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ortant Announcement
PubHTML5 Scheduled Server Maintenance on (GMT) Sunday, June 26th, 2:00 am - 8:00 am.
PubHTML5 site will be inoperative during the times indicated!

Home Explore Abandoned Jesus (버려진 예수)

Abandoned Jesus (버려진 예수)

Published by Billy Lee, 2021-12-01 17:55:44

Description: How to be abandoned Jesus from his people

Search

Read the Text Version

사실 이 말은 이미 구약시대 다윗이 쓴 것으로, 이는 성경학자들의 공통 된 의견이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아는 사실이다. 이 시편을 쓴 저 자 다윗에게서 인용한 구절로 그 저자의 아름다운 시들 중 유대인들은 익 히 알고 있는 시편 110장 1절이다. 유대인들은 유명한 이 메시야 예언을 가 리키는 아름답고 독특한 시로 평가되는 구절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구절 은 이들이 과거의 상상하며 기다리던 메시야의 도래를 갈망하는 증거 중에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예수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호와 야훼는 다윗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그리하여 하늘의 아들과 같은 권세를 받은 신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급기야 그리스도에게 왕권과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 리는 모든 것을 허락하시어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죄 용서까지…. 유명한 종교개혁자 중 한 사람인 칼빈Calvin은 이 본문을 두고서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정도로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메시야를 넘어 세상을 창조한 신의 존재와 동일한‘주’라는 표현으로 다윗의 자손을 넘어 또 다른 차원으로서 신의 레벨을 의미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예수는 이 구절을 가지고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다윗은 메시야를‘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자신이 결국에는 신과 같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유대인들을 분노와 죽음의 격동에 몰고 가고 있는지 예수는 몰랐을까? 자신의 제자들과 가족 들, 그리고 자신을 그토록 찾았던 메시야가 또 다른 찬란한 영광의 한 장면 인‘신의 대리인이자 신이며 그 역사의 죽음이라는 마지막 열차를 타고 있 는 자’라는 끔찍한 사실 앞에 서 있는데도 말이다. 예수는 지금 이 구절을 토대로 다윗이 그리스도를‘주’라 하였으므로 그 러한 사유로 인해 메시야가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을 종료하고 있었다. 그의 말로 인해 밝히 드러내고 있는 것은 자신에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49

게 메시야 호칭을 붙이는 것에 거부하는 시위를 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제 부터는‘신’이라는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결국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지 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예수가 여러 사람들에게 다윗의 혈통임을 나열한 것이 모두 거짓이며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가? 그래서 다만 시편 찬송의 시를 통해 자신은 사람의 왕의 후손 이 아닌 하나님의 진정한 후손임을 밝히 비추고 있는 시점으로 보아야 하 는가? 현시점에 있어서 인간의 몸을 가진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럼에 도 이 땅에 사는 인간하고 차원이 다르지 않다는 극한 대립에 휩싸이게 된 다. 지금 말하고 있는 예수 앞에 서 있는 자들은 진정 미친 자를 보고 있던 지 아니면 진정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예수는 신으로 이 땅에 내려와 지금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만인들 앞에서 그는 사람의 왕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자 진정한 하늘의 왕, 곧 신들 중의 신이라고 고 백하는 대목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 말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다. 당연히 우 리 현대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 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이들은 놓치지 않 았고, 신을 진정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 과학과 종교의 마찰로 인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는 부러워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몇 명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몇 세대 이상을 기다 렸던 왕이자 그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우리 자신들이 생각했던 바와 다르게 진행되는 사실을 보고 있어야 하는 자신과 또한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초라한 자가 신이라니! 오랫동안 이 땅의 통치자 모습으로 나타나길 기다린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허름한 옷과 떨리는 목소리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이며, 게다가 검은 색 혹은 다른 색의 눈동자를 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 250 버려진 예수

다. 그런데 그 생각과 사상에 상관없이 그의 주위에 모여든 유대인들과 이 방인들, 즉 로마의 피를 부르는 통치 앞에서 떨고 있는 이들에게는 실망 위 에 실망으로 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초라한 자가 신이라니! 위에서 난 자? 신? 신god 혹은 신들gods이라는 주제를 가진 책들은 엄청나게 나와 진열되어 있 지만 신과 예수에 관한 연관성 있는 관련된 책들은 잘 찾아 볼 수 없다. 그 러던 중 한 책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나는 자그마한 단서 속에 담긴 충 분한 예수의 사상과 논쟁의 결과를 주목하게 되었다. 한 무신론자가 과거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펼쳐 보인 글의 한 대목을 들어보자. “예수도 자기가 하나님이라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않는가? 그는 단지 혁명가요 현인이요 인습 타파를 주장하는 유대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는 결코 그 와 같이 생각한 적이 없다! 신뢰할 만한 많은 대학 교수들이 그와 같이 말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을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충의 증거 조사로도, 예수가 비록 특별한 친절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지만 바 로 당신이나 나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세대가 지난 유대인들도 아직 유일신 사상을 믿고 있으며, 현존하 는 다른 어떤 신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유일신 하나님은 영원히 이 땅 에서 볼 수 없는 존재이며, 더 나아가 극히 일부만이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 었다고 보고 있다. 진정 그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만난 자는 없다고 한다. 당연히 모세도 하나님의 등만을 보았다. 유대인들 혹은 오늘날 사람들이 신적인 존재로 부각시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여 돌에 맞아 죽을 어리석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51

은 존재도 별로 없을 줄 안다. 어찌하든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날 살아가면서 실 제 아무도 그런 존재로 이루어진 역사를 만든 것이 없고 그렇게 생각지도 않는다. 과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거짓말이며, 그것은 그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를 위해 모이고 믿어야 할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누구나 다 예수를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하는 여러 사건으로 유대인들의 땅을 흔들게 만들었고, 아니 더 나아가 세상의 온 나라를 예수 한 명으로 인해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최초이자 마지막 자로 역사에 한 획을 기록한 자는 예수, 바로 그가 아닌가? C.S. 루이스가 생각하듯이 나 또한 그와 같은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했 다. 예수는 자신을‘신’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그는 미쳤다고…. 다른 생 각을 넣는다면 율법에 허점을 낱낱이 파고들어 자신을 신으로 만든 치밀한 계획을 만든 자! 그에 의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살아간 훌륭한 자라고도 이 해할 수 있다. 또한 로마시대 수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최고의 웅변가여 서 이러한 상황적인 처세술에 능통한 자라고! 신과 같은 존재일 것 같으면 서도 진정한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론과 견해를 지적해보아 역사적으로 예수가 미쳤다고 한 것은 우리가 처음은 아니다. 예수가 망상에 빠진 듯 혹은 그가 정신이 아닌 미친 자같이 취급한 것은 성경에서 맨 처음 언급한 사실이다. 그것은“귀신들려 미쳤다”37고 최초로 말한 사람들은 당시 유대인들이었다. 심리학자의 견해로서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은 뭐든 의심하는 것이 있다 고 한다. 자신을 괴롭힐 것 같다고 하면 울거나 도망치고 혹은 화를 내어 스스로 방어한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그러한 것을 찾아보기는커녕 오히려 늘 침착하고 조용하고 겸손한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 이제 그것을 넘어섰다. 예수는 그들 속의 마음을 확신하여 그에 대한 대 252 버려진 예수

처응급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인간 본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과 추리력이 아닌 실제적인 상황을 유도하여 편집증적이거나 다혈질적인 심리적 불안이나 그 어떤 병적인 상황도 살펴 볼 수가 없다는데 놀라울 따 름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타인과 대화하는데 장애적인 요소, 즉 이상한 옷차림으로 나타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 이션이 잘 흐려진다든지 그런 요소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부류 의 사람들과 대화하였으며 부자, 천한 자, 심지어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대화를 훌륭하게 이끌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를 두고 배운 자같다고 했 다. 이러한 몇 가지 궁금한 요소를 제외하고도 예수가 신인지에 대한 불투명 속에 아직 많은 의구심이라는 요소로 불안하다. 미스터리적 혹은 신화적 상황에서 처음 궁금하게 묻고자 하였듯이 아직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마 리를 풀지 못한 채 세상은 예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 게 이런 논쟁의 도마에 오르는 최초의 인간이었기에 아마 금세기 앞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그는 지워지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오면서부터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로 인해 신과 인간 의 존재에서 멀어지지 않게 됨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머나먼 제국이 아닌 우 리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존재들에게 그 어느 신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지구상에 모든 생물과 동물, 그리고 심지어는 사물까지도 인간에게 둘러싸여 존재하는 평범한 존재인 하나님이 예수가 되는, 즉 범신론적 상 황으로 벌어지는 것까지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남겨야 할까? 왜냐하면 하나님 말고도 예수가 신이라면 다신론에 빠지기 쉽게 이루어진 수학 공 식이다. 신이 한 개가 아닌 두 개 이상일까?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신이 된다니…. 그것도 둘 씩이나! 과거 예수 시대를 기점 전후로 다시 생각해보자! 예수 탄생 이전에 대부 분 사람들의 생각은 알다시피 이렇다. 신 혹은 신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머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53

나먼 우주의 자기 영역에만 행복과 삶을 추구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던 반면 오늘날은 너무 신을 가까이 한 나머지 신의 존재를 인간 속에서 가끔 나타 나는, 그나마 너무 친근한 나머지 신의 정체성이 경외감이나 영적인 어떤 존재에서 심령마술이나 혹은 명상, 개인 신성의 발견으로 다가오는 희한한 (?) 모습과 형태로 인간 각자의 내면 속에 침투하여 발전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신의 존재에 대해 무의미를 논하며 예수를 인간 중 한 명에 불과 한 다윗 왕조의 후계자로 남아 있을 법한 설로 우리를 현옥시키고 있다. 그 리하여 신을 마치 시시한 미신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깎아 내리며 그리스 ∙로마시대에 있었던 신들의 형상과 존재를 지금도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 을 받아들인 것으로까지 해석한다. 더불어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의 메시 지는 그들의 절대적인 유일한 야훼 신의 얼굴을 먹칠 하는 사태로 번지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말하는 바,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38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자신이 하나 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며, 또 그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서 온 것이라고 하는, 위에서 난 자에 대한 분 명한 선을 긋는다. 하늘에서 난 출생지를 알리고 있는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있으나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자들은 그를 볼 때 자신의 육체적인 아버지, 곧 요셉에게서 출생한 것을 서로 안다. 그런데 신이 불러서 왔다? 그 메시 지에 있어서 하늘의 뜻이 분명히 다르게 진행됨에 조마조마하게 된다. 그 렇기에 그를 오히려 땅의 왕으로 받들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처럼‘하늘 로부터 온 왕’, 즉 하나님의 아들로 남으려는 그를 나와 현대인들은 매몰차 게 버린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하늘의 보좌에 앉을 날만 애타게 찾는 것 이 더 중요하고 명예와 부와 같은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겨우 그런 먹 이감을 찾아 다니는 한 마리 새처럼 그런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하늘에서 온 자는 전혀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254 버려진 예수

세상이 그를 인정하든 안 하든 자신은 모든 일에서 합법적인 하늘의 일 을 추진하려 하지만 번번히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사람들의 마 음의 발에 밟히곤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똑 같은 자녀임과 동 시에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자 신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충만 함에도 오히려 그를 사지로 내몰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 구원하라고 주신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하늘의 아버지가 참되고, 그가 살아계심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 하늘 에서 주신 놀라운 능력을 통해 고침과 기적을 행하면서 직접 몸소 보이게 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 것뿐이거늘…. 예수가 소지한 마지막 비장의 무기인 희생 재물인 죽음의 제사로 인류의 아픔과 고통의 무한한 죄를 대 신 지는 것으로 마감해야 하는 사명! 그것을 잘 이해 못했던 유대인들은 하 늘의 뜻과 땅의 뜻을 동조하여 이루기 위해 그에게 죽음과 고통의 공포를 체험하게 만든다. 게다가 예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기만 하였을 뿐인데도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조롱하였다고 자신은 늘 자신들을 보러 몰려온 자들에게 그렇게 세뇌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자신이 세 상에 속한 것이 아님 같이 자신을 버린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강 조했다. 그 고백을 통해 예수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버린 세상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넌지시 비추고 있었다. 그를 버리게 된 원인이 신이라는 무한한 영역, 우리와 별개로 여겨져 왔 던 나와 상관없는 존재로 여길지도 모른다. 예수를 역시 그런 존재로 치부 하여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이지만 쉽게 유추하고자 내·외부적인 문제 로 끌어내리는 그런 비참한 결과를 극구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문제가 나 의 신앙에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며, 교회 내외의 문제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 교회와 교회 기독교인들까지 등지게 된 경우임에도 어찌 인정하지 않 을 수가 있는가? 세상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 격렬히 비판하고 조롱해도 어찌 보면 신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55

이라는 존재는 꿈쩍하지 않는다. 당연히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이 자신을 조롱하는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 자신의 말 한마디로서 세상을 쥐고 흔들 면 더 이상 세상은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존재의 여부가 결정짓는 열쇠라고 해도 신이라는 존재의 다른 영역에 사는 신적인 존재가 자신의 보좌에만 앉아있다면 오늘날 신이 이룩하려고 하는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 다. 실제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음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력에 해당하는 사상으로 우리는 세계를 신의 손 으로 움직이려 하는 것에 참으며 인내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손으로 세상 을 움직이려는 인내심 없는 존재로 부각시키게 됨으로 신의 손이 더 절실 하게 만들었다. 최초로 선택 받은 유대인들이나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선물을 거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모두가 신의 눈으로 볼 때, 특별히 다른 것은 없으며 이 들도 별수 없다는 생각 뿐이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의 헛된 바람과 비리에 예수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듯 오늘날도 똑같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난 율법을 계속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하고, 게다가 영적이지 못하여 단면만을 보는 육체적인 판단을 한다는 따끔한 해석을 내놓는 대목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디서 온 존 재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철저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 리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높은 직위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 들, 이들이 자칭 하나님의 참되며 의로운 자신들에게 예수는 이들이 어디 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어리석은 내면의 창을 열어주 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바다 위의 배처럼 어리석고 방황하 는 유대인들과 우리들을 보면서 진정 바다의 주인이며 또한 항해 지도, 그 자체로서의 예수라는 지도가 필요한 자는 우리 모두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256 버려진 예수

자신을 이해하고 따르는 자들에게만 하늘의 보물을 펼치는데 주력하고 지 도하고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하늘의 보물과 항해할 수 있는 지도를 이미 주었 다. 그것은 신약이 존재하기 전, 구약 전체에 해당하며 하나님께 향하는, 그런 구미에 맞는 토라와 선지서, 게다가 성문서까지 받았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창세기부터 기점으로 신명기의 유래에서 시작되었음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고,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들 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지도를 펼쳤기에 어려움을 극복하곤 했 다. 그러나 제일 처음 받았고 누렸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사자, 즉 선지자나 예언자의 말에 청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까지…. 특히 신명기 19장을 보면 두 세 사람의 입을 통하여 증인을 세울 수 있으 며 위증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서라 는, 현대인들이 누리는 법원의 형태로 재해석할 수 있다.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죄인, 증인, 변호사와 판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상황에서 예수 는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제사장 앞에서 변론 혹은 변증하곤 했던 모 습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증인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 님의 정의와 뜻이 올바르게 서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벗어난 헛된 거짓 예언이나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충고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만약 우리의 목전에서 누군가가 유일한 하나님의 존재임을 매년 그리고 몇 세기 동안 그렇게 믿어 왔건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하늘에서 왔으며 그래서 자신이 신이라고 당신 앞에서 어느 사람이 당당히 말한다면 그 사 실을 어느 누가 믿겠는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를 증인석에 앉히거나 재 판에 앉혀 그 사실을 입증해야 하듯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다 대는 예수를 심판대 앞에 세워야 할 것이다. 오히려 유대의 반로마 저항운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57

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메시아적 지도자였다고 알려진 바 코흐바Bar 같Kochba 은 자가 오히려 별의 아들, 즉 메시아로 환호한 아키바Akiba라는 위대한 랍비 에 의해 그는 1세기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되었음이 예수의 사역과 행적에 비교된다. 추대는 고사하고 예수는 신성모독이라는 역적으로 하늘의 신이 인간에게 처절히 목숨을 빼앗김으로 억울하게 당하는 역설적 상황으로 내몰린다. 자 칭 예수와 동일시하는 일련의 메시야로 불리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여러 단체들과 집단이 엄연히 있는 유대 시대와 현실 앞에서 많은 거짓되고 허 황된 영웅들도 존재했다. 반대로 예수 사후 수세기가 지난 어느 영웅도 실 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와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의 정 신력과 의지력에 감탄하고 있다. 역사를 뒤져서 비교해 볼 때 그와 같은 모든 것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을 정도로 비범한 그의 능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자가 많다. 그렇지만 예수 를 놓고 극단적인 상황 가운데 놓인 오늘날에 현대인들처럼 유대인들도 비 범한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는 데에선 극도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예수의 추종자들은 유일한 여호와 야훼 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유일신에 대해 극도의 존칭을 아낄 정도로 존경과 칭찬을 불어 넣었다. 존엄하고 다른 세계에 영역의 존재이자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신의 존재로 무한히 박혀 있는 그들의 머 리 속에는 감히 하늘에 존재하는 유일신, 그분을 이 땅 위에 끌어내리려는 예수가 미웠을 법하다. 예수는 자신을 둘러싼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자신의 양이 아니어서 믿지 아니하며 자신의 양들은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고, 그 양들에게 영생을 주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양들에게 주신 아버지는 세 상 그 어떤 것보다 크다고 하면서 결정적으로“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39 라는 말을 거론하자 신적 모독으로 생각되어 돌을 들고 예수를 죽이려고 258 버려진 예수

하기에 이른다. 이 장면은 마치 차갑고도 선명한 크리스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수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인 이스라엘은 모세오경 전체를 율법으로 치켜세우며 세상의 중심을 단 하나의 여호와 유일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 들로 보았다. 그런 모세의 법을 통해 그들은 예수를 심판한 것이다. 나와 함께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리도록! * ** 유대인이었던 예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선포한 신이라고 한 경우 를 살펴보면서 유대인들이 그에게 행했던 잘못된 과거사를 들춰내었을 때 는 씁쓸한 기분이 맴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 았을까? 시편의 저자는 당시 유대인들의 재판장들을“신들”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보아 신을 자칭하고 다녔던 것 같다.40 여호와 야훼라는 신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일이나 난해한 질문들 의 재판을 하였던 것으로, 신이 창조한 인간들 중 선택된 일부가 재판관이 되어 자신을 하나님 아래의 대리인이자 신들이라고 불리었던 것을 빌미로 그 어느 날, 예수는 자신이 신격화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들이 밀고 있었 다.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다. 그는 마치 재판관이자 인간이 신의 대리인, 즉 그들이 더하기는 스스로 를 신이라고 불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신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반문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칭하였거늘 내 말을 가지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대목을 거론하면서 유대 인들에게 오히려 따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예수가 반문하기를“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나를 믿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는 기적과 치유의 행함은 믿으라 그러하면 유대인들 마음 속에 아버지께서 함께하고 예수 자신도 하나님 아 버지 안에 있으니 깨달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41 이러한 말에 오히 려 지도자이자 바리새인들은 등을 졌다. 그러나 오히려 요단 강 세례 베풀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59

었던 곳에 모인 자들은 예수를 행한 표적과 기사를 보면서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시적인 자들이지만…. 만약 하늘에서 허락했다면? 그것으로 예수를 단지 하나님 자신이라고 단 정하는 것은 아직 결승전에 골인하기도 전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 이상한 경기의 결말적 상황처럼 그렇게 보기에는 아직 이른듯하다. 또한 나중에 살펴볼 것으로, 죽은 후 삼일 만에 부활한 그것 하나로만 가지고 신성이 있 다고, 그를 신으로 하나님과 동일시하기에는 역시 뭔가가 부족하다. 『예수는 역사다』로 유명한 리 스트로벨의 저서에서 의거 역사적 예수, 포 스트모더니즘, 그리스어 문법 그리고 사도바울과 요한의 신학에 전문적으 로 다루고 있는 분야의 박식한 도날드 카슨Donald A. Carson박사는 예수의 말과 행동에 따르는 그러한 결정적인 증거로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확신이 너 무 부분적인 생각이라고 토로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이유로 들겠지만 예수님 아닌 다른 사람 들도 기적을 행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암시해 주기 는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못 됩니다. 물론, 부활이 결정적으로 예수님 의 신성을 입증해줍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뚜렷한 증거는 그분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42 카슨의 말을 유추해보면 그는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몇 가지 불 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던 점 중에 하나는 유대인들의 상식으로 도저히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는 유일한 권한이 예수에게 있다는데 자 신들은 오래도록 분개했다. 그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상황과 판단으로 볼 때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권한이 누군가에게 유일하여 구약 의 초점이 그에게 맞추었다고 가정해볼 때, 만약 예수가 그런 존재라면 이 제 그는 메시야를 넘어서 이제는 죄를 사해 주는 하나님의 권한을 승계 받 260 버려진 예수

았거나 혹은 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명제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통달할 정도로 박식한 유대인들에게 신적 모독을 감행하는 예수의 모든 총체적인 말과 행동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 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면? 그렇다면 예수가 과연 하 나님의 아들인지, 혹 신과 동일시해도 괜찮은지…, 우리는 그가 메시야임 을 거부하고, 그것을 초과하여 넘어서 예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주는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하게 폭로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신으 로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받아 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죄가 없다고 한 대목과 마찬가지로 병든 자를 말 한마디로 쉽게 고치는 그에게 과연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겠느냐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그가 바로‘하늘에서 난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다른 것 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과거 역사적으로 가장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도 자신의 허물과 아픔 그리고 분노와 저주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벗어날 수 있 는 자는 없었고,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에 목말라 했다. 그들의 죽음까지 더하여…. 카슨 박사의 말처럼“예수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 하고 싶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를 두고서 그가 신의 존재인지 아닌지 묻는 다면? 예수가 말하는 바, 즉 그 어느 누가 얼굴을 반듯이 쳐들고 감히‘너 희 중에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는가?’,‘나에게는 죄가 없다’,‘죄를 사하 는 자는 자신뿐이다’,‘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자이니라’라고 감히 선포할 자가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실제 하늘에서 허락하였느냐고! 나름대로 신약 네 개의 복음서를 종합해 볼 때 단 한가지 사실로 인해 요 약할 수 있다. 부활한 것으로 예수를 신으로 결론을 낼 수 없다고. 즉, 그렇 게 결론을 내린다면 혹은 죽은 자가 살았다고 해서 그를 유일신인 하나님 으로 모신다면 오히려 죽지 않고 산 체로 올라간 엘리야, 죽지 않고 하늘에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61

살아 있다는 하나님의 품에서 임종을 받았던 모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또한 나사로나 성경에 나오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하나님으 로 승격화되어서 이들에게서 유일신이신 하나님이라고 찾아야 할 것인가? 물론 죽은 자가 살았고, 추후에 그가 다시 죽음을 피하지 못한 자라 할지 라도 그들에게는‘부활’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계속 살지 않고, 아마 목숨을 다하고 죽었 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아닐지라도 이제 더 이상 유일신 개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살린 자들을 그와 같은 개념으로 모두 신 격화 해야 하며 인간성과 신성을 두루 섭렵한 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물 론 인간을 신으로 생각하는 자도 부지기수지만…. 그렇다면 유대교들도 모두가 신으로 추대되어 마땅하다. 구약 시대에 모 세가 백성들을 향하여“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은신 이가 아니시냐?” 43고 말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아들이자 하나님 은 유대인들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버 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자손이며 신의 대리인으로 은총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고 가정해도 우리가 그들에게 문제를 삼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유일한 독생자라는 예수의 사상과 맏아들이라고 언급한 바울의 메시지도 함께 거론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수 많은 아들들 중에 한 명을 택하여 세웠고,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가 죽고 살았다면? 그 외의 아들들은 아직 부활한 자가 없다면? 아직 부활의 현실 앞에 그 놀라운 사건들이 아직 도달되지 않은 채로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은 후 모두 부활할 것이다. 그렇게 신약의 저자들이 언급했고, 그것을 굳게 믿는 유대인들과 우리들의 미래에 있을 믿음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부 활을 그들은 원하고,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나사로의 죽음 앞 262 버려진 예수

에서 나타난 예수에게 마중 나간 마르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어찌 보면 부활은 예수만의 소유물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그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듯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소리보다 오히려 우 리 모두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고 문제는 시기가 오랫동안이냐 아니면 예수 처럼 짧은 순간이냐가 우선 첫째다. 중요한 것은 예수만이 자신의 소임을 다한 후 죽음으로 인생을 맺었고, 그로 며칠 후 부활해야 할 최초의 특권을 혼자 누린 셈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길 예수를 두고“부활한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44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부활을 보고서 그를 신으로 섬긴다면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기에 우리 모두가 이미 신이고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는 이미 죄 없는 깨끗한 하 늘의 백성으로 남을 것이다. 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예수를 믿어서도 안되 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는 것으로 족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 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할 수가 있다. 부활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나중에‘신’이기에 그러하다. 결국 부활이 하나님 자신이 되겠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숲의 일부분인 낙엽을 보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부활을 알린 예수가 낙심한 제자 들에게 자신의 부활 후에도 하늘로 바로 올라가지 않았고, 그 동안 알고 지 내던 자들을 찾아와 사십 일 동안 자신이 실제 진정한 구원자 혹은 메시야 이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낸 것은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또한 부활은 이런 제자들의 낙심하고 좌절하였던 사고 과정을 다시 돌리는데 아주 결정 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부활 자체로 혹은 부활만으로는 예수가 신 적인 존재임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부활과 메시야, 그리고 예 언들 각각 독립적으로만 가지고서 우리는 예수를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한 계가 있으며 잘못하면 모두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배 위에 존재하 는 자들처럼 불안한 삶의 연속이 될 수도 있다. 성스러운 예수의 육신과 그의 부활에 대한 신비는 이제 별도로 각각을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63

연구하고 나누어야 할 문제가 아닐 듯 싶다. 모든 신앙 고백서들에서 예수 님의 신성과 인성은 분명히 구분되어가려 하는 모습을 띄고 있지만 양자적 인 이론은 하나의 인격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연결고리적 상황으로 개별적 이면서도 종합적인 결합을 띄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인간적 예수를 과연 신으로 두는 문제를 가지고 앞에서 나열한 여 러 가지 각각에서 종합적인 관점으로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 래서 곧, 숲 안의 나뭇잎으로만 보는 것에서, 또한 숲 그리고 거기서 벗어 나 전체 우주를 살펴보듯 구약사상과 예수의 메시지 그리고 예수의 제자와 초기 기독교 사상 속에서 그 모든 것에 우리는 그 진실을 캐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포함하여 예수의 행적과 그의 말 한마디에 주목하여 야 할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밑그림에 대한 필요성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 다. 예수는 자신을 구약에서 나타난 장막으로 표현하였고, 그 자신이 바로 자기 백성 안에서 거하는 법궤로서 자신의 영광과 신비를 자신 안에 간직 하듯 거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자체로 본다면 그가 성전 자체였기에 이 제 청년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한 발짝 다가선다. 과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번재물과 속죄의 나음을 입는 성전이 이제 성전 그 자체로 여기게 되는 구원자 예수로 우리는 새롭게 그에게 다가서 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성전은 존재치 않음과 동시에 예수가 바로 성전이며 그안에 거한 모든 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었고, 사함을 받았기에 그를 하나 님의 진정한 아들로서 인정하며 그를 신으로 대우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기 에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은 하늘에서 허락했기에 그 결론은 자명하다. 추후 A.D. 70년 경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마지막으로 붕괴되는 시 점에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물론 그 때에 그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 에게 화살을 돌린 자들도 있었다). 어째든 굳이 자신의 입으로 하지 않아도 264 버려진 예수

그가 했던 행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들을 모두다 보았던 자들은 수 많은 생 각을 했을 것이며 예수 또한 자신이 말한 것처럼 하늘에서 왔기에 하늘로 올라갔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나라의 범주 가운데 이 땅에서 치유와 고 침 그리고 인류의 죄 사함의 병행적 사건으로 이미 그는 자신의 신분을 차 례차례 노출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이 참이기에 유대인들은 인간이 신으로 된 것을 두고 볼 수 없 었다. 이 또한 죽음도 하늘의 뜻이었고, 나중에 유대인들과 예수 추종자, 이들은 그 사건을 알아 버렸다. 더불어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은 예 수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수는 인간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것인 부활, 기적miracle, 표적sign, 병 고 침, 구원, 죄 사함, 가르침 등에 우리가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 그의 관점 에선 그냥 그 자신의 특징이자 성격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중점을 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소명과 자기 자신의 이해로서 그가 죽기 전에는 몰랐던 그의 행함과 사역 이라는 모든 것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받아들였으며 이해를 가지고 이제 는 대부분 소화해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우리만의 소유물이 아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예수와 같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 이제 자신을 향해 구원자라고 예 언하며, 태어나서는 아기 때에 자신을 만난 동방박사들의 경험과 목자에게 나타난 예언으로 어른들이 아기를 경배할 수가 있게 만들 수 있겠는가? 또 한 이제 그가 어른이 되어 세례를 받을 때 주위에 모인 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이 열려 이는“내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라고 하늘에서 외치게 되는 그 경험을 할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병든 자를 고치 며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저는 자를 걷게 만들고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면 서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게 만들 수 있겠는가? 또 자신이 신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65

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면서 사단의 엄청난 금은 보화 그리고 세상 을 통치하는 명예를 준다고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과연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죽음으로서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신적 모독으 로 죄인 취급을 받고 모두에게 좋은 것을 선사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할 수 있겠는가? 죽음 후에 당신이 며칠 만에 동굴에서 돌을 굴러 부활할 수 있는 자신이 있겠는가? 다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 자신을 생명의 떡, 생수 또한 빛으로 나타내어 하늘로 올라가서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 을 주겠다고 단언하게 말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만들 수가 있겠는가?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며 그를 이방인의 빛으로 삼 겠다는 놀라운 선포를 할 정도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죽 음과 부활의 정확한 기간이라는 시점에 의해 예루살렘 성을 단 삼일 안에 무너뜨린 것을 세운다고 자부하여 나중에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예루살렘 이 진정 이제 무너져 더 이상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죽음 직전에“다 이루었다”라고 혹은 스스로 죽음의 잔을 마시고도“어 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늘을 향해 외칠 수 있는 베짱이 있는 가? 죽음과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까이 위치한 몇 센치미터가 되는 두꺼운 길이의 성소 휘장을 두 개로 갈라놓을 정도로 엄청난 일을 만들 수 가 있단 말인가? 수백 아니 수억 명이 당신 때문에 매일 음식을 때면서 기 도하고 당신을 위해 하루에 몇 번이고 예배 드리며 주일마다 매일매일 참 석하여 당신을 위해 예배와 헌금을 드리고 가난한 자에게 위로와 자비의 힘,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죄에서 해방을 진정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 전 세계가 당신을 주목하여 더 이상 당신 이외에 진정한 신이자 인 간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커다란 영적 세력을 등에 엎고 있는가? 진정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엄청난 일들이 과연 하늘에 올라가 하나 님 앞에서 당당히“내가 당신의 아들이었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266 버려진 예수

다 했으니 나에게 당신의 옆에 앉을 권세와 부를 주어지게 해달라!”고 당신 은 고개를 들고 당당히 하나님에게 물을 수 있는가?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67

▐ 6장 미주 ▐ 1.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 가?”, 김영사, 이한음 옮김, 2007, p147. 2.  누가복음 7장 18절의 헤세드 레마 주석 참조. 3.  마가복음 6:20. 4.  혹자들은 예수의 사역이 태어날 때 비로서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의 신학 학자들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 최초의 사역을 시작하는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고 견해를 내비친다. 5.  누가복음 7장. 6.  누가복음 7장 19절을 참고하여 의도에 맞게 바꾸어 보았다. 7.  요한복음 3:35. 8.  요한복음 2장 29-34절의 본문을 각색하여 인용하였다. 9.  누가복음 7:22. 10.  마태복음 15:31. 11.  요한복음 5:29. 12.  누가복음 8:30. 13.  누가복음 7:32. 14.  누가복음 8:27. 15.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박은주 옮김, 2008, p139-147. 16.  요한복음 14:7. 17.  데이비드 다우닝,“반항적인 회심자 C.S. 루이스”, 강주헌 옮김. 18.  마태복음 12:6. 19.  마태복음 12:8. 20.  마태복음 11:20. 21.  마태복음 11:27. 22.  요한계시록 22:16. 23.  마태복음 13:35. 24.  마태복음 13:55. 25.  마태복음 22:41. 26. 마가복음 6:13. 27.  마태복음 12:24. 28.  크레이그 키너,“IVP성경배경주석(신약편)”, p314, 요한복음 4:7 주석 참고. 29.  요한복음 4:7. 30.  요한복음 4:18. 31.  요한복음 4:22. 32.  요한복음 4:25. 33.  요한복음 4:26. 34.  갈라디아서 1:19. 35.  마가복음 12:35. 36.  헤세드 레마 막12:35-37 원어로 직역한 부분 해설 참조. 37.  요한복음 10:20. 38.  요한복음 8:47. 268 버려진 예수

39.  요한복음 10:29. 40.  시편 82:6. 41.  요한복음 10:37-38. 42. 리 스트로벨 지음,“예수는 역사다”, 두란노서원, p 206 참조. 43. 신명기 32:6. 44. 고린도전서 15:23. 제 6 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69



제 7 장 바실레이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요한복음 18:30 - 로마의 나라가 파괴되기에 최적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날 것이다. - 미드라쉬 - 그리고 그분, 일전에 경건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율법을 주신 그분이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위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 … - 시빌의 신탁집 제3권 -

지도자와 그의 나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외교관이자 정치이론가였던『군주론』 의 저자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 ~ 1527는“천국에 가는 가장 지름길 방법은 지 옥에 가는 길을 반드시 숙지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의미는 무 릇 통치자나 지도자의 길은 멀고 험하여 진정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곳 이 지옥이라도 상관없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어느 곳이 지옥에 떨어지 는 길인가에 숙지가 필요하고, 또한 그 사실에 몸소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 한다. 그곳에 대한 상식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곳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는 실패한 지도자라고 말이다. 지옥을 숙지하는 각오가 없다면 지도자의 몫은 그만큼 적어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에 커튼 사이로 안과 밖이 존재하듯 지도자의 선택에 찬 성뿐만 아니라 반대는 늘 달고 다니게 되는 것이 오늘날 경영자 혹은 정치 분야를 비롯한 모든 분야 각각의 지도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래서 지도 자는 언제나 욕설을 당하고 악평을 받아먹을 각오를 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안티 크리스트』의 저자 니체 역시“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약함에 서 나오는 모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훌륭한 존재로서 인간은 강 해져야 산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무익한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낙인 찍 는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어찌보면 나약한 인간들의 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룩하면서도 힘이 없어 축풍낙엽같은 언약한 존재다. 예수 또한 자신의 길을 가는데 나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지도자로서 그의 길에 장애 가 없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키아벨리가 언급한 말의 근본적인 뿌리를 제 공한 셈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니체가 주장한 어리석은 그리스도인 중에 예 수는 그 대표자다. 그럼에도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현상 을 전적으로 모두 드러내어 숙지하도록 알려주었다. 272 버려진 예수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에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 보이지도 않는 그 길을 가는 것, 들으려고 하지만 도무지 듣지 못하 는 자들, 알려줘도 다른 마음이나 딴 생각으로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일들 이 다반사다. 조금 넉넉히 그것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생각은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가 서로 다르고, 좀처럼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그 길을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도 하며 종교를 믿게 하는 하나의 덫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에 너무 상반된 견해를 내비쳐 보인다. 사실 초기 기독교인들, 곧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는 자들은 극히 일부였 다. 극소수의 그들만이 예수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에 마음과 정성을 다했 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메시지에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에 과민성 알레르기allergy 반응을 가지고 있어서 반감을 늘 달고 다녔다. 그런고로 그것에 이상 과민증을 유발할 정도로 설레 흔든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은 일부 카이사르 황제를 더 선호하 기도 했다. 그 황제에 붙어서 살고자 했던 자들, 혹 역사를 조금이라도 인 지하는 자들은 그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 예수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행동과 반대로 카이사르에 대한 신임은 대단했다. 오히려 열광할 정도이기도 했고, 그런 자들은 천하 를 얻을 직책과 부를 취득하려 무진 애를 쓰곤 했다. 그들의 열광에 비해 작았지만, 예수의 제자들도 헌신을 통해 죽음과 희생 앞에 이들의 직책을 ‘사도’라고 붙었다. 과연 대부분 사람들은 두 부류 중 어느 것에 속하고 싶 을까?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황제의 등에 업은 자들의 선택이 처음에는 당연한 듯했다. 그 어느 것을 선택해야 했던 당시 유대인들이자 이방인들 은 자신의 과업에서 성취와 저주 둘 중 어느 하나로 결정해야 했다. 그 쏟 아지는 결정적 상황 속에서 예수를 선택한 자들은 인내와 고통을 얻었으며 카이사르와 로마 세력의 등에 업은 자들은 부와 명예를 얻어 각기 나름대 로의 스승들을 따르며 그들의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제 7 장 바실레이아 273

대부분 동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초라 하고 볼품없는 한 가난한 동네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근엄 하고 나라 내에서 모든 것을 갖춘 권력과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검어질 수 있는 선택의 순간에 이 세상은 황제 편이 되고만다. 어쩌면 예수의 희생과 남모르는 눈물의 지도자 상이 빛을 보게 된 경우, 세속적인 생각에 비춰볼 때 그 선택은 비웃음을 사게 된다. 이 땅에 지도자들과 판이하게 예수의 행 보는 초라하지만 남달랐다. 피조물들과 온 세상을 주관하고 완벽한 창조를 꿈꾸었고 더 큰 자를 섬기는 기회를 검어진 예수 그리스도에 경우 이미 초 라한 탄생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기에 첫 판도는 약하 였을지 몰라도 마지막에는 전혀 달랐다. 그 비결은 하늘에 있었다. 그를 돕고 그의 신분에 대해 잘 아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로마인들은 그 사실 에 주목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웃었다. 그 말에 의한 심한 공격과 타격, 그 리고 비난이 예수가 이미 시작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고 했던 그 의 나라에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런 가운데 E. 케제만이 응시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에는 이미 현재 그리스도의 지배권 의lordship 완성이다. 또한 그것을 이미 가지고 내려왔다. 만약 그리스도 의 통치가 공동체 내에서 보이기 시작한다면,‘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미 예견한 실존이 거기에 성취되었다. 지구상에, 그것이 오직 난폭한 폭격인 강습assault 아래에 책임을 지울 것이다.”2 유대 지도자들이 남겼던 언어 폭력과 난폭한 살인이 남겨진 이 땅 위에 서도 특별히 예수는 늘 잊지 않았던 그 하늘에 있는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 274 버려진 예수

고 보여준 것이 있었다.‘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밑그림 말이다. 이 상적인 지도자상을 보여주거나 지도자란 무릇 어찌어찌 해야 하는 마키아 벨리의 사상과 같은 세상의 노선은 과감하게 탈피하고, 그는‘희생과 사 랑’이라는 하나님의 노선으로 과감히 질주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사상과 고질병처럼 번지는 이상한 이론들 사이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그들 처럼 대처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존중했다. 예수가 보여준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 선포는 하늘에서 내려진 진리의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기적, 치유, 병고침,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 사단에 쓰임 받은 자를 고치는 일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스케 치는 고사하고, 우리가 그린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의 마음 속에 그린 밑그 림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또한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우리와 멀게만 느껴지는 선택들을 열거하기도 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우리가 생각하는‘천국’혹은‘하늘 나라’(‘하나 님의 나라’혹은‘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다분히 예 수가 이 땅에 와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 들의 가르침을 열거하여 우리에게 힌트를 주기 시작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길래 유대인들은 그의 나라를 거부하기 시작했을까? 하나님 의 나라에 이 땅의 지도자가 없고 그런 통치자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 떻게 해석해야 할까? 통치자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진행 중 이라고 한다면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황당한 사건이 아닌가?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그 나라의 서막 을 열고자 한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어거스틴의『고백록』을 통해 수 많은 독자들이 아파했으며 감동했던 그 제 7 장 바실레이아 275

의 책은 비록 그의 죽음에서 거의 10세기가 넘은 시점에 사는 오늘날 우리 의 눈 앞에 여전히 감동이 펼쳐진다. 당시 북 아프리카의 주교였던 어거스 틴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 사람들의 원성에 그도 마음이 아파했을 것이 다. 참혹한 죽음 앞에서 벌벌 떨어야 했던 아이들과 여인들, 그리고 아무 힘도 없는 백성들이 창과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그들의 일부가 찢기는 아 픔에 신음하고 호소하는 그런 비참한 현실 앞에 그도 세상에 무릎을 꿇어 야 했을까? 아니면 로마인들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지르며,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도 떠넘겨야 속이 시원하였을까? 어거스틴은 아마 창문 너머에 있는 하늘을 향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라는 진정한 마음의 고뇌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 억울 한 누명을 벗기고자 집필을 시작했다. 그 책이 바로『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다. 로마가 고트족에게 함락된 사유는 우리 기독교인들 때문은 아니며 단순 히 더 우세한 고트족의 군사력이 그들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며, 이는 과 거의 전례를 들어 로마 군대가 야만족에게 패배했던 과거 아픈 수모를 끄 집어 수면 위로 올리고 있었다. 그러한 내용으로, 그는 저서에서 로마가 야 만족에게 함락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단지“인간의 도시”이라고 서술한 다. 그러나“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다고! 이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유대 백성들에게 예언했던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낸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뒤엎고 죽이고, 또한 살 리는 데에 대한 섭리가 들어와야 하거늘, 왜 이처럼 치열한 분노와 참혹한 희생에 무고한 여러 나라의 백성들이 치를 떨어야 하며 이러한 현실을 두 고 하늘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아직도 이들은 무고한 백성들이 수 없이 죽 어야 이 땅의 나라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뿐 이란 말인가? 276 버려진 예수

유대교에서 사용하는‘나라’라고 하는 단어는“basileia, ”, 즉‘바실레이 아’basileia 라고 발음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어·헬라어 명사이다. 당시 헬라 인들 혹은 헬라를 잘 아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일반적인 개념 의‘나라’를 첨가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 단어는 신약에서 주로 사용 하는‘나라’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공통어이다. 구약 성경을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단어가 가지는 헬라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오늘날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왕권kingship, 국왕의 권력, 그의 지배 ,royal power or rule 또는 통치하는 왕정kingdom이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왕에 의하여 통치되는 영토 혹은 지 역이라고 하는 나라Kingdom이다. 마지막 그 하나는 왕의 통치the royal reign 혹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또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천국the heavens이라 는 뜻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시험에 사단이 보여준 천하 만국the kingdom of world이라 고 말할 때4도‘바실레이아’라고 쓰였고, 민족nation과 민족nation간의 대적 혹 은 나라kingdom와 나라kingdom간의 대립 구조에 대한 재난의 징조5에 있어서도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는 성경에 등장하는 그‘바실레이아’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데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하여 구약에는 몇 번 언 급하지 않지만, 신약이라는 영역에서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하 나님의 손길은 예수라는 한 인간 입술의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A.W. 알가엘A.W. Argyle은『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마태복음 - 지은이 역주)』라는 책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말하고 있 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영토territory를 상징하고 있지 않았다는데 주 목하고 있다. 더불어 구약에 등장하는 유대 백성들의 배경 속에서 드러나 는 하나님의 나라는“마태가‘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라고 말하며 언급 제 7 장 바실레이아 277

하는 것처럼 신약에서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과 선포의 핵심 화제가 바 로‘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백성 공동체들을 암시함에도 말이다. 구약성 경으로부터 유대인 예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미 가 다음에서 이야기할 삼중(세 가지)의 개념에서 유래되었다. 그 유래를 반 드시 먼저 알아야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의미를 새기게 되는 밑거름이 된다. 유대적 배경을 참고하여 이제 복음서에서 밝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첫 개념은 그 나라가 영원성과 우주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시편 기 자는“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6라 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그러한 배경이 숨겨져 있다. 동시에 또 다른 두 번째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부분적으로 지구 위에서 인식될 수가 있었다. 그 나라의 주권과 통치에 영향력 행사를 부분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는 인 간에 대한 선택에 알가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영원히 그리고 전반적인 온 세계의 통치를 감행하고 있다. 절대자는 온 우주 세계의 올바른 왕에 의한 것이지만 대다수 민족들은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그분의 주권과 통치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개념으로, 그럼에도‘하나님의 나라’라는 그 완성과 종 말은 미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 나라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에게 받은 구원이라는‘언약의 황금알’을 받아 든 이스 라엘 유대민족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섬기고 있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만큼 자부심이 남다랐다. 그들의 지식에 의거한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아 직 진실로 우주적이지 않고 게다가 보편적이지 않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있다고 생각지 않는 278 버려진 예수

자들이다. 곧 그런 자들을 후세life after death 혹은 다음 세상next World, 곧 사후 세계afterlife를 의지하는 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들과 달리 사후 세계를 거부하는 자들은 이 지상에서 혹은 죽어서 가 는 그 어떤 초월적인 세상에서조차 부활은 없어 후세는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 사이들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라고 할 수 있다. 곧 사도행전 23장에서 언급한 부활에 대한 유대인들의 싸 움은 이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혼란한 가운데도 확실한 것은 자신들 만의 우월의식과 절대자 신에게 은총과 선택을 받은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기에‘축복’과‘한계’라는 두 가지의 이상한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 다. 그들이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 오직 그의 나라는 먼 미 래에 놓여져 있음으로 다가올 메시야 시대에 악의 세력에 대한 종말을 끝 맺고 인도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 컨셉이 바로 종말론eschatology, 곧 그리스어로‘eschatos’, 즉 마지막last이라는 뜻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에게 속 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에 대한 시작을 알리고 싶다. 그 인식의 소 산은 아브라함에서 출발한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 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 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 라”7라고 들었던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러한 말에 이스라엘 백 서들은 동요되었다. 또한 나단의 다윗을 향한 예언으로“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8라고 이 방인의 공격과 원수와의 전투에 있어서 달콤한 하늘의 초코렛을 전하며 다 윗과 백성 이스라엘을 위로하였다. 그렇게 구약에서 이미 메시야의 나라는 세워지고 있었다. 제 7 장 바실레이아 279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있는 하나님 의 나라를 곧바로 인간의 나라로 끌어 내리는 일로 인간을 왕으로 세우고 자 사무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 이유로 세상의 통치처럼 군림하는 인 간의 왕을 달라고 했을 시기에 비리를 가진 자녀를 둔 늙은 사무엘은 백성 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로 시작된 신정 통치를 바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간청은 거절되었다. 오히려 하나님도 그 부탁에 동의했 다. 사무엘의 기도에 여호와 하나님은 반응했다. 고대 나라들의 신탁처럼 하나님은 직접 사무엘에게 말하는 바, 곧“백성들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 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9라고 하나님의 신적 통치를 버리는 유대인들을 상기시켰다. 급 기야 자신만의 통치에 대한 견고한 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기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은 승인하고 있었다. 어째 든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 위에 있고 거기에는 그의 나라the 가Kingdom 있다고 하는 시편 기자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미완성된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면서도 하늘에 있는 신적인 나라에 목말라 하는 호소와 그리움 속에 서 그의 나라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마음을 일관 있게 서술하고 있었다. 하 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라면 반드시 신적인 통치 범위에 깊이 들 어가 앉아야 하거늘…,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기울이고 들어야 했 던 이들의 선택에 유대인들은 자주 실패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 ** 『만들어진 』예수Fabricating Jesus 의 저자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 는 캐나다 에 소재한 아카디아 대학교 내의 신학 대학Acadia Divinity College의 신약학 교수 로 활동 중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성경에 대한 정확 한 위치에 서서 관련 신학자들의 가공했던 허실과 가설에 맹공격을 퍼붓는 다. 올바르게 전개해야 할 역사적 예수를 왜곡하는 전문가들에게 실랄하게 퍼붓는 그의 정직함에 매료되어가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그 사고가 늘어 280 버려진 예수

가는 이 시대에 왜곡되어 가는 신학자, 회의론자들과 더불어 자유주의 신 학 물결에 서서 그는 당당히 자신의 노선을 고집하고 그들과 달리한다. 그에 서적 내용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은 예수가 추구한 진정한 하 나님의 나라에 대한 해석에 동조하는 다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현 대인들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주장하는 그에게서 난 위안 이 된다. “불행하게도 목회자와 성경 교사를 포함해 많은 기독교인이‘하나님 나 라’의 의미와 종말론에 대한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가 천국 또는 죽어서 가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를 구분하려고도 한다. 더 심한 경우는 종말론이‘말세’를 의미한다고까지 생각한다.”10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이‘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서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다. 그 본질과 정의에 대해 서로 완전히 어 긋남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존 리뉴먼John Reumann은『Jesus in the Church’s Gospels(교회의 복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지은이 역주)』의 저서에서“예수의 핵심적인 메 시지가 무엇인지 프로테스탄트(개신교)Protestant, 가톨릭Catholic, 비기독교non- ,Christian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만의 신약 학자들에게 물어보라. 광대한 대다수 그들은 - 모든 단일의 최고 전문가를 포함하여 - 하나님의 나라 중 심에 선 그의 메시지임을 동의할 것이다”11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의 말과 행동은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리함에도 비록 공통된 의견들이 지배적이지만 그 나라에 대한 정의는 대다수의 의견과 충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는 지, 혹은 언제 시작하였는지, 심지어 제자들은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제 7 장 바실레이아 281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그들과 함께 쉴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들 복음서에 의거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셨다. 그때 사단이 주는 모든 권세와 영광이 주어진 나라에 대 한 유혹(눅 4:5)을 물리친 것을 볼 수 있다. 그후 그는 사역의 시작부터‘천 국’(하늘들 나라) 혹은‘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파하기 시작했다(여기서 ‘천국’은 유대인들을 향해 외친 단어이고‘하나님의 나라’는 이방인들을 향한 외침이었다). 예수는 온 지방을 돌며 하나님 나라, 곧 천국(하늘들의 나라)를 전파했다(마 9:35). 병고침과 약한 것을 고치는 자의 놀라움이‘하 늘들 나라’에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예수는 외쳤다. 그가“회개하라! 천국이 가 까이 왔다”(마 10:7)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독자를 위해 마태복음의 저자가 말하는‘천국’(하늘들 나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 수가 맨 처음 전면에 공개했다(마 4:17). 그 범위는 죽음까지, 게다가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일을 가르쳐주고 올라갔다(행 1:13). 그렇다면 예수가 외친‘하나님의 나라’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유대인들의 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고는 어떠할까? 그들이 남긴‘나라(혹은 통치)’에 대한 신적 인 용어의 발자취는 있을까? 그래서 난 그들의 사전을 찾아보았다. 유대 백과 사전 에The Jewish Encyclopedia 수록된‘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정의된 첫 문구는‘Malkut de-Adonai(말쿠트 데-아도나이)’라고 적 혀 있다.12 이는 아람어를 번역한 구약 성서인 탈굼Targum 번역판으로“나라 가 여호와께 속하리라”the kingdom shall be the LORD’s 라는 오바댜 1장 21절과“여 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The Lord shall be king over all earth라는 스가랴 14장 9절에 사용되는 단어다. 282 버려진 예수

백과사전에 수록된 단어‘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의 두 번째 문 구로‘Malkut Shaddai’라고도 한다. 유대교에서 사용중인 아람어로 번역 된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에서 그 단어가 나온다. 히브리어의‘malkut(말 쿠트)’, 곧 그것은 바로 헬라어“바실레이아(나라 혹은 통치 개념)”와 같 은 의미다. 다음 단어인‘Shaddai(샤다이)’는‘Almighty(전능한, 위대한)’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제 종합해보면“전능한 나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말쿠트 샤다이”에서‘전능하다’는“샤다이”라는 뜻을 영어로 바꾼다 면“God’s Kingdom(하나님의 왕국)”또는“The 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세 번째 문구는 바로 탈무드 중 비율법적인 이야기인 하가다Haggadah 와 미쉬나Mishnah에서 사용하는‘Malkut Shamayim(말쿠트 쉐마임)’이라는 단어로 등장한다.‘Shamayim’, 즉“쉐마임”이라고 발음하며, 이 뜻은 히 브리어의 문학적 표현인‘sky(하늘)’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단 어는 복수이므로“the Heavens”, 곧‘하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해보 면“하늘들 ”나라 theHeavenskingdom라고 번역될 수 있다. 실제 유대인들은‘하 나님’이라는 단어 대신‘하늘’이라는 단어로 대신 사용했다. 왜냐하면 하 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죽음을 수반한다는 사고가 있었기 때 문이다.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는 이들은 이러한 하늘의 나라와 하나님 의 나라가 동일한 단어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 나라에 대한 소망과 간구 가 그만큼 넘쳐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들이 현몽하는 그의 나라 는 로마 시대에 더 확산되는 조짐을 보였다. 각 유대 지역에서 반란, 민란, 소요사태가 일어나면서 급기야 미드라쉬Midrash(Cant. R. ii. 12)에서는“로마의 나 라the Kingdom of 가Rome 파괴되기에 최적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나 라가 드러날 것이다.”라고 당시에 유대인들의 목말라하는 시대상황을 치 켜세움과 동시에 고조시켜 기록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곧 그 나라가 올 것 제 7 장 바실레이아 283

이라 굳게 믿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적인 부분만을 고집 하지 않고, 그들에게 과거부터 늘 그랬듯이 로마 식민지에서‘해방’이라는 정치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 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아니라고 성 경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시대가 그들을 만들었던, 그들이 시대를 만 들었던 간에 그들에게 목마른 것은 정치적 독립이자 해방이라고 생각한 것 은 자명하다. 사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의 예언이나 선포 역시, 하나님의 손길과 그의 품으로 돌아온다면 악한 세력들을 포함 하여 이방인들에게서 해방시켜줄 것이라 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언젠가 등장한다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인‘메시야 시대’라고 대신 하였다. 이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바랬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나라는 하 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이 세계를 다른 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다양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 종파들이 모색했고, 이 땅 위에 새로운 나라 건설과 함께 정치적 체제와 종교적인 체제를 함께 만들어가는 색체를 띈 로마 제국보다 더 찬란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고픈 욕망이 꿈 틀거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와 달리 예수의 입에서 선포된 하나님 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나라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또 다른 확고한 하나님 의 나라를 들고서 현재 유대인들이 누리고자 했던 나라와 선을 긋는다. 그 의 주장은 그들이 외친 나라와 달리 영적인 부분에서 이 땅에 존재하는 나 라를 부정했으며 또한 체제를 전복하려고 했다. 그렇게 지상의 꿈과의 어 긋남을 비롯하여 새롭지만 기존 구약에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들이 이 땅에 드리워지게 되었고, 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나라 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지구는 울타리나 벽에 의해 나눌 수 없는 모든 것에 동일하게 속하였 을 것이다. … … 삶들은 진부하게 평범하며 분할됨을 가지고 있지 않 284 버려진 예수

는 부이다. 거기에는 가난한 자도 없고, 부유한 자도 없고, 폭군도 없으 며, 게다가 노예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위대 하지도 하찮은 자도 없을 것이다.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다. 모두가 함 께 동등 상태이다.”13 모두가 바라는 그 동등한 나라! 그러나 그 예수가 늘 꿈꾸던 하나님의 나 라, 그것은 베들레헴 혹은 예루살렘 땅을 거닌 모든 자들이 걷고 있는 이 땅과 달랐다.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이 바라던 기준에서 예수가 추구하고 누 리던 하나님 나라의 것과는 전혀 반대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다 양한 측면은 현대에도 그렇게 하늘 위를 벌겋게 수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땅에 실추되고 예수의 도발다운 열정 또 한 이 땅 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썩어가고 있었다. 그가 외쳤던 나라와 함께 …. 구약 성경에서 외치는 저자들의 사상을 볼 때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이스 라엘 민족의 형성도 하나님 안에서의‘가족’형태에서 이 땅의‘국가’형태 로 변형되면서 하나님의 통치체제는 변모하기 시작했다. 곧‘신정통치’에 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형성된 제국의 힘,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군주체 제’로 바뀌어가는 그들의 혐오적인 변형에 선지자들의 비평도 그들의 정치 와 역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사상과 사고가 녹 아있는 게이저J.G. Gager의 저서『Kingdom and Community(하나님의 나라와 공동체 - 지은이 역주)』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소망의 기대가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기대 이상으로 실망하고 있음에 고백 한다. 그래서 이들은“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14는 문장을 남긴다. 그렇게 다른 기대감을 메시야가 준비중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자 합리화로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제 7 장 바실레이아 285

사무엘하 7장 12절부터 시작되는 메시야에 대한 유대교의 사상 혹은 교 리(원칙 및 정책)는 다윗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메시야 언약의 약속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예언에서 살펴본 바, 다윗의 후손에 의거 그 후손의 나라가 견고하게 서게 되는 마지막 시대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며 하 나님은 그에게 아들이 된다고 하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역사』책을 저술함과 동시에 과거 <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 의 편집장을 맡았던 폴 존슨에게서 유대인들이 구약시대부터 반복적으로 범한 시대착오를 계산한 메시야의 국가, 즉 성경에 등장하는 그의 나라에 대한 정의가 뒤박죽되어 혼란스럽고 불안한 사고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복합적이고 심지어 모순적인 기원을 지닌 메시아의 교리는 유대인들 의 마음속에 커다란 혼란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메시아가 정치·군사적인 지도자이며, 그가 실제적인 국가를 세울 것 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15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 고 그의 진실된 진리를 각기 다른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유대인들에 게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마지막에는 아들에게 전부 실토하였다16 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이를 인 식한 예수 추종자들은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린 예수의 실토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적 혹은 군사적인 지도자로서 의 메시야 나라를 꿈꾸었던 그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는 어떠한 부작용을 겪 었을까? 스가랴는 모든 유대민족에게 향한 심판이라는 종말을 선사함으로“주께 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17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사야에서는“너의 286 버려진 예수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18, 혹은 그분은 왕으로 이방 세력들을 심판하고 시 온으로 다가옴19에 등장하고 있었다. 특히,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한 말들 에 대해“지도자들은 율법에 의해 모든 행동을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 나님은 한 분만으로도 너희의 지배자로 충분하기 때문이다.”라는 메시지를 대신 전하고 있었다.20 그렇다면 나의 궁금증을 대신해 그 지배자가 구약부 터 외쳤던 심판의 종말 곧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시작할 것인가? 누가 복음 16장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 의거 유대인들이 바라던 심판으 로 다가올 나라의 기대를 안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메시야라고 하 는 예수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나병환자를 깨끗이 하고 용서, 믿음, 종 이 되어야 할 이유 등을 가르치고 있던 청년 예수에게 바리새인들은 예수 를 시험하기 위해“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럼으로 앞으로 예고될 예수 자신이 겪어야 할 죽음의 파 장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예수의 첫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 한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은 사인 혹은 표징이 있고 난 후 에 일어날 일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말이다. 어느 순간에 일촉즉발 관찰되 어 우리 눈에 결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방법으로 되어짐을 단정짓는다. 결국 이들의 혼란은 예수의 또 다른 메시지에 더욱 가중된다.“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1라는 말에 그들은 충격을 먹었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정치적 혹은 군사적 메시야 로서 꿈꾸던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개념과 달라 듣는 청중들의 심장을 격 동시켰다. 그 결과 심각한 혼란에 봉착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 모두 죽어서 가는 저 천국의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 하늘에서 시작 될‘하나님의 나라’는 곧 닥쳐올 것이 아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이 는 유대들의 뇌를 강타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직 로마 군인들은 이 땅에 제 7 장 바실레이아 287

발을 딛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생각은 다양했을 것이다. 아니 벌써 시작되었다고? 언제? 지금이라고 했나?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시작되었다 고? 하나님이 벌써 이 땅 위에 그의 나라가 펼쳐지고 있다고? 하늘에서 하 나님이 내려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땅 위도 아니 라고? 더한 것은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의 뇌 를 받아들이는 순간도 없이 연타를 날려 온몸에 소름이 꽉 끼치는 고약한 미래의 충격을 지금 자신의 입으로 알리고 있었다. 그 내용을 듣고 있는 청 중들은 천연덕스런 얼굴을 할 수 없었고, 다만 모두에게 언짢은 당혹감과 굳어진 표정들은 예상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하나님의 나라’라는 슬로 건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로마 나라와 같은 이방인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의 쟁취와 이스라엘에 이루어질 화려한 영원성을 갖춘 영원한 나라 설립 안에 있었다. 우리 안에 있어 보이지 않는 숨겨진 작은 하나님의 나라, 그것을 미리 경 고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이나 시간적인 제약이 없으며 다만 자신 의 십자가에서 고난과 자신의 죄값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여 그 나라의 진정한 시작이 되었음을 고백했다. 결국 부활에 대한 그 시점 이후 이미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그리 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하늘에서 그려지던 과거와는 달리, 그러한 잘 못된 사실에 대한 폭로로 예수는 하늘의 진실을 통해 우리들의 심금을 울 리고자 했다. 그점이 내게 한없이 새롭게 다가오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비로서 그 출발점에 들어서게 된다는 시작점만은 분명히 밝히고 있 었다. 그럼에도 예수가 승천하기 전, 언제 올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도둑과 같이 어느 순간에 혹은 임신한 여인이 언제 아이를 잉태할지 정확 288 버려진 예수

한 시점을 모르듯 여기고 있었다. 그 천국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 어 언제 다시 우리가 그의 나라를 진정 눈 앞에서 당도하여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의 수수께끼는 희미하게나마 뒤로 미루는 듯한 말투로 들려 주고 있었다. 그러한 예가 바로 노아의 홍수를 들고 있다. 주의 날 하늘과 땅의 파괴 내세의 시작 구약시대 신약시대 Ⅹ 새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 창세기 이후(현세) 예고편(계시) 예수의 고난 및 부활 예수의 다시오심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 [그림 3-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식화 노아의 홍수는 예상과 달리 기대하던 시대에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을 지은 것에 한탄한 여호와의 기대를 저버린 채 세상의 악이 백성들과 함께 충만하여 가득 찬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홍수가 일어날지는 노아도 몰랐던 것만은 확실하다.22 다만 여호와의 말대로 의로움을 가진 노아에게 햇빛이 찬란한 땅 위에 방주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에 들어가는 시점 을 알려 주었다. 곧 필요한 시기에 맞춰 여호와의 예언 7일 후 노아가 600 세가 되던 해라는 것만을 경고하고 있었다.23 노아 시대와 같이 비록 비가 내리지 않고 있듯이, 하나님이 예고한 하나 님의 나라에 대한 시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예수 의 메시지에 담긴 그 뜻과 예언을 통해 진정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은 되었 다고 볼 수 있다. 다행인 것은 노아의 기다림과 준비과정처럼 예수는 그 시 작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이 이 땅에 오면서 이 미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그 사실 앞에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충고를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은 바리새인들과 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날카롭고 제 7 장 바실레이아 289

예리한 공격은 마치 나의 질문과 동일했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늘에 서 전해주는 예수의 가르침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모습과 시작을 우리들에게 일깨우려고 알린다. 과거 교회에서 주로 가르친 천국이자 혹은‘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예수 는 과연 어떤 말을 남겼을까? 유대인들의 상상처럼 혹은 동화나 영화 속에 나오는 화려한 궁전처럼 그런 모습으로 나라가 세워지는가? 아니면 내면 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해석을 해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이라면 한 번쯤 은 천국이 지옥과 반대되는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 서 천국은 내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기에 이 땅에서 멀게만 느껴지고, 또한 지옥이라는 곳도 내게는 아득하게 먼 공간에 존재하는 줄만 알았다. 예수 탄생 당시 자신에게 모인 수 많은 무리들에게 보여준 고난의 길을 간 예수는 그 길을 가면서도 묵묵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해 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에 대한 비교는 내게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 바리새인과 현대인들이 느끼던 그것에 대한 충격은 다른 자도 동의하고 있었다. 강해 설교와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30년이나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섰던 마틴 로이드 존스 는D.Martyn Lloyd Jones 1963년 그의 채플 시간에‘하나님의 나라’의 주제로 12주간을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여 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외치면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신 만의‘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함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의 공통된 오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외 형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며, 어떤 획기적인 행동의 결과로 온다고 생 각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메시아가 오 시면, 그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24 290 버려진 예수

이를 통해 과거‘하나님의 나라’, 혹은‘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견 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하였고, 그 정의에 대한 잘못된 오류를 교회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 기독교는 또 한번 착오가 생기 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묻는 어리석은 바리새인 들25, 만나와 같은 하늘의 표적을 따라다니고 그것에 목숨 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26 예수가 속한 유대인 나라 사람들과 유대인의 왕으로 인식한 그 를 보고 그렇게 이 땅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엉뚱한 생각이 있었던 로 마 총독 빌라도,27 심지어 예수가 승천하기 전에 언제 다시 올 것이냐고 묻 는 제자들 28까지 모두 어리석은 질문만 내리퍼붓고 있음을 들었던 예수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공통적인 결과가 있었다면 성경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하 나님의 나라에 대한 실마리는 우리가 질문한 사이 까마귀가 물고 가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그저 미래 지향적이자 하늘의 공간적 위치에 두었다. 이러한 사상과 생각들 속에서 나 역시 그 나라를 곧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적도 있었다. 결코 현재 내 모습 속에서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 려볼 수 없었다는데 실로 무지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이 땅 위에나 어딘가 공간에 존재한다고 한다고 해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는 선포를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었던 복음 서를 모두 읽어본 나는 이 모든 말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 다.29 『예수의 역사적인 위치』의 저자 E.P.샌더스는 예수의 제자였던 요한이 죽음에 이른 예수에 충격을 받아 오히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의 나 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만큼 야 릇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제 7 장 바실레이아 291

전반적인 노력을 엿보인다.30 그러나 사실 그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 에 대한 단어를 전반적으로 사용한 것은 다섯 번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히 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다른 세 복음서보다는 훨씬 더 자 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독특하게 다른 복음서에서는 저자의 복음서 집필 동기가 예수의 사건에 그 중심과 그의 메시지를 중간 정도로 믹스mix, 즉 적절하게 혼합하여 사용 하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의 메시지에 장수를 더 할애하고 있었 다. 그 결과 복음서 이후의 저자들은 복음서의 집필하고자 할 때 반드시 예 수의 메시지인 복음,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뜻과 그 방향성에 비유 와 독특한 정의를 내리면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The Parables of Kingdom(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 - 지은이 역주)』 의 저자 찰스 닷드C.H. 에Dodd 의하면 예수의 메시지는 모든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되는 것들이 자기 내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마지막 종말적인 기대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다.31 마치‘아마겟돈’,‘노잉’과 같 은 영화 속의 세기적 종말에 대한 견해를 이상하게도, 그는 미래적인 인식 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직, 그에게는 그것이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현재성에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고 견해를 비추고 있 었다. 닷드가 비록 미래적인 형태의 종말을 인지하고 있지 않고, 다만 예수 가 온 이후 이미 종말론적 심판은 미래가 아닌 현실에서 시작되었다고 경 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인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과거부터 이미 현대인들이나 과거 유대인들에게 짖밟히고 있어 유 린 당하고 있었다.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성경의 메시지를 잘 인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의 나라와 메시야의 인식에 서로가 충돌하고 있었고, 이들 은 같은 유대인이었던 예수와 말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특히 요한복음에 서 그들과 예수와의 입씨름에서 논쟁의 불씨를 야기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 292 버려진 예수

님의 나라에 대한 이들의 견해가 무척 달랐다는 것이다. 곧 유대 역사의 전 문가 폴 존슨의 견해대로 그것이 날카롭고 매서운 지적 사이로 대립된다는 의미가 이제 이해된다. 예수 역시 유대인으로서 이들과 똑같은 구약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 으로 미뤄볼 때 집요하게 공격한‘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서 모든 청취자 나 토의하는 당사자 모두가 그 개념과 생각들의 혼선에서 오고 있고, 이들 의 다양한 논쟁의 불씨는 가히 유대인들에게 온통 시기와 질투의 광란이 뒤범벅 되어 완전히 물과 기름과 같은 사태를 보게 되었다. 신에 의해 계시되어 적은 문체들로서 알려진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적 이자 유대 경전들 중 주후 1세기 초 완성된『모세 승천기』는 결국 로마 시 대에 걸친 엄청난 종교 박해를 기점으로 번역본의 결정판에 나라와 통치적 개념의 핵심이 된 변화가 다음의 문장들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 그분(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난다. 그 러면 악마는 최후를 맞게 되고 악마와 함께 모든 슬픔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32 이러한 문구들처럼 구원자 혹은 메시야가 오면 자신들에게 모두 알려 줄 것이며 그가 큰 군대를 이끌고 온 세계의 수도가 되어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모두 내몰아 결국 지상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들이 없다고 하여 치부하는 악의 제 국을 몰아내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끼칠 수 있 는 무한한 잠재력이 깔려 있었다. 나약한 자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하던 예수를 유대인들이 볼 때 다분히 기 쁨의 소식보다는 자신들도 늘 예수가 하려던 하늘의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비록 스스로 율법에 억눌렸지만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냄으로 자 제 7 장 바실레이아 293

신들의 몸은 정결하고 하나님 앞에 결코 나쁘게만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오히려 이들은‘심판’이라는 단어가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고 다만 시련 일 뿐이고, 심판은 이방인들의 소산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더 컸다. 헌 데 심판은 고사하고 돌개 바람에 가늘고 보드라운 티끌과 같은 먼지 섞인 바람만 나불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속하지 않은 나라?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가 예수를 데리고 빌라도의 관정 앞에 왔 다.33 이들 유대인 최고의 지도자층인 가야바와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유일 신에 대한‘신성모독죄’로 그에게 뒤집어 씌웠다. 물론 과거 제사장 자신 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던 것으로 로마의 위협이 되었고, 한 동안 잠잠한 민 란이 동요되는 불씨인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 제국에 위협34이 되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을 새벽의 어두움과 함께 감추 고서 말이다. 지도자들은 이대로 예수를 가만히 두면 두고두고 화를 면치 못함을 예감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민란은 예수로 다시 불태워졌다. 이 반란의 동요되는 불씨인 예수와 추종자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나라와 민족 을 빼앗길 염려와 근심이 이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예수를 가만히 두면 두고두고 화를 면치 못함을 예감한 이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모의하여 그를 처형시키고자 로마의 힘을 빌린다. 이방인의 처소에 발도 들일 수가 없는 유대인들에게 빌라도의 관정 문턱 앞에 이르러 포박한 행 악자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성가신 가운데 새벽녘 피곤한 몸을 가눌지 못한 채 나온 빌라 도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 단잠을 자려는 듯한 말투로 유대 인들에게“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처리하라!”35 라고 귀찮은 듯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사람 죽일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다고 하는 유대 294 버려진 예수

인의 설명을 듣고 빌라도는 이내 마음을 바꾼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을 지 나 자신에게 넘긴 죄인에게로 향한다. 그는 곧 관정에 들어가 예사롭지 않 은 죄수와 맞닥트리게 된다. 로마로부터 파견 나온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그 죄수에 대해 알지 못한 투로“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예수에게 물 었다. 예수는 이제 빌라도의 말을 받아 치며“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 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대답한다. 늘 예수는 일반적인 대답과 달리 질문을 걸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하 게 만든다. 빌라도는 한 마디 더 한다.“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하는 질문에 드디어 예수는 자 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대답한다. 만약 했다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 해 전파한 것이 전부라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가 그에게 속한 것이 아 니라고 말이다.36 그가 가지고 있는 백성들은 여기에 없고 이 땅에 속하지 않고 저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군대가 있다고 하는 대답에 우리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자신은 혁명을 일으키고 이 유대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 생각과 백 성들의 동요를 무기 삼고자 하는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하고자 했다 면 자신의 나라에서 하겠다고 말이다. 진정 이유가 이 땅에서 속한 자기 나 라와 백성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빌라도 앞에 자신은 혁명을 할 이 유도 없고, 유대 백성들에게 죄를 지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곧 자신이 유 대에서 한 몫 단단히 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다. 자신을 넘긴 유대인들이 전혀 자신의 백성들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빌라도는 그 뜻을 이해했을까? 마치 다른 나라 사람과 이야기하듯 자신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단단히 시사한다. 유대인들이 넘겨준 이 죄수의 말에 심상치 않는 기운이 넘치고 있는 것을 감지한 빌라도는 이에 게 아무 혐의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아마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에게 군대 제 7 장 바실레이아 295

가 어딘가에 있고, 혹시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고 감지한 것일까? 신약시대에 들어서 유대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가 전파한 나라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사실 어릴 때 배웠던 하늘 나라는 죽어서 가 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성경 복음서와 신약 전반에 걸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서 예수가 이미 시작한 것이었다. 동시에 지상에서 벌어 진 사건으로 묘사되기에 전혀 다른 모습처럼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고 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과 우리 마음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곧 지상에 세워질 주의 나라 혹은 메시야의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질 것이 라는 생각이 갈갈이 찢겨나갔다. 또한 메시야 나라가 이 땅에 없다는 이 황 당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주의 나라는 빈 껍데기에 불과한 조개껍질이었다. 이러한 마음을 알고 있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를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주님과 너무나 많이 논쟁하고 다투었으며 주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 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은 종교를 주님 의 메시지보다 우선시했고 주님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자 신의 유대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 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는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일 수 있습니 다.”37 하나님의 나라에 연관성을 가진‘영생’은 그 단어 자체로의 영생the eternal ,life 즉 우리의 심장이 멈추어 가게 되는‘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 겠지만 예수가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과 과거 그렇 게 배웠던 우리들과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종교로서 유대교의 나라 사상은 예수에게 큰 적이었다. 296 버려진 예수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파하면서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에 의거 한다면 새 계명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한 후 세 장에 걸쳐 길게 그 메시지 를 언급하는 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 내용 마지막에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 는 장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을 영화롭게 하여달라고 했다. 그렇 게 영화롭게 함을 추구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영생, 즉“유일하신 참 하나님 과 그가 보낸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38의 진정한 의미를 가진‘영생’ 을 주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에 주의시킨다. 그 말은 바로 이 땅에 딛고 있 는 예수에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 몫의 분량을 거두어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알도록 도와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게 영생에 더 가까 워지는 것이라고 한다. 영생은 우리가 삶의 종착역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이미 시작되었고, 덧붙여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의 가르침에 대 한 확고한 지식을 요하고 있음에 예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을 요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대한 과거의 판 단과 사고는 지우개처럼 지워야 했다. 당연히 정통 유대인들은 꿈꾸는 지상에 새로운 땅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 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일부 유대인들은 이 땅에 메시야 나라가 출 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 포했던 것이다. 예수, 그 자신이 시작을 알렸기에 이미 자기 입술에서 시작되었다는 놀 라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안에 들어서면 이미 우리 마음 속에서 그의 나라가 시작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 나라의 통치자에 대한 견해 로 바울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이 지혜(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 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39라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 자가 죽 제 7 장 바실레이아 297

임을 당해야 함을 유대인들은 상상했을까? 이곳은 신의 나라? 지구의 나라? 모든 역사와 책은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 로마 역사학자인 타키투 스의 저서『연대기』를 바라보면서 옛 로마의 웅장함과 역사적 진실 그리고 숭고한 그들의 사상들 속에 피어오르는 향수에 젖어 그리워하는 귀족의 한 사람으로 역사를 진실적인 마음에 담아 서술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지침서이자 하나님의 길로 다가서는 방향성을 제시함에 목적을 두고자 했다. 유대교의 진정한 대변인 으로서의 역할을 한 모세, 다윗, 솔로몬, 이사야, 예레미야, 하박국, 스가랴 등을 등장시키며 하늘의 정당성을 치켜 세웠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신약 은 하나님이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들과 그를 죽인 유대인들로부터 그의 오 른손을 들어주었다.40 하나님의 오른손을 들어줄 정도로 신뢰하고 다니엘의 환상에 나타난“인 자 같은 이”라는 자가 바로 예수를 의미했다. 더불어 예수의 권세인 영광과 나라를 그에게 주었고, 모든 자들이 그 앞에 섬기게 하는 특권을 가진 그가 이룩하고자 하였던 것은 고작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과 동등되고자 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로서 그것을 이룩하려고 애쓴다. 비즐리 머리 는G.R.Beasley-Murry 주의 날, 즉‘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정의를“주의 날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며 사람들을 위해 심판을 수반하며 주님에 의해 결정되는 그 어떤 시점이다.”41라고 말 하고 있다. 예수 곧 주님에 의해 결정되는 나라이기에 우리가 그 나라에 참 여하는 여운만 즐비하다. 이 또한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님이 절실 하다. 비즐리는 구약에 나타난 미래에 주어질‘주님의 도래’와‘주의 날’의 도 래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있음을 아주 298 버려진 예수


Like this book? You can publish your book online for free in a few minutes!
Create your own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