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설명할 만큼 그 사안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늘 조상의 처음은 바로 하나님이 등장한다. 이는‘신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밑바닥에는 빛과 황홀한 경지와 불안한 감동도 지배적이지만 하 늘 위에는 빛, 완벽한 천둥과 번개와 같은 황홀한 경지가 존재한다. 복음 서 역시 두 가지 양면성, 즉 거짓과 진리라는 것이 함께 존재한다.‘진리’ 라는 면에서 메시야에 대한 진실성과 사실성이다. 더한다면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사고와 함께 나아간다.‘거짓’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거짓과 탐욕 이 성경 안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러한 사고들이 예언자들의 공통점들 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결과적으로 올바른 결론과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이 주어진다. 이제 그 책임을 메시야의 예언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 여 성경을 바라봄으로 한 발 더 진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가 않았다. 전형적인 유대인이자 랍비인 러너Lerner는 기독교에게 나타난 질 문인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밝히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기대에 맞는 예언적 희망 따위가 전 혀 실현되지 않아 만족되지 못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서 예 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믿음에 참여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가 유대인과 그리스도 사이에 둘 다 성립할 수 가 없다. 비유대인들이 말하는 구약이라고 불리는‘히브리 성경’은 메 시야라고 주장하는 신약성서에서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 이다”6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킨다? 러너의 말을 뒤로 한 채『The Final Word(마지막 말씀 - 지은이 역주)7』 의 저자 팔머 로버슨Palmer Robertson은 예언의 시작을 모세로부터 알린다. 유 대인들의 토라 혹은 기독교의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모세, 그 예언자의 입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49
에서 나온 메시지는 결코 주관적인 언어가 아니라고 말이다. 인간의 생각 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 선포하는 동안 환각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언자를 히브리어로‘나비’라고 불린다. 이는‘이야기하는 자’라는 것 을 의미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는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자의 절대적인 특권이기도 했다. 또 다른 말로는‘로 에’라고 하는데, 이는‘투명한 미래를 거울 보듯 투시하는 자’로서 선지자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언을 미래의 거울이라고 말한 이유다. 구약 성경에는 모세를 전형적인 리더 십의 소유자로서 등장시켰고, 하루에도 여러 번 보채는 철부지 어린 아이들 같 은 수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고 행군하는 리더자의 모습으로 등장한 다. 그런 백성들의 사고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진정 들여다 볼 수 있는 투명한 거울이 아니었고, 그저 하루하루 사는 현재에 더욱 충실한 자들이었다. 그들 ▲ 1659년 렘브란트 작품으로 <두 개의 십계명을 손 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투명한 눈을 가지 에 쥔 모세 >Moses with the tablets of the Ten Commandments 지 못했다. 그래서 늘 모세의 말에 충성 을 하는 것만이 그들의 행동 전부였다. 모세,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을 통해 주신 가나안 땅에 입성하 라는 단순한 표어이자 목적이 그에게 있었다. 어눌하고 어리석은, 그래서 이 백성들을 버리고 싶을 만큼 충동을 느끼었음에도 끝까지 밀어 부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 명의 영웅심과 그를 지켜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진정한 리더십을 보게 된다. 50 버려진 예수
당연히 모세는 오늘날 왕들의 무력, 권력, 그리고 기타 다른 무언가로 이 끌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나아가는 그윽한 그의 순종 에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는 자부심이자 유일한 하나님과 대면한 자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과거 험난한 여정이었던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모세의 출생과 삶 속에서 나타난 내용은 당시 사르곤의 출생과 유사하다 고 학자들은 말한다. 과거 메소포타미아의 법 문헌에 보아 알 수 있듯이 버 림받았다가 발견된 아이를 입양하는 절차에 대해 나오고 있음을 일부 참조 할 수 있다.8 더불어 모세의 유아기 시절, 그는 갈대 상자의 작은 바구니에 버려졌듯이 광야로 내몰린 시기도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의 광야 생활 동안에 그가 느낀 고통의 호소나 하소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무려 40년 동안 그의 감정과 느낌은 감추어져 있다. 구약 성경은 침 묵의 순간들도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그런 침묵은 우리 인간에게만 주어지 는 전유물이듯 시종일관 신약성경까지 침묵의 순간에 말이 없었다. 예수의 죽음까지도. 곧 죽음 이후의 3일 동안에도 말이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한다는 그 침묵 시간을 제외하고도 하나님은 인간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새긴 두 개 의 돌, 하나님의 명으로 만들어진 언약이 오늘날 헌법의 기초를 세운 사건, 또한 그 사이 회막과 성막을 만들고, 하나님의 법궤, 십일조, 여러 가지 제 사(번제, 속죄제, 화목제)와 그에 대한 규례 등등 다양한 업적을 남기며 이 스라엘 민족의 틀을 구축하게 된다. 사실 그런 모세의 업적을 입이 마르도 록 칭찬하면서 예수 십자가의 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예언은 축소되었다. 곧 작지만 커다란 세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그 일에는 마치 이단아 취 급하였다. 과연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인간을 매몰차게 모른척하고 내어버 렸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구약 시대, 유대 백성들은 모세가 광야로 자신들을 내몰 때 야훼의 하나 님께서 보여주신 열가지 재앙을 기점으로 다수의 기적들을 맞보았다. 그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51
럼에도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즉 언약을 가지고 내려 오 기를 기다리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그만 참을 수가 없 어 금송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커다란‘우상 숭배’로 비춰지기 시작했다.9 결국 그런 일로 이들은 그만“목이 곧은 백성 들”이라고 자주 일컬어진다. 그러나 과거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던 모세는 눈으로 직접 우상숭배의 광경을 보자 그만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스 스로 하나님의 편에선 자들을 불러 모으고서 이들을 제외한 자신의 민족 삼 천명을 동족들의 손에 의해 산 체로 죽이기에 이른다.10 그들은 곧은 마 음을 가진 반복적인 범죄의 결과로 매번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러한 시 내 산 근처에서의 완악한 행위를 하고 난 모세는 스스로 부셔버린 십계명 이자 언약궤를 가지러 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고 그의 언약들과 기타 준수 해야 할 사항들을 다시 받는다. 그 언약을 다시 받고 내려온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면 서 한 가지 중요한 예언을 공표하게 된다. 이는 간곡한 백성들의 요구사항 에 대한 관련된 한가지 사항으로 참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이“선지자를 일 으켜 주겠다”라는 위대한 선포말이다. 그 모세의 메시지(백성들의 요구사 항에 관련된 대답)는 비로서 출발하면서도 그 메시야를 향한 예언의 이야 기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과거 백성들이 기도한 요구사항은 바로 호렙 산에서 요구한 것으로“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11라는 간곡과 부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두려움에서 시작된 이러한 호소는 이미 과거에 두 번씩이나 간청하였다.12 이들은 과거 하나님 존재의 두려움과 그분으로 인한 죽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간절하게 애원한 것에 대한 호소의 응답으로 모세가 선지자를 언급하기 시 작한다. 그리하여 모세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선지자 를 하나 세워 일으키실 약속을 간직하면서 깊이 새겼으리라! 모세가 전한 52 버려진 예수
‘선지자의 일으키심’에 대한 추가적인 예언은 계속된다. 그 언약의 약속을 선포하는 것은 유대인의 형제 중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붙여 주 고 일으키어 하나님의 말을 그 입에 둘 것이며 그에게 자신의 말을 무리에 게 다 전해준다고 말이다.13 물론, 그 예언(창세 전에 준비된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하나님의 이름 으로 전하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받게 되며 또한 전하는 선지자 가 하나님의 말을 하라는 것 이외에 전하거나 제 마음대로 하나님의 이름 을 빌어서 말한다면 그 선지자는 죽게 된다.”14라는 다소 혐오스런 선포를 주고 있었다. 이를 기억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 혐오스런 선포의 언약을 예수에게 십자가로서 극명하게 적용시킨다. 요한복음 6장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예수 자신이 말하길“자신은 하늘에 서 내려온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함도 아니요, 오직 하늘에서 나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함”이라고 강렬하게 들이 댄다. 곧 자신의 뜻과 전혀 무관함을 펼친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언에 맞지 않아 곧 죽게 되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한다면 유대인들 관점에 선지자들과 예수의 죽음은 필시 당연 하다.‘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한다’15는 그 사실은 검증받아야 하는 진실로 남는다. 그래서 오히려 죽이고자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셈 이다. 오직 그를 향해 저주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버리게 된 결과였던 것이 다. 죽음으로 그 예수의 정체성과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시야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닌 다면 진정 그를 의심해야 당연하지 않을까?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닐까? 무 턱대고 누군가를 신의 아들이며 신이라고 추앙 받음을 받아들일 자는 분명 몇이나 될까? 따지고 본다면 모세가 제시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메시야 의 경계와 의심은 진실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최적의 상태다.‘의심’을 시 작함으로‘하늘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가게 되기 때문이다.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53
우리의 시야 앞에 하나님이 선지자를 기다리라고 가정하여 그 예언한 메 시야를 갈망한다면 추후도 의심 없이 당신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 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이 사람이 과연 기다리던 메시 야인가 아닌가?”매일매일 이런 질문공세에 사람들은 끊임없는 고뇌의 고 통을 갉아먹어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들처럼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적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을 것이 자명하며, 예언자들에게서 증험과 성취가 있 는지 없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험대에 예수를 올 라서게 한다. 그의 예언이 맞는가? 그의 죽음까지 가봐야 알 것 같다고. 다윗의 후손과 마믈라크토브 사무엘로 인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왕은 곧바로 하나님의 산에 이르러 ‘여호와의 영’혹은‘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한다. 그런 까닭에 예언자의 예언과 같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영적인 황홀경을 사 울도 경험한다.16 그의 후사를 이은 다윗 왕은 극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로 사방에 널리 경계하고 적대시하던 적들에게서 파괴 ▲ 맛디아 의Matthias Scheits 작품으로 다윗 왕에게 충고하는 되었던 과거의 분쟁을 승리로 이끈 사 나단 선지자 건을 뒤로 한 채 그것을 기억하며 견고 한 왕정이자 제국을 이룩하여 점차 평안을 누리게 된다.17 그것은 다름아닌 다윗 왕에게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의젓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예언자적 직무 덕분에 정치적인 지도력과 왕들의 조언을 아끼지 않 았던 과거 예언자 혹은 선지자처럼 나단도 정치적인 파워를 과시하며 하늘 과 교통하던 절실한 메시지를 이스라엘 땅에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54 버려진 예수
나단 선지자는 신명기 때의 선지자로서 아주 정확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예언하였고, 그러한 계시를 통해 그는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 사건18, 솔로 몬의 등극19 등을 알리는 완벽한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놀라운 역할을 하기 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단이 과거와 조금 다른 예언을 한다. 사무엘하 7장의 예언을 차례로 읽어보면 다윗의 후손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A. 다윗이 죽은 후, 네(다윗의) 몸에서 날 씨를 네 뒤에 세운다. 그리고 그의 나라를 견고해지게 만든다고 한다. B. 그 다윗의 씨가 집을 건축하고, 오랫동안 명성을 세워 영원하여 질 것이다. C. 그 후손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은 내 아들이 될 것이 다. 그 후손이 불법을 행하면 사람과 막대기를 사용하여 벌을 내릴 것이다. D. 그러나 그의 후손에게 친절을 베풀어 사울 왕처럼 버려지지 않는다. E. 다윗의 후손 중에 한 명의 집과 왕의 지배가 영원까지 보좌가 견고 해질 것이다. 나단의 예언에는 바로 그가 죽은 뒤의 후손 중 하나를 세워고자 하늘에 서 허락한 것을 보여준다. 그 후손인‘씨(자식)’라는 표현으로 자식을 통한 다윗의 언약을 선포하고 있었다.20 이는 히브리어로“자라카()”라고 발 음한다. 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그(다윗)의 ”후손 your descendant 혹은“자 식”seed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언급해야 할 의미(A)는 그 단어가 단수명사라는 점이다. 그 씨 는 세월의 흐름 속에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그의 후손들 중 한 사 람을 말한다. 즉 메시야 누군가로서 그는 다윗의 후손 한 사람에게 비롯될 완벽한 나라의 주인공이다. 중요한 것은 그 후손이 과연 누구인가? 이는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55
솔로몬일 수 있고, 또한 다음 세대에 걸쳐 후대 누군가를 말하고 있다는 점 에서 모세의 희미한 세움을 받을 한 선지자와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들어가 기 시작한다. 두 번째(B)로 그의 후손이자 자손에 해당하는 자는 직접적으로 다윗의 아 들 솔로몬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 근거는“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21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 솔로몬은 직접적으로 꿈을 통 하여 하나님께서 건축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그리스도인들이 나 성경 구약학자들은 다분히 이 사건을 두고서 말하길 솔로몬보다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고 장담하고 있다. 문제는 예언 시기가 그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곧 그 시기는 나단의 시대였다. 이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당 시에는 아직 누군가를 지목할 확고한 의미로서 전달되지 못하는 역사적 현 장에 그들은 서 있었다. 다윗 시대의 나단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을 두고서 당시 전쟁 한복판에서는 그럴싸한 메시야의 완성이 확고히 이루어지지 않 았기에 여전히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어째든 그 시대 이후, 다윗은 하 나님을 위한 건축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이룩하지 못하자 솔 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충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위해 건 축하게 된다. 곧 그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제 이 견해(B)로서 만약 다윗의 후손인 씨를 솔로몬 그에게만 적용시켜 보자! 그렇다면 우선, 솔로몬의 집을 견고하게 건축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나단이 예언하는 다음 구절에서 적용시키면 다소 어긋나게 된다. 즉, 솔로 몬의 집이 나단의 예언과 계시처럼 영원히 견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솔로 몬의 성전은 견고하게 되지 못했다. 현재 21세기 무렵, 그 솔로몬 성전은 없다. 나단이 언급한 영원한 나라가 오늘날 없기 때문이다. 보다 더 적용할 수가 없는 점으로 세 번째(C)가 있다. 곧 여호와 하나님 은 그 후손에게“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은“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 는 분명한 언약적 예언이 있다. 과연 그것을 솔로몬에게 적용시킨다고 하 56 버려진 예수
나님이 언급했던가? 그의 후손들은 어떠할까? 물론 나단의 계시대로 솔로몬은 지혜로서 축복을 받았지만 그에게 선지 자들이 그런 말을 언급하거나 타인들에게 그 메시지를 받았다는 기록을 찾 을 수 없다. 더불어 하늘에게서 말이다. 하나님에게 아들이라고 예언을 이 룩하지 못한 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약한 솔로몬이었다. 저절로 의구심 이 드는 뚜렷한 증거로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솔로몬은 다수의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을 자신의 잠자리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메시 야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나단의 예언과 계시를 통해 진정 다윗은 그 일로 인해 기뻐하며 기도하고 있었다.22“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 워 결국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여전히 중요한 단서 를 손에 들고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 ** 나단 선지자가 예언한 대목 중,“그의 나라”라는 단어를 들여다 보면, 이 는 히브리어 원문으로‘마믈라크토브()’라고 발음한다. 그 문구는 다 윗의 씨 중 한 명의 나라인“그의 나라”라는 말로 사용할 수 있다. 무엇보 다 먼저‘마믈라크토브’에 대한 개념에는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후손 그 누군가의 나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다윗의 후손에게서 그 자신의 나라가 영원히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 미로 더욱 확대 해석하여 넓은 의미가 있다. 즉 신의 나라인 그 어떤 영원 하고 지속적이면서도 영원한 하늘에 존재하는‘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는 기독교인들 혹은 사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 되는 말로 붙 일 수 있다. 하늘에서 예수가 새롭게 조명하는 다른 세계의 의미를 내포하 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이쯤 되면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과연‘다윗의 후손’은 누구란 말인 가? 진정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단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주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57
신 예언적 의미를 진정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진정 다윗의 후손으로 인 해 세워질 누군가를 위한 그의 나라가 나단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예언 이자 말씀이라면 후대에 그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누군 가를 메시야로서 적용시킬 때 앞에서 언급한 나단의 예언 다섯가지 과정 (A,B,C,D,E)을 모두 거쳐야 한다고 생각된다. 아직 이 시대에 있어서 알아야 할 견해(D,E)는 우선 나단의 예언을 아직 개방된 사실로 여겨 다음의 계시를 완성해 가보면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를 더 찾을 수 있다. 나단의 예언으로 다윗의 후손은 반드시 필수로 나타나야 할 것이 있다면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하면 서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중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 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23 설사 이 땅에 그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면 과연 이 지구상에 영원한 나라이자 영원한 제국은 존재할까? 추후 예루 살렘 성전과 유대 사회의 마지막 멸망 시기를 비추어 볼 때 다윗의 후손 왕 조가 그 어느 시점에 갑자기 자기 자손의 맥이 끊어져 사라졌다면? 그것이 진정이라면 참으로 나단의 계시는 거짓말이 된다. 지금 다윗의 왕위는 결 코 끊어졌다고 해야 한다. 그럼 다윗은 나단에게 속은 것일까? 고대 로마로 되돌아 오면 그에 대한 한 가지 힌트가 숨어 있다. 예수와 동시대 인물로서 유명한『유대 전쟁사』를 집필한 유대인이자 저술가인 요 세푸스, 그 역시 그의 집필된 시점에도 여전히 아직 메시야가 나타나지 않 았다고 밝힌다. 그래서 나단이 예언한 메시야이자 그가 외친 나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그 당시까지도 여전히 시작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바가 크 다. 요세푸스의 저서에 의하면 예수가 오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유대 정통 혈통인 마카비 왕조Maccabees 혹은 헤스몬 왕조Hashmoneans, 이들은 제사 장 직분의 왕조로서만 유대 사회를 통치하였기에 이들에게는 다윗의 후손 혈통은 결단코 아니라고 말한다. 랍비 러너는 나단이 언급한 메시야를 두 58 버려진 예수
고서 이야기하기를“히브리 성경(모세 오경과 구약성경)은 다분히 기독교 이전, 수백 년 전의‘바벨론 포로’적 측면에서 당도하게 된 정치적인 성격 이자 민족의 구원자National Savior로 묘사한다.”라고 주장한다. 그 어떤 영적인 메시야나 영적인 나라를 배제한 듯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다만 정치적 혹 은 민족적 구원자를 메시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기에 예수는 메시야가 아닐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성립되는 초기 유대 지역에서 유래된 메시 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과열되기 시작했다.‘메시야적 성향의 열망’에 대 한 과열은 바벨론 포로exile에서 시작을 이루어‘다윗 왕조’Davidicdynasty와‘유 대 민족’에 이르러 끝맺는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단의 예언으로 인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했다. 그 결과, 두 번째 성 전을 재건하려는 것들의 회복을 나타내는 약속, 그리고 언약에 대한 부분 적인 성취가 새로운 견해나 이념적 성향으로 발전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바라본 메시야는 로마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자로서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여전히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여기는 점은 메시야를 누군가에 적용시킬 때 요세푸스가 저술하는 순간까지도 없 었다. 그의 저서에서 말하는 헤스몬 왕조 또는 마카비 왕조는 물론이고, 군 사적인 리더들 혹은 그 어느 왕들과도 같지 않았다. 심지어는 A.D. 132년 마지막 로마로부터 해방코자 자그마치 3여년 동안 을 항쟁하며 당시 유대 사회의 그들만의 예배, 게다가 전통과 삶을 유지시 켰던 자도 배제했다. 그 새로운 유대를 재건하려 노력한 유대의 선동자‘바 코흐바’Bar Kochba도 배제할 만큼 이들은 지극히 단순한‘유대 민족의 구원 자’라고 적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이는 요세푸스의 저서에 드러나듯 자신이 살아있을 때조차 유대 민족의 상황을 살펴본 바, 로마 시대에 남겨 진 과거 이스라엘의 혈통적 측면에서 메시야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결론은 확고해진다.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59
헤롯 대왕Herod the Great도 이와 마찬가지로‘유대의 왕’이라고 타이틀을 불 리었음에도, 그 역시 배제된다. 물론 그를 두고 다윗의 혈통에 대한 진실된 후손이 일어나거나 그의 혈통에 대한 막강한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점을 부 각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복음서에서 언급하듯 다윗의 혈통이었던 예 수를 그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를 죽이려 했다. 그 행동이 오히려 자신은 메시야가 결코 아니라고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모세 로부터 로마의 식민지에 접어들어 유대의 멸망 무렵까지도 모세를 시작으 로 나단이 언급한 메시야는 결코 만나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유대인들 역시 모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와 달리 복음서는 확신했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 나무에 달린 예수를 배신한 베드로가 추후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 거룩한 영(성령) 을 받고, 그의 첫 설교하는 대목을 살펴보면서 드러난 내용인즉슨“형제들 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 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메시야)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24 있다는 말에 수 많은 자들이 동요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다윗을 선지자로 보기도 한듯 베드로의 설교는 가히 메마른 영혼의 땅을 울렸다. 그 설교 앞에 그들은 회개로서 답례했다. 물론 베드로 가 설교한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다른 누 군가로 결코 적용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베드로가 본 다윗의 후손에서 날 영원한 나라에 대한 결론은 확고히 그들의 내면을 비추었고, 그들은 메시야를 인정했다. 또한 그 메시야가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 는 정치적 메시야로서가 아닌 육신이 죽지 않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를 예수의 제자들은 누리고 있었다. 그런 하늘의 선택된 그리스도 메시야 로서 완성할 자로 누군가가 연결된다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예견된다 고 하는 요지가 바로 베드로 설교의 핵심이었다. 60 버려진 예수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베드로의 선택은 결론에 빗나가지 않았다. 그 래서 아직 나단의 예언이 나온 그 시점에는 종료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 되 고 말았다. 이를 통해 다윗의 집과 메시야, 곧 그의 후손의 나라가 여전히 보전되고 왕위가 여전히 지속적인 형태로 남는다. 따라서 앞으로 누군가에 게 적용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그 후손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겠다”25는 표현을 마지막으로 그의 예언은 결 말을 내비친다.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천사 가브리엘의 메시지에서 비롯된다. 즉, 가브리 엘이 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알리며 예수를 가리켜, 곧“그가 큰 자가 되 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 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26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통찰력은 바로 인 간이 말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천사의 목소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메시야 적용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의구심이 남아있 음에도 부활로 인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가 이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분 명 영원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외친 나라가 바 로 구약부터 줄기차게 흐르던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동일하기 때문이 다. 하늘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예수 자신이라 고. 그러나 죽음에 내동댕이쳐진 예수의 모습을 본 자들은 과연 하나님의 나 라가 이루어졌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분명 예수가 채 찍에 맞았고, 징계를 맞음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신성모독으로 한 시 대를 풍기문란의 소용돌이에 휘둘리게 했던 장본인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버린 제자들도 그렇게 확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메시야 사상에 대한 결론을 선 뜻 내리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다양한 의문들과 함께 여전히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61
끝나지 않은 선지자 나단의 언약을 메시야라는 협상의 테이블 위에 두고자 한다. 예레미야의 슬픈 예언 예레미야의 아름답고도 슬픈 예언에 대한 계시와 언약은 눈물을 자아낸 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을 통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고, 미래 의 거울처럼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그렇게 비춰졌다. 그의 뼈마디는 모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구약성경에 드러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입술을 열어 말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27 듣지 아니하는 백성들 사이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예레미야,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 씀에 붙들려 시내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외치기도 했다. 그는 살아 있는 땅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끊어 놓고자 살인을 계획했었던 일도 자신은 새까맣게 몰랐 ▲ 시스턴 성당에 그린 미켈란젤로의 벽화 작품들 중 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윽고 자신을 도 고뇌하는 예레미야를 표현한 그림 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28에 비유할 정 도였다. 결국 스스로를 위기의 순간에 놓여 있었음을 회고하고 있었다. 시드기야 통치 시절은 다른 시대보다 거짓 예언자들의 활약이 너무 대단 했다. 그 때는 간음과 저주로 땅이 슬퍼하였다고 말한다. 선지자들과 대제 사장들의 행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변론하기도 했다.29 이들 을 향한,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들로 인해 예레미야는 미치광이 취급 받았 다. 그 일은 예언자들에게 너무 일상이었다. 그와 못지 않게 비슷한 예언자 62 버려진 예수
라면 이미 쉽게 당할 수 있는 일41이었으며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포로 취급하였다. 급기야 그의 일생은 저주 그 자체였다고 스스로 를 학대하는 듯하다.42 쇼펜하우어의 말 중에“홀로 있는 것은 모든 위대한 정신들의 운명이다.” 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혼자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정신이자 영혼의 맑은 호수다. 물론 혼자 있는 삶은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외로움의 부산물이지만…. 이 또한 때론 백성들에게 저주받아 한탄스럽게 여겨지는 바, 나쁜 측면의 생각에서 비교해본다면 덜 가혹할 것이다. 이사야처럼 가 르멜 산에 있는 언덕 꼭대기에 혼자 있는 순간32이 훌륭한 하나님과의 만나 는 순간임을 만들어가는 밑거름이었다. 구약에서 두 번째로 가장 긴 장수를 차지하는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 백 성들을 향한 암시적인 묵시록이자 투명한 예언서를 기록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렸다. 시종일관 예레미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 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 떨어지기 전,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 터 이미 만방에 세워 자신의 말을 전할 자로 택한 그릇이었다고 말한다. 그 래서 여호와는 자신의 입을 가냘픈 그의 입술에 대기도 하여 여호와의 예 언자로서 부름을 받게 된다.44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던 시기는 B.C. 625년경이었다. 그가 활동한 것은 유다 말기로서 유다 왕들인 요시아, 여호야킴, 여호와긴, 시드 기야, 이들이 다스리던 때였다. 그 입에서 나온 여호와의 예언대로 모든 것 이 이루어짐으로 예루살렘 멸망(B.C. 587년)을 예견한 자이기도 하다.34 아브라함 J. 헤셀의 저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이사야는 예루살렘에 적 군의 습격이 임박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예레미야는 미가와 함께, 적군이 예 루살렘을 장악하고 유다의 모든 요새들을 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로 예레미야의 예언은 한발 더 나아갔으며 구체적인 문구로서 적중하였다. 그 원인은 마치 현대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인 쌀자루에 쌀을 가득 채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63
우듯 부와 명예, 남을 속여 약탈해가지고 쌓아둔 온 갓 재산을 자신의 집 안에 가득 채우고 벼락부자가 되며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리는 세력의 편에 서서 타인의 인권은 무시하고, 빈민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못한 다는 주장35을 예레미야의 입을 빌어 나열한다. 유대 사회에 불어 닥친 강 풍같이 강력한 부정과 비리를 제기하고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여호 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그 시대, 유대인들의 사고는“여호와가 존재하지 아니하니 재앙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 존재하지 않을 것”36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와 동시에 마음이 마치 무뎌지고 있는 칼과 같아졌다고 경고 한다. 예언자를 버리는 현상은 계속된다. 예레미야가“이 땅에는 무섭고 놀라 운 일이 가득하다”37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향하고 있는 유대 백성들에 게 예언들은 빛 바랜 힘없는 호소로 남아있었다. 당시 예레미야의 말에 의 하면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을 일삼으려 하였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만을 노렸고, 이들의 행위에 백성들은 그들을 지극히 찬양하는 추악한 지도자들의 애처가가 되어감을 보게 된다.38 수치를 모르 는 이스라엘은 간음과 음란을 총동원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고, 급기 야 기름진 땅을 덮어 그곳을 우상과 주인을 잊는 망각, 게다가 이방신의 섬 김을 다진다. 경멸의 어조가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이들에게 계속적인 호 소를 잊지 않았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방인에게 포로로 잡혀 갈 것을 시급히 예언하나 백성들은 이내 거절했다. 그들에게 성경을 묵상 하라고 권고한 말도 무색해져 버렸다. 그런 일들에서 대지를 울리는 버려 진 예언과 방종이 때로는 지혜로운 자들에게 경종이 되었다. 역시 그것은 예수의 시대도 적용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외면이 예수의 예언에 불씨를 조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헤셀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곧은 마음에 더하여 무거움과 냉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 다. 64 버려진 예수
“예레미야의 마음은 아프고 황량했다. 그의 꿰뚫어보는 눈에는 성벽이 휘청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닥쳐올 그날은 무서운 날일 것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뉘우치고 회개할 것을 권고하고 호소했지만 쓸데없는 일이 었다. 그는 절규하며 울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것은 그 마음 속 깊은 곳의 두려움뿐이었다.”39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경멸했으며 조롱하고 무시하기를 극 도의 반대세력처럼 밀어 붙여 어느 예언자보다 더 하였다. 그래서 그는 별 명을 빈번하게, 또한 강하면서도 칼처럼‘예리한 진노의 예언자’라고 듣 게 되었다. 고통이라는 살얼음판을 걸었던 그의 애통을 통해 살아 있는 자 의 땅에서 유대 백성들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임으로서 그의 인생을 과감 하게 끊어버리고자 했다. 그렇게 다시는 이스라엘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치 않게 하려는 반대세력들을 그가 알고 있었다.40 물론 바벨론 왕이었던 느브 갓네살 왕의 포로로 70년간의 지배 받음을 예언하기도 했다.41 더불어 모든 나라에 내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읊기도 했다.42 예레미야의 예언이 자국들의 치명타가 되었던 반면, 적들에게는 기회가 되어 구체적 실행에 옮긴 적의 공격은 예루살렘을 황폐화시켰다. 그래서 살인자들의 도륙과 핏자국으로 얼룩진 죽음의 거리만이 바람의 소리와 함 께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끝없는 사랑으로 인해 예언을 소 모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늘의 언어를 옮겨 놓았던 성경에 나타나는 예레미 야의 언약 속에서 과거에서부터 펼쳐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일들을 읽 어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분간하기 어 려울 정도이다. 이들의 우상숭배는 극에 달했다. 다른 신에게 제사 드리며 하늘의 여왕 이라는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자를 만들기도 했으며,43 더하기는 눈에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65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자녀를 스스로 불에 넣어 우상에게 제사 드리 기까지 서슴없이 행했다.44 당시 유명한 치세를 떨쳤던 신으로‘바알’에게 분양하는 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45 당시는 거짓말, 간음, 우상 숭배, 거짓 맹세, 사회적 불의, 악의적 회개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추악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레미야 예언자를 하나님은 선택한 것이다.“나는 아 이라서 말할 줄 모른다”46라고 말한 예레미야는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자애 로운 자라고 표현할 만큼 그가 감당해야 할 짐은 아주 무거웠다.“아아, 어 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넘 어지는 뻔한 결과의 싸움을 걸어온다”47라는 말을 서슴없이 고백했다. 이러 한 표현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이용하면서까지 결코 가볍지 않는 농담을 던 지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늘 분열된 유다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하나님께로 돌 아오라는 아픔을 가지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또 그는 앞에서 여러 환상과 예언을 하였다. 특이한 것 중에 하나는 여호와김 왕이 바벨론 나라로 끌려 가 그가 누렸던 명예와 영광이 하루 아침에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날 아갔다는 것이다. 그의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 흘림과 압박과 포 악을 행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결과 당나귀의 묘에 매장될 것임을 여실 히 증명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또 다른 예언을 하게 되는데 바로 미래의 왕 메시야, 즉 나단의 예언과 비슷하게도‘씨’를 언급하지 않고 다윗 왕의 새 로운 가지(후손)라는 말로서 메시야 사상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48 이는 스 스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구절을 시작으로, 그는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뜻인 다윗에게서‘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물론 모세의 선 지자 예언과 비슷하지만 아래 요약처럼 이보다 더 구체적인 예언을 언급하 게 된다.49 메시야를 예언한 예레미야 23장을 통한 네 가지 메시야 언급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6 버려진 예수
A.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킨다. B.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린다. C. 세상에 정의와 공의를 베푼다. D. 결론적으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모두가 구원받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비유로 나타난“의 로운 가지”는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서 여호와의 싹이라고 해석하는 부분 을 잘 해석해야 한다.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 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뿌려 소멸하지 않게 하 고 청결하게 한다는 대목을 보면 마치 희생양을 통해 시온을 구원하겠다는 희망을 엿보게 된다. 이는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피를 연상케 한 다.50 이제 구체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메시야 역할에 대한 다양한 구절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자이신 선지자:“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51 의로운 가지 선지자:“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다.”52 공의로우신 선지자:“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 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3 왕이신 선지자:“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54 다윗의 자손 중 공의로운 자가 나게 되며, 그가‘정의’와‘공의’를 동시 에 펼치신다고 강조함에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를‘의로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67
운 자’로 존대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과 학계는 주목하고 있다.55 모세가 예언하기도 한, 다윗의 가지인 목자가 흩어진 양떼를 모으듯 다 시 모으는 예언은 구약의 연결고리가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늘어뜨린 동안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여전히 연속적인 관계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더욱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예수에게서 늘 꿈에 그리던, 그들 이 가진 이 땅 위에 진정한 검과 칼로서 다스리는 제국적인 이상과 편견 때 문에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구약의 메시야 사상을 계속적 으로 지켜오고 있었으며 메시야를 인간 예수에게 연결시키는데 그들은 너 무 부정적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죽음에 방치된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 로서는 결코 이어지지 못한 사고를 지니고 다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올 전쟁을 남자에게 고통없는 해산으로서 가 지는 예언56을 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다윗의 후손에 대한 사실을 두 번이 나 강조하는 것으로‘다윗의 가지’라 일컬음을 받으며 그를 통하여 의로운 공의와 정의를 베푸신다고 여러 번 약속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 예언을 예수에게 적용시키지 못하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메시야 사상과 편견 때문에 예레미야의 예언은 버려지고 찢기고 있었다. 여전히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향한 기다림의 눈빛은 성경을 통 해 심리적 상황의 연출적 무대 위로 옮겨야 진정 읽을 수 있다. 예레미야가 밝힌“의로운 가지”에서 나타나는‘가지’의 정확한 의미는 히브리어로‘체마흐( ) ’이다. 이는 파생명사로‘뛰어오름’,‘식물’,‘가 지’Branch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단어는 일반적인 가지의 의미보다는 베 어 버리고 남은 뿌리에서 돋아나게 된‘싹’을 내포하고 있다. 곧 베어 버린 싹은 죽음을 의미하고, 남은 뿌리에서 자라나는 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 활을 적용시킬 수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유대인들 은 그 싹이 그저 하나의 싹이거나 혹은 왕으로서 비유의 표현이라고 생각 한다. 이는 집합적인 의미 속에 드러난 다윗의 모든 자손을 가리키는 말로 68 버려진 예수
서 솔로몬 혹은 다른 왕들의 시대와 같은 의로운 자이고, 이 땅을 다스리는 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에 동 의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마치 기독교의 정당성을 훼손할지도 모르는 일 이기에 극도의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되고 있었다. 또 다시 이 모든 사실에 가능성을 메시야 협상 테이블에 고스란히 올리고자 한다. 버려진 예언자, 이사야 로리H.H.Rowley는『The Servant of the Lord(주의 종 -지은이 역주)』에서 이 사야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에게“예언자는 자신의 온몸을 예언에 던졌 다. 그는 입술과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 전부이자,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나르는 운반 기구의 일종으로 삼 았다”고 말하면서 예언자들의 참된 애정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 예언자들의 말과 행동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전달 자임을 분명히 각인시킨다.57 예언자들은 이사야처럼 유대 백성들에게 하 나같이 거절당했고, 죽음을 담보로 예언에 자 신의 몸을 내맡겼다. 그렇게 예언자들은 예언 을 자신의 업으로 삼는다. 로리의 말대로 예 언자로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다. 심지어는 일반적으로 보 통의 언어로서 예언을 선포하고 성취되는 장 면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특이하게도 다른 요 ▲ 벤야민 웨스트 작품, <재단 숫불의 이사야 구를 부탁했다. 입술>, 1782년, 밥 존Bob Jones 대학 박물관 아모스의 아들인 이사야에게 자신의 몸을 소장 직접 사용하는‘행위적인 예언’을 통해서 비춰지는 하나님의 예언이 하나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69
있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말로서 전하는 것보다 차원이 다른, 직접적인 몸 의 행위로서 보여주었다. 그 예언을 통한 이사야의 예언자적 역할은 보는 이들에게 아주 당혹스럽고 수치스럽게 보인다. 즉, 이사야의 옷에 대해 말 하는 것으로 그는 늘 선지자들이 입던 예복의 허리에 착용하던‘베’를 끌 러야 했고, 급기야 늘 신던 신발을 벗어 던지고, 속옷만 입고, 벗은 맨발로 3년 동안 유대 거리를 활보하기에 이른다.58 이러한 행위의 내포된 하나님의 뜻은 당시 두 나라로 쪼개진 이스라엘 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이들 두 왕국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위 나라들의 힘에 눈독을 들이고 있 었다. 성경에 기록된‘앗수르’Asshur와 동일한 이름의 앗시리아 제국에게 벗 은 몸으로 끌려가는 징조를 미리 보여준다. 그럼에도 북왕국 이스라엘은 연합군에 가담한다. 이제 곧 거대한 앗시리아 제국Assyrian Empire 59의 수도‘앗수르’가 주위 나라들 의 연합군 세력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전 쟁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블레셋의 도시‘아스돗’에서 시작된 반란에 대한 앗시리아 황제 사르 곤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아스돗의 반란군들은 B.C. 713 ~ 711년에 벌어진 3년간에 피비린내 나 는 전쟁에서 앗시리아 제국에게 무참히 ▲ 시리아 부조로서 사라곤 2세B.C.722-705와 고위 성직 깨지고 만다. 결국 앗시리아의 황제 사 자를 나타내고 있음 르곤 2세에 의해 원정군을 보내‘이집 트’와‘구스’를 비롯한 그 반란군들을 신속하게 무마시켜 분쇄하였다. 70 버려진 예수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71
72 버려진 예수
당시 사르곤 왕의 원정을 그려 아직 남아있는‘앗시리아의 기록’이 주는 의미는 실제 성경에서 나열한 나라들과 당시 주위 도시와 나라들의 현황과 사건의 진실성을 더욱 높여 주었다. 그 지역은 예루살렘 성전 옆에 위치한 그 당시 아라비아 영토 위에 존재하였고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에 맞닿아 있었으며, 서남 아시아의 고대 제국이었던 수도 니네베Nineveh에 위치한 앗시리아 제국은 약소국가들을 점령하고 도성들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반쪽 유다의 존재에 관한 미래는 골칫거리인 앗시리아 제국으 로 인해 불투명해졌고 그 강대국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멸망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선포에도 아 랑곳하지 않았던 북 이스라엘 왕국은 침체에 극치를 달아 아모스와 호세 아, 이들의 예언자로서 경고와 재난의 경험에도 이들의 자존심과 경고망동 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기고만장하여 떠들 어대는 모습을 이사야 입술로 과감히 드러난다. 그들은 마치“흙 벽돌이 무 너지면 다듬은 돌로 쌓고 돌무화과나무마저 찍혀 넘어간들 송백을 심으리 라”60라고 말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사마리아 성마저 무너진들, 또 다 시 재건하려는 그들의 멍한 마음이 예언을 모두 물거품으로 일궈지게 되어 최후의 보류로 남은 듯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된 북쪽 이스라엘은 남겨 진 파멸과 멸망뿐이거늘“무너지면 다시 쌓자!”라는 재건설주의가 팽배하 기도 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에게 분노(움직임의 시작)하는 결과를 초래하 였으며 이 땅이 타오르는 광경을 목격한 백성들 또한 불길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게 됨61을 예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들과 백성들은 그 일 에 묵묵히 넋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 습을 보게 된 경우를 칼릴 지브란의 말을 통해 극명하게 잘 나타내고 있었 다.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73
“신은‘사랑’과‘자유’의 광활한 하늘을 날아가도록 그대의 영혼에다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대 자신의 손으로 그 날개를 잘라내고 영혼이 버 러지처럼 땅 위로 기어가는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 이겠는가.” 거절된 어떤 징조,‘임마누엘’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두 나라, 이스라엘과 유다 안과 밖의 난국적 상황 쯤에 살고 있던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 은 후 예언을 하게 된다. 곧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서 기이한 거룩한 징조62 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사이 아람과 북 이스라엘 나라의 동맹연 합군은 이스라엘의 반쪽 나라인 남쪽 유다 백성들을 정복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긴박한 이 때 유다 왕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숲이 바 람에 마구 흔들리는 상황처럼 그들의 심리적 혼돈으로 마구 요동치고 있었 음을 진술한다.63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사야 면 전에서 그들을 향해 예언했다. 그 때 여호와는 이사야에게 윗못 수도 끝 세 탁자의 밭64 큰 길(지금의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 근처로 추측하는 곳)에 나 가 왕을 만나서 적들을 보며 말하길, 그들은 그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 루터기에 불과하여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충고를 넌지시 던진다. 이사야는 그 예언을 자신의 왕 아하스에게 전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포기하지 아니하고 아하스 왕에게“네 하 나님 여호와께 한가지 징조를 구하라! 그것이 깊은 데서든 높은 데서든 구 하라!”65고 충고했다. 하지만 일절 어떤 징조도 구하지 않는 왕을 두고서 이 사야 예언은 다음처럼 진행 중이었다.66 74 버려진 예수
A.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 B. 그 아이 이름은‘임마누엘’이라고도 불린다. C.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한다. D.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두 왕은 폐하게 된다. 비록 그의 입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했던 예언임에도 마치 피 와 혈이 난무하는 전쟁을 앞둔 아하스 왕에게 비논리적으로 엉뚱한 말인 처녀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면 왕은 아마 적지 않게 당황 했을 것이다. 전쟁 앞에서 출산을 이야기하는 기가 막힌 타이밍(?)을 노린 이 상황에서 누가 생각해도 당황했을 것이다. 오히려 뜬금없는 이야기로 상황을 더욱 어지럽게 수놓는다. 전쟁이 시작되는 지금 하나님의 검과 창이 그대의 손과 함께 있다고 생 각해보라! 그런 가운데 유일한 하나님은 뜬금없이‘처녀’,‘아들’,‘악’,‘선’ 이야기나 하고 있는 한심스런 상황에 아하스 왕은 이내 다른 마음을 먹은 듯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이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사야는 추가 적으로‘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두 왕은 폐한다 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역설적으로 예수와 아하스의 당한 직면은 비록 같 은 고통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듯 유다의 왕 아하스 는 하나님의 뜻을 완고히 거절했다. 그러나 예수는 예언에 참착하게 맞물 려 갔다. 버려지고 찢긴 이사야의 예언은 후대에 예수로 인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한 그 예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신 청년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의 뜻으로 순종하여 묵 묵히 수행한다. 곧 그 길은 유대인들조차 극히 꺼리는 일이 되어버린‘버려 짐과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신약의 마태복음에 출현하는 사자(천사 혹은 전달자)의 입을 통해 전해준 동일한 단어인‘임마누엘’은 당시 불과 10대 소녀였던 마리아의 임신과 관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75
련이 있다. 그 충격을 접해 들어 혼란스런 상황에 갑자기 약혼자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언을 하면서 인용한 문구가 바로 이 구절이었다. 만약 아 하스 왕이 임마누엘의 의미와 처녀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나단의 예 언 앞에 아마 바짝 엎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이사야의 예 언들은 왕에게서 무참히 버려진다. 긴장된 상황에 화를 불어 넣어 잿더미로 만들고자 생각하지 않고서야 이 러한 내용은 듣는 이로 하여금 다분히 화를 돋구게 만들고 만다. 그런 어설 픈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비수 같은 칼날 같은 징조가 서려 있어 우 리의 아픈 상황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과 뜻을 잘 살펴 야 하는 우리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더욱 더 절실하게 느껴야 하지만 현실 감과 동떨어진 예언의 충돌은 피할 길이 없었다. 이방의 빛? 메시야를 훨씬 더 정확하게 예언한 자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예언자들 은 구체적인 메시야의 삶과 죽음을 비껴가고 있으나(적어도 우리들 생각에 는 말이지만) 이사야는 남달랐다.‘이사야’라는 그 이름은“여호와는 구원 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라면 모두에게 자신의 고 유한 문장이라는 숨겨진 뜻이 담겨 있는 이름들 중 하나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예언 중 순한 양처럼 조용한 죽음에 이르는 장 면을 미리 보여준 것을 기록했다. 그는 진정 눈 앞에 예수를 보고서 말한 걸까? 아니면 자신을 가리킨 걸까? 이사야 42장 1-4절 그리고 6-7절을 동 시에 살펴보자! A. 하나님은 그에게 신을 불어 넣어준다고 한다. B. 그가 공의를 베푼다. C. 그가 외치지 아니하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76 버려진 예수
D. 그가 소리지르나 결국엔 거리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E.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한다. F. 그는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한다. G. 그가 진리를 가지고 공의를 베푼다. H. 그는 쇠하지 아니하고, 낙담하지 아니한다. I. 그가 공의를 세움에 섬들이 그 교훈을 삼는다. J. 하나님은 그를‘의’로서 불렀다. K. 하나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신다. L. 그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한다. M. 그는 소경의 눈을 밝게 하고,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끈다. N. 그가 흑암에 처한 자를 감옥에서 구원한다. 뛰어난 문학 소년이라고 정평이 나있던 이사야는 자신의 박식한 문학적 표현으로 성경을 기록한 천재소년이라는 애칭이 그의 이름과 함께 늘 붙어 다녔다. 유대인의 전승(미나쉬)에 의하면 그는 므낫세가 통치할 쯤, 톱으로 몸이 잘리는 극한의 아픔과 고통을 감수하며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사야가 남 유다를 활동하던 시기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앞에서 잠 시 언급한 대로 거대한 제국으로 거듭난 앗시리아 제국은 결국 북쪽 이스 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자 그 힘으로 또 다시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 성 전을 공격하기에 이르는 시대였다. 북쪽의 앗시리아 제국은 남하 정책을 펼쳐 남 유다를 힘들게 하였고, 남 쪽에서는 애굽(지금의 이집트)이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함으로 늘 날카로운 대립 관계에 노출되어 있었다. 남 유다 왕들은 이사야의 존재를 알고 있었 으며 왕에게 많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불안한 시국 상황에서도 그 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77
차서 헐떡일 것이라.”67 그는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분노에 치를 떨었 고, 마치 그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지칠 때까지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자신 의 사역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예언을 울리는 징으로서 들으려 했고, 또 이들의 귀를 향해 부는 희미한 바람과 같 이 여겼다. 또한 보아도 그것이 무슨 현상인지 볼 수가 없었다. 예레미야 의 예언과 비슷하게 그는“너희 못 듣는 자들아!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 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68라며 백성들의 무지를 드러 내고 있었다. 이런 문장은 예수가 인용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들 이스라엘 민족에게 쏟아 사방에 불을 지피는데도 그들은 깨닫지 아니했다. 이사야는 또한 조각한 거짓 우상에게 다음과 같은 선포를 했다.“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69라고 하며 헛되 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그들에게 잘못 믿고 있는 거짓된 것임을 호되게 꾸 짖고 있었다. 더욱이 이방신에게 장차 당할 일을 고하여 자신의 위엄을 과 시해보라고 전했다. 더불어 미래의 일을 알려달라는 비난과 비웃음을 통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다”70라고 존재하신 하나님과 비 교함으로 우상의 존재를 마음 속에서 지우도록 압박을 가했다. 게다가 여 호와는 한 사람을 북방에서 일으키어 고관들을 석회처럼 또한 토기장이가 진흙을 마구 밟음과 같이 짓밟는다고 경고하며 누가 이런 일을 알렸겠냐고 반문하고 있었다. 동시에“우상은 예언을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 주는 자도 없나니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을 것이다”71라고 아주 당당하게 선포 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주위로 펼쳐진 끊임없는 전쟁은 선지자 이사야 시대에 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곳에 하나님 역시 존재하고 있 었다. 물론 하나님은 존재했지만 예언자들의 죽음은 어찌하지 못했다. 더 78 버려진 예수
욱이 전쟁과 이방신의 우상 그리고 사리사욕과 탐욕들은 하나님이 존재하 고 개입하는 이 땅 위에서조차 점점 더 발전에 거듭하여 번져갔다. 그런 와 중에도 이제 슬픈 소식에서 전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 복된 소식을 알 리는데, 이는 시온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할 자가 보일 것이고 기쁜 소 식을 예루살렘에 주겠다는 말을 예언으로 남긴다.72 이사야 입술을 통한 메시야의 독특한 행위는‘침묵’이라고 할 수가 있다. 침묵을 유지하는 그의 메시지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고, 상한 갈대를 꺾 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기에73 너무 유대인들 사이에 연결되는 메시야 왕으로서의 이미지는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예 언의 일종이 된다. 이러한 예언의 의미가 두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전혀 개 운하지 않는 부정적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주변 인물을 대조하여 메시야 왕의 이미지를 생각해본다면? 이사야의 시대 말고도 추후 로마의 제국에서 벌어지는 지도자들의 권력과 무력을 승화시켜 로마를 대제국으로 만들어 유럽의 절반을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던‘카이사르 황제’, 바벨론 제 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위대한 인물인‘고레스’, 비록 로마의 등에 업었음에도 예루살렘 멸망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반역자 ‘요세푸스’, B.C. 166년 갈릴리 정벌을 이룩하고자 한 첫 이스라엘 왕으로 등장한‘아리스토불루스’까지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단순히 이사야의 메 시야 역할을 대조해보면 너무 맞지 않는 이미지다. 이사야의 예언은 결국 세상에 침묵을 지키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에게 물과 기름과 같이 겉돌아 귀감을 받지 못했다. 끝내 이사야 자신도 목소리 만 높이다가 죽는다. 이사야의 예언을 좀 더 살펴보면 이제 누구나 공감하 는 바가 있다. 이사야가 말한“상한 갈대”는 바로 인간의 삶 자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을 돌보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갈대를 꺾어 피리로 사용하기도 했다. 갈대는 늪이나 습기가 많은 지대에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79
서식하는 연약한 줄기이면서도 비와 바람과 같은 자연 환경에 노출되어 상 하고 갈라지고 찢겨지지만 잘 버티는 편이다. 언약하고 결함을 가진 갈대 같은 인간에게조차 이를 꺾지 아니하는 인간들을 돌보는 역사적인 상황 연 출하는 모습에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예언에 비록 실망했을 것이다. 반대 로 이방인으로서의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진지하고 자신을 낮추고 죽는 그 모습에 열광하고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예수에게서 나타난 이미지는 신약에 등장 하지만 이미 구약에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의 삶과 이미지는 이사야가 언급한 메시야의 이미지와 실로 놀랍도록 같다. 물론 예수 탄생 전후로 다른 메시야들은 존재했다. 그런 거짓 선지자 틈에 낀 예 수 탄생의 계기를 통해 다른 비슷한 메시야 인물과 비교해 예수가 유대 땅 그 거리에서 그 어느 예언자나 선지자들처럼 외치지 않았던 점이 오히려 대조된다. 정의를 실행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거리에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 지 않는다고 혹은 외치지 아니한다고 해서 그가 망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죽는 것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쇠하지 않는 모습과 낙담 하지도 아니한다고 하고 세상에 바른‘정의’가 실현되게 된다는 이사야 입 에서 나온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들에게 잘 보인다.74 또한 섬들이 메시야가 세운 교훈을 사모하게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사실 21세기 사는 작은 섬같 은 나라들이 예수를 믿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가능하다. 어째든 이 사야의 예언처럼 예수는 버려지고 찢기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마침내 소 위 말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그는 끌어당긴다. 분명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의’로서 하나님의 종 메시야를 선택하였고, 그의 손을 붙잡고 보호 하며 그가 바로‘백성의 언약’이자‘이방의 빛’이 된다고 하는 말을 남김으 로 오늘날 이방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예수와 사상을 알게 만들었다. 그의 80 버려진 예수
이룩한‘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빛’이라는 업적과도 바로 일치되어 간다. 이사야의 예언은 마치 예수에게만 들어맞는 듯 그렇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예언들이 예수 앞에 모여 조아리듯 세상은 어 쩌면 그가 수놓은 이야기들에 가득 찬 세상일지도 모른다. 예수의 모습, 그리고 고정관념들 이사야서 중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인 52장에 보게 되면 기독 교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도 메시야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제시할 수가 있 다. 수 백년 전, 이미 이사야의 뇌리 속에 메시야 이미지가 그려진 것을 보 면 무엇이 진정 예언인가를 알 수 있다. 성경 전체 윤곽을 그리며 틈틈이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었던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가 꿈꾸 었던 여러 가지 모습들을 그려 볼 수 있었다. 2001년도까지 먼저 거슬러 그 해, 영국 맨체스터 대학 연구팀이 개발한 첨단법의학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해 최근 발굴된 1 세기 유대인들의 두개 골을 바탕으로 당시 예수의 모습을 소개한 그림을 보게 되면 예수의 얼굴 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만약 우리의 고정관념을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아마 이러한 생각일 것 이다. 내가 보고 싶은 그 예수를 아주 멋지고 고운 빛깔의 금빛 머리 결이 수놓은 듯한 풍채와 빛에 의해 늘 화사한 얼굴로 남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 런 자로 이해했기에 그를 보고 싶은 소원이 이전보다 더욱더 간절했던 나 의 어린 시절의 사고를 벗어나고 있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 로마시대와 중세시대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화가들 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예수의 근육질 몸매를 보여주기도 하며 유명 연예 인을 닮은 듯한 착각에 빠져 보게 된다. 십자가에서 달린 모습도 초라하기 보다는 찬란하고 그러면서도 숭고한 모습을 띈다. 그러나 암울하고 침묵다 운 모습으로 어느 시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던 예수를 그리기도 했다. 이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81
렇듯 다양한 각도의 모습들을 추적하고 조명하여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모 습들을 대조해보면서 나름대로 지금 다시 상상해 본다. 그러나 나라마다 풍겨나는 예수의 이미지는 실로 다양하다. 이사야가 본 메시야의 이미지로 서 잠시 고난의 종을 표현한 이사야의 예언 중 메시야의 모습을 드러낸 52, 53장에 대한 간추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의 종이 형통케 되고, 받들어 높이 들린다. 그리고 그 종은 존 귀케 된다. B. 그 종의 모양은 다른 사람과 달리 상한 모습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를 보고 아연실색하게 놀란다. C. 그가 나라를 놀라게 하고, 왕들이 그 때문에 자신들의 입을 봉하게 만든다. 이 전에 전혀 전파되지 않았던 장면을 보게 되고, 듣지도 못 한 것을 깨닫게 된다. D. 그는 하나님 앞에 자라나는 연한 순(식물의 잔가지) 같고, 마른 땅에 서 갓 나온 뿌리 같아 풍채(화려한 영광)도 없다. E. 그는 멸시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다. 간고, 즉‘슬픔’과‘고통’ 을 많이 겪어 얼굴을 가리고 질고(질병과 고통)을 알고 인정한 자다. F. 우리의 질고(질병과 고통)을 대신 지고 받아 들이어 슬픔과 고통을 나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맞고 때림으로 굴복 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G. 그는 신성 모독으로 범죄자가 되어 부스러지고, 그의 사악함이 우리 의 채찍 위에 평화를 맞는다. H. 모든 양들이 길을 잃고, 제 각각의 태도로 돌리지만, 하나님은 통치 자(그 종)에게 죄의 처벌을 만나게 하신다. I. 그가 고통을 당하여도, 괴롭힘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고,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자(도륙자) 앞에 침묵을 지키고 입을 열지 않는 82 버려진 예수
다. J. 그의 무덤은 부유한 자와 더불어 악인과 함께 했고, 그럼에도 그는 강포(폭력)을 사용하지 아니하며 그의 입에 궤사(거짓말)이 없다. K. 자기 영혼을 버려‘범죄자’로 헤아려 준비된 자다. 과거 예언자들 중 이렇게 솔직담백하고 노골적인 예언은 없었다. 하나님 의 손에 의해 매맞는 메시야를 현대인들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히려 이 언어들은 반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이다. 죄의 처벌이 그에게 드러나기에 오히려 믿을 수가 없다. 이 내용의 메시야 예언은 예수 이전에 결코 실제로 누군가를 통해 드러나지 못했다. 너무 적나라하게 메시야 모습을 담아냈는 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다. 게다가 이 내용은 신약이 마련되기 훨씬 전에 기록된 내용이라는 점을 알아야 했다. 그 예언에서 보듯 경멸감이 우러러지고, 무시당하는 모습들, 천대 받아 도 마땅할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또한 숨 김없이 속내를 내비치는 모습들 속에 이렇게 비틀어 비꼬는 언약을 받아들 일 수가 있단 말인가? 예수가 메시야로서 범죄자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을까? 또한 악인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는 의미 에 좀더 신중하게 생각된다. 의인이면서 죄인 취급 당한다는 말에 자기 영 혼의 수고가 다분히 죽음으로 끝맺는 것 같다. 그 결말 속에 단순히 추상적 이 아닌 실제 메시야의 죽음이 이토록 정확하게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21세기 현대인들에게도 점꾀같은 미신은 어느 나라에도 동일할 것이다. 오히려 최첨단을 달리는 오늘날 대학 시험과 취업, 그리고 사업의 방향을 보여주려 조그마한 천막 같은 공간에서 거짓 유혹을 하는 예언자(오늘날의 점꽤를 보는 자들)와 그의 입술에서 내뿜는 어리석은 예언을 더 잘 믿는 현 대인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만약 몇년 후 아니 몇백 년 후의 사람을 이렇게 정확하게 예언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83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자세히 읽고 또 한번 묵 상을 해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읽고 나면 당신은 그 동 안 보아왔던, 늘 그래왔던 그 어떤 모습도 예수가 걸어간 길을 닮지 않았다 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예언자도 이처럼 아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예수의 참된 모습과 다양한 형태들을 보아왔지만 당시 유대인 들이나 이사야 본인은 예수를 보지 못했고, 아직 먼훗날의 이야기를 그려 내어 그 예언을 듣거나 상상한다면 무슨 예언이 그럴 수가 있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우리가 화가의 그림이나 영화의 장면을 보아왔던 예수의 공통 적인 모습을 보면 비슷하다. 거룩한 하얀 가운을 걸친 채 수염과 긴 곱슬머 리의 갈색 머리 혹은 검은 머리카락을 한 다정 다감한 그 모습을. 1975년에 로버트 파웰을 주연,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나사렛 예수』라 는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이 주인공은 볼이 약간 들어간 얼굴과 파란 눈 그리고 긴 곱슬머리에 약간 말랐지만 큰 키로 보여진다. 때론 1671년경『대제사장 앞에 선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반 호토르스트 라는 사람의 화가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예수의 상을 보게 된다. 전체적으 로 분위기는 어두운 조명 가운데 탁자 위에 촛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그 중앙을 기점으로 왼쪽에 신분이 꽤 높아 보이는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앉아있는 대제사장과 그와 관련된 사람 2명이 옆에 서있다. 그림의 오른쪽 에는 교회 성가대 지휘자들이 보통 입는 하얀 긴 가운처럼 지중해 지방에 서 입는 그들만의 긴 옷을 입고, 두 손을 앞으로 포개어 있어 겸허한 모습 을 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 예수는 커다란 키에 목 부분까지 내려온 긴 머 리에 수염을 하고 있는 그의 외형을 볼 수 있으며 마치 대제사장 앞에서 겸 허히 신문에 응하는 모습으로 촛불 위 혹은 어디론가를 그저 말없이 응시 하고 있는 듯하다. 『교회사 전집History of 』의the Christian Church 저자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교회사를 84 버려진 예수
회상하며 당시 예수의 모습에 대해 견해를 밝힌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당대의 관습과 사람들에 맞춰 복장과 용모를 취하 시고, 겉치장은 피하셨을 것이다. 혼잡한 군중 틈을 지나셔도 눈에 띄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주시하는 자에게는 용모와 태도로 영적인 아름다움과 두려운 엄위를 드러내셨음에 틀림없다.”75 사실 우리가 가지는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에 대한 자료나 근거가 전혀 없다. 다분히 신빙성이 있거나 혹은 권위 있는 자료가 없는 실정에 기독교 미술계의 인사들은 예수를 사람의 자녀들 중 가장 아름다운 자녀상에 가시적 형태로서 묘사하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실제 시편 23장 혹은 이사야 53장에 내비치는 메시야의 참혹하고 고난 당하는 살인자의 경고와 같은 끔찍한 예언에 대해 박해를 받던 주후 3세기 동안, 그런 모습의 예수를 그릴 수 없었고 보기에 흉할 수 있는 참된 예수 의 형상을 그리기 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소설가 르낭Renan은 마리아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멋진 청년 혹은 조 용하고 기품 있는 온화한 갈릴리 사람으로, 심지어 콧대 높은 본디오 빌라 도의 귀부인 아내도 창문에서 본 예수의 모습 속에 매료(?) 당할 정도의 모 습으로 나타내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런 온화하고 근엄하고, 매료 당할 정도의 내용만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것이 이사야의 예언 전 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수를 언제 만났느냐를 두고 시기나 시점에서 보이는 예수의 풍채와 이미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선한 이미지의 예수에게 폭력도 없었고, 침묵으 로 일관하여 말 없는 악인이 되어 버리는 점도 실로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 리하여 범죄자로 낙인 찍힘과 동시에 악인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십자가와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85
두 강도를 떠오르게 한다. 더불어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 중 마무리가 될 무렵, 여호와 하나님이 질고를 허락하였음에도“그의 영혼을 속건제물 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 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76 할 것으로 남긴다. 이는 메시야 십자가의 죽음이 비극으로 결말 날지도 모르는 예상을 희극으로 끝을 맺는 아름다운 결말도 함께 수록하고 있었다. 질고를 아는 범죄자 이슬람 종교의 지도자인 모하메드를 이슬람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사람 으로 추대하고 있다. 그들도 예수를 아마 유대인의 사고와 생각처럼 비슷 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언젠가『Jesus in Egypt(이집트 예수 - 지은이 역주)』라는 책을 읽으면 서 내 몸을 지하철에 앉은 채 의지하고 있었다. 마침 옆에 한국의 유명한 큰 회사 전기제어 팀의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슬람 교인이 내 옆에 앉 았지만 나는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 조금 후에 그 사람이 내게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으며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우리는 잠시나마 서로에 대해 조금의 여유를 풀 수 있었다. 그를 포함한 이슬람 사람들은 예수에 대 해 마호메드와 같은 부류의 한 인간a men이자 영적인 관점보다는 육적인 선 지자로서 예수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대화 중 당연히 난 기독교인이며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적으로 대화를 이끌기 위해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실제 난 하루에 몇 번씩이나 고집하는 이슬람의 기도를 하는 모습을 이스라엘에서 보았다고 털어 놓았다. 게다가 그것을 매우 흥 미롭게 매료된 하나의 그림같이 생각했다고 경험담을 내세우며 그를 치켜 세웠다. 그가 말하길“내게 예수는 그저 사람이었고 훌륭한 스승이자 예언 자였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으로서 부각시키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듯 86 버려진 예수
했다. 그에게 예수를 사람이라는 가죽 옷을 입고 범죄자로 낙인 찍힌 모습으로 부각시켰다면 그는 아마 진정 좋아했을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외부에서 무수히 비춰지는 다양한 각도의 그 모습은 외모 말고도 그를 보는 무수한 자들에 의거 총동원된 상상의 나래 속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입술에서 나온“고난 받는 범죄자” 인 예수에 대한 예언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 복음 저자가 예수 시절에 많 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보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시절77들까지도 말 이다. 그럼에도 사실 신약에서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 받아 그의 하 늘의 언사를 대항할 자는 한 명도 없으나, 다만 그를 시기하고 대적하는 사 람은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예수는 분노 혹은 멸시를 그들을 향하여 보이 지도 않았으며, 썩고 상한 갈대를 버리지도 꺾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 들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로간의 시기와 미움과는 너무 대조적이지 않는가? 우리 심리는 상한 갈대가 보이면 꺾고 자 하는 마음뿐이다. 범죄자 예수가 내뱉는 그의 말 한마디는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 유별나 게 똑똑했으며, 유식하게도 어릴 때부터 지독하며 착실하게 배웠던 유대인 들의 지식과 말재주에도 예수를 이겨내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비록 낮은 자를 업신 어기며 더럽고 추한 자에게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유 대인들과 달리 죄인과 친구하고 악한 자를 도와주는, 그래서 그를 악한 자 에 눌렸다고‘사단’혹은‘악마’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 탁월한(?) 인 간의 참된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양처럼 유순한 그에게 범죄자로서 너무 다른 경향을 보였다. 더욱이 사단의 시험을 거절하지 않았고, 받아들임으로 당당하게 걸어갔 던 예수는 그 시험을 겸허히 받아 들임과 동시에 세 마디 말로서 사단을 떠 나 보내게 만들기도 했다. 그 자리를 천사가 차지하고 그를 수종했다.78 또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87
다른 모습에서 예수는 안부를 묻고자 자신을 뵈러 온 안드레와 빌립에게 자신을 일컬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그래서 자신을 일컬어 인자가 들 려야 한다는 언급을 스스로 하기도 했다.79 다음 전개될 예수의 메시지가 나를 더 충격적인 사고로 몰아넣게 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 밀알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80라고 말이다. 그 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영광’을 대신하여‘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사야가 제시한 고난 받 는 종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혹은 유대인들이 꿈꾸었던 적대적 나라 들을 몰아내는 정치적 왕으로서는 극단적인 정반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예수의 모습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 들고 있음에도 예 수의 모습과 그의 삶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왕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88 버려진 예수
▌2장 미주 ▌ 1. C.S. 루이스, ‘기적’, 홍성사, pp13. 2. Cicero, De Orature, II, 46, 194. 3. 마가복음 5:12. 4. 아브라함 J. 헤셀(Abraham J. Heschel),“예언자들”, 삼인, p28 5. 레위기 4:3. 6. Rabbi Barry Dov Lerner, Why don’t Jews accept Jesus as the Messiah?, About.com 사이트에서 ‘Search’ (문장 찾기)으로 찾아보길 바란다. 7. 팔머 로버슨의 작품 제목을“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로 이 심주 옮김. 8. 월튼∙매튜스∙샤발라스 공저,“IVP 성경배경주석(구약편)”IVP, p108 참조. 9. 사도행전 7:51, 출애굽기 32:9. 10. 출애굽기 32장. 11. 신명기 18:16. 12. 우선 출애굽기 20장 19절을 보면 출애굽 후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들에게 말하지 말고 모세의 말을 듣기 원하고 있는데 이유는 자신들이 죽을 까 염려하게 된다. 신명기 5: 23 ~ 27, 4 : 33. 실제 성경에는 두 번을 언급 하지만 그만큼 이들에게는 절박한 요구사항이었을 것이다. 13.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르쳐 말한 것이라고 베드 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를 한다. 또한 그 말에 앞서 서 그는 하나님의 예언을 한 모세의 신명기 예언을 인용한다(사도행전 3:21- 24). 14. 신명기18:19-20. 15. 요한 복음 4장 34절 이후를 보게 되면 예수 자신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의 뜻을 향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 한다는 예수님 자신의 일 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하는 그의 참된 모습을 보면 숙연해 진다. 16. 사무엘상 10:6. 17. 사무엘하 7:1. 18. 사무엘하 12:9. 19. 열왕기상 1:13. 20. 사무엘하 7:12. 21. 사무엘하 7:13. 22. 사무엘하 7:12. 23. 사무엘하 7:13. 24. 사도행전 2:29-30. 25. 사무엘하 7:16. 26. 누가복음 1:32-33 27. 예레미야 23:9. 28. 예레미야 11:19. 29. 예레미야 23:9-11. 30. 열왕기하 9:11. 31. 예레미야 29:26.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89
32. 열왕기하 1:9. 33. 예레미야 1:4. 34. 아브라함 J. 헤셀(Abraham J. Heschel), 예언자들(The Prophets), 이현주 옮 김, 삼인, p179. 35. 예레미야 5:27. 36. 예레미야 5:12. 37. 예레미야 5:30. 38. 예레미야 5:31. 39. 아브라함 J. 헤셀(Abraham J. Heschel), 예언자들(The Prophets), 이현주 옮 김,삼인 , p183. 40. 예레미야 11:19. 41. 예레미야 25:12. 42. 예레미야 25:15-38. 43. 예레미야 7:18. 44. 예레미야 7:31. 45. 예레미야 11:13. 46. 예레미야 1:6. 47. 예레미야 15:10. 48. 예레미야 22:19. 49. 예레미야 23:5. 50. 이사야 4:2-6, 에스겔 36:25. 51. 예레미야 23:4. 52. 예레미야 23: 5, 33:15. 53. 예레미야 23:6. 54. 예레미야 30:9, 23: 5. 55. 예레미야 33:14. 56. 예레미야 30:6. 57. H.H. Rowley, “The Servant of the Lord”(London: 1954), p118, 주2 해설 참조. 58. 이사야 20:2. 59. 앗시리아의 기원은 바벨탑 이야기로 알려진 시날 지방에서 출발한다. 시날은 수메르를 가리키고 현재의 이라크의 남부 지역으로 생각하면 된다(창10:10). 셈의 후손으로 이들은 노아시대에 방주를 함께 지었던 자의 후손이다. 유목 생활을 하던 이들 앗시리아 민족들은 늘 주위의 전쟁으로 떠돌이 생활을 일 삼다가 언제부턴가 세력이 확장되면서 커다란 주위국가를 삼키었고 급기야 지중해를 통하는 무역로를 차단하려고 하는 영향력을 뻗치게 된다. 결국 앗 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앗시리아 왕에게서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여 늘 공격 받아 북왕국은 멸망 당하고 만다. 60. 이사야 9:9. 61. 이사야 9:18. 62. 구약에는 여호와의 표적(sign)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사무엘상 2:34, 열왕 기하 19:20에 각각 살펴보라. 징조는 역사적 사건의 시작으로 해석할 수 있 으며 고대 근동에는 신이 주는 표적이 징조를 보이며 어떤 일이 시작되게 된 다. 신이 하늘의 다른 모습이나 재물의 부분에 징조를 남기는 그런 예이다. 90 버려진 예수
63. 이사야 7:2. 64. 당시 아하스 왕은 포위 되어질 성을 염려해 성안에 물을 확보할 방법을 조사 하기 위해 물 공급 체계를 조사하였을 것이며 저수지의 물이 다니는‘세탁자 의 밭’에 이르는 길이었을 것이다. 존 월튼 외 2명 IVP 성경배경주석(구약 편), p854 참조. 65. 이사야 7:11. 66. 이사야 7:14-16. 67. 이사야 42:14. 68. 이사야 42:19-20. 69. 이사야 41:21. 70. 이사야 41:24. 71. 이사야 41:26. 72. 이사야 41:27. 73. 이사야 42:3. 74. 이사야 42:4. 75. 필립 샤프(Philip Schaff), 교회사 전집 중 1권(사도적 기독교), 이길상 옮 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159. 76. 이사야 53:10. 77. 요한복음 12:38. 78. 마가복음 4: 11. 79. 요한복음 12:23. 80. 요한복음 12:24.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91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로마인들은 딱 한가지 목적밖에 없다. 그것은 고대부터 내려온 목적인데 모든 나라, 민족, 왕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제국과 부를 위한 무제한적 욕망을 충족시키자는 것이다. -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 친절함과 관대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은 정복의 새로운 방법이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 평화를 원하는 자에게 전쟁을 준비하게 하라 - 베게티우스, 4세기 -
신들의 정치? 인간들의 정치? 영화『벤허』에 보면 유다 지역 내에서 제일 가는 가문의 후예로‘유다 벤 허’가 등장한다. 어릴 때 그의 절친한 형제이자 친구인‘메살라’는 로마 군 인이 되기 위해 유대 땅을 떠난다. 시간이 지나 로마를 선택하여 군인이 된 메살라는 호민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유대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사실 을 알고, 옛 어린 친구였던 벤허는 그를 만나 지난날의 돈독한 우정을 서로 과시한다. 그러나 벤허는 메살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면서 서로간의 다 른 견해로 비운을 감지하게 된다. 비록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이들은 야 망과 목표가 뚜렷하게 다른 채, 서로 다른 견해로 마주서게 된다. 친구인 메살라 부사령관은 예루살렘 지도자인 유다 벤허를 이용하여 반란군들의 명단을 얻어내려고 친구의 초대에 응한다. 결국 벤허 집에 방문한 이들은 친구를 배신하고 권력을 움켜잡느냐 아니면 밀고를 버리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만드는 대화 속에서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로마 군인들의 진상을 엿 볼 수가 있다. 메살라 : “내가 특별한 것을 설명하겠네. 자네는 아직 잘 모르는 것일 세. 황제는 우리 모두를 지켜보고 있네. 지금 이순간에서 동 방을 말일세. 이것이 내게 둘도 없는 성공의 기회이네. 적어 도 자네 역시 말이야. 내가 해낸다면 유다를 줄 수 있다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휘를 얻는다면. 내 약속하지. 그 끝이 어디인지 아는가? 로마! 황제 곁으로 갈 수 있는…, 아 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 앞으로 곧바로 가게 되 는 일까지…, 알아 안다고, 이는 가능성 있는 일이야! … 내 약속하지.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이지. 황제께서 우리를 주 시하시고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걸어 충성심을 보여야 하네. 자네가 무언가로 날 도와주면 된다네. 그분을 섬겨야 94 버려진 예수
하네…” 유다 벤허 :“자네는 그분을 신처럼 말하는 것 같네” 메살라 :“그는 신이네!! 유일한 신!… 그의 권력! 이 지구상에서 진정한 권력 말일세! (하늘을 가리키며) 아냐! … 저게 아닐세! 날 도 와주게 유다여!” 메살라와 유다 벤허와의 대화를 통해 보듯 왕의 위엄이 신과 동일시 되 는 추세는 유대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그러하듯 유대 땅 위에 펼쳐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유대를 포함하여 중동 국가들의 신과 왕의 형태는 어떠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고대 근동의 신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던 가드C.J. Gadd는 자신의 책에서 신 과 왕은 동양인의 마음에 너무나도 밀접히 짝지어져 있어서 둘 사이를 좀 처럼 분간하기 어렵다고 고백했다.1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전 세계는 신과 왕을 늘 접촉하고 있었다. 이러 한 사실적인 관점에 의하면 지금의 유럽과 근동 나라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통치와 신의 역사적 흐름이라고 하는 두 그림을 그려보는 동안 동시 다발 적으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이자 그들의 지배자인 로마에서도 꽃을 피웠고, 특히 곧 중점적으로 파헤칠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그 자리의 주인공이기 도 했다. 로마 시인들 중 대중적인 판타지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하고, 그리스∙로 마의 문학에 꽃을 피웠다고 하는 로마의 고전문학 중 하나로 불리는 다양 한 신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변신이야기』는 무척 유명하다. 그 책의 저 자는 바로‘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Publius Ovidius Naso 이다. 오늘날 통상 ‘오비디우스’라고 불리는 그가 자신의 책 마지막 부분에 카이사르와 아우 구스투스 황제를 칭송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95
“이분(카이사르)의 치세 때, 하늘의 신들이시여! 그대들은 인류에 큰 축 복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분이 인간의 씨에서 태어나시는 일이 없도록 그분은 신이 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부디 아 우구스투스의 머리Imperator가 자신이 지배하시던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오 르시어 멀리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그날이 더디게, 우리 시대보다 더 나중에 오게 해주소서!”2 그의 저서를 통해 다양한 신들을 인간의 삶과 동일하게 수놓으며 일반인 들에게 쉽게 접근하고자 했다. 물론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노골적으로 추종 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작품 활동에 전념하지만, 추후 아 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A.D 8년 유배되기에 이른다. 로마 황제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이 신으로서 왕적인 존재 는 아니었다. 다만 신이 된 인간으로 남겨진다. 그 왕은 신이 양자를 삼은 아들로 여러 다른 남신들과 여신들에 의하여 양육되어간다. 다른 나라는 어떠할까? J.G.프레저J.G. Frazer의 저서『The Golden Bough(그리스 신화 - 지은이 역 주)』에는 파르티아 아르사킷 왕조의 국왕들도 해와 달의 형제임을 자처했 고, 곧 신으로 숭배되었다. 『The Sacred Scriptures of the Japanese(일본의 무서운 경전들 - 지은이 역주)』의 저자 P. 윌러P. Wheeler가 말하길 일본의 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 성한 존재였다고 한다. 급기야 당시 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련의 모든 말과 토론은 주제로 삼을 수 없었고, 그것을 위해 금지된 법과 정의를 만드 는 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The Early Tudor Theory of Kingship(초기 튜더 왕조의 왕권 이론 - 지 은이 역주)』의 저자 F.L. 보머F.L.Baumer는 로마 황제를‘신이자 주인’으로 모 96 버려진 예수
시는 신격화를 비롯하여 중세기 전통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을 인간의 한 부분처럼 쉽게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인간에게 신의 장신구를 달아주려 는, 이런 경향의 흔적으로“그 눈부신 햇살에 천민은 무릎을 꿇고 지혜로운 자라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태양 같은 분”이라고 극찬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헨리 8세를 두고 한 말이었다. 또한 영국의 통치자 절대 군주들은 신 적인 종이였으며 그 왕들은“하나님 자신의 신격을 대신한다”는 말을 서슴 없이 읊었다. 이스라엘 땅 근처 이웃 나라들의 정치 형태는 어떠할까? 이집트, 앗시리 아(앗수르 제국), 그리고 페니키아의 왕들은 사제의 권한을 가지고 실제로 그 노릇을 했다. 곧 한 사람이 왕직과 사제의 기능을 포괄하여 아우르는 기 능을 담당하는 것은 원시 사회에서 다소 보편적 현상이었다. 반대로 사제 의 역할과 왕의 역할이 분리되는 나라도 있었다. 로마도 예외일 수 없었다. 때로는 로마도 사제와 왕의 분할 통치가 있었 고, 한 개인의 욕심으로 두 가지를 모두 하나로 품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초기 빛나는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에서는 절대로‘왕의 신격화’에 대한 사상은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사고였 다. 너 사람아! 띠로의 우두머리에게 일러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네가 으쓱해 가지고 ‘나는 신이다, 바다 한가운데 군림한 신이다’라고 하면서 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 우쭐댄다마는 그러나 너는 신이 아니요 사람이다 나 이제 뭇 민족 가운데서도 제 3 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 97
가장 사나운 외국인을 끌어들여 너를 치게 하리라! 너를 구렁에 처넣어 바다 가운데서 무참히 죽게 하리라! 너를 죽이는 사람이 앞에 닥쳐도 너는 감히 자신을 신이라 하겠느냐?”3 왕이 신격화되는 것에 대한 에스겔의 호통치고 경계하는 말은 새겨 들어 볼 만하다. 실제 왕이 없던 구약 시대부터 물론 왕정 제도가 꽃 피우는 시 대였더라도 왕은 고작 인간이었다. 그들에게 왕과 신은 엄격히 구별되었 고, 왕이 결코 신이 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약속이라는 의미에서 출발 한 언약의 일종이자 도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안위와 조율을 통해 백성들의 평화에 유념해야 하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스라엘 백성들의 번영에 책임 져야 했다. 유대의 왕이 된 자, 그 역시 하나 님과의 통치와 언약 준수를 반드시 지키고 율법에 대한 엄격한 마인드로 서 인간을 다스려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역할은 단지 유대인 들 중 하나님이 세운 왕을 섬기어야 했다. 더불어 언약의 일종인 율법을 가 진 채 하나님까지 동시에 섬기어야 하는 이중 부담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왕을 섬기고,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웃나라들과의 마찰을 야기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마를 포함한 이웃나라들의 통치자가 왕이면서도 사제의 역할을 함께 담당했던 것과는 달리, 과거 이스라엘 땅 위에서 왕은 결코 사제가 아니었다. 왕은 기름 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여 신 의 임명을 받고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하는 하수인에 불과한 점은 대조 적이기까지 하다. 이스라엘 왕이 세워진 후 그는 절대적으로 제사장이나 예언자 역할을 수 행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 제사장의 역할에 침범할 수 없는 영 98 버려진 예수
Search
Read the Text Version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 69
- 70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80
- 81
- 82
- 83
- 84
- 85
- 86
- 87
- 88
- 89
- 90
- 91
- 92
- 93
- 94
- 95
- 96
- 97
- 98
- 99
- 100
- 101
- 102
- 103
- 104
- 105
- 106
- 107
- 108
- 109
- 110
- 111
- 112
- 113
- 114
- 115
- 116
- 117
- 118
- 119
- 120
- 121
- 122
- 123
- 124
- 125
- 126
- 127
- 128
- 129
- 130
- 131
- 132
- 133
- 134
- 135
- 136
- 137
- 138
- 139
- 140
- 141
- 142
- 143
- 144
- 145
- 146
- 147
- 148
- 149
- 150
- 151
- 152
- 153
- 154
- 155
- 156
- 157
- 158
- 159
- 160
- 161
- 162
- 163
- 164
- 165
- 166
- 167
- 168
- 169
- 170
- 171
- 172
- 173
- 174
- 175
- 176
- 177
- 178
- 179
- 180
- 181
- 182
- 183
- 184
- 185
- 186
- 187
- 188
- 189
- 190
- 191
- 192
- 193
- 194
- 195
- 196
- 197
- 198
- 199
- 200
- 201
- 202
- 203
- 204
- 205
- 206
- 207
- 208
- 209
- 210
- 211
- 212
- 213
- 214
- 215
- 216
- 217
- 218
- 219
- 220
- 221
- 222
- 223
- 224
- 225
- 226
- 227
- 228
- 229
- 230
- 231
- 232
- 233
- 234
- 235
- 236
- 237
- 238
- 239
- 240
- 241
- 242
- 243
- 244
- 245
- 246
- 247
- 248
- 249
- 250
- 251
- 252
- 253
- 254
- 255
- 256
- 257
- 258
- 259
- 260
- 261
- 262
- 263
- 264
- 265
- 266
- 267
- 268
- 269
- 270
- 271
- 272
- 273
- 274
- 275
- 276
- 277
- 278
- 279
- 280
- 281
- 282
- 283
- 284
- 285
- 286
- 287
- 288
- 289
- 290
- 291
- 292
- 293
- 294
- 295
- 296
- 297
- 298
- 299
- 300
- 301
- 302
- 303
- 304
- 305
- 306
- 307
- 308
- 309
- 310
- 311
- 312
- 313
- 314
- 315
- 316
- 317
- 318
- 319
- 320
- 321
- 322
- 323
- 324
- 325
- 326
- 327
- 328
- 329
- 330
- 331
- 332
- 333
- 334
- 335
- 336
- 337
- 338
- 339
- 340
- 341
- 342
- 343
- 344
- 345
- 346
- 347
- 348
- 349
- 350
- 351
- 352
- 353
- 354
- 355
- 356
- 357
- 358
- 359
- 360
- 361
- 362
- 363
- 364
- 365
- 366
- 367
- 368
- 369
- 370
- 371
- 372
- 373
- 374
- 375
- 376
- 377
- 378
- 379
- 380
- 381
- 382
- 383
- 384
- 385
- 386
- 387
- 388
- 389
- 390
- 391
- 392
- 393
- 394
- 395
- 396
- 397
- 398
- 399
- 400
- 401
- 402
- 403
- 404
- 405
- 406
- 407
- 408
- 409
- 410
- 411
- 412
- 413
- 414
- 415
- 416
- 417
- 418
- 419
- 420
- 421
- 422
- 423
- 424
- 425
- 426
- 427
- 428
- 429
- 430
- 431
- 432
- 433
- 434
- 435
- 436
- 437
- 438
- 439
- 440
- 441
- 442
- 443
- 444
- 445
- 446
- 447
- 448
- 449
- 450
- 451
- 452
- 453
- 454
- 455
- 456
- 457
- 458
- 459
- 460
- 461
- 462
- 463
- 464
- 465
- 466
- 467
- 468
- 469
- 470
- 471
- 472
- 473
- 474
- 475
- 476
- 477
- 478
- 479
- 480
- 481
- 482
- 483
- 484
- 485
- 486
- 487
- 488
- 489
- 490
- 491
- 492
- 493
- 494
- 495
- 496
- 497
- 498
- 499
- 500
- 501
- 502
- 503
- 504
- 505
- 506
- 507
- 508
- 509
- 510
- 511
- 512
- 513
- 514
- 515
- 516
- 517
- 518
- 519
- 520
- 521
- 522
- 523
- 524
- 525
- 526
- 527
- 528
- 529
- 530
- 531
- 532
- 533
- 534
- 535
- 536
- 537
- 538
- 539
- 540
- 1 - 50
- 51 - 100
- 101 - 150
- 151 - 200
- 201 - 250
- 251 - 300
- 301 - 350
- 351 - 400
- 401 - 450
- 451 - 500
- 501 - 540
P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