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예수 이석희 지음
버려진예수
버려진 예수 2010.02.10 초판 | 2011.11.30 4쇄 지은이 : 이석희 펴낸곳 : NeuAvenue 출판사 등록 : 2009년 12월 17일 / 321-2009-000235호 저작권 등록: 2010년 3월 30일 / C-2010-003679 주소 : 서울 특별시 방배 4동 862-31 Tel : 02-591-4270 FAX 02-593-4870 Email : [email protected] 이 책의 출판에 대한 저작권은 NeuAvenue과의 계약에 의한 출판서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ISBN : 978-89-963730-0-1-93230 값 : 35,000원 Print in Korea.
버려진 예수 이석희 지음 NeuAvenue
| 차례 | Contents 008 지은이의 말 1장. 멸망의 시작 016 의구심, 그 전쟁의 파편들... 020 멸망의 시작 032 기독교의 의문점들 034 유일신과의 사랑 그리고 로마제국 2장. 엇갈린 예언들 044 미래의 거울 046 예언과 추종자manikos 055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킨다? 059 다윗의 후손과 마믈라크토브 068 예레미야의 슬픈 예언 075 버려진 예언자, 이사야 078 거절된 어떤 징조, '임마누엘' 082 이방의 빛? 087 예수의 모습, 그리고 고정관념들 092 질고를 아는 범죄자 제3장 핏빛으로 물든 전쟁a blood-red war 102 신들의 정치? 인간들의 정치? 109 카리스마, 독재자 카이사르? 125 로마의 신, 옥타비아누스? 141 표징예언자들Sign Prophets
4장. 예기치 못한 탄생 156 탄생의 후폭풍 I : 신화적 탄생 160 요셉과 마리아의 혼란 163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그 연관성은? 171 탄생의 후폭풍 II : 신화적 탄생 180 인구조사census 5장. 디아볼로스, 광야의 전쟁 6장. 예수의 정체는... 신? 인간? 226 예수의 알 수 없는 정체 233 유일한 분? 독생자? 236 성전이라 외치는 자 238 다윗 후손의 아들, 인간? 241 세례 요한의 의문 247 내가 그니라! I am who I am 252 메시야임을 거부한 자 257 위에서 난 자? 신? 7장. 바실레리아Basileia 278 지도자와 그의 나라 281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287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들 292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301 여기에 속하지 않은 나라 306 이곳은 신의 나라? 지구의 나라? 314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323 편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나라 327 하나님의 나라 리스트 330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의 상관관계?
제 8장 버려진 예수 346 예수, 이 세대에 버린 바 되다. 352 포도원 농부들과 주인 361 유대인들과의 불편한 마찰 제 9장 아름다운 빛깔의 잔, 십자가 378 함께 나눌 수 없는 고통 388 종려 나뭇가지 393 최후의 만찬과 배신 401 억울하고 불의한 재판 412 최고 극한의 고통, 십자가 421 죽음과 신의 부재 제10장 꺼지지 않았던 부활의 불씨 438 망상, 환상 그리고 착각 442 '세마포'로 둘러싼 틀어짐과 의심들 447 십자가, 실패한 이미지 454 처형 이후의 3일간 466 빈 무덤과 육체의 부활? 471 침묵하지 않았던 서류들 48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495 흙에 속한자, 하늘에 속한 자
다윗의 왕조 예수, 그는 실제로 로마시대에 유대 인의 왕이라고 선언되었으며, 유대인 또한 로마인 들에게 처형된 것도 바로 이러한 선포 때문이다. 그는 왕위를 요구하지 아니한,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당당히 선언하였다. 그는 이사 야의 예언을 밝히 비추는 선지자이자 하나님과 같 았으며 그의 길을 비추는 당대 최고의 왕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들의 생각 에는...
/ 지은이의 말 / 이사야의 예언 중 예수를 드러낸 한 대목이 있다.“그는 멸시를 받아 사 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이사야 53:3),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곁에 늘 있다. 그러나 그 메시야는 수 많은 자들에게 아름다움을 간직하지 못한 채 2000년 전에 죽는다. 그리고 삼일 후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여전히 21세기 현대 사 람들에게 버림받고 짓밟히고 있는 것이 현주소이다. 철학자, 과학자, 역사가, 물리학자, 항공과 우주계 종사자들, 심지어 신 학자들 사이에서도 지금까지 그에 대해 논쟁이 치열하다. 그에 대한 논란 거리를 뛰어넘어 풍부한 재료로 쓰이는 오늘날의 다양한 장르의 책들 역시 포함될 수 있다. 어머니의 품에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를 품었던 나 역시도 어느 날부터 예수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상하게도 그 일이 내게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되어버렸다. 이 순간,‘아 이러니’라는 단어를 들추어 내야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 단어는 내게 거추 장스럽기만 하다. 쑥스러움도 잠시… 내가 버린 예수, 그가 십자가에 죽기 전 하나님 아버 지에게 버림받으신 그 마음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말로서 표현하랴? 모두 에게서 버려진 그 예수를 깊이 묵상하여 얻은 제목이‘버려진 예수’이다. 물론 성경에도‘버려진’이라는 표현의 단어가 몇 번 등장한다. 그 단어가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되었고, 이 무색한 제목을 통해 독자들 사이에서 예수가 버림받은 이미지로만 퇴색되어 남겨질까 봐 걱정이 되기도 여러 차례….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였다. 그 가 곧 결혼할 거라고. 나는 통화 중간에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아
름다운 부부의 결혼식을 앞두고, 우리 동기들에게 축하 회식 자리를 만들 라고 무지 재촉했다. 결국 나의 간구에 못 이겨 결혼 한 달 전, 그 부부의 식사대접을 약속 받았다. 드디어 약속된 그날, 예배를 드리고 불이 나도록 뛰어 갔지만 이미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다. 동기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식사를 다 마쳐 있었 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듯 보였다. 결국 그들은 음식 먹는 나의 모습을 눈이 부어지도록 쳐다보았고, 나의 식사를 방해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내게 요즘 근황을 물었고, 난 책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호 기심과 설렘들을 간직한 그들의 눈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책 제목 을 정했냐고 물었다. 꼬치꼬치 따지고 묻는 친구들 앞에 나는 조용히‘버려 진 예수’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잠시 침묵이 흘렀고, 일제히 절호의 찬스 를 놓치지 않을 새라 모두들 고개를 설레 흔들며 만류하기 시작했다. 그 책의 제목에 대한 혐오감인지, 어색함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종교적 인 이미지의 반감 때문인지 모두들 바꾸라고 생떼거리에 돌입했다. 아무튼 반대적 상황에 몰린 나는 그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 그리고 너희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지 않았느냐?” 친구들은 말이 없었다.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잠시 침묵의 순간을 깨고서“네 말이 맞아! … 우리 모두 그랬지!”라고 말했고, 그 상황은 마침내 내 편이 되고서야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버려진 예수’, 그 말은 진정 내 가슴에 와 닿은 나의 경험에서 비롯되 었다. 푸르른 산, 넘실대는 바다, 숨 쉬는 자연과 이루어 가는 세월 동안 날 마다 상고하면서 생각한 제목이 내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과거 글을 완성 해가면서도 매번 그 문장에 대해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글을 쓰지 않 으면 안 되는 부담감을 가지게 된 사명자처럼 되어 버렸다. 이 책은 내게 과거 예수를 합리적으로 부정해가면서 유대교와 천주교, 그리고 기타 다른 종교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배척과 비난으로 서슴
지 않았던 내게 한 가닥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이 책의 시작은 이러했다. 예수를 부인하며 허송세월 보내던 어느 날 누 군가 내게 충고했다.“성경을 세 번만 읽어보게나!”그날 이후로 그 말이 늘 머리 속에 맴돌게 되어버렸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버린 나의 선배도 이 전에 그와 동일한 말을 했지만 그때는 간과했었다. 그날 이후 내 마음 속 깊은 곳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현실이 되어 성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의 책을 보기 에 앞서,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간직한 채 성경에서 과연 예수를 누 구라고 말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며 매진했다. 더불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비롯하여 그의 신적인 영역과 인간적인 영역의 의 구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비난과 비판의 세월 속에 허우적거리고, 그러면서 도 남겨진 것이 없는 빈 마음에서 이제 실타래가 풀리듯 성경의 눈을 뜨게 되는 나의 모습을 놀랍도록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은 태 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예수는 성령의 도움과 인도를 거부하지 않았고, 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버려진 사람이자 하나님의 첫 아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인 것을 알게 되었다. 숨통을 조이는 교회들의 많은 비리와 아주 추한 모습 때문에 무언가 잘 못 꼬이게 되어 가는 현장을 보고 들으면서 더욱 더 심해졌던 헝클어진 나 의 마음 속에서 한줄기 서광이 점점 비추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길었던 기 나긴 여러 해가 지나면서 이전에 예수를 과감히 버리게 되었던 그 때가 내 게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이 매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한 복 판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제자에게 버림받고, 유대인들에게 또한 로마인들의 조롱에 견디는 그 앞 에 마치 나도 있었던 것만 같았다. 또한 로마시대에 살던 그들과 어쩌면 나 의 마음과 무척 같았는지…. 그 이미지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필립 얀시 혹은 C.S.루이스 같은 자들처럼 중간에 교회를 떠나기 도 한 기독교인이 더러 있을 것이다. 과거 그들처럼 세상이 대답해 주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의문점과 난해한 해석의 어려움에서 시작되어 원칙 중심의 삶에 이르는 종착역까지 가야 하 는 다양한 것들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 붙들림이 심해져 기독교인에게 기본이 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동시에 성경 이외에 말하는 예수를 하얀 도화지 위에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러한 자취를 여러분과 함께 여행하고자 한다. 이전에 느끼던 부 정적 생각과 그러한 삶을 등지고, 조금씩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 과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심을 하던 것에서 마지막 죽음이라는 사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그 길을. 그래서 무언가 부족하고 약하고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된 예수! 그 죽음 앞에 선 예수를 제자들은 등지고 도주했다. 그점에서 그들은 나와 같은 뿔뿔히 흩어졌던 공모자들이 다. 이 제자들의 한 없는 슬픔과 좌절된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보게 되면서 많은 눈물과 가슴이 저며 오는 아픔을 나와 함께 독자들이 느끼게 되길 기 대해 본다. 눈물과 희생 없이는 삶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숭고한 역경 과 세월의 기나긴 파도를 지나면서 과거에 알지 못했거나 그 어수룩한 사 고력이나 상상력들과 함께 이 책의 제목처럼 제자 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에게, 그리고 당시 백성들에게 냉정하게 버려진 예수가 공회 앞에 서 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 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 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 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 요한복음 6:36~37 -
제 1 장 멸망의 전주곡 나는 나 자신이 경험한 전쟁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더 상세하게 언급하겠지만 …… 나는 또 백성들의 참혹함과 재난을 분석하여, 전쟁과 불화와 기근에 의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으며 정복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대전쟁사』중에서 - 이것은 세계의 종말이다. 나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다. …… 이제 한때 세계를 정복했던 이 도시(로마)가 무너지고 있다. - 히에로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 강도, 학살, 약탈, 이런 짓을 해놓고서 거짓말쟁이 로마인들은 그것을 제국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무차별 파괴를 해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 칼레도니아의 부족장, 칼가쿠스Calgacus -
의구심, 그 전쟁의 파편들… 예수와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어머니의 수정란에서 출 발해 태아가 되어 여인의 벽을 깨고 세상에 서게 된다. 아직 걷지도 못한 나를 교회로 이끌고 함께 간 사람은 나의 어머니였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 이 부어지던 유아세례….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 의 손에 이끌리어 교회에서 어린이도 아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정체성 없는 아이로 성장했다. 그 후 이제 청소년기, 즉 근육과 키가 발달하고 육 체적 혹은 심리적으로 남자로 성숙하면서 더불어 나의 지혜와 마음도 예수 에 대해 칭찬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낯선 세계이자 이젠 전혀 새롭지 않다. 내게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예수를 그 어느 누 구도 따라오지 못할 최고의 영웅으로 치켜 세우며 난 그를 극찬의 예우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과거처럼 혹 은 내 육체가 성숙하듯 그를 향한 나의 영혼 깊은 찬양이 당대의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매일매일 공부도 하고 기타를 치며 찬양도 부르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늘 가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곳을 난 행복해했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였 으며 거의 매일 드나드는 나의 집, 나의 전부였다. 그곳에 있으면 이상하게 도 마음이 편하고, 늘 어머님의 품처럼 따스한 곳이었다. 때론 마음이 아파 상처를 받으면 그곳에서 남모르게 눈물 하나 가득 채우곤 했었다. 그런데 그 어느 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너무나 큰 상처 를 감싸안은 것이 하나 있었다. 교회를 등지는, 그곳을 갑자기 떠난다는 것 은 나의 마음이 변질된 듯 보였다. 마치 그것이 무대 위의 마술처럼 갑자기 무언가에 의하여 변하거나 또는 과일이 계절이 변하여 맛이 없거나 천천히 상하게 되는, 그런 변화일까? 그러하듯 나의 아름답고 추억으로 가득한 마음이 상하게 되어 추악한 마 16 버려진 예수
음을 넘어서서 심히 괴로운 어두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것이 나에게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불과 얼마 전, 전혀 다른 마음(?)이 내게 찾아오게 되면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연약하고 성숙하지 못한 예수에 대한 나의 어리석음과 의구심이라는 마음의 문이 찾아올 줄은 상상치 못했 다. 마치 산타가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산타의 존 재를 의심하고 거부하게 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의 사고 같았다. 그런 아름답고 매일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기독교 세계관에서 이제 잠시 추하고 악한 생각이라고 여기는 의문들이 내 안에서 넘실거렸다. 누구보다 먼저 그 질문의 연속과 같은 삶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나를 누군가가 미리 알았다면…, 나는 그 사 실을 알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죽도록 매달렸을 것이다. 예수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나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마치 필립 얀시나 C.S 루이스처럼 교회를 등지고 기독교 사상과 믿음에서 예수 곁을 떠나 보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 푸른 언덕 지평선 너머로 노을 지는 햇 살을 바라보면서 내가 가졌던 꿈과 비전의 일체성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런 동일한 마음의 창을 친구들과 나누며 희망에 부풀었던 청소년기에 예 수의 첫 세례처럼 온 몸을 적시었던 희망의 언덕에 막 도달해 나의 사명과 소명을 예수에게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련한 행복의 추억도 잠 시, 아름다운 연인들과의 거니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홀연히 사라지는 안 개처럼 내게도 청소년기의 기독교적 사상과 믿음의 반석이 금이 가게 되어 눈 녹듯이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 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 제 1장 멸망의 시작 17
누군가의 조정으로 햇살 위에서 의심의 구름과 번개가 갑자기 내 머리를 강타하여 나의 온 몸을 전율하듯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의 의문점으 로 나를 휘감았을 때는 그것을 무엇이라 설명하지 못했다. 해외 탐방의 부 푼 꿈을 안고 필리핀, 이스라엘, 이태리로 혼자 무작정 가던 그런 행복해 했던 일들이 그리울 뿐이다. 그러한 행복한 세월이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런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의 병들이 나의 육체와 영혼마저 욱신 거리게 만들었다. 그러한 마음들이 마치 불쾌하고도 분별치 못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쳐나 가야 하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내가 그토록 믿었 던 기독교의 오류와 피를 부른 잘못된 기독교 과거의 역사, 그리고 쇠퇴하 고 무너져 가고 있는 교회들…. 그러나 일부 교회는 더욱더 커져만 가고 있 는, 그래서 이상하리만치 매주 강요하는 헌금과 웅장한 치장에 중요시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 앞에 분개하고 있었다. 물밑듯이 닥쳐오는 세상과의 타협이라는 관계적 상황에서 점점 세속을 닮아 가는 교회들이 나에게 더욱더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더불어 예수에 대한 의문점들, 즉 말도 안 되는 현실성에 너무 멀어져 가는 기적들, 이상 하리만큼 예수의 가르침과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어 난무하게 되는 다른 복 음들, 더 한다면 무신론, 범신론,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허구적 설화라 고 불리는 성경, 비리와 권력에 집착하는 목사들, 목사들간의 영역싸움, 그 리고 목사와 장로간의 세력다툼…. 의심의 구름 가운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민과 번뇌가 나를 너무 혼란 스러움과 분노로 수년간 악화시켰다. 과거 밝았던 하늘 위에 내가 존재하 고 있었지만, 이젠 그 아래에 갇혀 어둡고 음침한 마음이 나를 방치해 두었 다. 급기야 어두운 날씨처럼 갑자기 몰랐던 희미한 구름과 안개 속에서 나 는 바라봐야 할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목놓아 울어야 했다. 마치 아픈 상처와 병으로 인해 수술해야 되는 상황에도 병원에 갈 수 없 18 버려진 예수
는 가난한 자처럼 그저 난 그렇게 방치된 채로 곪아가고 썩어 들어가는 피 부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또 멈출 수 없어 솟구치는 화산의 분화구처럼 지속되는 악화의 기로에 앉아 그러한 의구심은 솟구치게 되어갔다. 정지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의심의 싹이 피어 오르게 되면서 심지 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기독교만이 세상을 향해 말하듯 유일한 천 국 가는 길이자 지옥을 면하는 하나의 올바른 통로일까? 이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의문점이었으나 다양한 철학의 한 사상과 같이 내게는 모든 것이 진 실된 사고였다. 내면의 바닥은 차갑고 냉랭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과연 하나님의 이성 이 현대인들의 이성과 비교하여 고작 작은 풀뿌리같던가? 당신이 말하는 기독교의 믿음이 과학보다 훨씬 거추장스럽단 말인가?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 위에 거하는 거대하고 광할한 지구 위에 떠다니는 공기와 먼지보다 못하단 말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듯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을 부르짖으라고 충 고한다. 그러나 내게는 부르짖을 힘도 용기도 없거니와 내 안에 존재하는 허무와 고통이 나를 엄습할 때마다 극한 상황이 기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한 마음들이 빼곡히 가슴에 들어차고 있었던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 다. 비단 이러한 마음이 육체적인 고통에 비하겠는가? 육체적인 고통은 아물게 마련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상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물게 되어 회복되지만, 한 번 당한 마음의 상처는 좀 처럼 사라지지 않고 수그러지지 않는다는 심리학자들의 이론이 새삼 미워 진다. 수 많은 의문들의 홍수 속에서 나 또한 육체적 상처보다는 마음의 상 처가 더 힘들다는 것을 이제 매년 낙엽이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이치처럼 그렇게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과연 이대로 나는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을 같 이 갈 수 없단 말인가? 그의 길에서 하차하여 내려와야 하는가? 무엇이 이 토록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가? 제 1장 멸망의 시작 19
내 앞에 마주해 앉은 폭탄의 시계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 주어진 시간, 즉 남아있는 시간부터 0초가 될 때까지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이 러한 극한 상황에서 해답을 풀어야 할 수수께기처럼 조급한 마음에 불안하 다. 결국 내가 하고 있던 일까지 놓아야 될 상황 가운데 처했다는 것에 섬 뜩했다. 학교에서 주어진 시간 안에 풀어야 할 문제의 사지선단처럼 4개 혹은 3개 중 그 어느 하나를 찍어 결과를 도출하듯 나의 의구심과 의심의 안개라는 질문들에 쉽게 답을 선택함으로 풀어 쾌재를 부르고 싶다. 모두 가 해결되어 사라지는 그런 마술 같은 상황이 내게 존재한다면 그 얼마나 진귀한가? 나는 그 예수의 길을 가려다 풍랑을 만나 좌초하게 된다. 잠시 아름다운 선과 악 사이에서 춤을 추며 거친 숨을 들이쉬는 숲을 헤 메이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iri의 신곡이 물 한 가운데서 떠오른다. 그 누군가의 길잡이로 인해 피로 물든 숲을 향해 나아가는 지옥의 발걸음과 동시에 베아트리체의 인도로 환희에 빛난 구원의 순간을 갈망하는 희미한 교차로 공간에 나는 하염없이 누워 있는다. 멸망의 시작 『The ides of March(라틴어‘Idus Martii’)』은 로마 달력 3월 15일을 가리 키는 용어다. 현재 이탈리아(로마)는 보름달 기념일을 유추할 수 있는 것 으로 마르스Mars (농경 수호자 혹은 전쟁의 신)의 헌신에 대한 축제의 날 혹 은 군대 퍼레이드가 종종 개최되기도 한다. 더불어 B.C. 44년, 율리우스 카 이사르가 친구 브루투스와 롱기누스 주도하에 로마 의사당에서 60여 명 이 상의 음모자들에게 둘러싸여 23번이나 찔려 죽임을 당한 날을 기념하여 잘 알려져 있다. 과거 로마 제국을 영원히 지키고자 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us Julius Caesar를 로마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또한 그 카이사르를 백성들은 사랑 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의 사랑에 대한 원로원들의 시기심은‘카이사르 살 20 버려진 예수
인’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막을 치닫는다. 로마시대에 정치인들간의 내 부 혼란과 맞물린 살인적인 대화, 그리고 친구의 배신에 곧 죽임을 당하게 될 율리우스 카이사르 독재자를 두고서 벌이는 치열한 공격과 방어들의 대 화. 이를 소재로 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연극 작품,『카이사르 시저』는 읽 는 이들에게 다양하리만큼 논쟁의 불씨를 지피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 빈센조 카무치니Vincenzo Camuccini, 1771-1844 1798년대 작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Morte di Giulio Cesare)> 그 작품은 다수의 등장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살인과 음모의 정당성과 방어로서 지속적인 대화를 이끌어간다. 카시어스 : 당신 이름(브루투스)도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름 못지 않게 잘 어울려요. 저울에 달아보면 그 무게는 같소. 그 이름 들로 신을 불러내 봐요. 브루투스란 이름도 시저 못지않게 당 장에 신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오. 지금 당장 신들의 이름으 로 물어봐야겠다. 시저라는 자가 대체 뭘 먹고 자랐기에 그렇 게 위대한 인물이 되었냐고. …… 옛날, 브루투스 가문의 신 제 1장 멸망의 시작 21
조 한 분은 로마에 왕을 둘 바에는 차라리 악마를 섬기는 게 낫겠다고 하셨습니다.2 …… 브루투스 : 시저를 죽일 수 밖에 없어. 나로서는 그를 죽여야 할 어떤 이 유도 없어. 다만 로마의 공익을 위해서지. 시저는 황제가 되 고 싶어해. …… 만약 시저가 권력을 장악하면 분명 폭정을 일삼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러니 그를 독사의 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알을 깨고 나오면 본성을 드러내 사람을 해칠 독사 알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니 알 속에 있을 때 죽여 야 한다고 생각하자.3 이들 카이사르의 살인을 계획하는 자들의 대화가 마지막까지 탐욕과 사 욕, 그리고 정치적인 음모로 뒤섞인 대화 속에 싸여 있음을 볼 수 있다. 결 국 카이사르의 살인이라는 정치적인 결단에 도달한 로마 정치인들의 결론 은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한 탐독이 더욱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한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며 타당한 말인가? 서로간의 공방은 가히 치열하다. 과연 원로원 시스템에서 벗어나 카이사 르가 독재자로서 비춰지는 행보에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죽음 으로서 그의 피를 보아야 하는지…, 늘 신경전이 대립되는 동안 로마 원로 원들과 지도자들 간에 말다툼은 일상이 되어간다. 거기에 더하여 동일한 로마 지역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살아온 제한된 환 경과 배경에서 춤을 춘다. 또한 이타 문화를 겁없이 소유한 그리스 문명의 혜택과 그들의 문화와 더불어 헬라 문화라는 거대한 지식들은 사실 나름대 로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이사르의 암살음모사건에 대한 결 론으로 끌어내기까지는 서로 의견들이 다르게 들고서 뿜어져 나오는 드넓 은 시야에 그들은 살고 있었다. 22 버려진 예수
정치적 현장 공간인‘카이사르의 살인음모’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끔찍 한 살인의 안개 속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한 줄기 사건의 진실공방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논쟁의 불시가 되어버리고자 했던 이 작품을 파헤쳐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성공하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합법적인 로마의 지배자 카이사르가 불법적인 살해를 당할 정도로 죽어야 할 인물인 가? 과연 그가 로마 원로원들을 적으로 만든 어리석은 자인가? 혹은 율리 우스 카이사르라도 배신하여 죽여야 할 극한 상황의 각오를 무장했던 그의 친구이자 대중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믿었던 친구를 배신한 살해자 브루 투스가 진정한 우리 시대의 영웅인가 배신자인가? 처음 카이사르의 살인에 반대하던 자신의 의견에서 돌아서서 살인에 가담한 졸장부인 그의 배신과 충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러한 다양한 난제의 난제 속에 파묻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문 제에 대한 불명료한 대답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진술했던 작품일지라 도 진정 결과를 도출하는데 극히 어려운 난해함이 숨어 있다. 그 때문에 살 인에 대한 정당성의 해결점이 도출되는 일에서 피하고 싶은 심정이 더 솔 직한 대답인 듯하다. 비록 그 일이 사실적인 로마의 한 사건을 바탕으로 널리 읽혀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읽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달리 해 석되어진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과연 여러 사람들이 ‘카이사르의 살인’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혹은 과연 무엇이 정답인지 고민할 것이다. 내게도 이런 나름대로의 난제를 만 난 것을 슬퍼해야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 심리적 압박감이 하나 있었다. ** *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갈 무렵쯤이면 색종이와 카드가 문방구에 남아 있 을 날이 없다. 서점과 백화점 그리고 커다란 문구점 앞에는 수십여 가지의 다양한 크리스마스 카드가 우리를 유혹한다. 반짝이는 카드, 캐롤송이 울 제 1장 멸망의 시작 23
리는 카드,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겨울풍경의 배경을 중심으로 산타와 사 슴들, 더불어 구유에 누인 어린 아기 예수를 그리며 동시에 하늘과 별들을 수놓은 배경 속에 여러 다양한 종류의 카드가 우리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한다. 그 뿐이랴? 스스로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넘실거린다. 색종이와 도화지를 비롯하여 풀, 가위, 자, 꽃, 색연필 등 문방에 쓰이는 모든 물건들 은 총동원된다. 자신만이 만든 고유한 물건을 자랑스럽게 여기듯 서로 친 근하고, 정들었고, 또 고마워했던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서로 교환하는 것은 이들만의 독특한 작품 연출이다. 정성스레 예쁜 포장 을 한 상자 안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선물과 함께 색깔과 모양을 그려 넣 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준비하면 미소가 빙글거린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 면서 거리는 분위기를 더하여 우리들의 마음과 기쁨을 또 한층 돋구고 있 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즐겁게 보 낼지 상상만 하면 가슴이 뛰고 저절로 웃음이 번지게 마련이다. 특히 연인들의 마음을 더욱더 풍성하여 설레게 하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다가갈수록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서로 손을 잡고 하얀 눈오는 밤거리를 거닐 때처럼 그날은 더 이상 하늘에만 천국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지상 최고의 날이 된다. 그들이 만난 후, 서로가 준비한 것들을 교 환하여 상대방의 미소를 짖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행복한 웃음까지 상대방 에게 선사하면 드디어 크리스마스의 행복은 절정에 이른다. 그런 꿈 같은 환상에 젖은 연인들에게 그날만은, 지난날 과거의 모든 아프고 쓰라린 가 슴을 지녔던 상처를 가진 자들과 함께 모든 것을 정지된 시계처럼 잠시 잊 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짜릿한 크리스마스와 함께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는 기분에 들떠있는 아름다운 날들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 한복판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청년이 서 있다. 태연한 웃음과 연 인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뒤로 한 채 그 청년은 풀이 죽은 듯 조용한 모습으 24 버려진 예수
로 이 아름답고 행복한 모든 광경을 부러워한다. 그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 처럼 이 모든 사실이 허구처럼 변하길 바란다. 또한 이 사실들이 한 낫 자 신에겐 허물어져 가는 사치일 뿐이라고 믿으며 자신을 위로하고 변호한다. 누군가가 드디어 그 청년에게 한 걸음 다가서려 하지만 그는 이내 사라져 버린다. ** * 비록 아름답고 추억이 담긴 크리스마스의 한복판에 말없이 서있던 나의 존재처럼 사실 성경을 중심으로 예수 전후 초기 기독교인들의 핍박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 중 일부분만 들여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매년 있는 꿈 같은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미소 짖게 만드는 행복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데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 크리스마스의 유래된 베들레헴 유대 땅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 난 회오리가 휘몰아쳐 살인이라는 단어를 포함하여‘죽음’과‘멸망’이라는 어마어마한 큰 소동과 땅을 흔드는 일들이 여기 저기서 연속적으로 나타난 다.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양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 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4 내게 유대와 로마의 역사를 연구할 때마다 그 구절을 간혹 기억나게 한 다. 로마와 유대 땅에서 벌어질 죽음과 멸망, 그리고 새로운 변화와 함 께…, 그러나 그것은 이제 시작일뿐이다. 로마 제국의 공포 정치와 맞물려 그 나라와의 유대관계를 지속하고자 유대 사회에 질서를 들먹거리는 귀족 들의 정권획득 사이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일 이 다수 발생한다. 그 일은 곧 온갖 비도덕적이며 잔혹한 행위인 역사의 피 제 1장 멸망의 시작 25
와 살육이 예수의 탄생 전후로 춤추며 난무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폭력적 인 극적인 비밀이 행복하고 따스한 크리스마스 아래 숨어 있었다. 당시 유대 사회와 전쟁을 연구해보라! 공격적이며 난폭한 잔인의 현장에 서 있는 것들이 마치 땅 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보여준다. 심 지어 사자와 독수리의 먹이 싸움의 향연처럼 로마 지배 아래 유대끼리의 피와 먼지 그리고 살인적인 흔적의 잔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역겨운 유대 땅으로 비춰지고야 만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탐욕과 살 인의 밥이 되고 만다. ‘크리스마스의 즐거워하는 이들의 행복한 비명과 웃음으로 수놓은 거리’ 와‘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드러난 피와 시체가 난무한 고통과 죽음의 거리’ 가 마주하는 로마 시대 교차로의 한복판에서 난 혼자 서 있는다. 오직 크리 스마스의 흥겨운 그 날들과 상관 없이 난 또 하나의 다른 진실을 구경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A.D. 70년경 여름, 코를 찌르는 저주스런 피의 잔 해와 뼈만이 남아 있던 피비린내 나는 냄새와 자욱한 먼지로 뒤덮는 일이 발생했다. 마침내 혈육의 장소로 변한 하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의 잔해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역사의 과거로 기억되어 버렸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의 땅에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을 죽 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억은 이제 나무에 나뭇잎파리 한 가닥만 남은 듯 예루살렘 성전의 잔해, 곧‘통곡의 벽’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음은 예루살렘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그곳과 같이 오늘날 아직까지 유럽 전체로 뻗은 증거와 잔해가 남아 존재하는 로마인들의 아름다운 흔적들이 여전히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역사의 전환점이 된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것의 유물들이다. 그 물품들은 유대교 신앙에서 가장 소중하고 값진 금과 은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중요한 장소이자 가장 신성한 보물들이 26 버려진 예수
이제 로마의 손에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분임을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우 주가 생성되기 시작한 때에 선택 받은 유대 백성들의 아픔을 가만히 내버 ▲ 프란체스코 하예츠Francesco Hayez 1791 - ,1882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1867년대 작품 려두시는 걸까? 이 땅과 하늘 위에서 못하실 것이 없다고 배운 우리의 전능 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 세계 수 많은 나라 중에 작고 초라한 한 나라인 이 스라엘 백성들의 죽음 앞에 동조하시는가? 왜 로마가 쳐들어와 자신의 자 식과 비교할 수 없는 무고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우성과 그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의 현장 앞에 분노하지 않으셨단말인가? 자신의 몸과 영 혼을 내팽개치면서까지 현장에 달려가는 현대인들의 기자 정신보다 왜 먼 저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마치 피와 얼룩진 잔인한 현장만을 말해주듯, 살인 현장에 늦게 도착하여 사건 실마리의 단 서를 찾지 못하여 이리 저리 어찌할지 몰라 방황하는 형사처럼 혹시 하나 님도 어찌 해야 좋을지 넋 놓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지금 무한한 권능과 자비로운 그의 피조물들은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더 제 1장 멸망의 시작 27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고통과 울부짖음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럼에도 애 굽을 탈출한 것에 상기시키듯 행복한 표정을 짓기에는 그들은 너무 아프고 쓰라린 상처로 얼룩져있다. 이런 고통의 호소가 하늘에 닫지 않았을까? 로마에 아직 그 당시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성전의 귀중한 성스러운 보물을 훔쳐가는 모습들로 표현하여 극찬을 받아 누리고 있는 그런 잔해가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이 버젓이 공개되어 있다. 그곳에 남겨진 신성한 물품들이 이방인, 즉 로마 병사들에게 어이없이 도난당하고 모독되고 있음 을 오늘도 여전히 증명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유대인 들의 찢어지는 가슴과 여미는 슬픔의 노래가 흘러 넘쳤을 것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잔인한 흔적의 역사를 말해주듯 나의 다양한 의문들과 함께 여전히 나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던 것에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어이 없이 바라보고 울어야 했던 유대인들의 뼈아픈 실제적 현장들과 그들의 애달픈 울음과 고초 그리고 복합적이며 다 양한, 그러면서도 현저한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이들 유대인들의 진귀하고 신기한 보물들을 탈취한 행위들의 선봉장인 티투스를 기념하고 있다고 하는,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제국주의의 잔혹한 행위와 같은 기념비나 조각은 오늘날 그 흔적과 비명의 역사 현장을 말해주듯 여전히 장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신전 안의 불을 밝히는데 쓰인 일곱 가지가 달린 촛대인 메노라Menorah, 제사를 드리는 시점을 알리는 은제 트럼펫, 성찬용 빵을 올려두는 제단 등 금과 은 으로 치장된 수 많은 유대인들의 값진 신성한 보물들은 가히 수백 년 동안 사제들만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진귀하고 신기한 물품들이었다는데 더욱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들의 물품들을 통해 볼 수 있듯, 유대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제사에 진실된 마음으로 온 신경과 집중을 펼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대제사장들 역시 그러한 마음을 이용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향으로 28 버려진 예수
몰아 가고 있었는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신전 안에서 장사하는 물건 들을 뒤엎어 버린 사건이 불연듯 스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 히고 급기야 그곳을 범죄자의 소굴로 전락되게 만들었다고 소리친 예수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심장 소리가 물질향락에 빠져드는 오늘날 의 현실을 미리 본 것처럼 왜 이들의 추악한 행동을 차마 볼 수 없어 분노 하여 크게 소리지르고 난동을 펼쳤는지 지금 로마사 안에 처한 유대인들의 환경과 배경을 보면서 놀라 까무러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로마에게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속주국(로마의 식민지 나라) 을 상대로 군사 원정 가운데 단독 원정으로는 유대전쟁이 전대미문의 거대 한 규모로 치고 있다는데 있다.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폭력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네로 왕의 권한으로 이제 로마 군대 거의 4분의 1에 해당 하는 군사력을 유대 땅 위에 맹렬히 퍼붓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5 서점의 진열대에 좋은 서적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시키고 흥미를 도 와주고 있지만, 그와 반대로 너무나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과거 아무 쓸 모 없는 너저분한 이야기들처럼 잊혀진 과거 속에 풍덩 빠져 이윽고 미래 의 희망이라는 예수시대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추억은 잔혹한 살인과 혈육 의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의문점들 내게 직면한 현실적 문제를 잠시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앞으로 언급할 유일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당한 유대인들의 고통을 사뭇 현대에 살고 있 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 비교한다면 그 어느 시대가 고통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 전후로 벌어진 당시 다양한 전쟁들 속에 로마를 중심으 로 벌어졌던 서로 다른 문화와 그 자신들만의 신들에서 멀어지지 않는 가 공할 위력과 파워를 위시하여 예수를 사랑하고 믿는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퍼붓는 질타와 멸시의 현장을 그때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지 묻지 않 제 1장 멸망의 시작 29
을 수 없다. 천박하고 무고한 백성들의 참혹한 현장 앞에 육체적인 고통과 피맺힌 원 한, 학대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에 난 고개가 숙여진 다.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측면에서 그때와는 사뭇 진지하게 다를 수도 있 다. 신을 생각했던 고대 시절과 다르게, 현대는 첨단과학과 영상이 만들어 낸‘과학과 이성’때문에 신을 거부할 수 있다. 과거 절대적인 믿음이 형상 화된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무색할 정도로 신을 향한 존경심이 제로에 가 까울 수 있다. 21세기가 말하는 바,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이성’이 신을 향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짓밟고 있다. 우리는 다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이다. 즉, 피고인(무신 론자들)의 변호사가 자신의 변호할 이들을 위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 들을 찾는다. 즉‘신의 부재’라는 주제를 이용하여 현란한 증거수집과 그 기록들을 찾아 이를 토대로 피해를 입힌 원고인(기독교인들)과 증인들(초 기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수많은 질문과 반론을 들어대면서 무신론자인 피고인의 변호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것을 위해 책을 연신 찍어 댄다. 그 주제는 역시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예수의 탄생 전, 그리스·로마 시대는 신화를 한 가지 이상 숭배하고 있 었다. 이는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하면서 숭배대 상이 변질되고 그리스∙로마 신을 믿는 자들이 하나 둘 떠나는 모습을 가만 두고 볼 수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재판하여 죽이고 있는 현실을 이제 현대인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왜 하필 유일신이냐? 다른 신은 해 당이 없느냐?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 반열에 올라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심판대에 세운다. 과연 이런 법적인 공방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결코 주인공 예수가 나타 나 해명하지 않으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결코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 자신들만 오로지 예수의 생애와 사건을 두고 30 버려진 예수
서 그것이 참인 것에 믿음과 신뢰를 부여 잡고 목숨을 걸지 않는가? 실제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는가? 교회 다니는 자들만이 허구적인 사상에 근거한 초기 기독교 사상을 맹신적으로 믿고 있는지 말이다. 초기 예수 시절, 증인들에 의해서 남긴 메시지들의 모음집인 성경 안에 서 보이는 내부의 문제점들이 눈에 보인다. 즉, 말도 안 되는 기적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예수의 실체와 허구,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한 헛 소리들…. 이러한 현란한 글솜씨 가운데 반론과 비판을 들이대면서 그리스 도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옥죄고 있다. 우리는 한 법원에서 객관적인 입장 혹은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법정인 공방의 비판과 정당성을 동시에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갈등하고 있다. 무 엇이 올바른 결정이며 어떤 것을 우리는 옹호하거나 더 올바른 선택을 하 기 위해 진실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급기야 해결책과 결론에 이르렀 는가 유일신과의 사랑 그리고 로마 제국 과대망상증에 빠져 A.D.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난 뒤 뜬금없이 로 마를 재건하겠다는 구상을 내세우며 로마가 불타고 있을 때 그러한 광경 을 더 잘 보려고 탑 꼭대기에 올라 전설적인 토로이의 파괴를 주제로 한 노 래를 부른 낭만적이며 교활한 인물이라는 황제가 있었다. 그 지극히 사치 스럽고 퇴폐적이기까지 한 로마의 황제‘네로’는 화제 발생의 책임을 물어 희생양을 찾아야 했다. 대상을 찾아 고심한 네로는 로마 시내에 머무르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그의 목표로 삼는다. ‘타키투스’라는 예수시대와 동시대 인물로서 종교 전문가들에게 유명한 그의 저서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인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들을 산 채 로 불태우고 십자가에 공개 처형하기를 일삼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 는 오금이 저리며 간담이 서늘해진다. 제 1장 멸망의 시작 31
결국 이들의 연약함과 유일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못마 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들의 헛되고 고귀한 죽음에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자들에 의한 질문인,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의 외침 앞에 우리는 법정인 공방 속에서 대답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숙제를 풀지 못한 나약함을 보이고 있다. 사실 로마가 식민지를 받아들일 때 초기에는 폭력과 억압이 별로 존재하 지 않았다는데 조금은 의아해할지 모른다.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영화 에서 보듯 우리는 로마가 잔인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상 하게 여길지 모른다. 물론 국가 안에서의 무력을 묵인한 현실에 직시했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사상처럼 새로운 나라를 점령하려면 피와 혈전이 난 무하는 장면은 없어서는 안된다. 일단 무력과 정복을 사용하여 적을 누르게 되면 회유책을 써서 그들은 가급적이면 피를 보지 않고 설득과 회유로 그들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 는 언변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내편으로 만드는데 탁월한 솜씨를 가지고 살 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황제의 등극과 권력의 단맛을 아는 자들 에 의해 강압적인 폭력과 시기, 질투, 그리고 잔인성이 총망라되어 점점 로 마의 초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시작이 작고 초라함에도 엄청난 제국을 만들어가기까지 나름대로 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다양하고 독창적인 그들의 정치 프로세스를 교제처 럼 만들고 사용하여 로마인들은 완벽한 통치와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초기에는 잔인한 살육과 식민지 백성들의 죽음으로서 제압하지 않 고 자신의 통치에 그들을 모두 끌어 안았을 초기의 빛나는 로마의 지배와 과거의 역사가 잊혀진 듯하다. 토머스 콜이 그린 멋진 로마의 파괴를 아름답게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 려낸『제국의 멸망 과정』(A.D. 1835~1836)을 로마인들은 상상이나 하였 32 버려진 예수
겠는가? 결국 A.D. 476년, 서로마는 공식적으로 멸망하는 절차를 거치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모든 로마인들은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그것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인해‘제국의 멸망’이라는 숙명을 예감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멸망되기 전, 100년 동안의 결정적이고 확고한 파괴의 충격파 그리 고 동시에 대내외적인 반란과 전쟁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있지 않다 는데 우리는 이상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 ▲ 토마스 콜Thomas 이Cole 그린 1836년 작품, <제국 멸망의 과정The Course of Empire >Destruction 여러 가지 멸망과 파괴의 유력한 사실 중에는 모두가 동의하듯 야만족 의 침입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사유는 로마인들에게 결코 멸망 의 정확한 원인과 문제 해결로서 완벽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로마의 향략 도 문제거리였지만 그것을 포함하여 로마인들 일부는 자신들의 조국인 로 마의 비참한 최후 멸망과 파괴는 단연코 문제가 있다고 할 때 당연히 네로 가 기독교인들을 들먹거리듯 이들은 그 멸망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의 탓으 로 돌렸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예수 한 사람의 운명이 유대 한 나라를 쥐고 흔 들고, 그것을 넘어 로마의 멸망을 보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음을 제 1장 멸망의 시작 33
볼 때 그 일은 내겐 흥분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잔혹한 전쟁과 같은 역 사적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산 증인 그 자체라는 점을 지닌다. 결국 산 과 자연을 불태울 하나의 작은 불씨가 바로 예수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라 고…. 이제 그 불씨가 타오르는 시점이 점점 흘러갈수록 이제 그것이 유럽의 기독교화를 조장하여 번성케 하였고, 그것을 더 뛰어넘어 반대편 아시아의 지역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정신이 침투됨으로 인한 최근의 역사 현장까지, 그러한 것에 아주 약간의 동조를 했든 아니든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의 주인은 예수가 만들어 놓은 작품인‘하나님의 나라’라 는 기적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논란이 끊이지 않 는 상황 가운데 이를 근거하여 앞에서 나열한 죽음과 살인이라는 한 토막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직 내게는 크리스마스와의 사뭇 행복 혹은 기 쁨보다는 이 모든 것을 냉정하고 뚜렷하게 느끼려고 한다. 그 이야기들은 조용하지도 않고 냉정함이 도를 넘어 점점 그리스도인과 의 전쟁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 고조되는 시간을 기다리듯 불편하고 냉소 적인 길에 서 있다는 게 아직까지 부담이 된다. 마치 그 시간은 내게 점점 수면에 물을 일으키고자 실증내어 실쭉거리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 가운데 역사의 피와 악몽을 부르는 현장의 땅 위에서 이미 예수가 태 어날 때는 마치 전쟁에 미친 로마인들 혹은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 사이 로 아무도 모르게 평화로운 듯 깊은 곳의 비밀을 유지했다. 그러한 역사는 불행하게도 그를 알아보지 못해 여관에 묵을 방이 없어 집이자 당시의 마 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쓰게 했다. 아무도 그를 진정 기독교에서 말하 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당시 한 미개 인에 불과할지 모른다. 마치 배고픈 장발장이 빵을 훔칠 때까지 아무도 그 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장발장과 같이 평범한 자가 훔친 후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아직 아무도 예수가 참된 신의 아들인지에 대한 것은 전 34 버려진 예수
혀 관심도 없었다. 그는 쓸모 없는 사람취급 당하여 버려지고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버림받기로 작정한 듯 세상이 그를 그렇게 방치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대인의 왕이며 메시야 그 리고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불렸던 그가 잠잘 곳이 없어 하필이면 왜 그런 허름한 곳에서 태어나야 했을까? 과연 그는 낮아지려고 조용히 온 것인가? 그 반대인가? 왜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세상의 왕임을 알리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진정 낮아진 한 사람의 아들로서 숨쉬고 아파하고 고통을 느끼는 한 인간이었던가? 불연듯 세례 요한에게 예수가 세례 받았을 때 하늘에서“이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언급한 복음서의 문장이 생각난다. 그 소식을 들을 청년 예수가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가진 자로서 머지않아 증명됨에도, 그 의 어린시절은 한 피조물밖에 되지 않는 헤롯의 폭력에 그와 그의 부모는 피신할 정도였다. 그들을 피신시키고자 한 천사의 경고로 인해 신의 아들 이 그저 죽음을 피해 도망가야 한다는 다소 황당한 사건에서 우리는 그것 이 역설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직 그런 어지러운 생각의 흐려지는 판단력을 주체할 수 없기에 크리스 마스의 행복은 내게 과분하게 느껴짐이 깊어지고 또 깊어지려 한다. 이미, 그 전에 예루살렘은 헤롯 왕과 함께‘동방박사(지혜로운 자)의 방문’으로 자신을 제외한 진정 거대한 왕의 탄생을 축하해야만 한다는 충격적인 소식 으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와 전혀 다른 삶과 세계에 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성탄절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는 것으로 현대인들은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 보인다. 그런 사이에 우리 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2000년 전의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을 언제 그 랬느냐는 듯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마치 각자 고유한 시민권을 가 진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일에 전혀 개의치 않듯이 전혀 다른 땅 위에 살아 제 1장 멸망의 시작 35
가고 있다. 최근처럼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가 발달한 요즘에는 다른 나라 의 일을 나의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일만큼 글로벌화된 상황에 동시적인 아 픔과 슬픔으로 느끼지만 인터넷과 미디어 탄생 이전, 과거에는 남의 나라 와 상관없이 살아도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21세기 첨단의 매체에도 불구하고 전쟁, 기근, 살인과 공포, 세계 대전, 유대인의 학살, 성적인 타락 그 자체와 극심한 알 수 없는 질병과의 싸움 으로 인한 심적 고통과 절규들이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살듯이 현재도 그 렇게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간다. 예수의 크리스마스 시절 동안 겪어야 했 던 헤롯의 살인 앞에 극심한 혼란과 가족의 대이동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의 고통과 불안, 게다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전혀 개의치 않는 우리처럼 세 대를 지나도 전혀 무관하게 지나가는 기차의 경적소리만이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한 지금의 크리스마스와 다른 당시 어지러운 세상 의 극심한 혼돈과 혼란이 있던 예수와 그의 가족들은 행복한 생각보다는 그것이 오히려 사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크리스마 스와 전혀 상관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의 목을 조여 오는 그러한 상황 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겉치레이자 희미한 안개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추억과 향연 같은 것들을 비교하여 과거 예수와 그 의 부모들과 친척들은 헤롯과 유대인들간의 핍박 속에 지금과 같은 설레고 들뜬 마음들이 과연 존재했을까? 나름대로 그런 아픔과 서러움에 보다 더 한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우리는 예수와 그의 배경들에 더 진지해 야 한다. 이제 다가올 구원자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한 이 다양한 사건 앞에 한줄 기 서광을 비추는 것이 있다면 피가 흘러내리고 악취가 풍기며 비명 소리 가 횡횡하는 가운데 질고를 아는 범죄자에 대한 예언을 하고자 한다. 그 예 언은 못된 기질을 드러내고, 기억치 못한 채 그것을 내팽개친 유대인들과 36 버려진 예수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송곳니를 물씬 자랑하며 허우적대는 로마인들 사이로 그 버려진 예언은 인류가 탄생함과 동시에 예고하고 있었다. 나 역 시 그것을 놓치고 있었던 얼빠진 사고뭉치였던 것을 나중에야 비로서 알았 던 것이다. ▐ 1장 미주 ▐ 1. 야고보서 4:14.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지만지, 2008), 김종환 옮김, p37, 1막 2장.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지만지, 2008), 김종환 옮김, p57-59, 2막 1 장. 4. 히브리서 1:10-12. 5. 사이먼 베이키 지음,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Ancient Rome : The Rise and Fall of Simon Baker, 2006), 김병화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제 1장 멸망의 시작 37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예언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자유가 자기 주장인지 아니면 요구에 대한 응답인지, 최후의 상황이 싸움인지, 관심인지,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다.” - 아브라함 J. 헤셀 - 베들레헴 너는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미가 5:2 -
미래의 거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 앞서 한 가지 통찰력을 가지고 나아가야 함을 알리고 싶다. 이는 현재와 미래를 말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예언자 가 말한 시점(현재)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건(미래)말이다. 그래 서 C.S. 루이스는『기적』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주제를 다룰 때 무엇보다 앞 서 예언에 대한 내용을 잠시 언급한다. 동일한 주제로서 단어와 그 뜻은 다 르지만 그것들을 적용시킬 때 같은 전제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로운 공간이 존재한다면‘기 적’혹은‘예언’에 대한 충고를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이나 기적을 믿는 자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에 게는 기적이나 예언은 결코 없다. 한 예로 역사적인 의미에서 성경 주석을 해석하는 자들은 요한복음이 베 드로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에 의거 베드로의 죽음을 복음서 저자들이 일찍 보았고, 그 사건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예언을 만들 어 냈다는 가설이다. 그러한 학자들은 이미 초기에 일어난 사건에 예언이 라는 단어를 넣어 버린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의 결론은 단순히 일어난 일 에 대한 기록된‘후대의 글솜씨’라고 쉽게 결론 짓는다. 이는 거울에 적용시키자면‘과거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거울은 물건이 있어야 진정 비춘다. 그 말을 다시 말하면 무언가 사건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거울이라는 예언은 그 사건을 비추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예언은‘미 래의 거울’이다. 결코 현재 볼 수 없는 물건(혹은 안보이는 것들)을 보여주 는 미래의 거울이다. 진정 예언의 의미는 사건이 이루어지기 전에 누군가 의 입으로 언급해야 하고, 또 그 예언한 사건이 후대에 일어나야 그것이 비 로서 완벽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건 뒤에 예언했다고 한 그 주석가는 이미 예언에 대한 의 미를 퇴색시키고 있었다. 이는 예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역사적 사건이 40 버려진 예수
다. C. S. 루이스는 그들의 예언에 대한 고정적인 시각을 대신 전한다. “즉 그 저자는‘어떤 사건을 언급하는 책은 그 사건 이전에 쓰일 수 없 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단, 진짜 예언이라는 것 이 존재한다면, 그 저자의 논의가 기초부터 허물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저자는 진짜 예언이 가능한지 아닌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 혀 논하지 않습니다.”1 과연 예언이란‘미래의 거울’이 아니라‘과거의 거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이 글을 써내려 가면서 반드시 넘길 수 없는 방대한 예수 그리 스도의 예언에 있어서 이미 수천 년부터‘유대인의 가보’처럼 내려온 메시 야 예언(구약 성경)을 그냥 넘길 수 없다. 물론 예언은 없다고 종지부를 찍는다면 이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고 생각되며, 역사적 예수와 동시에 믿음을 요하는 신앙적인 예수를 차츰 알 아내기란 여간 곤욕이 아닐 것이다. 개방적인 현대사회에서도 자신에게 필 요치 아니한 정보는 끊어버릴 수 있는 개방까지 고루 갖춘 현대인들에게 기적이나 예언에 대해 사탕이나 꽃냄새처럼 향기 달도록 나불대봐야 마음 이 굳어버린 자에게 기적이나 예언 따위를 이해시키기란 참으로 고단한 시 간으로 전락된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 있다면, 만약 한 사람을 향한 수 많은 선포 된 예언이 이미 기록되어 있고,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뒤에서도 그것들이 정말 이루어진다면 진정 최고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미 래를 향한 한 번의 이루어진 사건을 두고서 과거 이미 다양한 자들이 동일 한 자를 보는 한 각도, 그리고 그 시야를 다량의 책으로서 오래전부터 그것 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과연 얼마나 허무 맹랑하다고 내팽개칠 수 있을까? 예언을 허무맹랑한 사건으로 여겨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현대인들에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41
게 예수를 향한 예언 역시 동일한 사료라고 보아도 무방할지 모른다. 예언과 추종자MANIKOS 로마의 역사에서 위대한 황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어가며 그 시대를 주름잡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직업은 역설가이자 원로원이었다. 로마 의 위대한 웅변가였던 키케로는‘광기’,‘황홀경’,‘시적 열광’,‘사로잡 힘’,‘붙잡힘’이라는 단어가 위대한 시인들의 정신들을 접목하여“정열의 불꽃에 타오르지 않는 자 혹은 미쳐서 날뛰는 그 무언가에 붙잡혀 있지 않 는 자는 위대한 시인이 될 수가 없다.”2고 말했다. 그 말은 시인에게 문구를 창조하는 과정이 광기를 지닌 상태와 비슷하거나 그와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점을 내비친다. 또한 플라톤도 견해를 같이 한다. 그들을 포함하여 예언을 하는 자는 결국 광기를 지닌 사람 혹은‘맹목적인 추종자’manikos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어로‘마니아(mania)’, 즉 어떤 일에 몹시 열중한다고 할 때 쓰이 는 이 단어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사실 이는‘추종자’라는 뜻인 그리스 단 어의‘마니코스(manikos)’에서 유래된 것이다. 예언자였던 모세와 나단, 예레미야, 이사야 등등 구약의 예언가이자 선지자인 이들도 하나님의 추종 자manikos였다. 예언에 갈망하고 목말라하던 이들은 필시‘하나님의 영적인 시인(추종자)’이라고 여겼음을 성경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예는 성경 말고도 과거 그리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언가로 서 천재를 광기가 서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유한 세네카Seneca는“광기가 뒤섞이지 않은 위대한 천재는 없었다”라고 그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죽음 을 앞에 두고서도 자신이 지니고 다니던‘이성’이라는 도덕을 철회하거나 철학을 중단하지 않았던 이상한 광기의 소유자인 소크라테스도 한 때 치유 의 신인‘아스크레피오스’에게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 다. 42 버려진 예수
광장에 모인 대중들에게 호소하는 소크라테스의 변호를 번역한‘소크라 테스의 변명’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죽음을, 너희는 삶 을.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더 나은 길을 가려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신(유일신 대신에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이는 단수명사에 해당)만 아신 다.” 그가 말하는‘신’은 바로 유일신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범신론(물질 과 영혼에 각각의 신이 존재한다는 사상)이 아닌, 또한 당시 그리스·로마 의 다신론(많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도 아닌 것이다. 2세기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철학에 개방적이었다. 그만큼 그는 소크라 테스를 그리스도의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보기도 했다. 또한 플라톤과 헤라 클레이토스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유스티누스와 동시 대 순교자로서 터튤리안은 그 사실에 반대하기도 했다. 어째든 철학과 그 리스도인들과의 유일신적인 사상을 일부가 가지고 있기에 결부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도 당시 그리스 사상에서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살았기 에 대조적이다. 특이하게도 유일신을 믿었던 소크라테스는 유일신과 자연, 우주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그 시절, B.C. 360년경 플라톤에 의해 쓰여진 『Phaedrus(대화 - 지은이 역주)』의 유명한 선언서에서도 그리스어로 예언 과prophecy, mantike 광기madness, manike가 본래 하나의 단어였다고 설명한다. 플라 톤은 그 저서에서“두 단어, 즉‘mantike’와‘manike’는 실제 같은 모습으 로 본다.‘t’라는 문자는 단지 현대적인 의미를 사용한다. 또한 그 단어는 무미 건조한 삽입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t’라는 단어가 있냐 없냐의 차이뿐이 남아 예언과 광기를 동일시보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43
는 견해를 내비친다. 그가 외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로마의 신들에 게 향한 것으로 신의 선물이라는 예쁜 포장 속에 광기가 존재하며, 결국 커 다란 축복은 미친 그 상태에서만 주어진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정 예언은 광기이자 그 어떤 넋이 나간 영혼의 소유자들을 가리킬까?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들도 모두 예언이 아니고 광기로 치부해야 할까? ‘예언과 광기’, 물론 그들 두 단어는 출발점이 다르다. 솔직히 대부분의 예언을 언급하는 자들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들이 말 하는‘숙고하는 정신’과 비교할 때 신에게서 주어진 예언자의 행위인 예언 앞에‘광기’가 보다 완벽하고 유익하듯이 그것은 하나같이 탁월하다고 주 장하는 것도 추가로 찾아볼 수도 있다. 우선, 예언과 광기와의 연관성을 성경의 한 예를 찾아본다면 이사야서 21 장에서 진정 끼워 맞출 수가 있다. 그 예언자들의 공통점은 광기(?)같은 모 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단어에 거부감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예언을 받은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에 비껴나 있었다. 선지자 이샤야의 예언 가운데 영Spirit이 그의 머리 위에 내릴 때에는 하나 같이 예언자들처럼 그도 얼굴이 흉악스럽게 일그러졌고, 숨소리는 더더욱 줄어들고,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 위에서 쓰러져 볼 수도 없고, 말도 못한 채 그저 경련만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대목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은 광기일까? 아니면 예언일까?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그 예언은 지극히 문장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영감을 받 는 순간에 놀라서 흥분한 표현을 다소 그렇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이는 무 아경에 빠져진 상태 혹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는 것에 구태여 백 퍼센트 로 완벽한 연출을 끼워 맞추는 것에는 무리가 뒤따르게 된다. 물론 신약 사 도행전에서 등장하는 사도 바울은 몇 일을 앞을 볼 수 없었고, 다른 사람에 의지해야 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예수 자신을 향한 수 많은 예언들, 물론 그것들이 신 44 버려진 예수
약 시대 이전에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거울이자 미래의 사건 이라는 점에서 광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거짓말(이사야의 예언 처럼)을 거침없이 쏘아 누설하지만 우리들에게 그러한 예언들은 과히 듣기 거북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예언들은 신약에서는 빛을 발한다. 곧 그것들은 어떤 광기 나 술 취한 모습이 아니었고,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대변으로 서 이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위해 하늘의 열매이자 사람들의 목마름과 필요를 추구해주는 미래의 거울이자 미래의 완벽한 선언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는“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3라고 언급했다. 그 예 언이 당연히 존재한 구약과 더불어 자신의 시대뿐만 아니라 그 다음 시대 간의 추종자들이 당하는 수모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며 또한 앞으로 당할 미래로서 미리 보았다. 신약에서 다른 구약의 예언들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예수의 말도 이에 해당된다. 더욱이 과거 구약에 비춰진 잔인한 살해를 당 했던 선지자들과 그들의 예언들 때문에 예수가 박해와 모진 고난과 고초를 견디어 내야만 했던 것은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선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예언에 있어서 필연 예언자의 입은 날카롭다. 게다 가 그 입이 무겁지 않아 거침없이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어 애달프게 한다. 그래서 백성들의 숨겨진 추한 비밀을 드러내기에‘어둔 밤 울려 퍼지는 메 아리’가 되어 우리의 머리부터 심장을 내리 달아 발등을 내리깎음으로 그 예언들로 인해 결국 모든 것들이 꼬이기 시작하여 비틀어진다. 실제 그렇게 되면 듣는 자들은 겸허히 수긍하고 부끄러워해야 하거늘 청 중들의 반응은 냉담하고 차갑게 변하도록 만든다. 세상에 편히 누워 잠들 수가 없는 이들은 급기야 예언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대중들에게는 예 언자들의 목적을 알 수가 없지만, 하늘에서 출발한 그들의 예언은 헤아릴 수가 없는 도전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예언자들 앞에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45
서 행해지는 거대한 도전의 연설은 메아리처럼 울리고 만다. 자신들에게 속한 문제나 허점을 아무 관련 없이 떳떳하게 행해지는 인 간의 비극 앞에 자신의 감수성과 민감하고도 순수한 영적인 예언의 마음 은 사막의 작은 나무처럼 영양분이 없어 말라버리게 되었다. 사실 듣는 청 중들은 자신을 죽이는 사악한 다른 영양분을 줄곧 다른 방식으로 빨아들이 고 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지구상에 뒤족박죽된 상황을 연출 하는 거짓된 예언들은 잘 받아들이곤 했다. 더욱이 타인의 괴로움보다 자 신의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있었으며 무관심과 방탕, 그러한 이 땅의 파국 을 자신의 눈으로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을 잃어버린다. 급기야‘생애의 무 감각’이라는 치명타를 입고 진실과 진리라는 의의 원리를 공중에 흩날리 게 된다. 오히려 이들만이 느끼고 있는 자칭 아름다운 삶과 나름대로의 자 신만이 느끼는 고통과 함께 뒤섞이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희락을 하나님 안에서 찾기보다 다른 곳인 밖에서 찾게 되므로 악한 자들을 통해 오히려 거짓 예언자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어 간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유대 신학자인 아브라함 J. 헤셀은 자신의 저서 『예언자들』에서 예언의 진정한 것이 무언인지 그 실마리를 극명하게 드러 낸다.“예언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자유가 자기 주장인지 아니면 요 구에 대한 응답인지, 최후의 상황이 싸움인지, 관심인지, 이를 결정하는 것 은 우리다.”4 우리에게 예언은 저 멀리 있는 듯하다. 시끄럽고 자질구레한 일이라고 치부한다.‘정의와 논증’에 관한 영원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과부와 고아, 재판에 관한 탐욕과 부정, 시장바닥에서 벌어지는 시끄럽게 들리는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실제로는 스스로가 시시콜콜하게 여 기는 마음이 더 강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은 선택을 할 수가 있으며 그 결과로 몸의 영향력이 나와 함께 행동으로 변한다. 46 버려진 예수
웅장한 저택과 넓은 안마당, 세상의 모든 자로부터의 칭찬과 명예욕의 극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의 행실과 그의 몸에만 관심이 쏠린 다. 마치 내부 시장처럼 보이지 않아 모르게 숨겨져 있는 추태들이 오늘도 버젓이 백성 스스로 자신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하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분노와 시끄러운 연설을 통해 야단 법석을 만들며 앞서서 주장하고 있었 고, 온 세상이 더러운 하수구 속에 찌꺼기가 되어버림으로 그러한 격동적 인 그들의 행실에 예언자들은 주저 앉기도 했다. 예언자들은 더러운 하수구, 즉 악에 민감하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 한 세상 모든 자들은 이를 두고서 일회성one-shot 작품이야기 같은 에피소드 episode이자 삽화로 여겼다. 예언자들에게는 그 일이 바로 자신의 일이자 전 부이고 세계의 마지막 결말이기에 이들은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그의 말을 전하기에 이른다. 그저 여호와의 말처럼 영광의 도시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주어진 일만하게 되어간다. 거짓 없는 예언자에게 삶이란 신에 대한 연관성과 배제할 수 없다. 그러 나 인간들에게 예언이란‘내 방식의 획득’이다. 예언을 나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윽고 이런 말이 주변을 떠돈다.“신들(그리스·로 마 신을 총칭)로서 선과 의에 대한 분배나 최악의 삶의 운명, 게다가 겉에 서 뿜어져 흐르는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이렇게 주장하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주장과 같은 생각에 예언자들은 몸서리 칠 것이다. 혹은 키케로처 럼“신들에게는 큰 일에만 몰두해 있건만 작은 일에는 무시한다”는 그의 말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자는 바로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자가 광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하늘을 두루마리 삼 고 바다를 먹물 삼아 지상을 이상한(?) 광기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구약에 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거짓 행실을 야기하여 예 언자의 말을 작은 일로서 무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극히 하나님 제 2 장 엇갈린 예언들 47
을 섬기는 예언자들에게 그들의 참된 문구에서 나타나는 의미에 화가 솟구 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예언자는 사람이다. 물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확성기나 마이크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저 한 인간 중에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에게는 사명과 주 어진 하나님의 영감과 뜻을 기대하고 참고 인내하려고 하는, 그저 한 사람 일 뿐이다. 예언자는 물론 하늘의 일을 거침없이 주절거리게 된다. 또한 그는 진실 이 없는 추한 이 땅의 일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하늘에 있는 존재가 어 찌 땅의 일을 모른 채 하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자신들의 입을 통 해 세상에 보여주어야 했다. 그 길에 예수도 들어섰다. 그의 거침없고 날카 로운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한 입장에서 가르치고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고,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그들을 빈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가 죽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예언에게서 극명하게 나타낸다. 그에 대한 예언이 신약의 처음이 아니라 구약이 그 시작을 알리 고 있었다. 예수를 구약에서부터 만들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자 계획에 포함 시킨 이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를 직접 만났던 그 나름대로 다양한 해 석을 내림과 동시에 동일한 구조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신약의 처음은 이 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메시야의 예언’이다. 메시야, 즉 그 뜻은 곧“기름부음 받은 자”5라는 의미다. 히브리어로 이를 ‘마샤흐’라고 읽는다. 이는“어떤 것 위에 손을 올린다”라는 세례와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 복음서의 저자들과 후대 사람들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예 수가 구약에서부터 끊임없이 주장하던 하나님의 선택된 마샤흐, 곧 메시야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의 첫 장을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족보)에 관심 가지 고 관찰 할 수 있다. 또한 그 복음서의 저자 또한 제일 처음에 쓰게 된 계기 라고 할 수 있는 예수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다윗의 족보를 들고 나온 48 버려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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