서 제공한다. 마치 예수의 탄생이나 혹은 세례를 받았던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하늘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423
▐ 9장 미주 ▐ 1. 요한복음 9:3. 2. 창세기 1:28. 3. 창세기 3:17. 4. 창세기 3:16. 5. 창세기 3:17. 6. 욥기 1:8. 7. 요한복음 12:19. 8. 요한복음 12:12. 9. 마태복음 21:2. 10. 요한복음 12:16. 11. 스가랴 9:9. 12. 헤오도로스,“역사”, 천병희 옮김, 2009, 숲, p56. 13. 왕상1:33. 14. 존 윌튼 외 2명, IVP 성경배경주석 구약 편, IVP, p 507 열왕기상 1:33 해설 참조. 15. 마가복음 11:10-11. 16. 누가복음 19:40. 17. 누가복음 19:44. 18. 사이먼 베이커,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Ancient Rome)”, 웅진 지식하우스, 4장 참조. 19. 마태복음 26:3-5. 20. 출애굽기 24:8-11. 21. Gottingen, Biblische Theologie I , 1992, p130. 22. 마태복음 26:19. 23. 요한복음 13:7. 24. 요한복음 13:27. 25. 마가복음 14:27. 26. 마태복음 26:34. 27. 마가복음 14:29. 28. 마태복음 26:34. 29. 누가복음 22:31. 30. 요한복음 13:19. 31. 누가복음 22:24. 32. 누가복음 22:24. 33. Asher Maoz,“Law and History Review ”(Fall 2000 Vol. 18, No.3)에 보면 “Historical Adjudication: Courts of Law, Commissions of Inquiry, and ‘Historical Truth’”라는 제목이 실려 있다. 34. Asher Maoz,“Historical Adjudication: Courts of Law, Commissions of In- quiry, and‘Historical Truth’”, I.1. 35. 호크마 주석에 의하면 산헤드린에서 열린 회의는 비공식적인 석상에서 이들 은 회의를 하고 의견을 모으는 일로서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곳은 아니고 424 버려진 예수
유대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대제사장 궁전의 뜰 남쪽에 있는 다듬은 돌로 건축된 공회당(Gazith)에 모인다. 산헤드린의 구성은 총 72인의 공회원 으로서 구성되는데, 대제사장, 서기관, 족장급의 장로 등의 세 계층이 각각 24명씩 등재되어 있다. 36. 마태복음 26:3-5. 37. 마태복음 26:60. 38. 마가복음 14:62. 39. 마가복음 14:65. 40. 마가복음 15:5. 41. IVP 성경 배경 주석, 크레이그 키너, 정옥배 외 옮김 p.79 참조. 42. 민수기 15:30-36. 43. 마태복음 26:59-60. 44. 요한복음 18:28-30. 45.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6:66 해설 참조. 46.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8:29 해설 참조. 47.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유재덕 지음, 브니엘 출판사, p. 33-34. 48. 누가복음 22:53. 49. 시편 22:6-8. 50. 필립 얀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김동완·이주엽 옮김, 요단, p.268. 51. 누가복음 23:4. 52. 마태복음 26:31. 53. 마가복음 14:50. 54.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삼영 옮김, p.13 참 조. 55.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이종태 옮김, 홍성사, p. 41. 56. 데살로니가전서 2:15. 57. 고린도전서 2:8. 58. 갈라디아서 2:20. 59. 로마서 8:32. 60. 오스 기니스,“오스기니스, 고통앞에 서다”, 조계광 옮김, 생명의 말씀사. 61. 존 스토트,“그리스도의 십자가”, 황영철∙정옥배 옮김, IVP, p626-7. 62. 신명기 21:23. 63. 신명기 21:21. 64. 마가복음 15:23. 65. 욥기 19:7-10. 66. 누가복음 23:28. 67. 사도행전 2:22-23. 68. 마가복음 15:31-32.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잔, 십자가 425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십자가는 통상 그 자체로 선언되지 않았고 하지만 '성령에 의하여 주신 힘'과 '부활'이라는 연합 안에 있었다. 십자가와 예수의 부활은 서로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The Empty Cross of Jesus, Michael Green (마이클 그린의 '예수의 빈 무덤')> 그는 심리학자들이 표본처럼 제시하는 거룩한 한 이, 축복이 그 안에 있는 그대여 3일 후 보다 더 … 결코 회복 가능한 고통에서 그의 의가 떠날 수 없다. < 창세기 42장 17절에 대한 미드라쉬 문서> 만일 여기서 어떤 궁극적인 것이 드러난다면, 죽음 및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이상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이 예수 부활에 대해 생각하는 곳, 거기에는 언제나 죽음에 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특히 그것은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저항이다. <역사적 예수(Der Historische Jesus)1중에서>
망상, 환상 그리고 착각 망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과대망상’혹은‘피해망상’, 그리고‘빙의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빙의망상’은 신이나 동물이 자기 몸에 실렸 다고 믿는 망상이다. 이러한 망상 속에서 이치에 어긋나는 헛된 생각에 사 로잡혀 지나친 병적인 피해망상이나 과대망상 따위의 정신이상이 인간을 사로잡는다. 거의 대다수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이런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이 많다고 말하는 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정신병 동에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이자 나의 대학교 동기와의 통화로 두런두런 이 야기 하다가 무언가 스치는 통찰력을 얻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가 말하길“모든 사람들이 정신병자이다”라 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누구나 한 가지쯤은 크고 작게나마 의식적 혹은 무 의식적으로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고 결론내린다. 주위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신만의 내면에 병적인 무언가가 들어있다고 말이다. 그와 통화 하면서 과거에 내가 한가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정신병자가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즉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에 의해 알 수 있는 바, 정신병자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정신질환에 대한 고정관념, 즉 하루 종일 정신질환을 앓고 주위 사람들을 혼란케 하거 나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상시와 같다가도 갑자기 어느 순간에 잠시 정신적인 질환이 시작되었다가 또 이내 멈춘다고 한다. 적어도 우리 눈에 정신질환을 앓는 어느 환자를 보더라도 잠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다. 막상 과거 충격적인 장면이나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보거나 목격한다면, 그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혹자는 다른 사람이 보기 에 혼자 있지만, 그 자신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즉, 자신 의 내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는 사람들 혹은 영 상 매체로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거나 그런 피해 상황에 닥쳐서야 428 버려진 예수
증세가 시작된다. 이들에게는 현실과 환상 혹은 망상과 함께 겹쳐 분간을 하지 못해 정신분열의 근원적인 원인이 되어간다. 일상을 놓고 본다면 일반인들에게도 나름대로 두려운 대상들이 한가지 씩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기억이나 깊은 물에서 겨우 살아난 사람들 의 공통점은 그런 곳에 다시 가면 십중팔구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이들은 피해망상이라는 증상에 시달린다. 그런 물에 대한 두려움 혹은 고소공포증 을 포함하여 사랑에 실패하여 결혼하지 못한다거나, 밀폐된 공간을 두려워 하는 폐쇄공포증들이 뇌에 충격을 가하고 유발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자들이 간단한 증상 혹은 그와 같은 평범한 질환을 가지고 있음은 모두에 게 적용시킬 수 있는 덧셈, 뺄셈과 같은 간단한 수학공식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자들의 공통적인 뇌 구조는 일반적으로 우리 와 다를 바 없다. 겨우 몇 퍼센트만이 뇌의 손상만 있을 뿐, 정신질환을 앓 고 있는 자들과 평범한 이들의 생활과 비교해보면 별다른 반응을 볼 수 없 다고 한다. 물론 그 차이의 간격이 현격하게 벌어진다면야 상황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 차이가 엄청난 사건을 불러 일으키면서 생긴 뇌의 치명적인 상처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의 사고나 감정,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신적 상태를 가진 인격장애 혹은 정신분열증, 치매환자들 은 하루에 몇 차례씩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유명한 이래로, 관련 의학 기 술과 기타 범주의 의학 분야에서 오늘날 무궁한 발전이 있음에도, 여전히 망상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의 원인과 치료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의술이나 의학이 없다고 나의 친구는 장담하고 있었다. 오로지 일 시적 처방만이 그 환자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으며, 반대로 이해해야 할 분야 역시 무궁무진하기에 그렇다. 뇌의 구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차원이 다른, 근본적으로 또 다른 상상의 날개다. 한 사람이 평생을 연구하여도 못다할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29
장엄하고 광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뇌의 구조 속에 단지 몇 퍼센트를 찾 아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은 의학계의 진실이자, 지극히 알고 있는 병의 원 인을 찾아낼 수 없는 현대 의학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친구가 또 하나 재미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 고 하는 망상에 시달리는 자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난 바울과 연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혹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전에 비 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스스로를 말한 것을 볼 때 이에 해당될까? 성경을 본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유가 어찌하던 바울은 우선 이스라엘의 희망과 역사적 예수의 죽음을 목격하여 예수를 따랐던 공 동체를 핍박하기에 유용했다. 그 당시 예수 공동체의 절대적인 이스라엘 구원의 실패로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은 그 계기를 이용하 여 더더욱 기독교를 핍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미워하던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바울을 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친 구가 말한 이야기처럼 그에게 진단을 빙의망상이라고 연결시킬 수 있다. 친구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 내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수 차례 외치는 어느 환자처럼 바울도 어쩌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법하다. 바울이 만나본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부활의 사건’앞에 그의 상태를 그렇게 진단해야 할 것인가? 열두 제자들과 예수 부활을 만난 그의 추종자들은 어떠한가? 열두 제자들은 과거 예수의 처형 사건에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겁을 내던 이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증인으 로 나서면서 죽음을 자초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리고 마는 사태 앞에 이들 에게 과연 어떠한 증상이 어울릴까? 예수가 죽기 전, 유대 사람들에게 외친 것이 있다. 자신을 빛이라고 소개 한 예수의 그 한 마디처럼 실제 그 빛이 바울의 눈을 멀게 하였다. 또한 죽 었던 예수와 대화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혹시 그 사건은 파우스트의 말처럼 꿈꾸던 지상 낙원 혹은 한물간‘주관적 430 버려진 예수
환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어느 환자와 다를 바 없는 바울의 환상을 빙 의망상, 그렇게 주관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자칫 진리 탐구에 흠집을 내 어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자신이 말하고 있는 예수 부활에 대한 주장과 설교는 우리가 볼 때 헛된 망상이요, 환상이 아닐까? 바울의 속임수를 현재 우리가 알아내기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버렸 다. 그러한 착각의 진실이 우리를 속인 것은 아닐는지, 혹은 그래서 나름대 로 자신의 약점을 과감히 숨김과 동시에‘예수의 부활’이라는 내용물을 포 장하고 가공하여 완벽한 속임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유럽 전역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두고자 하는 속셈을 그가 계획했을까? 그로 인해 과감히 시간 을 투자하여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논리적인 비상과 판단력이 그를 미치 게 하였는가 말이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말하길, 바울은 휼륭한 유대 인이고 명쾌한 지식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예수를 신비화하여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부활에 대한 속임수’를 유대인 신념과 경험 사이 에서 잣대를 대고 자신의 말을 적용하여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 아닌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 않았는가? 비정상적인 착각과 일반적인 지식은 서 로 엄연히 다른 공간 속에 들어찬 존재의 사고다. 그 안에 인식하고 있는 중심에는 바울을 비롯하여 이들 예수 추종자들이 이러한 범위에서 이탈하 고 있지 않은지 부활을 외친 예수의 열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펼 치는 부활의 세상은 자칫‘주관적 환상’이라고 불러 일으켜야 하지 않을 까? 그 결과,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떠할까?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에서 볼 때 예수의 부활 사건은 단지 베드로와 바울의‘죄의 콤플렉스들’guilt-complexes에 의해 야기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자 가 있다. 그들이 죄를 지어서 그런지 그 이유로 예수에 대한 부활이라는 콤 플렉스를 가진 것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그것이 원래 존재했던 망상이라는 경험의 산물이라고 고백한 게르트 류데만Gerd 은Ludemann 사실 예수에게 일어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31
났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고자『What Really Happened to Jesus? (실제 예수에게 일어난 일? - 지은이 역주)』을 저술했다. 그 저서에서“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의 핵심에 대한 중대한 국면에 있다”고 밝히고 있었다. 또한 덧붙여 누군가 이야기하길“과연 무 슨 일이 있었는가?”하는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죽음에서 움직였던 예수에 대한 부활 가운데 그 근거가 단지‘믿음’만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충분치 못한 설명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한 사건 앞에 이러한 환상hallucination 혹은 환각illusion과 같은 단어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딱 어울린다고 하는 류데만처럼 예수의 부활이 순전히 제자들의 개인적인 심 리에 의한 변화의 산물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주관적 환상 이론’에 대해 언급하듯 정말 그들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주관적인 메시지로 받아들 여야 할까? ‘세마포’로 둘러싼 틀어짐과 의심들 몇 해 전, 증손자 형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자기 여동생의 사위가 임 종했다는 소식을 말이다. 그래서 난 온 친척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그 슬 프고 애달픈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큰 아버지 셋째 딸의 사위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어서지 못한 채 그 집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내가 유난히 귀여워했던 큰 아버지의 셋째 딸은 무신론자다. 교회를 다니는 것에 별로 시큰둥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은 남편은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내가 영종 사진 앞에 다가섰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나는 왜 갑작스럽게 하늘로 갔느냐고 셋 째 딸에게 물었더니 사위는 이미 지병을 알고 있었는데 고집스럽게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더불어 사위 가족끼리의 그 어떤 문제까지 그는 떠안 고 임종했던 것같다고 말이다. 그것이 그를 죽음에 치달았다고 해야 할까? 그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나는 속에서 무언가 모를 충격에 휩싸였다. 그 이 432 버려진 예수
야기를 들으면서 그녀와의 대화에 비춰지는 사위는 대단히 고집불통이었 음을 짐작케 했다. 마치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 예수를 향해 죽음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종용하듯 잘 달래려 했으나 나무 위에 죽음을 고집스럽게 버리지 못한 예 수의 이상한(?) 헌신처럼 사위도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사람들 의 눈물을 글썽이게 한 것과 연관 지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 의 눈물만이 죽은 자의 남겨진 유물 전부였다. 그렇다고 그 사위가 누군가 를 위해 희생한 것도 아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데 예수의 죽음과 그 어 떤 것도 연결고리가 없지만 죽음을 받아들인 것에는 동일한 듯싶다. 중국한자에‘애착생사’라는 단어가 있다, 즉 자신의 인생에 행복이 영원 하고, 죽기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위는 죽음에 무섭거나 떨리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가족과의 이별 을 원해 단순히 병원에 가기를 꺼리기도 했다는 사위…, 그런 긴 여운을 듣 고서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왠지 모른 숙연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꼭 그렇 게까지 기독교인으로서 자살이 아닌 죽음을 빠르게 다가오길 바랬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그가 내겐 지극히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같은 기독교인의 관 점에 보아 그렇게 부모가 싫어서 일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죽음이 라는 의무심보다 예수 부활에 대한 의구심이 더 나를 옥죄게 하였다. 왜냐 하면 예수에 비하여 하나님이 그를 살려 주지 않았는지 혹은 그렇게 죽기 를 바래 내버려 두었는지 말이다. 혹시 죽어가는 자를 눈 앞에서 본 적이 있는가? 훨씬 더 과거로 돌아가 또 다른 나의 개인적 사건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30대 초반, 어느 때와 마 찬가지로 난 반복적인 직장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갔다. 당시 난 하루는 날을 새고 다음날 저녁에 들어오는 일이 몇 달 지속되었던 때였 다. 그 어느 날, 오늘따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불 밑에 드러누워 자고 싶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33
다는 마음만을 간직한 채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왔다. 할머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중풍으로 오랜 동안 지병을 앓고 계셨다. 그 럼에도 임종 몇 해 전부터 어머니의 권유로 할머니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 죽음의 담보같은 교회 생활도 그분에게 마지막이었다. 나의 친할머니, 그녀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유일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는 것을 그날에야 알게 되었다. 늘 어릴 때 기억나는 그분의 추억은 품 안에 안길 때마다 어느 어머니보 다 포근하다고 생각했다. 친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이제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던 그날, 친할머니의 둘째 아들인 나의 아버지께서 오늘 내일 하신다 는 소리에 난 아버님을 쉬게 한 뒤 내가 잠시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저녁 늦은 무렵, 힘들어하시는 할머니는 나와 함께 어느 때와 전혀 다른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 그분의 팔을 만지는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그분의 표정과 입의 모양을 자세히 보았다. 나는 왠지 평상시에 안 하던 생 각이 들었다. 난 곧바로 찬송가를 불러주고 싶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찬송 가를 들고서 불러 주었고, 나는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찬송가가 거 의 끝날 무렵, 할머니께서는 입에 잔잔한 거품을 문 채 그대로 숨을 거두셨 다. 그때 나는 눈물이 고이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했다. 죽어가는 자를 눈 앞에서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때 나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따스했던 할머니의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피부 로 만져진 그 때를 회상할 때마다 예수의 시체를 만진 사람들은 어떤 생각 을 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기록되지 않았지만 십자가와 예수의 시체를 담당했던 로마 병 정들이 일반사람에게서 느끼는 따스한 피부와 비교하여 죽은 후에 느껴지 는 예수의 피부 감촉을 만졌다면 과연 그가 살아 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인간은 죽음 앞에 당연히 죽은 자의 시체만을 떠올린다. 나는 그 때, 할머 434 버려진 예수
니의 죽음에 직면했던 그 차가운 피부 감촉은 지금 이순간에도 잊지 못한 다. 예수의 시체도 그와 같을 것임은 예상할 수 있었다. 죽음이란 그 어느 의사도, IT기술과 첨단 과학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최첨 단 의약품과 의술로도, 죽음을 연장만 할 수 있지 살려내는 일에는 인간 투 쟁의 신화적 차원이 되어버린다. 죽음 앞에도 의사는 죽은 자처럼 할 말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정말 정상이기까지 하다. 죽은 자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많아진다. 죽음을 재촉한 친척처럼 왜 하필 그를 먼저 데리고 갔을까? 아니 그보다 혹시 그가 진정 기독교인이 라면 예수처럼 부활할 수 없었나? 그도 저도 아니면, 생명 연장이라도 할 수 없었나? 남겨진 가족들의 힘겨운 삶의 역경과 고난을 뒤로 한 채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는 그들의 가족들이 혹시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았 을까? 결국 기독교인들은 과연 예수처럼 죽음을 초월할 수 없는 문외한 인 간인가? 죽음의 초월성은 언제나 마른 광야의 수풀 같고, 그 목마름에 지름길인 ‘생명의 종착역’은 아무도 풀 수 없는 모든 자들의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 렇게 과거 영생이라고 하는 무명장수를 최종 목표로 삼고 기독교에서 말하 는 죄에 대한 처벌이 없다면? 또한 신의 섭리를 무한정 뛰어 넘어 보통의 인간이 가지고 싶어하는 부활로 초월적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얼마 나 행복할까?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삶의 끝자락을 향한 인간 앞에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성품, 곧 그분의‘영원성’을 털끝 하나라도 만진다면 그 얼 마나 좋을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이러한 사건들 앞에 수도 없이 생각 해보았다. 영원한 생명이 눈 앞에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애타게 죽 음 앞에 슬퍼하며 눈물을 적시며 통곡한다. 새삼 인간의 가치에 대한 문제 를 숙고한 철학적 사고로서 이해하며 그것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목 소리 높인‘니체’가 떠오른다.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35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신을 죽었다”라고 서슴없이 주 장하는 니체의 해석에 반은 동조한다. 그래서 인간이 신을 죽였음은 동조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역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동조할 수 없듯이 그것은 기독교에서는 수치 그 자체다. 니체 역시 자신의 죽음 앞에 서조차 두려워 떨었듯이 인간 모두는 그렇게 삶의 끝자락이라는 길 앞에 ‘허무주의’를 느끼듯 죽음의 시체들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제, 니체가 말한 신도 그 예수의 죽음을 두고서 할 말을 잊었는지 대답 이 없다. 그래서 니체는“신은 죽었다”라고 했을까? 초월적인 신의 허무주 의를 객관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이제 죽음과 함께 상승하고 있었던 것일 까? 왜 우리는 죽지 못해 안달 났는지, 반대로 왜 그렇게 살고 싶어 바둥거 리는지, 세상은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에 결론내지 못한 채, 마 치 미사일과 총탄 소리, 게다가 우레와 같은 장엄한 폭우가 고통 앞에 막 을 내린다. 인간의 머리 위로 쏟아진 그 모든 것들이 고요해지고 끝내 잔혹 한 전쟁 후의 평화가 깃들어 있듯 쾌활하고 인간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질 문들 속에 이내 평온하다. 세상은 죽음 앞에 부활의 연결점을 찾지 못한 채 죽음의 딜레마에 허우적거린다. 마지막 관문인 그 예수의 죽음 앞에서도 아쉽게도 멈추어 선다. 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예수의 죽음 앞에 신약 복음서에서 말하 는 삼 일째 새벽에 일어난 상이한 부활의 흔적은 우리를 마구 혼돈스럽게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목격자들 간에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각기 다 른 내용들에 대한 지적은 내게도 생소하였다. 어찌 보면 이제 예수의 부활 사건마저 우리를 혼돈의 늪으로 빠져 들기에 다분하다. 부활을 목격하기 전, 예수의 죽음을 알거나 본 자들은 사랑하는 예수가 떠나 슬픔과 탄식으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여전히 꿈쩍 않는 차가운 얼음 같은 시체를 가진 사랑했던 예수 앞에 기적은 그에 게서 달아나버렸다. 그 차가운 시체처럼 이들은 냉한 마음의 일체를 느낀 436 버려진 예수
다. 기적의 힘마저도 그에게 버려져야 했다. 구약에서 소리치던 다른 선지 자 못지 않게 예수도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어떤 자는 실망을, 어떤 자 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2 부활 앞에 죽음은 그렇게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 줄 뿐이었다. 십자가, 실패한 이미지? 2000년 전, 남아있는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찾아보았다. 유 대인의 죽음에 대한 과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의식이 현재 남아 있다. 유대인들의‘장래의례’는 케리아Keriah라고 하는 의식의 하나로‘찢음’의 행 위가 남아 있다. 이로서 장례 전에 행해지는 것이 전통이 되어, 의복에서 심장 위 오른쪽을 찢는 채로 기립 자세에서 자신의 슬픔과 애도를 표시하 곤 한다.3 죄와 질병과의 관계에서 유달리 연관관계를 예의주시하던 유대인들은 다 른 방향, 즉 병과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들 간에도 연관 짓고자 했다. 특히 예수시대에 이르러서도 커다란 질병을 가진 나병환자 같은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의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했고 격리되어 나병환자촌과 같은 지역에 서 살아야 했다. 그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 이 만연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병을 얻게 되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의식 속에서 성 장하던 그때가 구약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유대교 랍비인, 얼 그롤만Earl A. 의Grollman 주장은 과거 유대인들의 생각과 이상하게도 다르게 변 한 듯싶다. 그는“죽음과 병은 유대교에서 징벌로 의식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더 이상 죽음과 병을 하나님과의 징계와 연관 짓는 일이 어리석다 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현재 유대교에선 더 이상 질병과 죽음에 대해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최 근 이러한 사고의 변화가 단순히 살아가면서 질병의 원인을 다르게 첨가한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37
동시에 언젠가 죽음을 겪어야 할 삶의 한 부분으로 남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부활도 믿지 않는 대부분 유대 인들이 단순하게 존재하듯 그렇게 세월은 해가 뜨고 지듯이 반복되는 일상 처럼 죽음에 대한 사고력은 역시 간단하고 명료하게 변해버렸다. 베커E. 의Becker 저서『The Denial of Death(죽음의 부정 - 지은이 역주)』에 서 그는 오늘날 세속적이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지구를 가리키며“세속적 인 사회 속에서 느끼고 실감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해서는 일반적으 로 침묵한다”고 말한다. 모든 도덕이 재평가 받듯이 이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도 그러할까? 그 것들이 서로 엉키고 설킨 실타래 속에서 무한정 피어오르는 참된 그리스도 인들이 외치는 부활이라는 아우성 앞에‘실패한 이미지’에 대한 십자가의 연관성에는 해당사항이 없을까? 과연 고통과 죽음에서 승화시킨 예수의 부 활을 알리는 제자들에게 그 이미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구약 신 명기에는 질병과의 연관처럼 십자가가 죄악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에 목숨을 거는 제자들이 존재하는 방향과 함께 반대적 측면에서 바 라보는 시각은 부활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당연히 죽음을 가지 고 있다. 예수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쾌락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은 저품격 그리스도인들이 판을 친다고 할 수 있 는 이 때, 과거 풀리지 않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와 죽음의 문제는 예 수의 부활처럼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위생적인 사태 앞에 부 활에 대한 수수께끼는 이상하게도 우주마저 침묵을 지켰다. 대다수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과거 고대인들 역시 신과 죽음은 자연스레 연결시키고 있었다. 죽음이 신의 뜻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더욱이 예수는 그 사실 앞에 버려져야 했다는 것은 마땅하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까지도 죽음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438 버려진 예수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부활까지 그러했다. 수 많은 자들이 그 사실 로 인해 목숨을 걸고 아우성쳤건만, 대다수 백성들은 그 사실과 자신을 동 일시하지 못했다. 현대인들의 CF 광고하듯, 당시 유대 사회 아니 유대를 넘어 온 유럽을 휩쓴‘예수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선전했음에도 대다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은폐하거나 더욱더 강한 응집력으로 그들을 축출하려 고 애쓴 흔적이 책에 도배질하다시피 하고 있다. 과거 이미 로마의 역사에 도 그리스도인의 핍박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했다. 고문과 고통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차츰 사라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자신 의 죽음이 오히려 부활을 만들었던 예수처럼 이제 많은 자들이 그의 길을 대신 걷고 있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에게 부활은 예수와 같은 전유물이 아 니었다. 죽음이나 상처 앞에 고통스러워하는 심리적 영향에 놓인 피해자들 은 방향 상실, 충격, 혼란, 냉담, 피가 섞인 울부짖음, 그리고 감정적인 불 안정, 혹은 무력감의 심리적 증상들을 갖는 정신분열까지 그렇게 진단되어 그러한 상황에 방치된 채 무료한 시간을 지낸다. 그러한 분노와 치료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된 사실들 앞에 그 어느 성직자나 법 앞에 착한 자라 해도 별로 나아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그 순간, 복음의 거짓 오류라는 시간에 서린 시퍼런 칼날에 부활의 복음이 놓인다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고통에 방치된 자는 위장질환, 호흡 곤란, 심혈관 고통, 신경의 마찰로 인한 극한 고통, 만성피로 속에 수명장애까지 겹친다면 박해와 핍박에 거 짓말이라도 하여 위기를 모면하려는 자는 서럽게 줄 서 있다. 이런 추악한 현실 앞에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을 토로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았다. 현 대인들이 좋아하는 교회 마당에서 소리 높여 부활을 울부짖는다고 죽음과 공포, 그리고 박해 앞에 활짝 핀 꽃처럼 방긋 좋은 일이 생기라고는 초기 기독교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 말에 아마 비웃음만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39
오히려‘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역겨운 부활’이라는 우스갯소리, 이 문장은 허울좋은 환한 미소 속에 세상은 지우개로 그것을 지운다. 유대 인들이 현세를 깊이 갈망하고 죽음으로서 찾아오는 내세, 즉 죽음 뒤에 찾 아오는 삶의 마지막을 아무도 해석해주지 못하는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요시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무엇을 통해 진실과 진리가 수반되어야 할까? 비록 현대 의학이 첨단화되었다고 한다 한들 의학계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죽음과 질병, 게다가 질병에서의 회복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프로 세스를 가진 미스터리 한 사건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죽음 과 질병의 원인과 방법, 그리고 위기 모면적인 설명을 할지언정 죽음의 정 확한 사유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떤 과학적 사고나 이론에서 현명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듯이 죽음과 부활 역시 예수 앞에 일관되게 침묵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이러한 죽음의 침묵을 예고하듯 랍비 중 일부는 부활에 대한 해석에 난 색을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 표시를 하며 저명하고 다양한 자유주의 랍비들 의 말처럼 부활에 대한 특별한 믿음에 반하여 다가오는 것은 그저 장래의 화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들을 보게 된다. 죽음은 아마 현실적인 한 사건이며, 운명과도 같은 사랑의 파괴이자 또 다른 삶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남아있는 자들에게 그것이 슬픔이요 절망뿐 이다. 더불어 분노로서 고정된 두드러진 경향으로 자리잡아 그 인간의 마 음은 달랠 길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 종파 중 사두개파들이 누리고 있는 부활 신앙을 거부하는 경향처럼 부활을 외치는 자들을 아마 죽어서 가는 천국을 사모하는 사회적인 악이요, 마음이 천국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에서 현실의 방해꾼이요, 가뜩이나 종잡을 수 없는 현실 앞에 불운한 현 재 삶의 한 가닥을 버리고 있는 동안 철딱서니 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미개 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금 현 시대에서도 가장 신랄한 비판을 받아 440 버려진 예수
마땅하기도 하다. 그들 때문에 특정한 중심적인 사회 행동을 조정하고 가 늠케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 부활을 설득하는 자들은 현실을 부정할 수도 있으며, 현실 세계와 충돌할 수 있는 우려 또한 높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죽음을 목격한 현상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부활’이라는 커 다란 장벽 앞에 그 이야기를 도외시하는 자들은 두 가지 중 하나로 기독교 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유령 이야기들 속에 맹 목적으로 바로 곧이 듣는 순진한 촌뜨기 혹은 새로운 종교를 재생, 가공하 여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이라고…. 이들은‘부활의 평 면도’를 은밀하게 계획함으로 약삭빠른 음모를 가진 공모자들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그런 인식으로 현재의 기독교인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게 현실이 다. 그러나 성경의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와는 정반대다. 우선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도망갔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너무 예수의 참혹한 죽음 앞에 오열과 흐느낌 속에 부활을 잊혀버리게 된다. 그들에게는 시체로 썩 어가고 있는 예수의 무덤 사이로 수 많은 생각이 들이밀고 있었을지도 모 른다. 비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성경을 어떻게든 거짓 날조라도 하 라며 종용하고 있지만, 그렇게 소개하는 이들의 내용을 잠시 접어두고서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듯 예수와 추종 자들 사이에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죽음에 줄행랑을 쳤고 여인들은 내내 울었다. 제 자들과 연관이 있을 법하지 않은 제 삼의 인물(아리마대 요셉)만이 고요한 침목 속에 빌라도 앞에 부탁하기를 예수의 시체를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죽음 앞에 나서기는 연약한 시대가 아닌가? 지금 밖에는 시퍼런 피가 묻어 있는 창과 칼 앞에 여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체 닦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서러울 뿐이다.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41
그저 여인들은 음모를 만들기에는 너무 연약한 자들이다. 또한 제자들이 부활의 청사진을 몰래 그리기에는 역시 당황스러운 심적인 죽음의 사막 속 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죽음과 질병, 그리고 삶의 마지막 행복이라는, 그 한 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을 예수는 그들 앞에서 무시했다. 메시야 로서 세상을 뒤엎고자 했던 제안을 과감히 무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죽 음에 놓인 그는 거짓말쟁이요, 악의 자손이요, 당시 다른 메시야와 다를 바 없는 한 피조물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적어도 배신자들의 눈에는 그럴 수 도 있다. 죽음에 애통하고 통곡하는 예수의 주위 사람들 중 유달리 여자들은 더 예수에게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감정의 손아귀에 쉽게 좌우지되는 여자들 로서는 감정적으로든 혹은 연민으로든 예수의 사역에 애석할 따름인지라, 성경 그 어디에서도 여인들의 사역이나 큰 일에 대한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십자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존재가 사라졌던 죽 음 앞에 서 있는 예수를 막달라 마리아와 니고데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를 기다리고 있던 존귀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이 442 버려진 예수
예수의 죽음 앞에 침묵을 깨고 사람들에게 버려져 시체가 되어버린 예수를 돌보기 위해 빌라도에게 방문한다는 것 말고는 심리를 알아내긴 낙담하기 에 이를 데 없었다.4 안타깝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 었다고 성경은 기록했다.5 그러한 간단 명료한 심리 상태는 복음서 전반에 걸쳐 시간을 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와 한계를 넘어 읽어보면서 느끼듯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 무렵, 안식 후 첫 날까지 이 들은 서로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들은 서로를 위안할 수 없는 공모자 들이다. 그 두려움이란 고작 유대인들이 혹시나 자신들을 찾아내어 죽일지 도 모른다는‘걱정’이 부활이라는 생각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를 공개 처형함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미지 혹 은 종교적인 라이벌 제거에 성공했다. 로마인들은 제국을 붕괴시키려고 했 던 소인배들 중 하나로 치부된‘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야망 어린 사내 를 죽였고,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야심과 신성모독이라는 해괴 망치스 런 입담을 가지고 남발하는 그 어린 사내, 예수를 내동댕이쳤다. 이유야 어 찌하든 자신들이 찾고자 한 메시야 사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하늘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둔탁한 소리만이 가득한 말을 되풀이한 그가 유대 백성들의 우상이 되어가는 질투에 눈이 멀어 죽음으로서 바꾸어버렸다. 그리하여 아직 잔재가 남아 있다고 본 이들은 아마 그가 죽음에 이르렀 어도 무언가 음모를 펼칠까 봐 걱정되어 무덤 주위를 지키게 하려고 노력 한 흔적 역시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그 사실이 진짜라면, 그 일이 진정 일어 나서 자신들의 직위와 신분에 위협이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그들이 했 을까? 아리마대 요셉의 선처로 죽음이 일찍 찾아온 것에 의문을 품었던 본디오 발라도 역시 의심과 놀람으로 예수의 시체를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하기도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43
했다. 부활 전까지 3일의 시간! 아직 예수가 걸었던 그 죽음의 공포는 잊혀 지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다. 고작 그런 시간만이 이들의 공포와 불안을 더 해주고 있었다. 처형 이후의 3일간 예수의 죽음 앞에 우리는“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이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예수의 정체, 그것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본체로 믿고 있는 바였다. 또한 판단하는 이, 하나님 역시 그와 같은 대답일 것 같다고 그리 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의 처형 시기는 달랐다. 부활의 존재가 없던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 이후의 3일간은 제자들에게 어둠과 같 은 나날이었다. 그렇게 그 답답한 기간도 그들에게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부활 전에는 어두움 그 자체였고, 살인에 대한 공포, 움직이지 않는 예수 의 시체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러한 색체를 포함하여 부활에 대한 도 전과 시리즈물 혹은 예수 전 생애의 삶과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그러한 다양 한 색체들이 부활 전에 존재했지만 여전히 적의를 두고 부활의 평가를 비 관적으로 보는 색다른 무늬가 존재한다. 역사비평학자 라이마루스H.S. 는Reimarus 예수의 부활을 사도들이 만들어낸 날조라 우기며‘빈 무덤’에 대한 도전에서 그의 사명은 출발한다. 그와 함 께 혹자는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 사라진 빈 무덤이 결코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렛싱G.E. 의Lessing 단편『예수와 제자들의 목적에 대하여』에 실려 있는 내용 중 특이한 점이 바로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설을 제기하여 부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의 한 불씨를 낳게 된다. 이렇듯 다양한 사상과 사고를 가지고 예수 부활에 대한 사건을 각양각색 에 걸쳐 추론하고 결론 내는 학자들이 많다는데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 444 버려진 예수
다. 심지어 파울루스H.E.G. ,Paulus 하제K.A. ,Hase 슐라이에르마허F.D.E. 등Schleiermacher 등…,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가 언뜻 보기에 죽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잠시 후 다시 소생했다고 하면서 역시 부활에 대해 다른 해석으로 치부한다. 그 러나 사실 앞 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십자가 사건과 태형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전통과 문화라고까지 할 정도로 오랜 기간을 두고 사용된 잔 인한 살인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 무엇보다 로마 자신들이 알고 있었다. 그 렇다면 예수의 부활 앞에 거짓과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첫째로 성경에서 언급하듯 빌라도는 예수가 예상외로 너무 빨리 죽은 것에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그 어떤 사건을 두고서 궁금함과 동시 에 이상히 여길 때 쓰는 말”에 적용되어 사용될 때 원문 헬라어‘다우마조 (qauma,zw)’를 사용했다. 이 단어를 통해 마가복음의 저자는“이상히 여겨” 라는 심리적 의심을 사용하고 있다. 결국 복음서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의 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빌라도가 백부장을 불러 예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듣고 난 후에 넘겨주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나열하고 있다. 성경이 만약 그 사실에서 거짓이 들통나고 백부장의 거짓 실수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백부장은 아마 형장에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와 더 불어 복음서의 저자까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과연 거짓된 오류투성이의 복음서 편지들이 핍박받는 교회에 읽혀졌을까? 둘째, 앞 장에서 언급한대로 십자가 사형 전문가들은 직업처럼 늘 완벽 하게 하는 자들이기에 추후의 의심도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고 살려 내려오게 만들었다면, 그 역할을 했던 주위 사람들은 모조리 그 죄과로 인해 처형당했을 것이다. 셋째,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 무덤을 옮기는 작업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 세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옮긴 무덤의 위치를 알았고 무덤을 함부로 옮기 지 못하도록 돌로 막아놓았다. 그 무덤 역시‘바위 속에서 판 무덤’이라고 하는 새 무덤으로서“그리스도의 묘실”이라고 불렀다. 실제 그 무덤에는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45
큰 돌로 입구를 막기도 했다. 마태복음에는 돌문을 봉했다고 적혀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면? 가공과 추출을 위해 다른 책에 서 참고할 수 있을까? 물론 부활을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들과 연관코자 하는 자들을 책에서 어렵게 만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찾는다면 수 많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부활했다고 떠들어댈지 모른다. 에릭 호넝Erik 은Hornung 신화를 거들먹거리며“의기 양양한 그 극점에 도달 하여 이시스와 헤르메스Hermes의 승리 확산이 이집트의 지혜로 알려진 이 야기들에 흠뻑 빠져들어 남았고, 비록‘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의Trismegistus 6 권위를 이용했던 클레맨스Clement와 터튤리안 Tertulian, 150-230 과 함께 시작된 초대 교부들 이the early Church fathers 여전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승리를 매우 늦추게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헤르메스는 부활의 존재로 나타나기에 그러 하다. 그 신화는 예수의 부활과 연관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신화 속에 등 장하는 다양한 존재들 가운데 대못과 창에 꿰뚫려 나무에 매달린 그들의 부활과 예수와는 어느 정도 연결 시킬 수 있을까? 이들의 신화와 영화들의 모티브가 된 예수 추종자들이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 가공물인‘예수의 부 활과 승천’과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독교에서 파생된 부활 사상은 이미 유대 사고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 앞에 죽음도 불사하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은 채‘죽음에서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유대 전통의 죽음과 사후 에 대해 독특한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보편적 혹은 자연적인 죽음이지만 죽은 자의 몸이 영혼과 언젠가 재결합하기 위해 무덤에서 일어나 우주적인 공정성에 띠를 두르고 마침내 균형을 잡을 것이 라는 의식은 지배적인 듯 했다. 『On the Posterity and Exile of Cain(가인의 유랑과 그의 자손 - 지은이 446 버려진 예수
역주)』의 저자 필로 유다이우스 는Philo Judaeus, 20 B.C.- 50 A.D. 알렉산드리아의 유태 계이자 신학자·그리스 철학자이다. 그 책에서 필로는 창세기 강해를 언급 하는 그런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시킨다. “그런고로, 레메크 Lamech 7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에 관하여 나는 충분 히 말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신뢰 를 배신한 죽음을 가졌던 아벨Abel 8의 부활에 내려다보는 것이다. 모세 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일으켜 주셨다 함이며’(창 4:25). 셋이라는 이름의 번 역은‘관개’irrigation라고 한다.”9 유대인들은“일으켜 세워준다”rise up 라는 문장이 들어가 있음으로, 그렇 게 자신들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활 사상은 집단적인 성향으로 자신들 전부가 언젠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부활할 시 점에 이르러 무덤에 안치된 죽은 자들, 게다가 동시에 살고 있던 자들을 포 함하여 모두가 함께 죽음에서 일으켜 세울 놀라운 시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대 시대는 어느 나라건 부활에 대한 근거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던 것 같다. 또한 반대적으로 부활에 대 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춘 사두개인들은 죽음 이후에 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부활에 대한 시각을 부인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 부활에 대해 놓치고 있었다. 요세푸스는『유대전쟁사』의 저서에서 유대종파들 중 사두 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견해를 대신 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종파인 사두개인들은 운명을 철저히 배척한다. 하나님은 세상 제 10 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47
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어떤 면에서는 악과의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 거나, 또는 단지 방관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각자의 의지에 따라 정해진 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영혼의 사후불멸과 저 세상에서의 상벌 사 상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10 신화 속에 등장하는 부활, 유대인들의 부활신앙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 이 혼합되어 만들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합적으로 비교한다면 그려진 이미지는 비슷하다고 할지 몰라도 그 연관성에서는 남다르다. 허무 맹랑한 곳은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의 부활은 그 어느 모티브로 모방할 만 한 연관성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보다는‘신의 부활’혹은 ‘신의 내려옴’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다양한 색체를 가진 예 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지극히 현실 세계에서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 유 일신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허무맹랑한 신들 속에서 진주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고, 거센 풍랑과 성난 파도와 같은 잔인한 폭군의 정치와 학대와 박해 속에서도 태양빛에 찬란한 햇살처럼 하루 꼬박 계속 비추고 있었고, 심한 요동은 고사한 채 잔잔한 물결처럼 조금씩 출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활의 믿음의 폭과 넓이는 상당히 깊었다. 이들에게는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부활과 같은 면에 추호도 관련이 없 다. 만약 신화를 믿고 그 사실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음으로 자신의 치부 를 드러내면서까지 발버둥치는 잔인한 형틀과 고문 속에 신화를 거부하지 않는 허무한 자가 과연 존재할까? 신화적 요소를 가미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어 도 그들을 비롯하여 당시 대다수 유대들은 가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래적인 시각을 보았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부활 448 버려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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