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로의 눈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애매 한 논리로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를 이해를 하지 못했으며 이해를 바라지도 않듯이 말하는 예수 앞에서 제자들도 훗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맛본 후에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이 임한 후 그들은 드디어 부활의 쓴 잔,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쯤 드디어 복음 서를 남겼던 것이다. 예수 자신에 관련된 하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엔 우리 모두가 다 그릇 이 너무 작아서 그럴까? 그래도 예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의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알기 쉽게 비유로 설명했다. 그 비유가 실제로 받아들이거 나 혹은 무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든 개의치 않고, 그는 난해한 해석을 쉬운 비유로서 자신을 계속적으로 변호하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포함되었던 선택 받고 계획된 제자들에게까지 자신을 외면하는 그러한 처 지의 심정을 미리 알리고 있었다. 앞서 말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처럼 다쳐서야 돌아오는 종, 즉 당시 구약 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의 죽음을 여러 번 알았음에도 마지막 숨겨진 카 드인 자신의 아들을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과연 과거 선지자들은 알고 있었을까?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 까?”20 이 구절을 통해 이사야는 당시 유대 백성들을 일컬어 깨닫지 못하는 맹 인이며 어둠에 잠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처신과 행위 그리고 우상 숭배가 만연함을 보고 하나님께 한탄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처 럼 그는 하늘에서 가르쳐준 그대로 하나님의 예언과 언약을 듣지도 않을뿐 제 8 장 버려진 예수 349
더러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고 오직 우상숭배와 자신의 이득과 욕심 그리고 심하게 편중된 재물 앞에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헛된 망각스런 무지와 망각의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상황은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구 약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이사야는 자신의 예언과 죽음 앞에서 아직도 진정 무서워해야 할 하나 님을 버리고 있는 이들을 보며 한탄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아무 리 유대인들에게 제대로 된 쓴 소리를 퍼부어도 이들은 미동치 않고 하늘 의 충고에 아랑곳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으로 신약의 유대 인들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았는가? 이들의 상황을 직시한다면 결 국 하나님이 세워준 구약의 언약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주의 거룩한 성읍들 과 예루살렘 성이 버림받았고, 마치 쓸모 없는 광야가 되도록 방치하고 있 었고, 급기야 주의 찬송이 희미한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들려 자신들의 죄 악이 바람 같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그들을 몰아 가고 있는 사건에 결단 코 관심없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야 하 는지 모르고 있다. 이사야가 유대 사람들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이 어 디로 향하고 있는지 하소연을 하듯 말이다. 또 이사야는 예수의 세례를 받 을 것 같은 환상을 미리 본 듯하다.“원하기는 주는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 셔”21라고 마치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세례 요한이 본 환상을 옆에서 지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마치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듯 주의 나라의 원 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애원과 부탁도 지금 십자가를 당할 예수의 발걸음을 결코 가볍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고통과 고난을 비켜 달라 고 애원할 정도로 심각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 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예수가 결코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거나 다른 350 버려진 예수
사람들의 교훈의 형식과 문체를 빌려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구 약의 자신에 관한 예언들과 필요하다면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나 유대인들의 상황에 잘 맞는 인용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계시의 방향 성이 예수를 향하고 있음에 그들을 이해시키려 했다. 그러한 구약의 언약 과 메시지를 인용하여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감춰진 진실된 모습으로 비춰 질 때에도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돌보심을 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이스라 엘에서 생존하기를 나름대로 터득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언어, 방언과 전혀 다른 성격의‘하나님 말씀’을 사용하여 하늘에서 선사한 그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커다란 실수였음을 모른 채 말이다. 유대인들과의 불편한 마찰 내게 어릴 적 예수의 모습은 매우 온순하고 아이 같은 미소를 짓고 다니 고, 그래서 아픈 자만을 위한 천사와 같은 존재로 여길 정도여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좋은 자로만 여길 정도로 치부되어버린다면 예수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이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찢뜨린 종이와 같은 극한의 한계로 되어버린다. 이는 결국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서 자칫 오해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아름답고 멋지고 나름대로 매력덩어리의 소유자로 생각할 수 있 는 상황에서 벗어나 반대로 너무 하늘의 마음을 닮아 맑고 투명한 나머지 이 땅의 세상 사람들과의 마찰은 고사하고 그와 같이 있으면서 심사가 편 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한 예로,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고 기도하는 집을 강 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는 행위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심기를 괴롭게 하는 언사를 내뿜는 동시에 더욱이 성전을 너희가 헌다면 사흘(3일) 후에 세울 것이라는 표현으로 말을 내놓는 예수에게서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는 것은 제 8 장 버려진 예수 351
자명하다. 그것이 십자가의 부활임을 모르는 채…. 수도 없이 화를 내거나 인내심 없는 우리와 달리, 좀처럼 그는 죄인들과 제자들의 잔치를 제외하고는 좌절과 분노를 잊어버린 듯 행동한다. 그럼에 도 유대인들과 마찰은 이어진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도 같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조차 어기며 환자들을 치료하는 그의 행 동에 분노하여 박해하기 시작했다.22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그야말로 자신들의 위대한 유일신이며 자신들의 죄를 매일매일 씻어 이방 인들에게 환심을 사게 되는, 그것으로 하늘의 이론을 내세워 마치 노벨상 을 차지하려고 하는데 예수는 그 이론과 반대되는 반론을 제기하여 유대인 들의 지식과 명예에 먹칠을 하는 찬물을 끼얹는 언사로 인해 그들의 분노 를 사기도 했다. 자신 주위로 모인 이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거들먹거리는 예수는 자신 의 입으로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냈지만 더러는 죽이며 박해하는 사실을 폭 로하고, 그와 더불어 유대 지도자들에게 선지자들의 무덤이라고 치부하고, 모든 선지자의 피가 이 세대에 담당할 것이고, 율법교사에게 지식의 열쇠 를 쥐고 있으나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들어가는 자들도 막고 서있다고 분 노와 논쟁을 그들의 도마 위에 올린다.23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따라오라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심히 괴롭게 한 다. 안식일에 앉은뱅이를 치료함으로 안식일에 일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위 배하기도 했다.24 유대인의 법이나 마찬가지인 안식일의 규례를 무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우를 범하는 실례를 무 릅쓰고서 무언가 나타내고자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세상에 저항하는 인 권 혹은 생명을 수호하는 자처럼 행세하고 유대의 명절날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곳도 골라 잡아 유대인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게 한 다음에 자신이 하 는 일이라곤, 고작 유유히 한 가운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버젓이 거닐기도 했다. 또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물론 한 나라의 왕이 존재하 352 버려진 예수
는데도 자신이 세상을 통치하는 진정한 왕이라고 하는 나귀 타는 모습 속 에 군중들을 선동하여 유대인들의 땅을 발칵 뒤집기도 했다. 예수라는 자는 일부러 싸움판을 만들어 논쟁하는 듯했다. 곧 하늘의 뜻 을 받아 그 이론을 펼치지 못한 채 자신을 따르라는 유대인들의 이론에 대 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너무 정직하여 세상과 타협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 세상이 가지고 있던 법과 질서를 흩뜨 리고 있었다. 하늘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부여 받은 자인 나사렛 청 년, 그가 유대인들에게 저주 받고 버려지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길을 가면 서 애굽의 열가지 재앙이 애굽 땅에 덮듯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누군 가의 재앙으로 묘사될 정도로 능한 예수가 이제 자신의 능력을 끝내 가리 고 있었다. 급기야 우리 인간의 두뇌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평생의 두뇌 를 사용하지 않고 죽는 것처럼 예수 안에 펼쳐진 하늘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여 쓰레기에 버린 꼴이 되고만다. 십자가에서 말이다. 사실 예수의 메시지나 그의 행위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존재 임에도 그를 탐탐케 여기지 않은 자가 많다는데 의아하게 만든다. 그토록 우리는 예수가 친근하며 사랑스럽고 포근하고 그의 모습만 보아도 설레는 마음이 들어야 정상인 듯 보인다. 헌데 이제 자세히 그의 진면목을 들여다 보니 그는 외톨이였고 핍박을 받은 죄악에 가득한 세상을 바꾸려고 마치 금은 보화가 가득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을 그러 한 마음으로 동일시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이상한 몽롱가로 비춰질 뿐이다. 그러한 혼자만의 세계를 누리고 바라보고 인내하는 착각에 빠진, 소위 오늘날로 말한다면 4차원 세계에 살며 이상한 사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 한 자신만의 세계에 취해 사는 몽롱한 사상가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수는 세상을 자신의 손바닥처럼 보는 듯한 착각에 헤 어나지 못하고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 제 8 장 버려진 예수 353
고 그러한 모진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은 정도노선이라는 것을 눈씨코 찾 아볼 수 없는 고지식한 자로 비춰짐에 불안감이 휩싸인다. 협동과 일체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집합적인 공동체를 선호하는 유대인 들과 달리 그는 갑자기 새벽녘에 사라져 혼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예수는 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외톨이임을 성경을 통해 비춰지 고 있었으며 그는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행복해했다. 세례를 받은 후 예 수는 갑자기 광야로 내몰려 그는 사단과의 싸움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동 시에 세상 앞에 자신을 겸손히 드러냈다. 사단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저 그의 부하일뿐이라고 치부하고, 사단의 곁에 있기를 거부하고, 그럼에도 시험을 당하는 것에 익숙지 않던 유대인들과 반대로 사단과의 싸움을 마치 재미를 맞보려고 기다리는 링 위에 권투선수처럼 별종에 가까워 좀처럼 찾 아볼 수 없는 인물로 사복음서는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유대 문화와 제도 에 동떨어진 일이 되었지만 이들의 눈에는 기이한 자로 비춰지기도 했다. 비로서 내게는 예수를 내가 알고 있던 규격화된 네모난 상자에서 이제 어떤 형태의 성격과 사상을 상자 안에 두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게 되 었다. 내가 어릴 적, 예수에 대한 성경공부를 할 때 그는 외톨이였다는 말 은 들어볼 수 없었다. 게다가 술자리를 좋아하는 방탕한 자 혹은 유대인들 에게 저주 받은 몹쓸 상종치 않아야 할 인간들과의 식사시간들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 유대인들의 눈에 황당하게 보여졌다. 그는 오히려 그 시간 을 즐기고 있었다. 예수가 살았던 당시 그의 기이한 행동과 이상한 언사를 비춰지는 유대인들의 상황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즉흥적이며 여흥을 즐기 고 사람들과 대화를, 그것도 유대인들에 비친 죄인들, 이방인들, 여인들과 잔치 위에 잔치를 벌리는 이야기꾼이자 사기꾼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포도주 술과 떡 같은 음식들 위에서 신중하고 긴장되어 늘 하늘 을 내 맘대로 쳐다볼 수 없는 유대인들의 영역가운데서도 예수는 죄인된 친구들과 즐기고 또 즐기며 마시고 또 마시는 삶 속에서 이야기의 꽃을 피 354 버려진 예수
우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버렸다. 이러한 이상하게 비춰지는 예수 의 참 모습을 과거에 가지고 있던 예수의 상에 추가적으로 담으려니 영 거 북스럽기까지 하다. 이제 예수를 어딘가와 비슷한 자로 만들 수 없다는데 실망감이 들었고 더 나아가 그를 형틀에 고정된 자로 만들 수 없다는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를 좀처럼 유추할 수 없는 답처럼 내 안에서 과연 우리가 알던 예수를 다시 써야 할 숙제처럼 남겨야 할 지도 모른다. 스스로 버려지는데 너무 익숙하여 제자들 몰래 한적한 곳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위로 했어야 했을까? 그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 찍힌다. 유대인들의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늘 꺼리는 것 중에 하나다. 유대인 공동체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이 기 때문에 더욱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외톨이라고 볼 수 있기도 했다. 유 대인들은 대대로 나라의 개념보다는 주로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해 나갔다. 늘 같이 행동하고 같은 사상과 마인드로서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가는 보람과 뿌듯한 결실을 맺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유대인 은 언제나 공동체에서 배제되었다. 혼자 되어 남겨진 것에 익숙한 한 청년 을 우리는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유대인들 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로 치부됨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예수로 인해 추 후 그를 비롯하여 유대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동포들에게 배척당하나 다시 돌아온 사도 바울도 회당에서 쫓겨나듯 나가야 하는 심각한 상황까지 이르는 걸 보면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제사를 지내거나 예루살렘에 들어설 때 집에서 예배 드리거나 밥을 먹을 때도 늘 언제나 그렇듯이 유대인들은 손을 씻었다. 그 것이 하나님께 향한 자신들의 신뢰이면서 믿음이고 언약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기 위해 또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기 위한 일련의 행사로 손과 몸을 씻는 것에 치중하는 유대인들을 꼬집고 제 8 장 버려진 예수 355
있었다. 겉에 있는 몸을 씻는다 한들 물질과 향락에 중점을 두는 내면의 세 계를 끄집어내어 거짓과 우상숭배하고자 하는 내면의 마음 속에서 나타나 는 그들의 행위를 더 날카롭게 비판하여 유대인들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핵심을 찌르기도 했다. 그렇게 불편한 마찰은 수도 없었다. 그런 비판 가 운데에도 예수는 유대인들처럼 안식일 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설교도 하였으며, 평일에는 가난한 자나 아픈 자들을 위로했으며, 좋은 일과 선행 을 베풀라는 좋은 마음을 지니고 다녔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세례 를 베풀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용납될까? 그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자신을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느낌은 유대인들에 게 어떻게 느껴질까? 내게도 그 사건들은 당황 그 자체였다. 이러한 사실 을 받아들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지울 수 없는 예수의 또 다른 모습 과 그러한 인상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단 말인가? 인간이라면 죄인 취급 받 기를 주저하고, 그러한 영역에서 안간힘을 쓰고 벗어나려한다. 그에 비해 예수는 죄인취급 당하여 즐기고 있었다는 사건에 그냥 그저 넋놓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가? C.S. 루이스 혹은 필립 얀시 같은 기독교 최고의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그 러한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이방인들로 취급 받던 유대인 이외의 백성들 을 보살피고 가슴으로 끌어 않았던 것처럼 사랑과 믿음을 보여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에 대해 잘 모르는 백성에게 다가가야 하는 모범 을 보이신 자가 예수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과 말에 우리는 다시 귀 기울이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몸소 배우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유대인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죄인임을 고백 하면서도 우리는 모두 알다시피 죄인이었고 죄인과 친구였던 예수 덕분에 그러한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거하게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또 356 버려진 예수
한 자신들만이 구원 받을 것으로 여긴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 신의 울타리 안에서 노는 그런 무리들이 되고 있다. 이는 마치 또 다시 모 질게 부는 유대인들에 향한 분노와 비난의 메시지처럼 예수는 다시 그렇 게 당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또 다시 말 한마디에 상처 받 고 예수를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다. 성경에 조금이 라도 인내와 애착을 가지고 사복음서 모두 읽어본다면 동일한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버려진 예수’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최고의 사상가이며 자선가 혹은 최 고의 선생이라는 타이틀만을 생각했던 나에게 또 다른 예수의 부정적인 양 면성을 보이게 되는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그는 마치 유대 땅에서 늘 지켜 지던 관습과 문화에 도전하는 자처럼 여겨지고 이단취급 당하듯 그렇게 거 룩한 전쟁을 불사하고 있었다. 그 전쟁이 비록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비 난과 고통의 징을 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 전쟁은 이미 하늘에서 하나 님의 영과 사단의 영과의 영적인 전쟁의 서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과거 예수가 살던 로마시대에 버젓이 존재했던 이미지, 즉 다른 나라들 의 반란 주동자들 말고도 여기저기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꾀 하는 표징 예언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우두머리들이 오히려 유대 여러 당파 중에 하나였고 백성들을 이끌고 로마에 대적하고 유대인들을 동원하는 상 황이었다.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유대인들을 선동하 여 수많은 무리들을 꾀어 군중을 모아 자신에 속한 집단의 무리 안에 가두 던 주동자들처럼…. 그러나 그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그러한 칼과 창 을 들고 싸우는 전략에서 벗어나 동떨어진 전략이 있었다. 고작 열두 명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자신을 따르던 기적과 음식에만 눈독들인 우유부단한 성격들의 무리들만 선택했다. 비록 70인을 선택한 흔적과 함께 말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성전을 불과 몇 안되는 자신의 열 두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생각과 행동에 반하여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제 8 장 버려진 예수 357
자들을 동원하여 유대를 장악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저주하고 있는 로마 군 인들을 몰살시키거나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게 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에서 도 사단의 유혹을 거절하듯 그는 그렇게 바짝 엎드렸다.‘죽음’이라는 단 어를 취한 것이다. 일순간에 세력을 확장하여 단숨에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피와 땀 이 서려있는 급진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새벽 이슬이 낙엽에 조금 조금씩 알게 모르게 침투하듯 이 땅의 육적인 대지를 영적인 세계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듯이 그렇게 점증적인 하늘의 세력 확장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마치 로마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자신의 세력을 차쯤 넓혀 마침내 세계 유럽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는 거대한 민족으로 변모하듯 어쩌면 그의 세계 도 작지만 하늘에서 자신의 세력을 차츰 넓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고작 열두 제 자를 세웠고, 그마저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처럼 여겨져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십자가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지 못하고 도망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그의 나라는 비운 속에 비친 초라한 세계같이 보 였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순조롭지 못하고 슬픈 운명, 그 가운데서도 그는 세 상을 구원하는 방법을 이제 달리 하려 한다.‘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방법으로서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하며 그것들을 선택 하게 몰아간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절대적인 스승이자 예수라 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선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 었다. 그 방법 말고 다른 전략으로서 승부를 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융통성 없는 예수가 경계하고 꾸짖는 모습도 복음서에 비 췄다. 그는 이러한 강경한 자세로 이를 침묵으로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그 의 곧은 자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구약의 하나님과 마치 상반되는 듯 358 버려진 예수
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에 유대인 지 도자들이 동요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유대인들과 의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일 거수일투족을 살피고, 그렇게 그들을 따끔하게 흠을 지적하여 말하는 그에 게도 다른 면인 유대인들을 옹호하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는 유대인들을 향하여“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 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5라고 외치는 그의 또 다른 모습 을 보는 상황에도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가 보기에 하나님을 향한 모습이 때론 너무 지독하게 보인 듯 구약에 내려온 전통을 잊지 않는 광경도 보았 다. 유대인들에 관점에서 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믿음에는 그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자가 없기에 지독했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 눈과 맘에 들어야 하는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 고, 만약 하나님의 눈과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을 행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즉시 회개하고 야훼 하나님께 돌아오는 지극히 당연하고 일관된 삶을 살아 온 자들이다. 물론 일부는 예외하고서라도…. 하나님 관점에서나 이방인들의 관점에서도 인정한 그들임에도 결국 유대 인들은 하나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이방인들의 신을 섬기고 다른 여인들 을 탐하고 부와 재물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예언자와 선지자들의 말에 귀담아 듣지 않고 남몰라 했던 그들이었기에 예수가 오게 되는 누를 범하 지 않았는가? 이러한 메시지는 당연히 자신을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을 향하여 칭찬하 는 모습 속에서 그는 진정 구약에 필요로 하는 유대인들의 마음과 절차와 규례를 인정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그의 언사를 통해 참고할 수가 있었 다. 그는 죽음과 삶의 선택의 기로에 서서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검어 쥘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발을 스스로 죽음의 길에 서서히 들여놓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었다고 말이다. 자신은 그저 하늘에서 선택 제 8 장 버려진 예수 359
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았으며 반대로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행복하면서도 안타까운 소명’이라는 단어에 중점을 두고 싶어했다. 이는 역설이 아닌가? 제자를 선택하여 섬기며 가르치고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들을 꾸짖고 마지막에 가서는 죽음을 맞보는 것까지 선택해야 했던 예수! 그 이상의 것 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닌 주어진 일에만 묵묵히 수행하는 자로 남는 것에 진 정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연히 증명하게 된다. 게다 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되었다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중에 요한을 통해 드러낸다. 즉 자신을 증언하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 (구약의 선지자 들, 요한, 바울, 제자들, 초기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존재와 죽음을 동시에 추구하여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나가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먼 미래를 보았다.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데 결정적 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버림받아 저주와 비판 그리고 죽음, 마지막에는 부활이라는 절차를 선택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따르던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그는 그런 곧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 가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음에도 자신을 영접하지 않고 버림받는 것에 놀랍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왕의 말을 전하는 신분으로 백성들에게“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과“회개하라”는 단순 진리를 공포하려는 예수의 참된 마음을 몰라주고, 예수의 사역에 제동을 걸고 거 부하여 자신을 저주하는 백성들에게 그는 동요하거나 마음의 미동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을 보여주듯 죽음을 앞 두고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말이다. C.S. 루이스는『고통의 문제』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고통과 기독교 에 놓인 시련에 관한 역설을 보이고 있었다. “기독교는 제가 지금까지 묘사한 바, 인간의 오랜 영적 준비에 뒤이어 360 버려진 예수
일어난 격변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것은 고통이라는 거북한 사실을 끼워 맞춰야 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자체가 우리가 만들 어 낸 어떤 체제에든 끼워 맞춰야 하는 거북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입니 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 들어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26 실제로 예수의 사후에 벌어진 기독교인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고통의 문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해결하는 것보다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이 땅 위에 경험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실제였다. 그렇기에 그 말에는 고통 이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 지 못하는 적은 마음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고통의 열쇠를 열지 않고 그 고통을 만들어내어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 이는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고통의 문제이다.‘모든 고통 과 저주를 받고 게다가 하나님으로부터까지 버림받은 자’라고 외치는 유 대인들의 말 속에서도 그저 물이 흐르듯 인정하며 자연과의 이치를 받아들 이듯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음에 그런 자가 존재할 지 모르는 바이다. 내게 예수의 역할을 맡긴다면 아마 잔을 엎고 뒤도 안돌아보고 달아났을 것이 다. 그는 세상을 향한 진노 대신에 죽음을 이제 서서히 선택한다. 매일매일 죽음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그는 분노대신에 침묵을 선택한 다. 그 침묵 사이로 예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여 부활로 승부를 거는 쪽 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 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원하는 하나 님의 소리에 더욱더 예민해가고 있음이 예수의 진정 참다운 삶이었다. 그 는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두려움의 독잔’…,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는데 익 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위해 태어난 청년 예수라고도 제 8 장 버려진 예수 361
할 수가 있다. 그것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할 수 있는 최선 의 방법이었다. 사랑스런 예수이기에 앞서, 그도 참혹한 죽음이 문 앞에 서 있었음에 나 자신도 잠시 몸서리 친 것처럼 만약 예수 대신 그 어느 누구를 지목하여 그 길을 간다고 시킨다면 동행할 수 있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뒷 걸음칠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 고통의 너머 푸른 지평선이 넘실 거리고 푸르른 풀 냄새와 지저귀는 종달새의 울음소리 같고 아름다움이 황 금으로 치장된, 그곳은 참혹한 죽음과 함께 하는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 라이자 그 찬란한 미래를 보았다. 먼 미래로서 우리에게 향하고 지금 속한 시대에서 자신을 바라볼 사람들의 눈을 미리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독잔을 과감히 마시는 선택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야 말았다. 애초에 우리와 다른 자였다. 그는 현대인의 무거운 짐과 깊고도 넓으면서 난해한 모든 과거 진리와 아브라함 언약의 피로서 갚는 어린 양의 피 대신 죽어야 이 일이 매듭지게 되고 현대인의 아픔과 고통이 자신과 하나되어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한 진 노의 잔을 드디어 종료됨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독보적인 존재임을 비로 서 느끼고 있던 자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실체를 남기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하는 스케치를 이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볼 것 이다. 특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앞으로 넘겨받고27 죽임을 당하기 전, 이들에 게 능욕당하고 침 뱉음과 채찍질을 받아 사흘(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28을 이제 때가 되어 제자들에게 알리지만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제자들에게 각인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 제자들은 십자가를 비켜가는 땅의 영광을 같이 누리고자 하였고 그러한 죽음에 인색한 제자들 앞에서“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 희가 마실 수가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가 있겠느냐”29라 고 오히려 따지고 있었다. 유대인들, 심지어 열두 제자들도 모두 다른 마음 362 버려진 예수
이 여전히 미혹되어 있음에 예수의 길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고 기록하 고 있었다. 내게도 동일한 질문이지만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실 수 있 겠는가? 그 일에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를 붙잡고 그 하나님의 일에 대 해 항변하자 예수는 사람의 일을 더 중점 두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일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함을 또한 각인시키고 있었다.30 분명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되어서 나아가면 갈수록 모든 자들이 그러한 짐을 대신 짊어질 자를 현재 찾는 것에는 애당초 포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신복인 제자들마저 자신의 죽음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동일시하는 상황에서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임을 예수는 이미 알고 있었 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McGrath31의『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의 저서 에서 예수 시절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실정과 현대인들의 교회 상황을 너무 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처럼 십자가가 진정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제자들이 말하듯 자신들도 하나님 영광의 자리 옆 좌우에 앉는 것에 혈안이 되었다. 그렇듯 현대인들의 개개인들이나 교회들의 삶과 행동 에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라는 루터 식의 접근 방식에 거북하게 받아들이고 비켜가려는 그들의 행동과 심리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맥그래스에 의거 자신이 몰랐던 십자가를 두고, 그러한 십자가는 하나님 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위치에 맞는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고 외친 다. 제도적인 형식에 그치는 유대인들의 회당이나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처 럼 현대인들의 제도적인 틀에 맞춘 교회만이 판단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비록 버거운 상대인 자신의 지저분한 잔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언급한 현명한 교회는 예수라는 교회의 머리와 같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매맞고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하 는 피와 땀이 서려있는 순교자들의 순고한 삶과 죽음을 맞보는데 있어서 제 8 장 버려진 예수 363
우리가 결코 측량치 못하는 예수의 짐을 함께 질 수만 있다면 세상과 함께 예루사렘성과 현대의 교회는 아마 예수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갈 수 있었 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 자신의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천사가 자신을 도왔던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 속에 하나님의 영(성령)과 같은 불의 힘을 빌리지는 않고서야 이 일을 마지막까 지 묵묵히 수행해야 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판별한다”Crux probat omnia!라는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그는 이제 십자가의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운명을 알고 비켜서지 않고 그 길 을 정면으로 승부하려 한다.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물과 피를 쏟아 부어야 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살이 뜯겨져 나가는 비참함에 몸부림 칠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었 다. 364 버려진 예수
▐ 8장 미주 ▐ 1. 요한복음 5:18. 2. 요한복음 10:30. 3. 요한복음 9:16. 4. 요한복음 6:66. 5. 마가복음 2:1~12. 6. 누가복음 4:24. 7. 누가복음 23:13. 8. 요한복음 8:58. 9. 요한복음 11:48. 10. 누가복음 17:21. 11. 누가복음 17:25. 12. 누가복음 6:32. 13. 누가복음 19:10. 14. 요한복음 11:51-52. 15. 요한복음11:50. 16. 잠언 31:10. 17. 마태복음 9:4. 18. 누가복음 20:9. 19. 요한복음 6:60. 20. 이사야 64:12. 21. 이사야 64:1. 22. 요한복음 5:16. 23. 누가복음 11:45-54. 24. 요한복음 5:17. 25. 마태복음 5:20. 26. C.S. 루이스,“고통의 문제”, 홍성사, 이종태 옮김, p35-36. 27. 마태복음 17:22. 28. 마가복음 9:31. 29. 마가복음 10:38. 30. 마가복음 9:33. 31. 맥그레스는 마치 C.S. 루이스처럼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 근처에서 생활 하는 북아일랜드 출신이다. 가히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라고 불리는 그는, 비록 문학과 과학이라는 상이한 학문임에도 그는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동 원하여 그는‘과학신학(Scientific Theology)’이라는 체계적인 발전을 도입 하려는 계획을 하는 놀라운 과학과 신학을 접목시키는 소유자이다.“예수를 아는 지식”(규장출간), 사도신경 해설 등의 많은 저서를 남기며 평신도와의 대화를 중요시하는 호흡 있는 자임은 자명하다고 한다. 제 8 장 버려진 예수 365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 … 그들(신을 두려워하는 자)은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큰소리치고, 주님의 아들들이라고 자처한다. … … ‘오직 자신들만이 행복하다고’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또한 될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하나님을 그렇게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실인지 보자꾸나! 그들의 비참한‘인생의 말로’가 일어날 때, 그때를 지켜보자. 정의로운 자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 그들의 원수에서 구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시험해보자, 심술궂음과 고문 속으로 그들의 이유 있는 차분성과 인내의 한계를 증명하자! 추잡한 죽음과 함께 비난하자.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한다고 할 게야.” - 『악인의 생각』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서 2장 - 신은 총체적인 강력함이 있다. 신은 모두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랑의 전부이다. 거기에는 물론, 고통이 있다. - Bart D. Ehrman in God’s Problem - 십자가 고통 당하사 버림 받고 외면 당하셨네 짓밟힌 장미꽃처럼 나를 위해 죽으셨네 나의 주 - Paul Baloche,“Above All”가사 중에 -
함께 나눌 수 없는 고통 고통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은 개인마다 육체를 하나씩 가 지고 있다. 그 고통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결코 육체를 나누어 고통을 교 환하거나 물물거래를 하듯 그렇게 쉽게 옮겨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것이 현실이 아닌가? 살을 째는 아픔 가운데 있는 고통스런 자를 두고서 상 대방은 그에게 다분히 위로를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아픔을 가져가지 못한 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예수는 인류라는 거대한 족속들의 고통을 모두 짊어졌다고 한 다. 무슨 말일까? 그러한 내용이 늘 기독교에서 공공연히 자행된다는 점에 서 나의 고통과 아픔을 짊어지고 대신 지셨다는, 그리스도인 나도 그 의미 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놓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이 수술 후에 찾 아오는 극심한 고통에 아파하고 아무도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도 없거 니와 짊어지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현대인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에게 구약부터 예언된 일이었지만 그 고통 역시 대 상이었던 당시 유대인들과 현재까지 살다가 죽은 모든 이들도 그 고통에 동참하지 못했다. 십자가의 고통은 오직 예수에게만 존재하는 발걸음인 듯 홀로 조용히 움직였다. 나에겐 그 고통을 알 수 없어 이내 성경을 꼭 끌어안지 못한다. 그렇기에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 어떠한 감정도 매마른 듯하다. 세상 사는 이야기를 거론하듯 또한 고통이 함께 찾아온 삶의 한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그 러하듯, 예수에게도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큰 고통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 다. 그 고통은 어느 누구도 짊어지지 못했고, 당시에는 함께 할 수 없었다. 또한 고통은 아픔을 당한 자만이 안다고 했던가? 실제 고통에 있어서 그 누군가 그것을 제공하는 전유물의 소유자가 있는 지 생각해 본 경우가 있었다. 친구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한 가 368 버려진 예수
지 기독교에서 기피하는 의문점을 이야기의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 았다. 과연 갓 태어난 아이처럼 새로이 기독교를 믿는 자들 혹은 이전부터 교회를 착실히 다니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가지고 성경을 어떻게 해 석해야 되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한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그야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라 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다른 자도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병과 고통 그리고 삶의 무거움 속에 기독 교인들은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다니듯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고통에 노출 되고 있다. 설령 인간이 고통을 만들었다고 한다 해도 방치된 대로 가만 내 버려 두시는 인자(?)한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진정 고통은 나눌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 앞에 인간이 겪는 고통은 참혹 하고 끔찍하다. 침대에 몇 년 아니 몇 십년을 누운 채 말없이 고통에 힘겨 워하는 투병하는 자 앞에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은 기 분 좋은 자들은 얼마나 될까? 가뜩이나 힘들어 하는 투병생활에 활력소를 주지 못할지언정 오히려 그런 대답 속에 찬물을 끼얹는 사실은 병을 더 키 우지 않을지 걱정된다. 아니 그 환자는 다음에 누군가가 문병 오는 것을 기 피할 지도 모른다. 때론 죄악이 질병과 고통에 놓이게 한 장본인이라고 하여 질병에 걸린 자들에게 회개의 촉구를 정렬적으로 퍼붓는다. 그렇게 고통이라는 것은 다 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거북스런 기피증을 유발시킨 다. 기적이 찾아오는 기쁨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아픔과 절 망은 가을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듯 그들의 마음을 주저 앉게 만들어 버린 다. 욥의 친구들처럼…. 대부분의 목사들이 언급하듯 고통에 대한 질문 앞에 늘 창세기를 들먹거 리기만 하는 정도에 그친다. 스스로 인류의 죄악을 모두 알고 있고, 고통스 런 절망 앞에 그러한 인류에 대한 죄로 뒤집어 씌우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69
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과연 고통이 왜 찾아 오는 것일까? 우리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시련을 이길 힘이 있지만 막상 당하게 될 때 거부감을 먼저 보이고 사력을 다해 그 것을 냅다 던져 버리기 일쑤이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달아난 무책임한 사 람이 아니고서야 선한 자에게도 고통이 내면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이 과연 정답일까? ** * 그 어느 날, 나는 어머님과 어느 도로에 방치된 채로 몇십 분을 움직이지 않고 차에 있었다. 그 때 내 나이는 젊디 젊은 20살쯤의 청년에 불과했다. 늘 급하신 성격의 어머니는 운전대를 잡고서 이리저리 불안한 채 어서 차 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눈에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뜸 “그렇게 급하시면 차를 돌리세요”라고 묻자“그래 볼까?”라고 어머니는 대 답하셨다. 그런데 그녀는 나의 말에 몇 초를 생각하더니 급기야 핸들을 돌 렸다. 사실 그 도로에서 180도 회전하여 반대 차선으로 옮기는 것은 엄연 한 교통에 위배되는 불법행위였다. 너무 급한 일정 때문에 그 사실을 잊고 우리는 위반자가 되어버렸다. 아니라 다를까 우리는 회전하여 반대 차선에 돌입하는 순간, 저 멀리서 차 한대가 막 오고 있었다. 그 차는 우리를 보았 는지 끽소리를 내면서 급 브레이크 제동 소리와 함께 운전석 옆에 있는 나 의 옆문을 냅다 걷어차 버렸고, 우리는 그렇게 아찔하게 충돌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우리를 받은 운전자는 고개를 숙인 채 우리를 보지 못했다. 내게 들리지 않는 어머니의 심장은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안절부절 불안해하 고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침착하게 조용히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의 말 한마디 때문이라는 단어가 나의 뇌리를 스 치며 떠나지 않고 맴돌기만 했다. 다행히 어머니와 나는 아무런 몸에 상처하나 없이 무사했다. 그러나 우 370 버려진 예수
리를 받은 운전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겨우 부셔진 내 옆의 문을 힘겹게 열고서 야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고개 숙인 운전자에게 향했다. 충돌로 인해 꽤 멀 찌감치 떨어진 상대방 차에 도착한 나는 창문을 두드렸고, 그분은 마치 유 령을 보듯 나의 눈을 응시했다. 그분은 그제야 한 숨을 쉬고 창문을 열었 다. 우리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을 눈치챈 그를 보며“괜찮으세요?”라고 물 었고,“혹시 다치신 데 없으시죠?”라고 묻자 그분은 긴장을 풀며 나를 향했 다. “네! ~ 저는 괜찮습니다!” 시종일관 그분은 우리의 안전에 고개를 연신 갸우뚱하면서 이상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실제로 그분은 나중에서야 우리가 죽은 줄 알고 고개 를 들 수 없었다고 했다. 경찰 역시 그 사건 앞에“기적이 아니고서야~”라 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저 기적이라는 단어만이 그분들의 머리 속에 맴돌 뿐이었다. 사실 기적보다 더한 것은 나의 작은 말 한마디의 실수로 인해 나와 어머 니, 그리고 그분의 목숨까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작은 실수로 인해 우리 모두는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다행히 모두가 입원할 정도는 결코 아 니었고 가벼운 목의 통증만이 그 때의 사고 후유증을 말해주었다. 몇 주가 지나도록 상대방의 다른 통증이나 질병을 발견하지 못해 다행이었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질병과 고통을 야기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을 알아채는 귀한 교훈이었다. 고통이 인간에게 먼저 찾아오는 것보다 고통의 순간, 그 이전에 하나님 에게 먼저 다가서는 것이 먼저였다. 모든 일에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연결 시키려고 노력했다. 작은 실수와 허물을 가진 맹인을 이용하여 그 자신의 죄와 질병을 결부시키려는 제자들에게“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 타내려”1는 의도를 보이고 있던 예수와 사뭇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다른 마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71
음을 품는 듯하다. 한 낫 작은 실수로 고통과 질병이 찾아 올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알지 못 하는 어떤 범죄자가 우리를 공격하기 전까지도 그러할 수 있다. 이유야 어 째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로 시작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자동차에 앉았던 내 옆에 창이 깨지지 않아 긁힌 자국 하나 없었지만 문 은 완전히 부셔졌다. 그때 멀쩡히 살아 있는 나는 하나님께 미안해하면서 도 고마워했다. 그 감사는 중앙선을 넘어 돌면서 마주선 차에 충돌할 때 그 무언가가 나를 막아선 느낌을 받았고, 그 순간 그 충돌에 감사했다. 물론 창세기에 고통과 고난의 시작은 하나님과 같고자 한 개인의 잘못된 선택과 욕심에서 출발한다. 또한 고통이라는 단어가 아담과 하와의 사건에 결코 연관을 맺어 보려 해도 고통의 원인 제공에 대한 어느 한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전에 보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 하여 땅에 충만하라2는 좋은 결과물을 주었다. 땅에 기는 가축과 들짐승들, 인간이 다스리기에는 버거운 하늘을 나는 새들과 곤충들, 또한 바다 속에서 일분도 채 버티지 못하는 인간이 바다 속 까지 사는 모든 식물과 어류들을 모두 다스린다는 놀라운 범위의 다스림은 인간에게 대단히 놀라운 성과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기뻐했 음은 창세기에 잘 나와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 모두 늘 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 창조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자들에게 그저 질 병과 고통을 마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사건과 인류의 죄악을 연결 고리처럼 결부시키려는데 너무 강조하여 그 사건 이전에 대한 하나님의 창 조 목적과 그 통치를 위한 전개를 잊고 만다. 게다가 한 가지‘선악과’라는 인류의 죄악 앞에 할말을 잃을 정도로 거대 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은 일류가 살아온 이래 가장 문제시 되는 협의해 야 할 의제이자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의문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선 372 버려진 예수
악과 사건은 악한 뱀의 말(?)을 들었던 그 순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하 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내면의 욕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 곧 히브리 어 원전의 의미로‘좋은(선)’그리고‘나쁜 의미(악)’를 동시에 알게 하는 나무를 건드린 죄로 인해 두 가지 내용을 수반할 뿐이었다. 그것은“종신토 록 수고하는”3 남자와“잉태하는 고통”4의 여자로 두 가지를 받게 된다. 남 자는 아내를 얻음으로 여자를 다스리며 힘겨운 부부 싸움이라는 전쟁을 치 러야 하고, 너무나도 풍부했던 에덴동산과 달리 땅의 저주로 먹을 것을 위 해 땅을 갈고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어 그 영양분을 통해 먹어야 사는 참혹 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그에 반해 여자는 남자와 사는 동안 출산의 고통을 가지게 되면서 사랑스런 자녀들을 돌보며 남편을 죽을 때까지 사모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고통의 원인을 창세기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섬 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취한 후부터 그 고통이라는 단어는 주위를 휩쓸고 지나가며 인간 스스로를 괴롭게 했다. 자업자득이라 했던가? 그렇 게 아담과 하와에게 살아가는 고통을 더하였을 뿐 질병과 아픔에 대한 고 통이 죄와 결부된 것은 절대 아니다. 더한다면 남편과 아내가 사랑싸움이 라는 무대의 링에 오르는 순간, 늘 해왔던 대로 서로 책임전가하며 미안하 다는 말 한마디를 두고 사랑과 전쟁의 기나긴 시간 싸움에 돌입한다. 그렇 게 여자가 건네준 사과를 먹음으로 인해 벌을 받은 남자는 여자에게 책임 전가하고, 그 여자는 사단이라고 하는 뱀에게 책임 전가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로 인해 사단이라는 존재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에 그친다. 우리는 이런 사실 앞에 고통이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는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이외에 성경에서 제공하는 오늘날의 다양한 질병, 즉 암, 에이즈, 바 이러스 관련된 알레르기, 세균, 당뇨병, 영양실조, 호흡기 질환, 백혈병과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73
같은 인류의 질병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다. 대신 남자와 여자가 가 지는 수고와 해산의 고통 속에 인류는 그것들이 계속 내려져 왔다. 그러나 사회 생활의 무수한 변동이 인류에게 질병을 야기시키고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세계 인구를 줄게 하는 영향을 가져 온 것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그전에 갖지 못했던 부와 명예 그리고 쾌락이라는 질병을 입에 달고 살 듯 그렇게 행함으로 고통의 순간들이 점차 증폭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했다. 또한 해일이나 폭풍으로 인 해 경악하게 되는 자연현상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 고 겨우 넋 놓고 구경만 해야 하는 실정이다.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5 아 담과 하와의 과실이 그 원인이었다. 다른 유대인을 보자. 욥은 죄악을 범하여 질병이나 가족의 죽음 게다가 제물의 몰락까지 경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선한 영을 가진 하나님과 악 한 영의 존재인 사단 간의 내기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결국에, 죄악을 통 해 질병이 들어오는 것보다 하나님과 예수와 대면했던 사단에 의해 자신의 몸을 혹독하게 저주 받은 것에 의미가 있다. 실제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욥에게 인생의 고난과 역경이 단순히 그의 죄 때문이라고 질 책했다. 사단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몰아간다. 오류의 사고를 가진 욥의 친구들과 달리, 욥기 마지막에 가서 등장한 하 나님은 욥에게 죄 때문에 질병과 가족을 잃은 슬픔이나 재물의 소유욕 때 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했던 사단의 간계6처럼“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 나님을 경외”하느냐고 사단의 시험을 부추기는 역할에 동조했을 뿐이다. 또한 진정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궁금했었을 충동도 가지고 있음은 하 나님과 사단의 대면 속에 피어났던 대화를 참조하면 알기 쉽다. 물론 욥에 게 고통이라는 단어에 더하여 자신이 가진 의구심과 경계심 그리고 자신의 죄 없음에 대한 잘못된 통찰력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 라고 선을 그으신다. 그렇게 질병과 고통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까닭 없이 374 버려진 예수
다가왔다가 아무 일 없듯이 사라지곤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불연듯 스치고 지나간다. 이상하게 여길지 몰라 도 하나님도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을 허락하여 세상의 뜻과 하나님의 뜻 을 대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한 점이 회의론자들에게 성경의 오류 를 파헤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어린아이에 게 불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주기 위해 불 곁에 데리고 가서 결코 다가서지 말아야 하는 단순한 가르침인‘뜨거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경계해야 할 고통의 시기가 필요하다. 우리 몸은 뜨거움에 대한 고통이 무엇인지 스 스로 알고 있다. 펄펄 끓는 온도에 손을 담그는 날에는 그 고통이 느껴지고 그 시간이 길어지고 만다는 것은 국민학생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사람이 외적인 일로 번민할 때, 고통 의 원인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그의 관점에 있다. 인간에게는 언제라도 관점을 달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듯 고통의 원인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스스로 몸을 수습하지 못한 채 질병이 들어 오도록 방치하여 추스르지 못하거나 차가운 공기를 오랫동안 쐼으로 인해 콧물과 기침을 야기할 수도 있으며,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의 면역력을 높 이지 못하면 몸에 축적된 나쁜 성분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지 못해 이내 몸 은 건강치 못하고, 비대해 둔해진다. 세끼 먹는 음식 속에 나쁜 물질들이 몸에 싸여 축적된 침전물들로 관절 과 뼈마디를 쑤시게 한다. 일례로 짠 음식과 아주 매운 음식으로 다른 질병 을 유발하고, 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많아 질병이 올 수도 있다. 용기 있는 자들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지만 그것에 방치한 마음을 간직한 자는 고통과 질병이 수도 없이 찾아오고도 남는다. 질병이 다가온 후 꾸준 한 운동을 통해 이겨낸 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질병과 다른 선천적으로 찾 아오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에 해당사항이 없는 듯하다. 그럼으로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질병을 찾아온 자들에게 그 어떤 사유로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75
서 다소 간단한 원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유전이라는 습성이 남 아 자녀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도 무시 못하는 결과로 남는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거나 함유하지 말아야 할 그 어떤 치명적인 물 질을 자신의 몸에 남겨둔다면 결혼 후에 발생하는 자녀에 대한 질병의 원 인 제공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을 만들어낸 신에게 불행과 고뇌라는 화살을 쏘아 붇는다.“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런 신이 되고 싶 지 않다. 세상의 불행과 고뇌는 나의 마음을 찢어놓곤 한다.”라고 심경을 고백했다. 그러나 오해를 사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 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병을 선사하여 우리와 관계를 끊어 놓고 싶어하시는 분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지 않는 이상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상대적일 수 있다. 우리는 질병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몸을 부르르 떨듯이 그렇게 울부짖 는다. 왜 내게 질병이 찾아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정 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이다. 하나님 과 나와의 관계성에 흠집이 생겨 혹시 교육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상기시키 는 것을 요구하는지, 아니면 나의 잘못된 일시적인 선택으로 인해 질병을 유발시켜 스스로가 고통에 방치되어 놓았는지 지금 바로 이 순간 고민해야 할 때이다. 한편으로는 고통도 인간의 몸에 좋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경세포라는 물질은 우리 몸에 그 어떤 충격이나 찢겨짐에 예민한 반응 을 보인다. 외부에 있는 피부라는 물질에 수 많은 신경세포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 많다. 그런 물질이 외부의 충격이나 약 한 흠집이라도 나는 날엔 뇌에 반응을 전달하여 상처가 있다는 신호를 보 낸다. 그 신호가 바로 고통을 알게 하는 것이다. 화학 작용을 하는 간은 고 통이 없어야 하기에 신경세포가 없다. 화학물질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기 376 버려진 예수
에 신경세포가 없이 우리 몸에 들어온 화학 물질들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 는 중요한 기관이다. 이런 다양한 기관들의 합작품인 몸은 고통을 통해 반 사신경처럼 아픔을 느낌으로서 환자들은 의사를 찾거나 아픈 곳을 알게 된 다. 그래야 우리 몸은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배고픔이라는 쓰 라린 고통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말없이 죽고 만다. 고통을 모르는 것도 유익한 일은 결코 아니다. 배고픔이라는 쓰라린 고 통과 같은 인지능력에, 만약 그런 기능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발에 상처가 났는지 혹은 어느 순간에 발이 찢겨져 나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고통 앞에서 서기도 하는 인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아주 중요한 기관이고 기능의 일종이라는 것은 의학서적을 본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다. 회의론자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질병과 고통에 방치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맹공격을 퍼붓는다. 누가 우리를 창조하였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악의 기 원 때문에 질병을 야기시키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고민하는 자들은 오늘도 늘어만 간다. 이들에게는 성경이 가져다 주는 중요한 교훈은 잊고, 다만 전 면에 부각된 질병과 고통 그리고 악에 대한 문제만을 삼고 추적해 들어가 난해한 질문을 연신 신문 찍어내듯 쏟아 붇는다. 에밀리 디킨슨은 십자가를 통해 의심을 극복하고 가물가물했던 신앙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다시 피워 올리기도 했고,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히 틀러에게 저항하여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고통에 버거워 하는 현대 그 리스도인들에게 전쟁과 죽음 앞에 방치되어가기 전, 인류와 유대인들의 고 통 앞에 교수형을 택한다. 십자가로 인해 고통을 감수하는 그들의 선택에 많은 자들은 그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16세기 전염병에 노출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한 것으로, 그 의문에 싸였던 피부에 오르는 고름을 통해 저술가 헨리 나우웬이 발견 해 낸“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흔적을 남겼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그의 말에는 고통으로 뒤틀린 몸과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77
찢어진 상처와 곪아 터져버린 수치스런 버림과 외면들 속에 영혼의 어두움 을 이겨낸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고 감격해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저술한 존 스토트 역시 마찬가지로 고통과 절망 그리고‘주저앉음’이라는 그런 상황을 통해 십자가를 중요시하는 것과 동 시에 십자가가 하나님을 믿게 된 바로 그 진실이자 믿음의 통로임을 밝히 고 있었다. 단순히 십자가를 고통으로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 미지에 우리는 방치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짐짓 고통이 예수와 연 관이 서려 있을까? 예수가 고통을 끌어 앉았을까? 아니면 소위 그 쓰라리 고 지저분한 고통이라는 것이 예수를 감싸안았을까? 종려 나뭇가지 유대 백성들의 분노와 시기, 그리고 우울한 질투의 향연이 피어 오르는 시점 가운데, 예수를 보러 몰려온 무리들은 아직 예수가 죽는다는 것을 모 르는 듯 어디선가 환호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 하늘을 보며 구약 의 하나님 야훼 말을 대신 전달하여 자신을 하늘에서 온 자라고 한 예수 앞 에 유대 군중들은 둘러 싸여 있다. 그러한 과거 엄숙한 선서 가운데 대다 수가 그를 바라 볼 때 알게 모르게 이들 유대 백성들은 마음이 흐뭇해 하고 있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이 땅 가운데 비천한 동네에 몸소 행차한 그를 귀한 왕 으로 대접하고 예루살렘 성에서 영접하는데 기꺼이 기뻐하며 환영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려 한다. 이 때 유대인 대부분이 그를 진정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마음보다는 그를 환영하는 마음이 더 커진 듯하다. 이미 종려나뭇가 지의 사건에서 볼 때 예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사복음서에는 모두 이 장면이 나오는데 그만큼 성경의 저자들은 이 사실 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어쩌면 예수를 잠시나마 우 리 모두의 왕으로 추대하고 대우하였다는 사실에 저자들은 하나같이 동의 378 버려진 예수
한 것 같다. 과거 예수는 늘 백성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의 군중들에 둘러싸 이는 것이 예민한 듯 피하더니 이제 만찬과 죽음의 때를 눈 앞에 두고, 그 는 자신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반기는 듯했다. 그 러한 순간적 상황을 적절히 묘사한 구절로“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 다!”7라고 외치면서 예수의 사건들에 날카롭게 대립되어 저주하는 바리새 인들의 입에서 놀라움의 탄성 혹은 비난의 역겨운 소리가 동시에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하나님도 기뻐했을까? 그때는 오늘날의 시장 분위기처럼 이미 수많은 군중들의 틈 사이에서 발 을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 매어있는 사람들이 이 장면들을 보면서 과연 예루살렘에 귀하고 유명한 왕이 드디어 탄생했다는 의문과 호기심으로 놀 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흥겨운 잔치와 파티 같은 놀 라운 사실 뒤에 숨겨진 이면의 피 흘림과 잔인한 형벌이 떡 하니 서있을 줄 이야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앞으로 자신들의 왕이 어떻게 처형될지 누구 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며‘호산나!’라고 외치던 자들의 환호 뒤에 유대 지 도자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모든 것이 유대 땅 뒤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아직 이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유대 지도 자들은‘권위’에 대한 예수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어찌하든 이 수 많은 군 중들 속 사람들의 마음들이 서로 융화되어가며 예수의 입성은 이제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소식이 이미 널리 펴져 유대인들의 축제이자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에 그가 온다는 소식으로 이미 그를 보려 무리들이 성전을 둘러싸고 있었다.8 예수는 이때, 이미 유대인들에게 영웅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적인 치유능력과 죄사함, 오로지 말로 아픔과 죽음까지도 고치는 전대미문의 사 건들, 유대인들의 삶과 고민을 들어준 최고의 지성인이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 예수는 특이하게도 예루살렘 입성하기 전, 당시 주위사람들에 비춰 지듯 유치한 일을 제자들에게 시킨다.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79
자신이 쓰고자 하는 나귀를 가지고 오라는 명령9을 말이다. 언뜻 보면 이 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은 마치 순간적인 이벤트를 좋아 하듯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행위를 시킨다. 예수의 명령에 준행하면서도 이상한 의문을 가졌을 법한 이들의 다양한 생각을 배제한 채, 곧 나귀를 구 하여 오는 제자들 앞에 예수는 결국 그 위에 올라앉는다. 아직 예수의 허 황된 일이 독특하지만 겸손한 행위로서 제자들과 무리들이 지금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해 모르고 있는 상황10에서 주목할 것이 하나있다. 바로 나귀를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야 예언을 연출한 것으로 구약성경 스가랴의 예언을 보여주려는 사안으로 비취진다. B.C. 520년경에 예언자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학개라는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스가랴의 예언 중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어 겸손한 모습을 한 자 가 나귀 새끼를 타고 등장하는 왕으로 묘사하는 행위11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예수행위는 결론적으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초기 유대인들의 왕정 시대에는 왕이 타기에 알맞은 것들을 찾았고,‘노 새’라는 짐승을 타고 등장하곤 했다.12 또한『역사』를 집필한 최초의 역사 가 헤오도로스Herodotos, 그의 서적에서는 고대 리디아 왕 코로이소스가 페르 시아인들과의 전쟁 여부를 놓고 당시 델포이 신탁을 의뢰하면서 노새와 왕 권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퓌티아의 예언을 수록하고 있다.“노새가 메디아 인들의 왕이 되거든, 발이 부드러운 리디아인이여! 그때는 지체 없이 자갈 이 많은 헤르모스 강을 따라 도망가라!”13는 예언을 통해 사람이 아닌 노새 가 왕이 된다는 터무니 없는 예언 이야기를 믿는 왕으로 등장시킨다. 그 언 급을 통해 당시 고대에는 노새를 왕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을 보여준 다. 노새가 끄는 마차를 사용한다면 위엄과 통치를 나타낼 수 있지만 스가랴 가 예언한 내용을 상상한다면 그 위엄과는 전혀 반대로 나귀 새끼를 앉아 380 버려진 예수
등장하는 조금 우스운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 말보다 2배 가량 비싼 노새 에서 결코 뒤떨어진 저렴한 나귀를 이용하므로 왕의 위엄은 떨어지지만 왕 의 위치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다른 문서, 즉 아키드문서에서 나귀 를 이용하여 등장하는 왕을 볼 수가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진정한 왕으로 등극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14 뭐 어째든, 그러한 예수가 취한 행동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사랑으로 그 려지는 행위를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더불어 예언에 대한 성취를 배가 시키는 작전임은 학계에서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더한다면 주위에 있던 로마 군사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아마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 한 사건이 추후 파란을 예고하는 신적 모독과 십자가 사건의 시작을 알리 는 신호탄이 될 것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수도 있을 것이 다.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이러한 이상한 광경 가운데 부러운 듯한 표정과 우스꽝스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혼란스러운 해프닝을 보는 매력에 빠진 듯 하다. 어린 나귀를 대령하고, 그 위에 앉은 예수가 가는 길에 자신들의 겉 옷과 들에서 잘라온 나뭇가지를 바닥에 깔고, 드디어 종려 나뭇가지를 흔 들고 소리지르는 장면을 보면서 왜 유대인들이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지 모른 채 그냥 넋놓고 보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로마 군중들 사이 로 시작된 퍼레이드는 정점에 달아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수 많은 관중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 심리적 상황과 정반대로, 모든 유대인들이 이 상황을 마치 왕으로 오 시는 메시야로 예수를 인지하고 알고 있듯이“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15라고 대지를 울리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만은 더 이상 암울하고 불행한 순간들이 사리지고 환호와 희망이라는 깃발만이 예 루살렘의 불안과 혐오, 예루살렘의 함락이 곧 불어닥칠 로마 식민지의 잔 인한 현장에서 잠시 멀어져 가는 듯 펄럭이고 있었다.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81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제서야 이해한 듯 두고 보지 못한 채 분 개하고 있었다. 이들의 환호와 희망의 깃발을 내려놓게 하고 싶어하는 그 들의 음모와 시기 속에서 예수는“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에게 소리지르게 할 것이라”16라고 괴변을 늘어놓아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상한 것은 과거 자신의 신변을 노출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사람처럼 쉬 쉬하던 그가 이제 이 상황을 방치한 채 유대 백성들의 환호와 함성을 그냥 내버려 둔다. 마치 잠시 후 자신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이러한 행복한 순 간을 만끽하고 싶은 양 모든 것을 겸허히 수용하는 듯했다. 추가적으로 이런 희망의 나팔 속에서 예수는 단 한가지 독특한 행동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장차 예루살렘 돌 위에 돌이 남지 않게 만들 정적인 원수가 둘러싸여 멸망하는 예루살렘의 최후에 대한 환상17을 미리 본 듯하 다.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동안 절규와 고통의 순간이 올 때마다 오로지 죽 음에서 구원하실 야훼 하나님에게만 심한 통곡과 눈물을 보이던 예수가 갑 자가 수 많은 군중들의 환호성과 기쁨 앞에 있는 이들 사이로 눈물을 보이 는 인상적인 장면을 유일하게 사복음서 중 누가복음에만 세밀하면서도 독 특하게 터치하고 있었다. 그 환상을 본 예수가 결국 티투스 장군의 호위 아래 예루살렘의 멸망이 진행되는 장면을 보았을지 모르는 가운데 드디어 A.D. 70년경 역사상 실제로 유대는 멸망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이제 더 이상 남아있지 아니하고 폐허로 전락하게 되는 일련의 진정한 사 건이 비로서 그가 죽고 난 후 몇 십년 후 터지고야 만다. 이 예루살렘 파괴의 사태는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요세푸스에 따 르면 노약자와 병든 자는 죽었으며 성전 포위 기간 동안 죽은 연약한 백성 들과 봉기자 수가 모두 110만 명에 달하였고 로마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성 포로들은 모두 신전 안의‘여자들의 궁전’이라는 곳에 끌려갔다. 약 9 만명 정도는 전 지역의 노예로 팔려 혹자는 검투사 혹은 야수의 밥이 되거 나 힘든 노역장에 고된 일을 감당해야 했다. 로마의 군중들은 이런 적군 유 382 버려진 예수
대인들 앞에 그들의 나라를 점령하고 난 뒤 늘 그렇듯이 장엄한 행진과 함 께 수 많은 노략한 값진 물건들을 로마인들에게 선보인다. 그 앞에 열광적 인 환호와 찬사를 로마인들은 박수갈채로 보답했으며 마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겸손한 왕인 예수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군중들은 승리에 도 취되었던 것이다. 그런 유대 땅의 소탕작전은 예루살렘의 초토화로 유대사 회는 A.D. 74년경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숫한 전쟁의 소굴로 전략하였 다. 최후로 유대의 마지막 남은 마사다 요새도 점령당한다. 이런 예루살렘 점령에 공을 세워 후에 네로 황제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 그는 차기 황제의 자리에 임명된다. ▲ 데이비드 로버츠David 이Roberts(1796-1864) 그린 1850년 작품, <티투스 장군의 로마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 나사렛 예수의 볼품없는 나귀와 비교할 수 없는 로마 황제에게만 주어지 는 로마식 월계수 화관과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자줏빛 바탕의 별이 노여 있는 개선장군의 의상을 입은 티투스와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인들 앞에 열렬한 환영을 받는 기념을 토하면서 그들의 뒤에는 수천 명의 포로들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각종 금은 보화와 황금, 즉 제사에 쓰이는 물건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83
들과 함께 금과 상아로 아로새긴 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있었다. 게 다가 유대에서 벌어진 참상인 전쟁의 극적인 장면들이 그려진 엄청나게 큰 그림이 그 길에 서있어 유난히 시야에 잘 보여짐으로 뒤로 보여지는 태양 빛의 장렬함이 기나긴 행렬을 반사하여 환호하는 백성들과 함께 장엄하게 비추고 있었다.18 최후의 만찬과 배신 로마 황제와 비교 되지 않는 초라한 환영이지만 유대인들의 환영과 기쁨 을 등에 없고 예수는 성전에 입성했다. 그는 그러한 승리와 함성의 도취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 입성 후 제자들에게 귀에 따갑도록 동일한 선포 를 취한다. 예전처럼 늘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것에도 그의 몸값은 천장부 지로 치솟고, 그의 말 한마디에 유대 백성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행위에 몸 서리쳐지고, 그를 한 번 가까이 갈까하여 그의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는 현 시점에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예루살렘 입성을 뒤로한 채, 곧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 해 자신이 팔릴 것이라는 그 선포 앞에 제자들은 고개만 갸우뚱하다. 그의 말이 현실이 된 듯 지금 예수의 인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자 한 공동 체 일원들은 심히 분개하고 있는 듯하다. 유대 사회를 통치했던 다른 대제 사장들과 비교하여 대략 A.D. 18-36년 사이를 지도하며 로마의 평화를 유 지하고, 그 오랫동안 직책에 머물렀던 대제사장 요셉 가야바를 위시한 이 공동체는 자신의 집에 모여 비공식적인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무언가 심각한 사안으로 의논하러 모여든 특별한 모임이다. 이들의 모임은 궁전 건물 근처에 있는 대제사장 집안 뜰에 모여 비공식 적인 회의로서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에 대항하여 많은 민 란들과 폭군들의 행위로 인해 이들은 늘 유대 사회가 불안한 곳이라는 점 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것도 모자라 폭동까지 일어나는 사건 앞에 384 버려진 예수
모임을 통해 혹시나 혼란을 예방하는지 모른다. 이들은 이런 혼란스런 상황가운데서 또 하나의 사건에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그들의 눈에 자신의 지휘를 넘보며 거짓 선지자 행세를 하는 이 청년 예수를 어찌 할까 고민중인 가운데 이들의 중심 회의 내용은 33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 나사렛 예수의 처형 안건에 의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회의는 율법에 준한다면 불법적인 회의이며 명백한 위법 행위임은 알면서도 이들은 시기와 분노로 가득한 가운데서 누군가 이런 애기를 하는 것 같다.“나사렛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동의하지만 문제는 민란이다. 유 대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에는 많은 유대 백성들과 외각 지역에서 수 많은 인파가 몰려올 것은 자명함으로 이번 명절은 피하자”라고 이들은 비밀스런 회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19 *** 새벽에 내린 눈과 영롱한 이슬 사이로 펼쳐진 맑은 하늘 아래에서 나는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가 이런 죽음을 감지하고, 그래서 이제 최후의 만찬 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음을 미리 알아채고 있는 이 시점에서 죽음에 놓인 예수를 다룬 성경에 골몰하여 나름대로 깊이 묵상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 에 다른 구약의 비슷한 부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에서 제시된 언약의 피,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아 적은 후 그 언약의 내용을 가지 고 시내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 모세, 그리고 백성들의 전략적 제휴로 하나 님이 창안한 선언서를 낭독하는 사건이다. 그 후에야 비로서 모세와 아론을 비롯하여 장로 칠십 인들이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니 사파이어 같은 청옥으로 포장한 길 같고 하늘에 푸른 빛이 도는 청명한 하늘의 모습을 보았으며 이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었다.20 이들 장로 칠십 인은 당시로서는 커다란 혜택을 입었는데 사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 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님과의 주권을 표시하는 조약 체결을 통해 잠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85
시 나마 모든 것이 영적으로 깨끗해진 상황 가운데 이들은 진정 유일신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그런‘신과의 음식’과 비슷하게 연출되는 사건은 흡 사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킬 수 있다. 급기야 모세와 장로들처럼 여호와 신 의 아들과 제자들 또한 먹고 마시고 있는 특혜를 누림으로 우리들에게 부 러움을 사고 있었다. 슈툴마허P. 는Stuhlmacher 이런 인상적인 장면을 참고하여 예수가 만든 최초의 사건을 두고서 최후의 만찬이 어쩌면 구약성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 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21 하지만 일시적인 로마 카톨릭 황제의 면죄부처 럼 모세의 손에 시작된 언약의 피의 개념은 한시적으로나마 죄에서 벗어나 게 해주는 약속만을 강조한‘일시적인 구약적 언약’인 반면, 신약성경의 예수가 만든 최후의 만찬은‘영원성을 가진 피와 살에 대한 기념적인 신약 적 언약’에 대한 본질성은 다르지 않을까?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였던 예수 는 눈 앞에 닥친 자신의 죽음을 총체적으로 진두 지위하는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이 추구한 모든 인류의 구원에 대한 속죄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또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도달할 수 없었던 것에서 일대일의 관계적 인 교류로서 영원한 길을 개척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 발렌타인 데 불로뉴Valentin de Boulogne, 1591-1632의 1626년 작품,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 요한과 예수> 386 버려진 예수
성만찬(최후의 만찬)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해석으로, 슈툴마허의 새로운 접근적 사고방식은 결코 예수가 최초로 만들어 놓은 만찬에 반하는 적지 않는 충격이 있는 흐름 속에 언약의 사건과는 별개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벼려지고 찢긴 자신만의 죽음을 승화시켜 결국 독특한 형식을 창안, 곧 후 세의 기독교에 근본이 된 사상과 기념을 분명 고안해낸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공동 저자 게르트 타이쎈Gerd 과Theissen 아네테 메르츠Annette ,Merz 이들은‘제의 창시자’로서 요한과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그들을 구별하면서“세례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성만찬은 예수 에게서 유래한다. 이 두 가지 예식은 전통으로서가 아니라 혁신으로서 정 당성을 획득한다!”고 말하고 있다. 세례 요한과 메시야 예수는 각각‘물세 례’와‘성만찬’이라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어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 무리들에게 나름대로 원인 제공을 하여 일대 혁신을 제시하기 시작 했다. 구약에서 늘 행하던 인간의 대속물인 어린 양의 피로서 죄를 사하는 의 미에 이른바, 외부의 침략에서도 구원받았던 유대 백성들에겐 유월절은 커 다란 축제의 향연 그 자체다.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인 깊은 밤, 예 수의 부탁으로 그의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22하고 있었고 만찬의 절 정은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로 시작하여 제자들 앞에서 그들의 발을 씻기 며, 배신의 음모를 암시하는 대화를 듣게 된다. 과거 몇 번에 걸쳐 제자들 의 스승이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죽는다는 황당한 말을 하더니 이제“언약의 피”라고 하는 포도주와 살을 자신의 몸으로서 기념하고 있는 장면을 보기에 사뭇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럽다. 또한 떡을 떼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는 제자들의 심리적 상황에 대해 성경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다만 그 상황 속에 그들의 생각은 각양각색의 혼돈과 번뇌 로 승화되어 그들의 뇌리를 수백 번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신약의 사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행위와 말들에서 제자들이 이해 못했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87
던 부분들은 간혹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하나 같이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수치는 성경을 통해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심리는 제외하고…. 진정 최후의 만찬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지 않고 진휘 여부도 파악하지 못한 나처럼 어리둥절하여 아직 모든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이들 제자들은 그저 얼마 전에 있었던 노새 대신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는 왕으로서의 기분에 힘껏 부풀어 그렇게 대접 받았던 예수와 만찬을 한다는 들뜬 생각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 전혀 천덕꾸러기로 지낸 이들 제자들의 직위는 그저 배를 가진 부자로서 어부였던 베드로, 돈을 세는 세 리, 그리고 아픈 자와 고통 속에서 피와 땀으로 얼룩진 일을 하던 의사 등 등…. 지상에서야 다양한 직업 정신을 가진 이들에게 급기야 왕을 대접하고 옆 에서 대화를 한다는 꿈과 같았던 현실 이야기가 불연듯 펼쳐지는 이 마당 에 예수의 말 한마디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 가? 어째든 이러한 복잡하고 불완전한 시간들 사이로 소용돌이치던 그 시각, 아직 최후의 만찬에서 갑자기 세족식을 하려고 준비중인 예수에게 베드로 는 그의 행위와 속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세족식 행위에 제동을 걸뻔하기 도 했다.23 이러한 예수의 사역과 순교의 길을 같이 걷는 그 길이야말로 최 후의 만찬을 경험했고,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기념을‘성찬식’이라는 의식 으로 탄생시켜 최초로 제공한 십자가 부활의 예수에 대해 기억하는 사건이 되고 만다. 더불어 추가한다면 예수는 이들의 싸움 앞에 언젠가 자신처럼 이들 또한 곧 죽음에 맞이함을 아마 자신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으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는 자리에 이제 예수는 갑자기 놀 라운 사실 두 개를 폭로한다. 곧, 필립 얀시는 이 장면을 적절하게도“그의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은밀한 밤의 가운데 난데없이 폭탄선언을 하고 있 388 버려진 예수
다”고 묘사했다. 그 폭탄선언은 음모와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 폭탄선 언으로는 유다의 음모를 뽑는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단과의 싸움을 통해 그와의 질문에 제동을 걸었던 반면, 지금 그는 사단에게 마치 자신을 팔 사 람을 찾고 있는 것을 알고서도“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4고 허락하는 기이한 언행을 사용한다. 그 사인이 떨어지자 곧바로 유다를 조정함으로 자신의 꿈에도 이루는 죽음을 성취하는 동기의 시발점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유다만이 배신한 것일까? 베드로는 어떠한가? 열두 제자 모두 가 예수를 배신하고 배반했다는 나의 견해에 동조하는 필립 얀시, 그도 예 수에 관련된 자신의 책에서“배신 행위적 측면에서는 유다의 행위는 정도 차이에서는 다를지언정 (다른 제자들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주 장하고 있다. 사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진행하던 중 제자 모 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25 필립 얀시 또한 이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이 들 모두 본질적으로는 모두 예수를 버리고 배 신한다. 예수의 예언은 이루어져 양들이 모두 흩어지고 만다. 그들의 행위는 질적으로 다르지 만 양적으로는 동일하게 ▲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의Caravaggio,1571-1610 1626년 작품, <예수의 체포> 버리고 만다. 본질적으로 그 사유야 어떻든 간에 제자들 중 예수의 고통과 아픔을 동조하거나 그와 함께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자는 한 명도 없 다는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89
최후의 만찬에서 벌어진 두 번째 폭탄선언으로 베드로에 향한 자신의 버 려질 운명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 그 말이 진정한 사실로 다가올 것임을 알았던 예수에게 베드로는 자신이 진정 예수의 가야 할 길이 무엇 인지 알지도 못했다. 재판 앞에 예수를 버린 그는“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 리하지 않겠나이다”27라고 힘있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정황과 사실을 볼 때 유다만이 유일하게 예수의 죽음에 동조했던 것에서 배신자라는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 그를 버렸다는데 기독교인 들은 유다만 배신한 자라고 오해한다. 이들이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찌하든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한 세 번 부인이라는 그 예언28때문에 불 안한 베드로의 마음은 누군가에게 사단이 밀까 부르듯 하려는 또 한 사람 의 마음과 함께 유월절 최후의 만찬이 불안과 초조로 동요되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설마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을 것이다. 유다 배신이 라는 사건에서 스스로 돌아서기를 요구하는 예수의 기도 모습29에서 이미 팔아 넘길 준비를 하고 있던 유다의 생각을 찔러 앞으로 야기될 충격적인 사실로 이들 제자들은 여전히 아리송하다. 혹시 외부에서 말하는 역사적인 예수의 삶에 대한 사실여부로 논쟁거리가 한창인 21세기 과학과 이성주의 시대, 이러한 죽음에 관련된 의식 가운데 예수의 창안한 성찬식이 부활과 함께 그의 역사적 진위여부와도 연관성이 있을까? 예수의 존재여부와 최후의 만찬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기독교 역사 에서 그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역할이 바로 성찬식임을 주장 하는 사람이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최후의 만찬 식사를 한 후 예수의 죽 음과 부활이 일어나기 전, 미리 알림으로써 자신이 추후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보아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리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 그리고 신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여 예수를 믿게 하려는 요한의 390 버려진 예수
놀라운 작전을 말하고 있었다.30 로마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순교한 A.D. 125년 안디 옥 감독이었던 이그나시우스Ignnatius는 예수가 만들어 놓고 간 성만찬을 이렇 게 표현한다.“부활의 보증, 불멸의 묘약.”그러나 아직 진정 예수가 죽음 의 단계 후에 일어날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성만찬 앞에 이들 제 자들은 오히려 그가 자신과 늘 함께 있어 이 세상을 통치하고 픈 마음뿐이 다. 동시에 자신의 스승이 죽는다는 것에 두려워 할 수 있다. 더욱이 그가 다시 살아야 한다는 의심에서 조금은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 성경 안에서 몇 마디로 유추되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추후 유대인들의 삶과 방식을 통째로 바꾸게 될 역사적 인 십자가 사건 앞에 예수는 심각한 상황 전개로 받아들여 긴장한 채 자신 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는 이 순간에도 이들 예수의 제자들은 하염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 더 큰 자인가 하는 무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31 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제자들 앞에 예수는 화를 내는 대신 완벽한 비교를 통해 겸손과 지휘의 불가분 관계를 보여준다. 마지막 사건인 죽음의 위기 를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자신들의 좋은 위치를 선점 하기 위해 싸우는 상황32에서 역설적으로 오늘의 성찬식이 추후 이들 제자 들에 의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로 세워지는 시기가 된다고 말이다. 억울하고 불의한 재판 일리노이 대학교에 연속기획물 중『Law and History Review』라는 법률 정기 간행물33 중에 2000년 가을 판을 살펴보면 특이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Historical Adjudication: Courts of Law, Commissions of Inquiry, and“Historical Truth”(역사적 심판: 재판소, 조사 위원회, 그리고 역사적 진실 - 지은이 역주)』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야셀 메오스Asher 는Maoz 첫머리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91
에 이스라엘 법률 역사에 대한 기록을 수록하며 아울러 예수의 불의한 재 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대법원이 예루살렘에서 발족되었을 때 수십 명의 크리스천 목사들이 모세 시모라Moshe Smoira 대법원장에게 로마 지배하에 최고 유대 법원이라 할 수 있었던 산헤드린의 최고 선봉자적 역할인 고 등법원을 향하여 예수에게 벌어졌던 불공정한 재판에 대한 재심을 청구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번성하고 있는 기독교가 두 밀레니엄Millenia 이후 에 가장 흥미로운 일로 남겨진 채, 예수에 관련된 책은 수천 권의 책 위 에 또 수천 권들이 곱하여 쓰여졌으며 19세기 무렵이 시작된 이래 60만 권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더불어 그들은 예수의 재판 에 대한 명예 회복적 차원에서 성취되기를 바라고 있었다.”34 법적인 구속력과 역사적 사실 앞에 누군가는 억울한 재판에 회부되어 형 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수 역시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적들의 심장을 향하여 날까로운 화살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체 념하고 죽음을 선택하였지만,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의 억울한 누명 을 벗기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필자는 적지 않게 놀라게 되었다. 산헤드린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의 친구로서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부심을 가진 버림받은 예수에 몸을 떨 어 분노를 표시해야 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우주라는 체제 속에서 예수가 말한 것이 진실이든 혹은 거짓이든 하나님의 아들이 말하는 하늘의 메시지에 과감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유일하게도 자신들이 바로 신의 선택 받은 자들이라고…. ** *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자부심에 하늘을 찌르는 자들이 예수 때문에 한 392 버려진 예수
자리에 모였다. 가야바(요셉이라고 부르는 대제사장이며 그의 사위는 마가 복음에 나오는 안나스 대제사장이다) 집 안쪽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 고 서기관들(율법학자들)이 둘러싸인 산헤드린35이라는 공회에 그들은 가 룟 유다로 인해 잡혀온 예수를 데리고 와서 신문하고 있었다.36 예수의 재판과 판결에 앞서 B.C. 4세기경 로마의 장군 바루스Vartus라는 자 에 의해 유대인들 대략 이천 명을 산채로 십자가에 매달았던 사건이 이윽 고 벌어지기도 했다. 그의 만행을 참지 못해 유대 백성들은 로마 지도자들 과 군인들에게 분노와 비난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지금 이 시대는 예수에게 로마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법률로는 그 어느 죄 가 없음을 알고 풀어주려는 사건 앞에서 오히려 예수를 잔인한 죽음으로 내몰아 무죄인 그를 심판대에 세웠고, 결국 그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한 나약한 인물로 되어가는 듯했다. 이제 과거 불쌍한 자 들의 순교적 정신을 뒤 로 한 채 예수를 처형하 려는 것만을 치중한 나 머지, 기쁜 일만 남아 있 는 이들에게 복잡하고 난해한 장벽이 하나 있 음을 이제서야 인지한 다. 그것은 그를 칠 증거 ▲ 맛디아스 스톰Matthias Stom, 의1600-1649 1630년 작품, <가야바 대제사장 앞에 선 예 를 찾으려 하지만 헛수 수 그리스도> 고이자 증언의 불일치로 풀려날 징조를 보이기에 이들의 마음은 당장 급하 다.37 예상대로 아무 혐의를 찾지 못하자 답답한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 묵 묵부답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는 예수에게“과연 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93
그리스도”라고 확신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 동안 정적을 침묵하던 예수가 답변할 때가 된 듯이 대답한다.“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 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38 뜰 밖에서 불을 쬐면서 엿듣고 있었을 베드로가 만약 그 말을 듣고 있었다면 아마 환 한 미소를 띄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가 계속적으로 침묵을 일관했다면 아마 무죄로 풀려났 을 것이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부 예수 추종자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에게 앞에서 잠시 언급한 야셀 마오스의 언급처럼 누군가는 인권남용에 관련된 소송 재판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추가적으로 상상력을 불어 넣는다 면 그 일로 인해 예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왕으로 칭송 받았을 것이고, 그 는 더 이상 누군가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신의 주권적 지휘를 함부로 남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제사장, 자신이 볼 때 우편, 권능과 같은 두루뭉실한 예수의 언급으로 인해 극한 슬픔 혹은 의로운 분노의 행위인 자신의 옷을 찢는다. 듣고 있던 가야바는 몹시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기에 기가 막힐 노릇일 것이다. 율법 학자 혹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인간은 인간일뿐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그들에게는 유일신으로 작용했던 과거의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실한 유대인들의 생각에 여호와 유일신으로부터 사람과 같은 아들이 있다고 말 하는 예수 앞에서 그들은 분노했던 것이다. 구약의 유일신, 즉 여호와를 믿 는 유대인에게 예수의 말은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올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재판의 상황은 신성모독에 해당될까?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고 말하는 대목을 극도로 민감한 문제처럼 말을 아끼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 예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의 입으로‘하나님의 아들’이 라는 것에 동의한 것은 이 대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 스스로 자기 입에서“내가 신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394 버려진 예수
자신이 그 말을 하고 다녔다는 증거는 시종일관 한마디도 찾을 수 없다 는데 필자는 적지 않은 실망을 했다. 사실 교회에 어릴 때부터 다니면서 예 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 우리 구주라는 말을 수도 없 이 들었고, 하나님 자신이라고 배웠다. 그렇게 고백한 우리들이지만 정작 예수 자신의 입에선 그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나 제 자들 심지어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의 입에서 스스로 말한다는 것이 내게 깊은 생각을 요한다.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는 그 동안 수도 없이 참아오다가 기회를 노리듯 침뱉고, 곁에 있던 하인들도 동참하여 손바닥으로 예수를 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된다.39 이들에게는 그를 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법! 이들에게 미래의 생각 따위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신성모독 의 말을 들어 자신의 분노와 감정을 한 사람에게 전가하고 그것이 합법적 인 양, 이들은 자신의 지휘를 마구 사용하게 된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와 달리 예수 자신은 진 정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발휘 한다. 고통과 잔혹한 살 인이나 마찬가지인 이 끔 찍하고 몸이 부르르 떨리 는 긴장된 사태에 거짓말 이라도 하여 위기를 모면 ▲ 호세 데 마드리조Jose de Madrazo y Agudo, 1781-1859의 1803 작품, <안나 하려는 게 사람의 심리이 스 대제사장 앞에 뺨맞는 예수 그리스도> 거늘…, 젊은 청년 예수는 반대로 침착하고 대담하게 여기고 있었다. 심지 어 빌라도 총독앞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청년 예수의 침착한 대응 으로 이들은 이제 기이하게도 놀랍게 여긴다.40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95
후대의 랍비 문헌에 의하면 신성 모독은 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 로 소리 내어 읽는 것, 혹은 다른 신을 추종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하는 내용 까지 포함시켰다고 한다.41 결국 예수가 살던 시절에는 신성 모독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신성 모독이 무엇인지를 수록하 지 않은 듯하다. 더 일반적인 말로는 추후 하나님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 시키는 모든 일련의 행동이 신성모독죄42로 성립되어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법률 전문가들에 토대로는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성립할 만한 근거나 사유 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예수시절 재판과정에서 나타나는 그 어떤 판례와 같은 예제가 전혀 없었다는 이치에 도달한다. 공회의 정규 회의는 보통 성전 내에 서 마련된 특별 회의실인 잘라진 돌실 이라는Chamber of Hewn Stone 곳에서 열렸다. 예수의 재판이 불법이라고 하는 첫 번 째 이유는 이러하다. 사실 밤이 아니라 낮에 재판해야 한 ▲ 라틴어로 된 필라도의 기념품으로 1961년 발견되었다. 다. 그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늘 초 석회석 사각형 덩어리 위에 새긴 라틴어로 [...]TIVS PILATVS[...] 둘째 줄에 새겨져 있다. 조하게 기회만을 기다려온 유대인 지 도자들의 심정은 복음서에 여러 번 나타난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의 재판을 하려는 의도에서 회의를 열었다면 낮에 해야 한다. 문제는 예수 가 잡히던 날은 밤이었고, 그 밤이 지난 새벽녁 다음날 아침으로 미뤄 다시 재판해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재판 선고 후 하루가 지나서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 형에 처할 죄인들의 죄목을 묻거나 혐의를 씌우려면 공공의 시간인 낮의 일과시간에 심의를 해야 했으며, 만약 혐의가 인정되어 그가 죽어야 할 사 형선고를 내렸다면 재판 일에서 만 하루가 지나서야 그 사형 집행의 선고 에 정당성이 부여 된다. 396 버려진 예수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세 번째다. 축제 기간에는 절대 살인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잡힌 그날이 바로 유월절 축제 기간이었다. 그날에서 가까 운 때이기에 수 많은 자들이 모여들었고, 바로 왕에게서 탈출한 이스라엘 회복의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 기간에는 처형을 금하고 있었음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이들의 공소 내용이 거짓 증인들의 판치는 일에만 집중되는 이 시 기43에 한 가지 더 한다면 유대 전통에 의거 증인들에 대한 반대 신문을 통 해 위증을 가려내야 하는 시기가 지금이며 증언들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여 증인들의 거짓이 선포되는 순간 예수의 공소 내용은 허위가 될 것이다. 우스운 해프닝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서 유월절 새벽녘에 빌라도가 머무 는 관정으로 가서 그들은 예수를 넘겼다. 그러나 이들의 발걸음은 관정 입 구에서 기다리며 빌라도가 나오길 기대했고, 이는 유대인들의 종교 규범을 지키려고 이방인의 터에 드나드는 일이 허락되지 않아 밖에서 기다리며 예 수만을 빌라도의 관정에 넣는 일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관 정 문 입구에 서 있는 유대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관정 안의 예수를 심문하고, 또 다시 밖으로 나와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이야기하는 풍경은 가히 웃음만이 절로 나오게 된다.44 산헤드린은 본래 탈무드에서 밝 히듯, 수 많은 내용들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조심스럽게 들어 있었다. “… 산헤드린은 생명을 구할 것이지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 다수의 동 의가 아니면 판결을 내리지 말라. 범죄인 신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이고 해지기 전에 끝내야 함. 사형 선고를 받는 자는 판결 당일에 집행해서는 안 된다 …”45 오히려 이런 일련의 유대 혼란에 대한 종교적 정책을 뒷받침할 수 없어 서 이들은 종교적인 문제를 이제 로마의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시키는데 혈 제 9 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97
안이 되어가는 이들의 교묘한 작전이 이제 시작되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변명 아닌 변명 으로 예수에게 혐의를 씌우고 로마에 가서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는 질문 으로 산헤드린과 빌라도의 법정이 서로 다른 냉혈적인 권력 앞에 역설적이 게도 이들은 한데 뭉친다. 과거, 늘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는 평상시 서로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 * 빌라도의 성격은 1세기 유대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여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성격은 잔인하고 오만하여 쉽게 분노하곤 했다. 특히 유대인과 사이 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 유대인들의 정결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에 못마 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46 ▲ 안토니오 치세리Antonio Ciseri, 의1821-1891 1871년 작품 <Ecce Homo>, 곧‘이사람을 보라’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형벌에 대한 설명하고 있는 빌라도를 그린 그림 요세푸스에 의거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을 받아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본 디오 빌라도는 그의 구체적인 행동과 성격을 통해 몇 가지 사건으로 잘 이 398 버려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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