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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장로교회_30년사_2부

Published by kpcnjc, 2020-08-13 14: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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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창훌jjl.j혜 30 년사 The Presbyterian Church of New Jersey : A 30-Year History 1972-2002

치황료.iitj헤 30 녕샤 The Presbyterian Church of New Jersey : A 30-Year History 1972-2002 뉴저지장로교회 로고 01 의 로고는 뉴저지 장로교회가 위치한 -, I NEW JERSEY의 영문머리글자인 N과 T 가 겹쳐지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 가와기독교를상징하는 물고기 형상을이루고 있으며,물고기의 몸체와꼬리는대한민국을상 징하는 태극기의 색상t빨강과 파랑)을 띠고 있 다. 따라서, 로고 전체가나타내는 바는 “한국인 의 정 체 성 (IDENTITY)을 가지 고 미 국 NEW JERSEY에 자리잡은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하 는기독교회 “라고하겠다. (도안: 김창길목씨 ~OV많LAPPING LEIT많SOF ‘N’ AND l ‘J’ FORM THE CRUCIFIX AND FISH IN R퍼R페I없ANCEOFαfRIST. THE TA표 AND BODY OF THE FISH ARE ABS1RACIED AND mWRED WIIHTHE CEN1RAL HUES OFπffi KOREAN FlAG, RED AND BLUE. BY THESE VARIOUSSY뼈OUSMS, WE MEAN TO GIVE REFERENCE TO OUR MULTI-FACETED IDl많‘ITIIY AS Þ,표뼈많SOFπffi CHRISTI때 COMMUNITY IN NJ, AS 1\\표MBERS OF 깐ffi KOREAN-Al\\표IDCANm:rvαIDNITY II'‘~N J.

、 、 “9 부’ ‘ 우릭 교회의 발자취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IYIlù밍 [P[f엠덩며W영밍Il'Ô&l1Jíl ~Ilù띠『텅Ilù @U 매밍매~ D밍『콩밍y

1. 창립기(않72-1979) Eα rly Period 柳柳τ ι 젠 ¥ Efl톰'1(19 캡커 973) Inception Period 그월빽 *뺨 @빼 a 컸월종 쭉A 용를 “여1 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 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끼막 10: 1) 1972년 8월 13 일(주일). 한인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차를몰아 어느공원으 로모여들고있었다. 사일러스 칸닥트 공원(Si1as Condict Park)-허드슨 떠udso띠 강 건너 서쪽, 모리스 카운티(Morris County) 의 키 넬런 보로61(Borough of Kinnelon)에 자리잡은 아 름다운 공원이었다. 그곳을 찾아 나선 이들은 거의가 뉴저지 저지시티에 거점을 둔 한인들이었다. 여기서부 터 루트(Route) 23번 N을 타고 3, 40분 차를 몰아 가 면 키넬런 로드(Kinnelon Road)를 만난다. 그 길을 타 고 서쪽으로 314 마일쯤 가면 우측에 카운티 공원인 사 일러스 칸띄트 공원이 나온다. 오히려 지금의 우리 예 닮원이 있는 오클랜드(Oakland)에서는 더욱 가까운 거 6) 100 Kinnelon Rd., Borough of Kinnelon. 26

리에 있다. 호수가 있어 낚시도 할 수 있으 며, 등산로를 따라 등산을 즐길 수도 있다 붐비지 않고 조용한 이 공원은 물오리가 밀 고 가는 잔잔한 호수, 광활한 잔디밭, 산림 욕을 즐길 수 있는 숲, 완벽한 피크닉 시 설-언제나 평화스러워 보이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2002. 5. 5. 본 역사편찬위원 현 지답새 사진 1. 초대 담임 장영춘 목사 모인 무리는 장영춘7)(사진 1) 목사와 곽 The first senior pastor of the church, Rev 영철8) 김지수 9) 김지윤’ 이성남’ 오안순10) Youngchoon Chang 장영애’ 최진섭 가정 등 20 여 명이었다. 감 격의 첫 예배를 공원에서 드린 것이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이시지만 한 국에 계시던 하나님이 먼저 여기에 와 계선 것 같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찾아와 우 리를 불러 모으셨구나! 그런 유의 생각으로 그들의 마음은 떨렸으리라. 공원 이름의 지일러스(Silas)' 는 신약 성경(행 15 : 22-35)에 바울과 함께 사역한 ‘실 라 의 바른 발음 표기이교 자일러스 칸덕트(Silas Condict)’ 는 뉴저지에서 생존했던 인물 이다. 첫 예배를 드린 공원이름 자체가 의미가 있다면 있었다.11) 전기한 대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 사일러스(실래는 초대교회 선지자로서(행 15 : 32)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사실도 의미가 있거니와, 사일러스 칸닥틱1777~1861)도 뉴저지 초기 장로교인이자 정치인으로 뉴어크(Newark) 에서 태어나 1795년 프린스턴을 졸업했고 키운티 치안판샌 뉴저지 주의 7) 장영춘 현 뉴욕 련즈장로교회 담임목사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교장, 미주 크리스천신문 발행인 · 사장 등을 겸직하고 있다 뉴욕교협 회징-(4대)과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κAPC) 총회장도 역임했다. 8) 우리 교회 장립예배에서 여1 배 인도를 담당했던 곽영철 집사는 현재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소재하고 있 는 중앙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사역하고 있다. 우리 교회 해외선교부에서는 5 년째 그의 사역비 일부를 지 원하고있다. 9) 김지수 집사에 대해 양호식 장로는 말한다 “그는 나와 ROTC 동기로 친구이다. 그가 어느 날 내게 ‘공 원에 가보자’ 고 제의하여 따라갔다. 그것이 우리 교회 창립예배였디 원래 그는 한국서 신용산교회에 출 석했다, 당시 신용산교회에는 장영춘 목사가 전도사로 있었고? 장미은{장목사 부인)사요 안순익(이성남 부인), 김지수 등이 한 교회 학생회에 출석했다'(2002년 4월 12일 녹취) 10) 오안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본 제단을 섬겨오며 생존해온 역사의 산 증인 1977 년 12월 4 일 시무권 사로취임. 현은퇴권샤 11) 모리스 카운티 관련 인터넷 자료를 참조했읍. 27

사진 2 우리교회가 창립예배를 드렸던 최근의 사일러스 칸되트 공원 만le first worslrip service of the church at the Silas Condict Park 회 의원, 연방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동명 인 그의 아버지 (1738~1801)도 18세기 미 대륙의회 뉴저지 대표였고 삼촌인 루 이스 역시 주의원, 연방하원의원을 두루 맡았다. 그의 외손자 오거스터스 윌리염 커툴러 마저도 주 상원의원, 연방하원의원을 거쳤다. 이들 모두가 장로교인들이었다 칸닥트 부 지는 둘 다 모리스타운 제 1장로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그런 뜻갚은 이름을 가진 공원에서 우리 ‘뉴저지한인장로교회’ 가 태어났으니, 별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수 있겠다 사일라스 칸덕트 공원(사진 2) 은 1964년 9월에 모두 265에이커 위에 조성된 광활 한 공원이었다. 이 광활한 곳에서 한 한인교회가 웅대한 비전을 품은 아기로서 고고(때 때)의 울음을 내지른 것이었다 잉태의 고통은 필연적임에도, 본 교회가 순산된 요인이 있다. 그해 7월부터 주님께 믿 고 간구한 바의 결설이었다. 새 교회 설립에 뜻을 같이하는 장영춘 목새 이생남-안순익 집사 내외, 오안순 집λh 이성희 집λH오안순 집사 사위), 최진섭 집사 등이 기도 모임을 가져온것이었다 30년 전 교회장립 당시, 뉴저지 한인 동포(당시는 ‘교포’ 또는 ‘교민’ 이란 말을 많이 썼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리에서 한국인끼리 서로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 괴 더구나 한글 간판은 찾아 볼 수 없던 시절이다. 뜻이 통히는 동포들이 자연스럽게 모 여 소규모 그룹이 형성되고, 이들이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가정제단 형식의 예배가 있었 28

i 쟁념5:. 을따름이였다 그런 모임이 커져가면서 뉴욕과 뉴저지에 한둘썩 한인교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무 렵 이민자들과 유학생으로 구성된 한인교회는 예배처소인 동시에 이민생활과 직업 관련 뉴스를 나누기 위한 정보센터요 개인의 소식을 교환하는 만남의 장소였고, 나아가서 한 인사회를 대표하논 기관 역할도 했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한뜻을 나누는 교우들이 모여, 현존하는 뉴저지 두 번째 한인 교회인 본 교회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태평양을 건너온 같은 핏줄들의 애환과 망 향 같은 그리움을 달래주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진정 여기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딘 것이 다. 시작은 미약했으되 그 불씨가 타오르는 활화산이 되어, 뉴저지는 물론 미국 아니, 전 세계를 향한 천국 확장의 초석으로 이루어져갔다. 때마침 본국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 60주년을 맞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 서나마 어떤 의미성을 더해준 것이었다.1972년 9월 24 일에 열린 총회장립 60주년 기 념식에 초청 받은 주한 미국대사 필립 하비브는 축사{통역. 섬우전)를 통해, 한 · 미 교회 유대강화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12) ...본인이 기억하기로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국 선교사는 장로교회의 후원으로 온 의사 ‘호레스 N. 일렌’ 박사였습니다. 알렌 의사는 한쾌1 온 후 한국에서 미 국정부를 대표한 유명한 사람으로서 수년간 봉사했으며, 사실은 알렌 의사가 살던 집에 오늘날 제가 살고 있습니다. 지난 90년간 알렌 선교사 외에 많은 유능하고도 헌신적인 선교사들이 한국의 기독교회가 튼튼히 지활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과연 옳다. 그렇다면 90년이 지난 그 즈음에는 우리가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할 때 가 당도한 것이 아닐까? 이런 차제에 우리 교회가 문을 연 것은 그만큼 막중한 사명을 지고 태어난 것이라 하겠다. Q~뻐삐 앞에서 밝힌 대로 준비 기도 모임이 있어왔는데 거기에서 정한 것일까? 그토록 맘에 드는 공원을 선정한 것도 그렇거니와 누군가가 A4용지 크기의 주보를 12) r한국장로교 100년J /김웅호(金雄虎)편/목양사 215 쪽, 29

'-처 ^I^-O1--~2- .:ül효 130 년 At 준비해 가지고 나왔으니 말이다 상단에 ‘주일예배순서’ , 그 아래 줄로 ‘1972 .8.13 ’ ‘사회. 곽영철 집새 라 쓰였고1 그 부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 쪽에는 순서개 오른쪽에는 찬송가 가사가 적혀있었다 물론 손으로 쓴 것을 복사한 것 이지만 정성껏 썼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표c 1). 주보 한 장씩을 받아들고는 니무로 만들어져 있는 야외 취사용 식탁에 앉았다. 곽영철 집사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묵도 기원, 찬송의 순으로 이어졌다. 우리 교회가한공동체로서 첫 번째 부른찬송가는 ‘찬송 21’로되어있다. 현재 우리가사용 하고 있는 찬송가로는 433쟁눈을 들어 산을 보니)이다. 당시의 7μ1를 여기 적는다 1. 눈을 들어 t멸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여호와 나를 도와주시네 ιj ‘이「 」κ 셔 ι} Jι。4 4ilJ 4iiL :J. 기,1\\, 사 뀔ιι、 ι、ι← π니 υr 끼 이'.k. j‘ -‘i 밍 엇- ‘』녁 상 ’ “4약 \"J ‘1 j 'i ?“ 까,1! “-Ì- ‘ J;.. l.!; - 표- 1 창립예배 순서 ‘ 30

너의 발이 떨리잖고 주가 깨어 지키네 이스라엘 지키신 이 졸며 쉬지 않도다 2 하나님이 너를 지켜 우편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 않겠네 네게 화를 주지 않고 혼을 보호 하시며 너의 출입 영영토록 보호하시리로다 가사가 주는 의미가 크기도 하지만 맘껏 크게 볼라댔다. 이어서 부른 찬송 ‘하나님의 진리 등대’ ‘참 아름다워라’ 도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늘 높이 계셔도 못 들 으실분이 아니시건만! 미국인들이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눈물을 찍어내는 이 도있었다고한다 김지수 집사가 감격의 대표기도를 올렸다. 장영춘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였으니 제목 은 ‘벤엘로 올라가자’ 이었다. 설교 전에 ‘특찬 (특별찬송)’ 의 순서가 있었으나 누가 담 당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후로 성가대가 조직되기 전까지 서경숙, 곽영철, 김 현성, 김현덕, 김지수 등이 특별잔송을 담당하였다~) 창립예배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헌금순서를 가졌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 음 발을 딛고 감사를 드렀던 ‘청교도 정신’ 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동훈, 최진업 집사가 헌금위원이었다. 책채화 초대 담임목회자 장영춘 목사논 행정과 조직력에 있어 특별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 었다. 일례로? 창립예배를 드리자마자 바로 다음 주일 제직회를 구성했으니 말이다. 하기 야 기왕 뜻을 같이하는 교우들의 공동체라면, 중지를 모을 기구의 조기 구성은 당연할지 모른다. 제직회 구성과정상 아이러니도 없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주해 올 때 이명증서 13l 같은 서류를 챙겨 온 교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 목사가 제안했다. 13) “교인은 이주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지 교회를 떠날 때는 6개월 이내에 소속 당회에 이명 청원을 하여 야 한다.\" (미주한인장로회 헌법 제2편 ‘정치’ 제 15조 ‘교인의 이명’) 감조 31

“우리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제직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어느 교회에서든 무흠(無X)하게 집사직, 권사직, 장로직을 사무하였다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인정해야 되겠습니다 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창립예배에 참석했던 다음 사람들을 직분자로 인정하여 제직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제직회장: 장영춘목사 제직 : 곽영철, 김지수, 김지윤, 이성남, 오안순, 장영애, 최진섭(이상 전원 집λ니도합 여밟 명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대홍수 때 방주에 오른 노아의 여밟 식구와 같은 숫 자였다 제직회가 구성된 그 다음 주 9월 3 일에는 첫 제직회를 열어, 정기 제직회는 매월 첫 째 주일에 모일 것과 임시 제직회는 제직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언제라도 소집 할 수 있는 것으로 결의했다. 창립예배를 드린 이후의 초창기에는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거의 매주 제직회가 교회 당에서 모였다. 그러던 10월 31 일 임시 제직회를 이성남 집사 집에서 갖더니, 장 목사 집을 비롯한 각 가정에서 순회 회집을 하기도 했다. 여름철에는 버 겐카운타 파콰Bergen County Park) 등 야외공원에서 모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장시간 숙의하면서 제직간 친목도 돈독해질 수 있었다. 당시 몇 안 되는 제직이지만 모일 때마다 호명을 하여 회원을 점명케 하고 기록도 철 저히 남기게 한 것으로 미루어, 장영춘 목사의 준법정신과 행정력을 엿볼 수 있다 하겠 다. 회계보고도 매월 정기 제직회 때마다 서면으료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못박고 있다. 당시는 아직 당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아 당회장이 임명권을 발동하지도 못했겠지만, 제직회의록에 의하면 각 부서장을 제직회에서 선출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민주주의적 운 영이라고나할까.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발이 없다’고 표현하리 만치 자동7;}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교인들의 발이 되어줄 ‘교통부’ 가 필요했다. 우선적으로 긴요하고 필요 불가결했던 부서 였다. 매주 “차편이 없으선 분은 교통부장 이성희 선생님께 말씀드리세요”라는 광고가 전화번호와 함께 매주 나갔다. 물론 차비는 무상이괴 이성희 선생도 무보수였다. 32

예수 앓기 원혀는 사람늘 1972 년도 ψ“ E E앨 맨 킬 매X 표 -2 첫 제직회 회의록 아울러 교우들의 친교를 위한 회우부{會友部의 존재 역시도 절실했다. 당시 제직회의록을 들춰보면, 1972년 8월 20 일 제직 선임과 더불어 부서조직을 하였 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서 책임자는 제직이 아닌 평신도가 맡았다는 것도 눈여 겨볼 일이다;(표 2) 1. 다음과 같이 제직회 임원을 선출하였음. 서기: 곽영철 집사 회계: 김지수집사 2. 본 교회 운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부서를 두고 그 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선출하였음. 봉사부 책임자: 김동훈 선생 교통부 책임자: 이성희 선생 회우부 책임자: :Mrs. 조풍작(박정실) æ

;;;;J.i::르 느주 Ã -f ÃI 0 ......... 쿄호 I 30 닌 At 사진 3.1972. 8 부터 그해 10월 중순까지 임대하며 예배드렸던 저지 시티 소재 재림 루터교회 The church’ s worship service at the Redeemer Lutheran Church in Jersey City, August of 1972 through October in the following year. Z생 첫 예배를 공원에서 드리긴 했으나 주일예배를 계속 공원에서 드라기에는 너무 분 위기가 산만하다고 느꼈다. 매주 야외예배를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교 날씨가 추워지면 불가능한일이기도했다 어차피 교회란 건물을 필요로 하며 건물 자체를 교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 기에 임시 예배장소~14)(사진3)를 저지시티에 마련하여 창립예배 디음 주일인 동년 8윌 20 일부터 10월 8 일까지 거기서 예배했다. ‘임시 예배 처소’ 라 함은 향후 예배장소를 시코 커스(Secaucus) 에 얻는 것을 목표했기 때문이다. 설립예배를 드린 지 1개윌 남짓,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교회 병칭 건이 화제가 14) 33-37 Wamer Avenue, Jersey City, N.J. 34

(얘← @앵 되곤 했다. 그러던 9월17일 예배 전, 임시 제직회를 소집하고 중의를 모아 교회 명을 ‘뉴 저지 한인장로교회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Jersey)’ 로 정 했다. 예배 후 전 교인의 총의에 붙이니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지역을 크게 집아 주{써 이름을 넣고1 다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 속에서의 ‘한인’ 이라 는 자긍삼을 내포시키고1 교파도 묶어 표현했다. 지금은 엇비슷한 교회명칭이 많고 별스 런 이름도 있지만, 한인 교회가 몇 안 되던 당시, 손쉬운 ‘작명’ 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 무 평범하다할지 모르나, 한인들은 물론 미국인에게도 영어로 의미전달하기가 손쉬운 명 칭이다.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사람들’ 이 이 이름을 들고 나아갈 때 기쁨이 념칠 것이며 기 적이 일어날 것이고, 하늘에는 영광이 가득할 것으로 믿어 의섬치 않았다. 땅 끝까지 이 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는 교회로,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 는 기대가 모아진 것이었다. 교회설립 사실과 함께 교회이름을 한인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제직회 일동 명의로 신문지 ÀJ에 굉고도 게재했다. 앞에서 밝혔듯, 기존 직분자는 본인 자술을 토대로 제직회에서 인준키로 했였다. 1972년 10월 1 일 정기 재직회에서 차성옥 권사와 유상현 집사를 만장일치로 추가 인 정, 제직은 도합 10 인이 됐다 차 권사는 본 교회 과도기 첫째 권사였다 한편, 그해 11월 15 일자로 이병학 집사를 제직회에 추가했고 같은 날 이성남 집사를 재무회계로 선임, 회계담당을 이원화하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재정 운영을 기했다. γ 뚫쩍 ι 교회를 설립하기 전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창립 이후에도 절대적언 것은 오로지 기도 였다. 그들의 기도가 지금의 우리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 면모를 당시의 주보에서 익히 알수 있다. 저희들의 모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시기를 위히여 특별히 기도하시며 배가운동에 힘씁시다. 35

새 예배처소를 마련하기 우1 0-1여 다함께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가 꼭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하루 한번씩 교회 위하여 또 특별한 사정에 처한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러하여 온 교우가 믿 음과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됩시다. 그리고 새 집회처를 물색 중이오니 이 일을 위 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이민자들에게는 한글로 된 성경과 찬송7}가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 집사쯤 되었 었던 교인들에게나 있었을까 하는 정도였다. 여느 한인교회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에 서는 교회에 나가1 않던 사람들도 이민을 와서는 곧잘 교회를 찾아들곤 하였다. 이들에 게 성경과 찬송가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렇다고 지금과 같이 한국 책방이 가까이 있 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찬송가가 준비되기 전까지는 찬송 가 거}를 주보에 계속 게재해야 했고 교인들이 익숙히 외우고 있는 찬송가를 골라 불 러야 했다. 학생들의 교과서보다도 더 귀한 영혼의 교과서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닌 가 이 일을 조속히 해결하려면 교회에서 성경과 찬송가 일괄 구입을 위하여 모금 운동 을 전개하여야만 했다. 이는 김동훈 선생 가족이 찬송가 구입을 위하여 창립주엘 그 다 음 주일에 $50을 특별 헌금한 것이 태동이 된 것이다. 9월 2 일 한국에서 성경, 찬송가가 배에 실렸다.10월 29 일부터 성경과 찬송가가 교우 들에게 저렴한 가격(성경 3불, 찬송가 2불)으로 배부되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전하신 이후 초대 교회가 이러 했지 않았을까 히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앞장서는 것이다. 장목사는 교회 일이나 신앙 문제 또는 심방을 원하시는 교인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뱀 달라는 주문을 전화번호와 목사관 주소를 곁들여 계속 주보에 싣는다. ‘서슴지 말라’ 는 것에 매력을 끈다. 찬송가 구입에 써달라고 헌금을 하괴 차편이 없어 교회에 나오는 데 불편한 교우들 의 운송을 솔선 자원하고1 오안순 집사의 경우는 헌금 주머니를 손수 만들어 내놓았다. 성가대와 교회학교 교사를 지원히는 등 자기 탈렌트를 오직 주께 바치는 것이었다. 또한 병상에 있는 교우눈 누구나 할 것 없이 으레 찾아 위로하고? 새로운 교우를 열렬하게 환 영하는 등 사랑이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36

사진 4. 19 72. 10 부터 5년 여 동안 임대하여 예배드렸던 우리 교회 세 번째 예배 처소 제일개혁교회 지금은 한인교회인 생명샘 교회가 세를 얻어 예배 드리고 있다, The third past location of the church at the First Reformed Church , which is currently being occupied by the Fountain of Life Korean Church 매주 돌0까며 다괴를 준비해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해 10윌 시코커스의 미국인교회인 재1개혁교회(The First Reformed Church)영l(사진 4) 예배당을 새 예배처로 정식 임대, 이전하여 15 일 주일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 작했다 이 일이 조속히 이루어지도록 온 교인이 합심기도 해온 터이고 주님이 응답하신 결과 였다. 먼저 임대해 쓰던 미국 루터란교회 측은 월 사용료 40달러를 요구해와 장 목사에 게 재조정을 일임하여 윌 20달러를 제안했지만 타결되지 못하던 차에, 시시비비를 잊게 된 것도다행이었다. 우리의 선배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어 이 아담한 예배 E닥을 저희 모임을 위히여 제공o}o~ 주 15) 53 Center Ave., Secaucus, NJ 07094 37

Ä f-iC르 누주^,-f A' 0 .....1-쿄호 I 30 년^~ 사진 5 본 교회가 창립된 후 첫 추수 감사절 (1972 11 23 목) 오안순 집사가 간증을 하던 중 감사 찬송을 부르고 있다 점면에는 ‘첫 감사의 밤’ 이라고 장식되어 있다 The frrst Thanksgiving Day service of the church on November 23,1972:deaconess, Ahnsoon Oh, singing while her confession, a10ng witb tbe title 'The Night ofFirst Thanksgiving.' 사진 6 첫 번 맞는 성탄절 (197212.25) 축하예배를 마치고 성가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만le fellowship of the choir members after having the fírst Chlistmas Ser피ce on December 25,1972 38

@양 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며 특히 본 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온 교우께 진신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열심히 모이고 깨끗이 시용하도록 각자 가 협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챈 2t 새 교회당으로 옮긴 지 한 달 여만에 설립이래 첫 번째 추수감사 시즌이 다가왔다. 필그림 (Pil맹ms) 이 드린 첫 번째 추수감사절과도 같은 들뜨고 신나는 한마당 감사의 축제를 열었다. 그 감사의 정도는 당시 자체행사 내용이 웅변해 준다. 한국식 감사주일인 11 월 19 일 온 교우가 한자리에 모여 감사예배를 드런 데다 미국식 언 11월 넷째 목요일(23 일) 추수감사절(ηla빼sgiving Day)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몽 땅 교회에 모여 감사의 기쁨을 만끽했다<감사의 밤>이 1, 2부로 나뒤어 1부 감사의 만 찬., 2부 감사의 간증 · 찬양 · 시와 수필 낭독 등으로 이어져 밤이 갚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표 3) 첫 번째 맞는 성탄절 축하 행사로는 주일이자 성탄이브인 12월 24얼 저녁 7시, 갓 조 직된 성가대가 선을 보였다. 몇 안 되는 대원들이었지만, 찬양이 무르익어 가면서 다들 은혜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여기저기서 ‘아멘’ 과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국 땅에 서 한인들끼리 주님의 나심을 축하한다는 것-그것은 감격 그 자체였다.(사진 5) 지휘는 이성남 집사가 맡았다.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 고, 어릴 적부터 음악 전공자 못지 않은 실력과 재질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초창기 멤 버로서 이 일 외에도 많은 봉사를 기도와 믿음으로 감내해 내니 은혜가 충만했다. 12월 25 일에는 오후 12시 30분에 본 교회당에서 성탄축하예배를 드렸디{사진 6). 제 1부만찬회 감사의밤 5 시 30분 제 2부예배순서 570장 기원 사회자 찬 {AC그~ 다같이 εμ영춘목사 기 s:=.. 39

성경말씀 고후 9:10-15 εP영춘목사 제 3부시와찬양과간증 찬양 성가대 최진섭집사 간 ξ드 이성남집사부부 ζ그 곽영철 집사 외 4명 만도린, 기타협주 박혜순 양 김현덕 군 남성사줌창 Offertory 오안순집사 주일학교어린이 ,•< 고1 조용한 어느 날의 일기 속에 김지수집사부부 E긍 김현성 군 김혜옥양 기타쏠로 김동훈선생 서경숙양외 3명 간증 김지수집사 이준무집사 합창 아이들의 동무는 정명숙양외 5명 이중창 성가대 다같이 감사의 시 장영춘목사 피아노독주 간증 여성사줌창 •거,-‘ 피 근 바이올린 독주 거룩한성 기타협주 찬양 찬 { -'-- 573 장 C그 =τ다 표끼 < ] x 앵얘앓&행짧 채 이제 교회명칭도 확정됐고 제직회를 비롯한 각 부서의 ‘조각’ (組聞)도 끝난 셈이다. 이미 예배장소도 마련됐다. 미약하나마 형식상으로는 거의 모든 게 갖춰졌고, 남은 것은 본격적인 활동 및 활성화였다. 헌금 주정헌금 및 월정헌금을 책정, 9월 예배 때부터 드리되 제직이 솔선 수범키로 했다 배가운동 교인 배가 운동을 하면서 전 교인이 힘쓰기로 했다. 구역제를 도입, 구역별 40

C쟁수 x 영’쩔 로 총력과 열성을 기울였고, 새 동포를 발견하면 밤을 낮 십l아 무조건 즉시 심방 하고 강권하여 우리 교회에 나오게 했을 정도다. 그뿐인가 누군가 이민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면,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비행기에서 첫발 내리는 공항까지 달려가 이민 보따리를 챙겨주고 교통편도 제공하곤 했다. 낯설고 불 삶고 말 설 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최선을 다했다. 하나같이 전도자가 되어 교회로 이끌었 고, 새로 등장한 교우에겐 있는 친절을 다 베풀었다. 당시를 표현하는 어느 교인 은 “그 때는 새 교우가 나타나면 엽어 나르다시피 했다”고 회상한다. 교회행사 교회 행사를 활성화하여 한인들의 흥미를 북돋우논 동시, 고국을 떠나온 그 들의 호뇨수 달래주기도 교회가 맡o}, 중추절 전후의 주일 같은 경우 ‘추석야외예 배’ 겸 야유회를 갖기도 하였다. 회우부 매주일 다과를 준비하여 예배 후 친교모임을 갖고, 성도의 교제와 정보 교환 등을 기했다. 어떤 이들은 그때 그 시간이 즐거워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지금도 술회한다. 다과 준비는 자진해서 했고, 단 매주 5달라 어치를 념겨선 안 된다고 제직회의록에 적고 있다16) 주일 대예배 시에는 거룩하고 염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안내위원을 2명씩 선정, 입구에 배치했다. 새로 나오는 교우에게 관섬과 친절을 베풀어 주보 도 배부하고 좌석을 안내하며 예배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 교육 주일학교는 아직 조직이 미흡하고 교사로 일할 적임자도 없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장 목사의 부인(장미은 사모)이 어린이틀을 맡아 돌보면서 교육도 담당 하게 된다. 그라던 중 주일학교 운영을 사모 흔자서 이끌기에 역부족이어서 유치 부와 유이부로 나눴다. 그라나 유치부는 교λ까 충원될 때까지 당분간 보류하고, 유아부는 여 집사들과 0까 엄마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해 나갔다 16) 1972년 10월 1 일 자 <10월 정기 제직회> 회의록 참조 l꺼 양호식: 30년간 한결같이 본 교회를 섬겨왔다 1986 년 11 월 시무장로 장립 2002 년 현재 건축위원장, 안순익 집사는 그를 “뉴저지 장로교회의 열매’라고 표현했다{2002년 4월 2일 녹취) 41

교통부 교통부에서는 차편이 없는 교인들의 운송을 책임지고 분담, 주일이면 이른 아침 부터 몇 행보씩 예배 후 늦게까지 계속적으로 운행했다. 교회관리 교회를 관리하고 늘 정결을 유지할 일꾼을 세웠다. 양호식 선생17)과 김현성 군이 이 일을 맡아 열성적으로 봉사했다. 첫 성례식과 성찬식 우리 교회로서는 첫 성찬식과 세례식을 갖은 날이 1972년 12윌 10 일 주일이다. 학습과 세례의 문답을 시간을 정하여 실시했으니 12월 9 일(토요 일) 학습 2:00-2:30, 유아 세례 2:30-3:00, 어른 세례 3:00-3:30 이었다. 그해 마지막 제직회 12윌 3 일 그해 마지막 제직회가 열렸다. 설립된 지 고작 넉 달 반 정도였지만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창립된 그해 마지막날언 12윌 31 일은 마침 주일이었다. 그 주일 주보에 의하면 지난 주 12월 24 일 주일에는 뉴저지 최초 한인 교회(교회명· 뉴저지한인교회)를 1966년에 설 립한 백예원 목사 부부와 이정희 씨, 한숙희 씨, 곽신형 씨가 ‘손님으로 오신 분들’ 이라 고 적혀있고, 그 밑으로 연말을 지내며 감사의 메시지도 실였다. 지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 내려주신 크신 은혜와 축복에 대히여 진 심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저희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혹은 간절한 기도로, 혹은 현신적 봉사로, 혹은 물질적 봉현으로 이바지히신 여러분께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새해엔 더욱 크신 은혜와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경 장영춘 목사는 그야말로 모든 일에 앞장서 불철주야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혐춘 이런 일이 있었다 18) 어느 교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모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장 목사가 급히 18) 정석기 지음 ‘세계 속의 한인교회(1lI)’(붐란출판새 220~223 쪽 참조 42

X 영현잉i 세 살 난 장남을 차에 태우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자동차 시동을 끄고 아들을 차안에 둔 채 부랴부랴 들어가 산괴塵苦) 중인 교언을 데리고 나왔다. 순간사건이 터진 것을깨달았다. 아들녀석이 0얘바가없는사이에 기어드라이브를켰 다가 다른 차를 박아버린 것이었다. 경찰이 출동하는 등 긴박한 상황이었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 목사눈 선분을 밝히고 겨우 사정하여 간신허 위 기를 모면했다. 그리고는 진통 중에 있는 임산부를 째 태우고 맨해튼으로 치를 몰았다. 간호사 출신인 그 여인은 남편이 출장간 사이 산기가 차 섬한 진통을 겪고있었던 것이 었다. 그 임산부는 맨해튼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차안에서 전신을 뒤틀며 비명을 질러대더 니 그날 병원에서 순산했다. 43

19'73 $앵멍$얘 핵쩍싹 설립 후 첫 새해를 맞았다. 구랍마지막주에는 58 명이 모여 예배 드렸다. 불과 넉 달 여만에 거의 삼 배가가 된 것이다. 헌금도 매주 $120을 상회하였다. 새해를 맞는 주보에는 감사의 인사를 실었다. 지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 내려주신 크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하 여 기도와 봉사로 수고하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 니다.특히, 1. 매주 예배에 찬양을 맡아주신 성가대 이성남 집사와한경희 양및 여러 대원들, 2. 매 주일 차편을 제공해 주신 이성희 선생님 을비롯한여러분들, 3. 매주 예배 후 다과들 준비하신 조풍작 선생 님 부부와 그 외 여러분들, 4. 주일학교 어린이와 영아부 어린이들을 맡아 수고하신 여러분들, 5. 교회 관리를 위해 수고하신 김현성 군, 김현 덕 군, 양호식 선생님 외 여러분들, 6. 반년간의 실빔을 맡아주신 김지수, 이성남 두 회계 집사님들게 감사드립니다. 심기일전한 모습으로 제직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부서 를 조직했다 부서 배당은 역시 제직회의 다수 의견에 따 랐다. 한편 “자녀 교육 때문에 미국으로 왔다”는 말이 이 민 사유로 가장 지배적이던 당시에 교회 교육도 빼놓을 수 없어, 교육부가 선설되기에 이른다.4개 부서를 구성하 고 전 교언이 어느 한 부서에 가입하여 그 부서에서 봉사 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기도 했다. 제직회 조직은 다음 과같았다. 44

년도 제직회장 : 장영춘목사 제 직: 장영춘목사 차성옥 권사 곽영철 집사 김동훈 집사 김지수 집사 김지윤 집사 서 기: 박은숙 집사 오요반 집사 유상현 집사 이병학 집사 이성남 집사 회 계: 징영애 집사 정말순 집사 최진섭 집사(14명) 꽉영철 집사(유임) 부서기 : 김지수 집사 전봉 도사 부부: 재무회계 김동훈 집사 (현금수지 담당) 교우부 재무서기 유상현 집사 (기록담당) 교 육 님T 차성옥권사 최진섭집사 김지윤집사 이병학집사 내친김에 성가대 명단도 여기에 섣는다. 성가대원명단 지 휘 : 이 성 남 집사 반 주 : 한 경 희 여 자 남자 고해영 ••••}•••• 곽영철 양호식 김문자 김지수 이병학 김소정 오요란 김현덕 이준무 김혜옥 유멍선 김현성 조풍작 박혜순 이순익 서경숙 장영애 정명숙 \"'1 동차 어느새 이웃톱기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나 사랑 넘친 교회였던가를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 교회당 사용료가 5달러 정도 인상되리라는, 약간은 부담스런 뉴스가 틀린 가 운데도, 남을 돕기 위한 바자회를 열고 십시일반으로 적극 참여했다. 일례로 1973년 3 월 18 일 주일에는 서울 응암동 소재 한성교회 19) 건축기금을 위하여 특별헌금 순서를 갖 45

고 지원했다. 당시 서울 한성교회에 시무하는 김동빈 목사가 방문, 설교를 담당했다. 지 원금은 $412 01었다. 이국땅에서 갓 태어난 교회가 모국 교회당 건축을 지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복의 지 름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월세 들어 지내는 교회일망정 이곳 아닌 모국 교회를 도움의 대상으로 떠올린 것은 가상한 일이다. 장로가 아직 한 명도 없는 상태였던 본 교회는 그 즈음 임수식 장로20)를 영입하게 됐 다 73년 4월 1 일이었다 임 장로는 본 교회 ‘초기 제 1번 장로’ 인 셈이었다.21) 이로써 제 직회원은 도합 15명으료 늘어났다. 당시는 부득불, 한국장로회 헌법에 대체로 준할 수밖에 없는 현설이었다. 그 볍에 의 하더라도 목사와 장로 각 한 명씩으로는 당회를 구성할 수 없게 돼있었다. 시기상조였다. 이를 일컬어 ‘미 조직 교회’ 라 부른다. 우리가 ‘창립’ 을 했다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결국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 리기로 했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 던 일이다. 당시 예배의 한 모습을 소개한다.(표 4) 19) 서울 은평구 응암3동 240-36번지 소재 현 담임목사 김승호(2001 년 8월 부임) 주일 대예배 평균출 석 교인수 350명. 총동원주일에는 450명에 달하고 있다 (2002년 4월 3 일 현재 사무실에 전화로 확 인) 20) 당시 당회나노회가구성되기 전이었고,임 장로가공동의회에서 선출됐다는기록도없으며 본교 회에서 임직한사실이 없다 단 1974년 4월제직회의록에 “본교회에서 시무투표를받았다”고표 기돼 있다(당 제직회의록 침조). '‘당회의 결의로 노회의 허락을 받아 공동의회에서 투표수의 3분 의 2이상의 득표로 선출한다\"(구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제 2편 정치 제 41 조 ‘장로의 선택’/미주 한인장로회 헌법 제2편 정치 제 40조 ‘장로, 집사, 권사의 선택’ 참조). 임 장로는 뉴욕 맨해튼에서 기독교서 점을 운영하다가 미주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 개혁교단(RCA) 소 속 뉴욕낙원장로교회 (41-20 Queens Blvd. Sunnyside, NY 11104) 담임목사- 뉴욕연합신학대학 학장 (2002년도 대뉴욕지구한인교회주소록 참조) 21) 본역사편찬위원회는본서에서 태동기 · 격동기 · 과도기 세시기(초대장영춘목사부터 5 대 이희 철목사까지)를우리 교회의 ‘창립기’로보고,임수식 장로를초기 제 1 호장로로부르기로한다. 46

1973 년.5'- 예배순셔 it 사회 : 장영준목사 1973. 2. 11 묵도 기원 다함께 사회자 *찬송 ~..................... (109장) 다함께 *신앙고백 (사도신경) 다함께 (43번: 사35: 1-1 0) 다함께 교독 찬송 (448장) 다함께 기도 성경 εν염 oB 집사 찬양 파설 설교 (시 37: 1-11 구약 827p, 마5:5 신약 5p) 기도 짧 째마성 “대지의 상속자’ 설 깎파 *찬송 (469장) 다함께 헌금 (특송.이성남) 김인숙 김지윤 기도 사회자 광고 위원 *우1 ~← (436장) 다함께 、그 E그 장영춘 목사 • k 축도→ 폐회 •• ‘ 다함께 (*표는 일어섬) 성가대 지휘 : 이성남 집사 반주 : 한경희 양 성경의 페이지를 적어주어 찾기에 편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찬송가를 한 예배에 네 번씩 불렀고 이성남 집사는 지휘를 담당하면서도 특별히 독창을 지주 하여 성도들에 게 많은 은혜를 선사하였다. 경건한 예배를 지향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유의 사항을 주보에섣기도하였다. 경건한 예배 진행을 위해 아래 기록된 몇 가지 사동멸 유의하시어 이행하여 47

^~εE .!;::;.^-i ::ξ. O ........ ..i끄호 l 주시기룰바랍니다. 1. 예배를 정시에 시작할 수 있도록 각별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먼저 오신 분부터 앞자리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3. 예배는 가능한 한 무언으로 진행 하겠아오니 미리 주보를 보신 후 다음 차 례를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4. 그 날에 부를 찬송가 장수와 섬경말씀 등은 예배시작 전에 미리 찾아 표시 하여 두셨다가 제때에 지체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다. 5. 별 표시(*)가 있는 곳은 기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구역의 활성화가 교회의 성장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고 갈파한 제직들은 2월 7일 정기 제직회에서 ‘10 개 구역으로 나누교 각 구역에 권찰을 두고 금년도 교회 목표인 부 흥을 위하여 교언 매가 및 교인 각 가정 심방 등을 각 구역별로 상서l 히 운영하기로 함’ 이라고 결의한다. 구역 편성은 다음과 같다.(표 5) 1구역 : Jersey Ciη(개 권찰 오 안 순 : 나경목 박정선 박행자 양호식 이성남 이지순 인병식 정명숙 유상현 2구역 : Jersey City(냐) 권찰 김 지 수 : 홍유성 김덕용 김상진 검용대 박선자 김홍근 김호수 오용덕 윤상길 이준무 차용칠 3구역 : Jersey City(다) 권찰 장 영 애 : 박재효 박희원 안병자 조경숙 조풍작 지효인 4구역 : Hoboken, Union City 권찰이 희 자: 이봉기 5구역 : New York 권찰배 태 호: 이덕행 조동준 한경희 이인옥 6구역 : Rutherford 권찰박은숙: 곽영철 신준화 유정근 허 택 허명수 7구역 : Passaic 이북 권찰 김 현 숙 : 고영해 권원중 김정희 박혜순 이병일 이병학 이종숙 48

1973 던도 최정애 이영옥 손정희 표 5 첫 구역조직 8구역 : Tenaf1y, Leonia, Fort Lee 권찰 함홍길 : 김주성 정말순 9구역 : Thills , New York 권찰임 수식 : 김선숙 김한숙 박혜연 이명희 10구역 : Newark, Orange, Elizabeth 권찰 이재성 : 박혜정 임문자 한원봉 엄웰천해새 4월 22 일 첫 번째 맞는 부활절 행사였다. 이를 기하여 첫 성례식을 거행하였다.3월 14 일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는 사순절(L뼈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경건한 신앙의 절기로 지키기로 했다. 이에 즈음하여 임대주인 미국교회와 합동으토 고난주간에 종교영화 상영 순서를 가지고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3월 14일 오후 8시 ‘My Broth, The Guru\" 21 일 오후 8시 ‘Th you know where 1 am Going\" 28일 오후 8시 ‘Iα19 way Baclζ” ‘'Easter SlD1Y\" 4월 4일 오후 8시 ‘'uγe a little\" 11일 오후 8시 “The Re1um’ - G∞d Fridaγ Eγ얹ing\" 20일 오후 8시 애랙얘 a 애쩍나 가정의 달을 기해 5월 13 일 어린이주일과 어머니주일을 겸하여 지켰교 27엘에는 야 외예배도드렸다. 미국교회에는 어머니날(Mother’s Day)은 있으나 어린이주일은 없어서 지키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답습하는 셈이기도 하지만i 그보다 교육적 견지와 원만한 가정생활을 위해서라도절실했다 축하 행사는 아래와 같다. 1) 어머니를 위한 만찬회 - 각 가정에서 자기 가족기 잡수실 음식을 준비하여 와 49

}풍훌 &않겠(\" ~ #구;에 ;;;:1 。 과호 !ι 30 않 Af 2) 축하순서 서 같이 어머님들을 대접하며 친교의 만찬을 베푸는 것이다. (1) 어머니 치하 찬양과 수필, 시 낭독 (2) 어머니 중에서 - 어머니의 마음은 이러하다. 자녀 중에서 - 우리 어머니는 이런 분이시다 (3) 선물증정 및 기념촬영 축하순서 프로그램을 보면 1.찬송 “어머니 은혜” 임수식 장로가정 2. 모범가정 합창 이준무 선생 바이올린 독주 3. 선물증정 (45세 이상 어머니들께) 어머니 중에서 차성옥 권사 이성남집사 4. 어머니의 심정은 이러하다 김지수집사 5. 독창, 어머니 마음 김동훈집사가정 이병학집사 6. 우리 어머니는 이러 히셨다 김숙희 김혜옥 김지수 곽영철 7. 장한가정 합창 장영철목사 8. 어머니를 기리는 시와 수필 9. 흔성 사중창 10. 어머님을 위한 기원 란엔샤꾀와의 유대 6월 9 일에는 한인회가 주최승}는 배구대회에 참가하면서 유대관계를 돈독히 했다. 교회와 한인사회와는 멜 수 없는 연결 고리였다. 교회자체가 이미 한인 커뮤니티였 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여반장이 었다. 우리 교회는 선전 끝에 3등을 하였다. 선수는 물론이려니와 응원을 아끼지 않고 물심으로 돕는 모습은 정녕 하나가 되는 ‘흔연일체’ 바로 그것이었다. 선수 : 양호식(주장) 곽영철 김지수 김현성 김환영 김홍근 이성남 이형복 홍무승제씨 우앤어l 든 7~ 냐 c~ 순 편애란 있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는 만인의 아버지이시요 평등의 근본 $J

년도 이심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모든 명단은 개 나, 다 ..순으로 써진다는 것이다. 특히 주보에 게재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작정 헌금의 예를 들어 보자. ·주정으로 하신 분 : 김동훈 김지수 오요반 이성남 임수식 ε병춘 차성옥 차종철 최진섭 .월정으로 하신 분 : 김덕영 김순조 김지윤 나경옥 박은숙 배태호 양호식 이준무 이화자 정말순 정명숙 지문자 한경희 어쩌면 대접상으로라도 목사를 앞에 적는다든가 할 볍 한 일인데 절대 그리하지 아니 하였다. 그 외 남녀 성가대 명단, 구역조직 명단, 배구 선수 명단조차도 그러하다. 굳이 ‘가나다 순’ 이란 명기가 없어도 의례 그 순서였다. 이즈음 장로 집새 권사 투표 후 듀 표순으로 나열하는 것이나, 다른 교회에서 있는 일이지만 헌금액수에 따라 헌금자 명단 을 나열히는 것과논 도시 다른 의미를 갖는 성싶다. 맨 }주냉 랴앤 앨 A~ 어느덧 교회창립 1주년이 다가왔다. 기념행사를 8윌 둘째 주일에 갖기로 하고, 대내 · 대외행사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계획을세웠다. 대내행사 : 축하예배, 축하 파티 (준비위원: 오요란 · 징영애 · 정말순) 대외행사 : 찬송가 경연대회 및 성경 퀴즈대회(준비위원: 장영춘 · 임수식 · 이성남) 추후 위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8월 12 일(주일)에 창립 1주년 기념행시를 가졌다. 기념 예배 때 특별음악 순서를 준비했고 약간 명에게 전도상을 수여했다. 기념촬영(사진 7)도 하고 유상현, 장영애, 정말순 집사와 이화자 성도 등이 준비한 냉면을 들었다. 고국에서 먹던맛그대로였다 일년을 회고하며 주님께 드린 감사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를 회 고히는 몇몇 창립 멤버들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눈시울을 적신다. 창립 1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계획했던 찬송가 경연대회는 그후 10윌 둘째 주 오 후 6시 30분에 개최됐다. 종목 당 5달러 씩 참가비를 받았다고 기록돼 았다. 한편, 성경 51

사진 7 창립 1 주년 기념예배를 마치고 After celebrating the first anniversaIγ worship service of the church 퀴즈도 주보에 실어 추첨하는 행사도 가졌고1 각 교회 성가대 지휘자들을 초청해 이민교 회의 교회음악 전반에 걸친 간담회를 나누는 등 자못 선구적인 역할도 했다. 이 같은 외 부인사 초청 행사의 경비는 제직 공동으로 부담했다. 제 1회 찬송가 부르기 대회에 참가한 교회는 다음과 같다. (무순) 뉴욕 제일 장로교회, 중앙교회, 부롱스 교회, 맨하탄 교회, 부루크린 교회, 권-즈 교회, 유니온 교회, 워싱톤 장로교회, 뉴저지 제일 교회, 본 교회(이상 107~ 교회) 입상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효녕가 독창부 l등 김금숙 부롱스 교회 본 교회 2등 임형재 유니온교회 요다f 숙 본 교회 2). 찬송가 줌창부 l등 부롱스 교회 2등 워싱톤장로교회 3등 뉴욕제일장로교회 3). 성경 퀴즈문제 추첨 결과 l등 최경희 부롱스교회 2등 이기규 부롱스 교회 김지수 3등 정경희 이규백 부롱스 교회 52

예수 닮기 원하는 사협율 1973 년오 *i멍 01 톰쇄어l 엣은 그 .!-I 첼동틀 %mi 교육 주일학교를 맡은 교육부의 이병학 집사가 환등기 구입을 제안하여 실행했다. 시청 bhg 각교재를 구비하기 시작한 것은 교회 교육장 진일보를 뜻한다. 중고등부가 5월부터 매주 11시 45분에 모여 김지수 집사의 지도 아래 성경공부를 빼킹μ 하였다. 써 £ 성가대 성가대가 보다 활성화됐다. 지휘자 이성남 집λL 반주자 한경희 선생이 무보수로 있는 열성을 다했다. 양귀숙, 정말순 집사 등 많은 제직들이 성가대원들을 자주 불 러 저녁식사를 대접하며 격려했다.80년대 이후 주일학교 교사나 자치 부서를 대 상으로 확대하여 줄기차게 이어진 좋은 전통이었다. 미국교회와의 유대 교회당을 임대해주는 미국교회와의 유대도 건실했다. 예컨대, 교회당 임대 1년을 맞는 10월 14일(주일) 미국교회의 Cody 목사를 모셔 설교를 듣고, 감사 의 표시로 기념품 전달도 했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벽 을 넘기란 쉬운 일만은 아 닌 데다 미국인이 주인인지라 우리네 셋방살이가 원만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하 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잘 유지됐다. 야외예배 교우들의 결속을 다지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주 야외예배를 가졌다. 또 본국에서 느끼지 못하였던 여유와 자연으로의 발걸음은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동 서남북, 원근을 가리지 아니 하였다. 5월 27일 Rock1and Lake North State Park, Nyack, N.Y. 7월 8 일 Si1as Condict Park, Kinnel, N. J. (작년에 창립예배를 드렸던 공원) 감사절 교회창립 후 두 번째 맞는 감사절인 11월 18 일 (추수감사주일)에는 외부강사로 백리언 목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고, 성례식을 겸한 기념예배도 드렸다. 미국 정규 감사절(Tha따sgiving Day)에는 전년도처럼 온 교우들이 교회에 모여 축하 만 찬과 뜻 갚은 축하순서를 가졌다. 성탄과 연말 연말이 되어 교회 명의로 성탄카드와 달력을 준비했다.100 달러 예산을 들여 모국으로부터 달력 120부, 성탄카드 200매를 구입해 교우가정과 이웃들에게 배포하였다. 연말 출석교언 수는 90명이었다 53

_.- ¢’‘ζ’‘ιιι’τi <’{ κ” \\ 누주 ;4;I 。 £;고호 130 념사 .t. 71 ~ ξ 년째 채j중 그해 마지막주일인 12윌 31 일, 문종구 집사 집에서 제직회를 모였다 신년도를 기해 새로 임명되는 제직들이 동참했다. 이때 자리를 함께 한 김규환 장로가 바로 본 교회 초 기 두 번째의 장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임 제직의 수는 제직회장 장영춘 목사를 포함; 20명에 달했다. 모양새가 팩 좋아 보였다. 신규로 감λ}제도가 도입되고, 부서도 7개 부로 증설됐다. 1974년도 제직회 임원 및 부서는 다음과 같다. 제직회장 : 장영춘목사 서 기 : 곽영철 집사 부서 기 : 차종철집사 회 계 : 김동훈집사 유상현 집사 감 사:문종구집사 부 서 : 예배부·서무부·전도부·교육부·교우부·재정부·봉사부 54

년도 1함와 (2) 객동'1(1974 카 975) Turbulence Period 애해교회2.j 얘팩 g 물론 세를 얻어서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그 서러움 이 컸을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지켜야 할 공중 도닥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세를 놓고 있는 미국교회 에서 말을 하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1974 년 벽두부터 주보에 이런 경고가 3주 연속으로 설렸다. 본 교회를 사용히는데 있어서 여러분들께서 아래 몇 가지 사흔떨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출입문을 언제나 든넙시다. 2) 전깃불을 절Q늠t합시다. 3) 어린이를 잘 E팩합시다. 4) 교회기물에 어린이가 손대지 않도록 합시다. 5) 다과나 휴지를 어지르지 맙시다. 6) 전화사용을 삼가 합시다. 쪽채양 풍 ‘ a 쩍-:tI 차 새해 예산을세웠다 지금껏 월 50달러 내던 교회당 사용료를 100달러로 올려 낼만큼 교세가 확장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인수 도 늘고 헌금도 차고 넘쳐 성가대 가운을 구엽하는 등 교회가 경제 안정권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즈음 장 목사 부인이 아기를 출산했는데 기존 책 55

누주처;;;;, ^。~도e쿄호 130 넌^~ 정된 출산관련 경비(제직회의록에 ‘산비’ 로 표기) 375달러를 교회 재정에서 지출함은 묻 론, 산후 경비 전액도 교회에서 부담할 수 있었을 정도로 재정 여유가 있었다 교우부에 서는 교인들의 생일을 파악하여 예배 후 친교시간에 모든 교우와 더불어 축하 시간을 갖는 등 성도의 교제가 두터워 갔다. 그러던 1974년 2월 17일이었다. 임시 제직회에서 장영춘 목사와 임수식 장로가 난데 없이 ‘교회 이전(移별햄’ 안을내놓았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곳엔 한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앞으로도 한인들이 밀집될 묘념 이리로 이주 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인들이 많고 또 계속 밀려들게 될 곳으로 교회를 옮 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목회자로서 더 많은 양 무러를 구원해 내야 한다는 생각 은 당연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서 물고기가 많은 곳에 그물을 내리겠다는 것이 목회자의 뜻이요 하나님의 멍입니다. 그렇다고 한 마리의 양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함께 교회를 이전하자는 것입니다. 뉴욕 뭔즈 플러심으로 말 입니다. 멀고 가까운 것이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제직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는 대부분 생활터전이 이곳 뉴저지입니다. 생 업도 고려되어야 하고 아이들 교육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별면, 피 곤한 이민생활에 더욱 스트레스가 쌓일 뿐입니다 여랴 여건상 불가한 일입니다.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긴 시간 토론을 한 뒤 찬반을 불어,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무기 명 투표로 결정하지는 문종구 집사의 제안에 이성남 접λ까 동의? 유상현 집λ까 찬성하 여 안건이 채택되재 무기명 투표에 부쳐졌다. 결과는 찬성 1표, 반대 1OÆ, 기권 5표였다. 결국 교회이전을 제안한 임수식 장로만 찬성표를 던진 셈이 되었고, 나머지 제직 전 원은 기권 또는 반대를 하였다. 부결되고 말았다. 경뽑 쭉 A 뼈 바람직한 목자로 부각돼온 장 목사는 양떼와의 견해차를 드러 냈다 교회 이전이 부결되자, 장 목사는 부득불 사임을 표명하며 목회방침을 끝내 이루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받은 바 은사라고 했다. 사표는 1974년 2월 23 일(토요일) 임수식 장로 사회로 열린 임시 제직회에서 전격 수리됐다. 양귀숙, 정말순 집사는 참석하지 못 했지만 제직회 서기 곽영철 집사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했다. 성도들은 섭섭한 마음과 눈물,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루아침에 목자를 잃은 양떼는 56

1974 년또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성장 기대치로 막 부풀어가던 우리 교회가 이렇다 할 타당한 이유 없이 목자를 앗긴 첫 케이스였다 이뿐 아니라 m년 대를 격동기로 수놓을 숱하고 기나긴 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영춘 목사와 더불어 교회가 설립된 지 정확히 1년 6 개월 10 일만의 일이었다. 목자 잃은 양떼. 그들은 제 ‘먹이’ 를 재가 찾아야 했다. 스스로라도 먹을거리를 찾지 않으면 어찌되겠는가? 아직 우리 교회가 노회에 가입되어 있지 아니한 상태이기에 노회로부터 임시당회장 을 파견 받을 수도 없는 터이었다 우선 제직회 조차도 임수식 장로가 이끌어 갈 수밖에 없었다. 임시 제직회장직을 맡 은 것이다. 임시 설교목사를 부르는 일도 제직회의에서 결정됐다.3월 10 일(주일) 길웅 남 목사 초청, 3월17일(주일) 최찬영 목사 초청 이런 식이었다. ‘임시’ 라는 단어가 난 무했다. 이런 과도기에 사뭇 과감한 일이 발생했다. 합동찬송가를 개편찬송가로 비꾸기로 한 것이다.1974년 3윌 3 일 정기 제직회 때였다. 돌이켜보면, 한국교회는 1백년이 넘는 역사 중 1893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최초 의 한글찬송가가 출판된 이래 여러 개의 과도기 찬송가를 거쳐 1949년 1윌 (합동)찬송가 를 발행하여 모든 교피들이 같이 사용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양분된 뒤인 1962년 예장 ‘고려’ 측과 ‘합동’ 측 등 일부 장로교단이 ‘새찬송캐 를 출판했다. 이어서 1967년 장로교(통합 · 기장 측), 감리교, 성결교1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의 공동작업으로 (합동)찬송가를 개편한 1개편)찬 송개를펴낸것이다.찍 찬송가 교체가 채 이뤄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양쪽 찬송가에 함께 수록된 곡을 부를 22) (합동)추f송개 새찬송개 (개편)찬송가 머리말 참조 57

웠」 #쭈양애 ÃI 항를를£갔호 δP 월^~ 경우, 예배인도자가 “합동 00 장, 개편 xx 장”이란 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주보에도 두 찬송가를 동시에 썼다 그러던 우리 교회도 시대적 부응에 발맞추어 점차 합동찬송가 를 개편찬송가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 달부터 개인용 찬송가를 구매해 바꾸기 시작했 고 교회 비치용 찬송가도 구입했다. 이는 한국 보수교빼 속해있던 장 목λ까 본 교회를 떠나면서 비교적 조속히 발생한 반사적인 현상으로 추정된다 후 a』목샤 캔밴음 위하셔 1974년 3월 17일 (주일) 오후 2λ115분 제직회 서기 곽영철 집사의 사회로 임시 제직 회가 열렸다. 임시회징띨 맡아온 임수식 장로는 그날 불참했다. 장 목사 이임이래 교회에 대한 관심을 잃었음인지, 닥쳐올 난국을 예감했음인지 교인 출석수가 줄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흥미’ 를 잃었다는 표현이 옳을지 모른다. 제직회 j 참석 상황도 저조하여 출석 12명에 결석이 7명이나 됐다. 그 동안 동요와 술렁임이 없지 않았다는증거다. 어쨌거나 목회자 초빙이 급선무였다. 그때까지 초청하여 설교를 들은 몇몇 목회자 중 한 명을 청빙하자고 중의를 모았다. 김규환 장로가 최찬영 목λ}를 담임목회자로 모시자 • 고 제안했고 김지도 집사의 동의, 이성남 집사의 재청으로 표결에 붙여 가결했다. 최 목사에게 뜻을 전달하고 청빙을 시도하는 일의 제반 문제는 김규환 장로에게 일임 했다. 목회자 사례비는 월 600달러, 전화 · 교통비 100달러 수준에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임시 제직회에서 결정된 지 일 주일, 급 불살을 타고 다시 임시 제직회를 열 게 됐다. 역시 서기 곽영철 집λ까 진행을 맡았다. 김규환 장로가 최찬영 목사를 모셔온 ) 것이다. 사회자가 과정 보고를 요청하자, 김 장로는 그간 최 목사를 모셔오기까지의 전 말을 설명하고 최 목사를 소개했다. 최 목사는 주님의 뜻으로 믿고 담임목사로 열심을 다해 봉직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라고 인사했다. 체 2 대 최깐@경 옥샤 부。』 최 목사 청빙 건은 그 다음 주일 전교인 공동의회에서 통과되어, 74년 4월 첫 주일인 7일, 최 목사 취임 예배를 드렸다. 취임예배 준비위원으로는 김규환 장후 유상현 집새 차종철 집새 양귀숙 집사가 수고했다. 월g

최찬영 목시는 성품이 온유하고 조용한 스타 M 일이었다. 말씀의 감화력도 깊었다. 온 교우들 은 하나님이 본 교회를 사량하사 미리 예비해 £Wmbwz 빠 두셨던 목회자라고 여겼다. (사진 8) 킹 뾰 마시 냥71 위관 봉천 최찬영 목사가 취임한 그 주간 금요일 4월 12 일, 김규환 장로 자택에서 정기 제직회가 열 사진 8. 제 2대 담임 최찬영 목사 근영 렸다. 물론 최 목사가 제직회장으로서 의사진행 을해나갔다. The latest photograph of the 2nd senior pastor of the church, Rev. Chanyoung Choi 본 교회를 떠난 임수식 장로에 관한 의안이 나왔다. 그날 제직 회의록에는 “본 교회에서 시 무투표를 받으신 임수식 장노님은 타교회로 가셨으므로 본 교회 제직 명단에서 제하기 로 가결함” 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임 장로는 1973년 4월 1 일부터 74년 4월 5 일까 지 본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약 1년 기간이었다. 아울러 재무회계 김동훈 집λh 장영애 집λ까 구두로 사임을 표해, 그 역시 수리됐다고 적혀있다. 새로운 ‘비상’ (飛1:) 을 위해서는 떨쳐버려야 할 묵은 ‘깃털’ 뭉치가 있나보다. 셔져도화와 천년회 밑~I:-, I 위원 ^~천 언제부터인가 정확치 않으나, 여전도회와 청년회 결성 건이 팩 오래 전부터 계속 거 론되어 왔다. 청년회의 경우 해당 연령을 19세에서 30세까지로 하자는 구체적인 논의도 있었다. 그것이 무르익어 1974년 4월 12 일(금) 정기 제직회에서 두 자치기구 발기위원을 임명하기에 이른다. • 여전도회 발기위원 : 차성옥 권샤 백신열 권사, 오안순 집사, 정말순 집샤 양귀숙집사 (5명). • 청년회 발기위원 : 차종철 집사, 김지영 집사, 이병학 집사 (3명). 4월 14일에 먼저 여전도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회장에 오안순 집사가 피선됐다.

#루^-I ^I 당트륜그고호 I 30 난^~ &$J뿔해- .용 그해 5월 3 일 금요일 저녁, 최찬영 목사 자택에서 5윌 정기 제직회가 열렸다. 5월 12 일 어머니주일에 어머니들께 꽃을 달아 주기로 했고, 19 일 주일에는 춘계 야외 예배를 갖기로 의결한 것이다 이어서 본 교회 ‘과도기 제 2번 장로’ 인 김규환 장로를 본 교회 시무장로로 추대하는 문재가 논의됐다. 최 목사 청빙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교회 발전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 해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의결권과 임명권을 행사할 당회도 조속히 구성돼야 한다는 시각이었다. 이 추대 건은 제직회에서 이내 결의됐고 5윌 26 일 시무장로 투표 및 당회 구성을 위한 임시공동의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당회 구성이나 장로 선택에 대한 헌법 내용을 숙지한 제직이 없었던 듯 싶다. 다수결인지는 몰라도 임시 공동의회에서 가결된 것으로 하고 시무장로 취임예배를 위한 3 인 준비위원(오안순, 치종철, 이성냄을 뽑는 난센스가 벌어졌다. 뒤늦게나마 누군가 이를 “적볍하지 않다’고 말을 했고1 그로 인해 김 장로의 시무 추 대 건은 유야무야 돼 버리고 말았다. 그후 김규환 장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미루 어 보건대, 김 장로가 본 교회에 출석한 기간은 1973년 12월 31 일부터 1974년 5윌 26 일 까지일 것이다 그는 그후 김용주 목사의 라더포드장로교회로 옮겨갔다. 본 교회 초기사에서는 직분자 임직 문제에 였어 묘한 ‘징크스’ 같은 것이 엿보인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이다 폰 Â~ 지각변동은 그로써 끝나지 않았다. 최 목사가 부임한지 5 개월 남짓했을 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뉴욕 성 서공회에서 최찬영 목사를 동남아 선교사로 추천, 파송키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모를 일이라며 최 목사가 사의를 표명하자 수리할 도리밖엔 없었다. 재차 목양자를 잃게 된 교인들은 허전한 아쉬움과 갚은 설의에 빠져 들어갔다. 최 목 사는 4월 7 일 부임하여 동년 9월8 일 사임하였으니 딱 5 개월 시무한 셈이었다. 격동의 연속이었다 60

년도 체3 목 À~ ,, 1 후임 목회자 청빙은 본 교회 초대 목회자 장영춘 목사에게 의뢰하여, 정승칠 목사를 소개받았다~(사진 9) 제직회가 장승칠 목사를 후임자로 가결한 그 다 음 주부터 강단에 모시기로 했으나 회오리바람이 일 기 시작했다. 장 목사의 부임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 다. 그들은 주중에 장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임하 사진 9 저13대 담임 장승칠 목사 지 말라고 심한 말을 하며 사전 방해작전을 폈다 그 까le 3nd senior pastor of the 러나장목시는이 모든일들을감내하고부임했다:1974 Church, Rev. Seungchil Chaug) 년 9월 22 일이었다. 뜻 있는 성도들은 이 문제로 열심히 기도했다. 부임 둘째 주일까지는 장 목사를 반대 하던 교우들도 함께 예배를 드렸다. 왜 부임을 반대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세 번째 주일 이 되자 반대파는 여전도회 잔금, 성가대 성의 (7낸) 등 교회의 여러 비품들을 챙겨 가지 고떠난것으로전해진다 그러나 제단 ‘지킴이’ 들은 공의로우선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리라고 믿고 있었다. 진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장승칠 목시는 1974년도 연말을 기해 공동의회를 소집했다. 세례교인 18명이 참석했 다.74년도 결산, 75년도 예산안 심의와 함께 장 목사 담임 추대 건도 표결에 부친 결 과확정됐다. 61

써、 χ “#꾸처 ^I ;0;n-æ-’‘피호 130 녕싸 I활평5 쳐l훼목폐를한빠바 장승칠 목사는 교회 발전을 위한 107B 년 계획을 수 립하자고 역설했다. 하기야 아무 계획 없이 지내다가 훌쩍 떠나버리는 목회자보다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 이었겠는가. 온 교인들은 마음을 한데 모았기에, 감사 와 기쁨으로 열심히 일하는 교회로 변모하면서 비약적 으로부흥했다. 장 목사 부임 당시 60 명이던 교인이 8 개월쯤 되자 100명이 넘도록 불어났다. 정녕 배가된 것이다. 개척교 회 성장은 50 명, 100명이 ‘고비’ 라는데, 이미 두 고비 를 념긴 셈이다 ‘미 자립’ 같은 단어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간숭챔 쪽얘 J-~애 교회가 성장했다든지 컸다든지 논하는 기준이 무엇 이건 간에, 이제 뉴저지 장로교회는 모양새를 펀 갖춘 교회가 된 것이 사실이었다. 부입 8 개윌 째를 지내면 서 장 목사는 장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듯 했다 내섬 접찍어놓은 인물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일부 교우들은 때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한 두 번 우 여곡절을 겪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 목사는 자기 뜻을 굳이 관철시킬 생각이 었는지 장로를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급 기야 1975년 5월 정기 제직회에서 무기명 투표에 부쳤 으나부결되고말았다. 장 목사는 무척 상심했는지 이내 사표를 던져버렸 다. 깜짝 놀란 제직들은 두 번, 세 번 반려했으나 그는 끝끝내 사표 수리를 원했다. 교회 돌ö}가는 모습이 “싹 62

수 년도 이 노렇다”는판단이 선 것인지 앞날이 어둡다고무색해진 것인지 자존심이 상처 엽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목회자가 원한다고 해서 장로를 무턱대고 뽑을 수는 없 는노릇이었다. 6월 1 일 정기 재직회가 열린 자리에서 장 목시는 후임자로 임근하 목사를 소개하면서 전화번호까지 내놓았다. 차기목회자 후보까지 천거한 것이다. 그쯤 되자 그의 사직원은 수리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15 일에는 장 목사가 임시공동의회를 소집했다. 자신이 소개한 임근하 목사를 교 인들이 청빙해 달라며 기부를 묻는 표결에 들어갔다. 웬일인지 3차 투표까지 깃썩도 3분 의 2 선을 넘지 못하고 부결됐다. 교인들의 마음이 흘어진 것이다. 당일 투표 결과는 이 러하다,(표 6) 표 6 장승칠 목사 사임 수락 가부 투표 2/3 선 겨c 30 명 28 26 장 목사는 제직회를 통하여 다음 대책을 세우기로 하고, 주기도문으로 임시공동의회 를 폐회했다. 며칠 후 임시 제직회를 열어, 임근하 목사에게 연락하여 찾아가 만나고 부 임 여부를 타진하기 위한 위원들{차종철, 이성남, 곽영철 집씨을 뽑았다. 장승칠 목사는 1975년 7월 13 일 주일예배를 끝으로 본 교회를 떠났다,23) 10년 장기 목 회계획을 세운다던 그가 1년도 채 못되어 떠났고, ‘계획’ 이란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 다. 만일 담임목사가 이때 장로선출을 잠시 미루고 성장여세를 몰아 10년 계획을 계속 펼쳐 나갔으면 어했을까? 본 교회 역사의 굴곡이 사뭇 판이하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뉴욕교캔01 태애냐랴 그 무렵, 대외적으로 한인교계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이벤트가 발생했다 뉴저지를 포함한 대뉴욕지구(Greater New York) 교계를 총망라한 교회연합체가 생긴 23) 현 뉴욕루터교회 (155-14 35th Ave., Flushing, NY 11354) 시무 ‘2002년도 대뉴욕지구한인교회 주소 록’ (뉴욕교협 발행) 참조 63

삼 ^~등를 iγ #;;ζ애 X1 0 .......... 쿄호 130 않^~ 것이었다.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이하 뉴욕교협)였다. 창립총회 일시는 1975년 6월 27일 금요일 오후 8시, 장소는 뉴욕 권즈 엠헐스트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뉴욕교회였다꺼 총회대표는 창립총회에 한해, 각 교회 담임목사와 평신도 대표 각 1명씩이었다. 당일 총회 참석자는 22 개 교회의 목사대표 22명, 평신도대표 18 명이었다. 이날등록된 교회 중에는 본 교회도 포함되어, 참석대표가 장승칠 목새 치종철 집사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밖에 교협총회 참석자 중 과거 우리 교회와 관련 있던 인사들을 구태여 나열해보 면, 권즈장로교회의 장영춘 목사와 임수식 장로 라더포드장로교회의 평선도 대표 김규 환 장로 등이었다. 장승칠 목사도 교협 결성 직전 교계 연합운동에 관여돼 있었다. 즉 뉴욕한인교역자회 임원진의 회계였고 교협 창립 준비회 때 공동서명한 회원들 중에도 끼어있었다 뉴욕교협은 60년대부터 존속해온 목회자 중심의 교역자회를 근간으로 하여 새롭게 교회중섬으로 형성된 단체였다. 이미 상당기간 전부터 다년간 교역자회 총무로 일하면서 평소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컬)에 관심이 많던 신성국 목시{뉴욕한인중앙교회)와 이재은 목λL 뉴저지의 박재영 목사 등 여러 인사들어l 의해 태동 기미를 보이다가 그해 4월 6 일 교역자회 정기총회에서 신 목사가 회장으로 당선된 것을 계기로 구체화돼갔다. 이날 창립총회 중 임원선거에서 초대회장에는 한영교 목사가 당선됐고, 부회장 유태 영 목사와 이동필 장로 총무 안중식 목새 서기는 뉴저지의 김해종 목사가 됐다. 뉴욕교협은 80년대 이후 뉴저지교협을 비롯한 여러 지역 교협으로 니눠진다 체 냐래 애윤해 몬얘 영@』 전술한 대로 징승칠 목사의 소개를 받아 제 4대 임근하 목사를 맞게 됐다. 1975년 7월 20 일 예배 후 자리를 옮겨 본당 회의실에서 온 교우-(47명)가 모여, 제직 회 서기 차종철 집사 사회로 임시공동의회가 열렸다 사회자가 “이미 제직회에서는 임근 하 목사를 본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만장일치 가결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교 임 목사에 대한 소개 말을 한 뒤 거수 표결에 부쳤더니 전원이 찬성했다 장 목사가 있을 당시 공동의회에서 부결됐던 안건이 팬지 그가 떠난 후 가결된 것이 어쩌면 미묘한 반응0171 도 했다 24) 85-15 Broadway 당시 담임목사 이재은(훗닐 한국 기독교방송국 대표 역임)‘ 64

1975 년도 a:~AI 태셔냐려쓴 몬부매 1975년 7월 27일 새로 부임한 임 목사도 온유한 인품에 말씀이 감동적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목λ따다 모종의 비전을 갖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려고들 했다. 임 목 사도 예외는 아니였다. 부임한 그날, 임시 제직회를 소집했다. 교회 예배시간을 새로 조 정하기 위해서였다. 종전 여름 동안 오전 11시 30분에 드리던 예배를 8윌 둘째 주일인 10 얼부터는 12시 30분으로 환원키로 했다 그간 태만해진 주일학교 교육도 재활성화에 들어갔다. 당분간 각 제직이 학생들을 윤번제로 맡아 책임 관리케 했다. 8월 첫째 주: 홍무승 집새둘째 주: 이성남 집새셋째 주: 곽영철 집새넷째 주: 양호식 집새9월 첫째 주: 차종철 집새둘째 주: 이성희 집사 한편, 다가온 교회창립 3돌 때는 기념예배를 드라고 자축연으로 부인회에서 냉면을 준비하되 교회재정 80~100달러 선에서 해결하기로 하였다. 75년 8월 3 일 정기 제직 회에서는 구역을 편성하여 구역별로 해당 구역원들의 교통편을 책임지도록 하고, 구역 편성은 임근하 목사와 치종철, 오안순, 곽영철 집사에게 일임했다. 이처럼 열기가 달구어질 때 교인들의 친목이 곁들여지는 법이다.9월 7일 정기 제직 회에서는 그 다음 주일에 야외예배를 갖기로 하고 준비위원들(양호식 · 이성희 · 이성 남 · 문덕기 · 곽영철)을 선정했다. 결정한 바로 다음 주에 시행할 수 있은 것은 그만큼 연락이 잘된 때문인지 식구가 단출해진 것인지, 늘 준비돼 있은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주보(예배 순서지)를 만들어 예배 시에 사용했는데, 초를 먹인 원지(原紙)를 소 위 ‘가리방’ 이라는 줄판 위에 놓고1 철필로 긁어 쓴 후 등사괜mimeograph) 에 밀어만든 구식 주보였다. 일정시대 때부터 많은 이들에게 향수(?) 어린 인쇄문화였다.(표 7) 용화쳤 F 01 천 채 폴해채 임 목사의 부염으로 교회 걱정거리가 잦아틀 만 하자, 목회자의 주거지(뉴욕 권즈)가 멀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 목사가 교회 부근으로 이사오기를 일부 교인들이 원 했던 것이다. 임 목사는 “가정 사정으로 이사 오기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11월 2 일 제직회는 이 일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한 위원들(차종철 · 이성희 · 이성남 · 양호식 · 곽영철)을 뽑아 일임했다 일말의 불안스런 조짐이었다. 65

누구처 ^I ^I- \"ë근\"\"'-교호 I 30 닌사 0 표 7 주보건본 $앵댐 g 교회는 일꾼이 필요하다. 그해 안에 안수집사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목회사역을 보필하기 위해서는 장로보다 안수집사를 먼저 뽑는 것이 바람 직하다는 시각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계획은 종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 즈음 교회 66

예수 닮기 원하는 사람들 1975 년도 구석이 다소 어수선했다. 성가대 가운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비치용 캐비닛과 아울러 “ 교회학교용 흑판도 1개 구입했다. 구입은 서광진 집시.25)가 맡아했다. 개 과꾀 성탄절이 다가왔다.12월25 일 오전 11시 모두들 교회당에 모여 축하예배를 드린 후 엘 이성희 집λ까 준비한 떡국을 나눠먹었다. 각 가정에서 준비해온 선물들을 교환하는 순 때걸μ 서도 가졌다. 교인수가 단출했기에 가능한 행사였던 것 같다. 째 ‘ 연말에는 여러 봉사자들에게 사례하는 기회도 가졌다 임근하 목새 지휘자 이성남 집 λL 반주자 김혜옥 선생, 교회학교 교사인 원혜숙, 서태호 선생 등에게 이었다. 신년 기도회 및 예배를 1월 1 일 0시부터 4시까지 드렸다. 합리적인 재정운영을 위해 처음으로 차기(1976) 회계연도를 위한 예산위원(차종철 · 이성희 · 양호식 · 김정권 · 서광 진)을 선임했다. 특이한 것은 일반 교우들도 예산심의 때 나와서 발언할 수 있게 허락한 사실이다. 2잉서광진: 1975년도미하자마자오안순집사를처음만나우리교회로이끌려출석하기시작했다.현 펠리세이드장로교회(담임 권일연 목사 . 23601dT:뼈와lRd., OldT:聊an, NJ 07675) 협동장로(부인: 김어금권사) (YJ

、 :;;;;;I- ë큰 # ; ; { ; , 。 £ i고호 130 녕 ^t ω 염} 과도'1 (1976-1979) Tr,αnsitional Period ε뼈했@ 싹샤댈 01 때 X 흩 1976년 새날이 밝았다. 그해 1월 4 일 (주일) 정기 제직회에서 작년도 결산과 선년도 예산안을 상정해 놓 고 섬의하면서, 목회자 사례를 금년부터는 1년 12 개월 에다가 두 달치를 더해 14개월 사례비를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이 예산안에는 또 교육비, 선교비 등이 신설 됐다 1월 17일 (토요일) 저녁시간에는 제직들이 모여 교 회 운영 전반에 관한 좌담회를 가졌다. 교회가 생동하 는 듯 했다.1976년도 새 제직회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서 기 : 김정권집사 부서기 이한봉집사 서무회계 : 양호식 집사 재무회계 : 이성희 집사 애쯤얘복새톨애새얘 염근하 목사의 자택 이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교인들 중 더러는 전년도 11월초부터 임 목사가 교 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교회를 섬겨주기 바라던 터였다. 당시에도 임 목사는 “가정 형편상그럴 수 없 다’고 피력했었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위원들을 뽑 아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결새 들이기 엔 역부족 이었다. 1976년 2월 22 일(주일) 오후 2 시, 임 목사는 임시 68

제직회를 소집했다. 개회를 선언한 그는 봉투 한 장을 내놓고 냉큼 나가버렸다. 제직들 재k 은 닭 쫓던 개처럼 멀끔해졌다. 하릴없이 제직회 서기 김정구 집사가 임시 제직회장이 와 되어 사회를 맡아 문제의 봉투를 열어봤다. 사직서였다. 갑론을박 2시간 여 토론 끝에 굉 사표가 수리됐다. 임 목사는 1975년 7월 27일 부임하여 1976년 2월 22 일 사임한 것 뾰 이다. m X찌ta 당회는 여태 형성되지 못했다지만 제직회만은 존속해 있었으니, 역대 제직회 ‘임시회 장’ 들을 추스려봄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회자들이 들고 날고 했던 것이다. 또 다시 졸지에 목지를 잃은 ‘고얘 들. 어느 한 구석 제대로 돌0까는 부서가 없음은 두말 할나위도없었다. 옥샤천밴위원회 때를 7}리지 않고 무책임하게 들썩이는 지도자. 양떼를 돌본다더니 후딱 히면 지팡이를 던지듯 사표를 내던져버리는 ‘목자 들. 그들 때문에 교회가 이다지도 빈번히 상처받고 방황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교우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자괴감 마저 들기도 했다. “이번만은’, “이번 목사님만은하 며 기대 속에 모시고 또 모시고 했지만 안타까움과 어처구니없음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이 우리 교회를 연단시키겠거니’ 하는 생각이 제직들 간에 스멸 스멀 일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이제는 심사숙고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는 차기 담임 목회자를 모시기까지 설교강사 초청에 따른 제반사와 후임목사 청빙을 위해 ‘목사청벙 위원회’ 를 구성했다. 김정권 · 차종철 · 이성희 · 이성남 · 김정구, 다섯 집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였다. 되풍 01 되쓴 최의, 조공한 목자 잃은 양들은 후임목사 청빙위원들을 뽑아놓고 그들의 활동만 눈여겨보고 있는 상태였다. 제직회는 계속 임시의장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으나 별다른 안건이 없었다. 그저 청빙위원회의 간단한 경과보고만 들을 뿐이었다. 후임목사 사례비 월 800불 이내 에서 청빙하도록 하자는 결의가 고작 안건이라면 안건이었다. 그러던 4월, 정기 제직회가 역시 임시의장에 의하여 열렸다. 청빙위는 잠정적으로 본 교회 제 5대 담임목사로 이희철 목사를 청빙키로 하고 기도 중이며 구체적인 것은 결과 /@9

^ .. ~ 앙‘ κj 쑤주^_-IA\" I 。 μ 쿄호 1 30 념사 에 따라 임시 제직회를 열어 다시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1976년 4월 18 일 회의실에서 임시 제직회가 열렸다. 안건은 이희철 목사 청빙에 대 한 가부를 묻기 위한 공동의회 개최의 건이었고1 결정된 사항은 그 다음 주일(4월 25 일) 임시 공동의회를 열어 청벙투표를 하기로 했다. 이 공동의회의 임시의장은 곽영철 집사 가맡기로했다. *&밸 끊&찮 5 빼 뽑얘 1976년 4월 25 일(주일) 오후 2시 본교회당에서 임시공동의회가 열렸다 출석인원도 이제는 줄고 줄어 25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희철 목사 청빙 가부 결정을 위한 공동의회였다 사회자의 제안설명이 있은 후 가 부를 표결에 부쳐,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에서 성서지리학을 연구 하고 았던 이희철 목사를 본 교회 제 5 대 담임 목사로 맞게 되었다.(사진 10) 그라나 투표방식에 있어 미묘한 점이 있었다 전임 목회자 임근하 목사 청벙 건은 거 수로 표결하더니 이번에는 찬성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기 립투표’ 였다. 어쩔 수 없었던 교인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기사 이 목사는 이미 지난 주중에 이사(333 Fairmount Ave., Jersey City)하여 많은 교인들。1 이삿짐을 나르고 했기에 가부 투표는 어쩌면 한갖 형식일 뿐이었다. 사실,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는 없었지만 항간에 성결교회에서 온 일부 교인들 이 성결교단에 속한 목회지를 모시고 명칭도 성결교회로 바꾸자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 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런 연유로 기립투표가 실시됐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역으로, 만장일치의 은혜로운 표결을 위한 유도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교회는 목사들이 못 배기는 교회”라는 오명까지 쓰고 있을 즈음에 이희철 목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연이은 ‘목회자갈이’ 에 지치고 질린 성도들은 이번 목사님은 또 얼마나 계실까 혹은 어떡하면 오래오래 계실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조바섬과 갈망 속에 조심스럽게 이 목시를 맞이들였다. 교회설립 3년 8개윌만에 다섯 번째 목회자라면 어떤 설명도, 부연도 펼요치 않은 상황이었음에랴. 01 4\\뺨 이희철 목사 부임 후 첫 사엽이 교회의 등록과 이사회의 구성이다 70

예수 닮 71 원하는 사람들 1976 년도 어쩌면 전철을 밟지 않고 법적 보호를 받으려는 생각이 깊이 내재해 있은 모양이 다. 또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기도 했 다.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내용은 무엇인 매 £m 개 이희철목사는 입에 입을통하여 본교 힘h m빼a 회의 분위기와몇 년 안되는 역사지만과 얼 # 거얘기를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 때로는 교회가 부분적으로 갈라져 라더 사진 10 저15대 이희철 목사 포드 쪽으로 바람이 일기도 했다는 둥, 교 The 5 senior pastor of the 회의 재정잔고를 송두리째 거머쥐고 가버려 church. Rev. Heechul Lee 고빨}기도 했고, 이를 나눠 갖기로 했디는 퉁 헌물은 기증자가 이쪽이면 이쪽 것으로 하고 저쪽이면 저쪽 것으로 하자는 둥 믿기 어려운 많은 이 0비들을 들었음이 분명하다. 새로 부임한 이 목사는 두 번 다시 교회에 흠집을 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온 제직들도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기에 교회를 정 부에 등록하여 위치를 공고히 하고 이사회를 구성해 재산을 잘 관리하기 위한 방책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이 그런 관점에서 이사회(Board of Truste헤 구성을 구체화했다. 이사 임기는 1년으로 했 다. 이사장(president)은 1976년 4월 27일(화) 목사관에서 있은 임시 제직회에서 차종철 집사로 선임했다. 이사회 Secretary는 제직회 서기 7}, Treasurer는 재정회계가 겸임하기로 했다 이사회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정기 제직회 때마다 이사장이 제반 진행 상황을 보고했 다. 그후 차종철 이사장이 1976년 7월 8 일부로 사임하고? 약 5개월 공석 중이었다가 12 월 5일 원윤팔 집사를 제 2대 이사장으로 선출하여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도 개인 사정에 의하여 곧 사임하교 77년 1월 9 일자로 이성희 집사를 신임이사장으로 선임하여 명목을잇게된다. 2θ 당시 이희철 · 이현호 · 서광진 3인이 트렌턴 뉴저지주 청사에 가서 교회등록을 필했다{앙lO2, 4, 11 서광진증언녹취). '71

누주 ;;;;;iÄI ^。~ε독E 고호.... 않웰 채샤용:\"]1채 이희철 목사가 부임한 그 해 그 달의 재정을 뒤적이는 것도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 아살펴본다.(표 8) 표8 수입면 ←;ζ「 。E1 •;Z「 이근되나n그 자「처。힘니n그 감사헌금주일학교 계 4 36.95 74.00 60.00 170.95 11 45.10 114.00 경.00 5.21 189.31 18 22.35 45.00 420.00 487.35 25 21.65 155.00 155.00 6.50 338.15 계 126.05 388.00 660.00 11.71 1,185.76 *부활절 감사헌금 400.00불은포함되었음 지출면 금액 3월이월액 1,932.93 내용 4월입금액 1,185.76 목사님사례 600.00 4월지출 1,592.68 목사님초청비 50.00 4월현잔액 1,526.01 교회사용료 100.00 성가지휘자 50.00 반주자 40.00 침대 250.00 205.00 APTDEPOSIT 50.00 TELDEPOSIT 112.50 55.18 APTRENT& 묘Y 80.00 1.592.68 다과비 미입금(약정) 계 재정보고는 이런 양식에 의하여 매월 제직회때 마다 서면 보고되었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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